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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원하면 구원 받습니다.
말씀 : 로마서 10:9-10. 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오전 11시
구원이란 무엇일까?
누가 농담으로 9원은 10원에서 1원이 모자란 것입니다. 이왕 받으려면 10원을 받아야지 왜 9원을 받습니까? 물론 이 말은 농담입니다. 구원은 죽을 목숨이 살아났을 때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누군가 달려와서 그를 물에서 건져서 살았다면 그 사람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며 그것을 물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이 포탄에 맞아 한 다리를 잃고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달려와서 상처를 싸매주고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 받게 하여 살아났다면 그는 전쟁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난 집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 누군가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 그를 구해냈다면 그는 화재로부터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누군가 죽을 뻔 했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서 목숨을 건졌다면 그는 육신의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도 늙고 병들면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구원은 일시 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로써 성경에서 말씀하는 혼의 구원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 낙원, 즉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말할 때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하고 악한 기준이 어디에 있으며 누구의 판단에 있느냐? 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자기 자녀는 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착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님의 기준과 판단으로 자기 아이들이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옥보다는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교통사고나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어떤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사람을 아는 이들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말하기를, 좋은 곳으로 가서 평안하게 쉬었으면 좋겠다며 유족들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나 친구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그 죽은 사람이 과연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습니까? 보장 없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죽은 사람을 좋은 곳이나 혹은 나쁜 곳으로 보낼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연예인이 억울한? 스캔들과 악풀로 시달리다 자살했는데 많은 동료연예인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하는 소리가 [이제는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곳이 있는데 바로 하늘나라 하나님 아버지 집입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가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그러나 아무도 그 죽는 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속에 받아들였다면 그 혼이 구원을 받았고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믿음으로 괴로움을 이기고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갑니까? 그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한 것입니까? 과연 사람은 구원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천국이나 지옥은 누가 지어낸 말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는 별로 관심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관심 없다고 지옥이나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유도에 관심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권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 친구는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컴퓨터게임만이 유일한 낙입니다. 이렇게 각각 관심사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자기 관심사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무시하거나 그런 운동이나 취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야구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골프에 관심 있는 사람이 등산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 관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분야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에 관심이 없어도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고 지옥이 기분 나쁘고 생각하기 싫어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이나 지옥에 전혀 관심이 없어도 때가 되면 어느 한 곳으로 반드시 가야합니다. 죽음이 관심의 문제가 아니듯이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는 것도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문제입니다. 다만 각자의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나이가 다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각자 태어난 날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각자가 죽는 날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시간이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같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고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곳이 천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아니면 막연한 죽음입니까?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모르는 사람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막둥이 모세가 학교 다닐 때 말하기를, 시간이 빨리 가서 어른이 되어 학교도 가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때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가 있으면 졸업할 때가 있고 군에 갈 때가 있고 취직할 때가 있고 결혼할 때가 있고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가 있고 그 아이들을 결혼시킬 때가 있고 손자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사람은 돈을 잘 벌어 윤택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누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늙어 간다는 것이고 늙으면 병들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틀에서 벗어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사는데 너무 힘들고 바빠서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어느 날 죽음 앞에 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히 오는 문제이면서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을 피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물론 여기에 있는 여러분도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모두가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피해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과연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면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는 것일까요? 과연 여느 동물들과 같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일까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역사라는 것이 있고 문화라는 것이 있고 장래와 미래가 있으며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곧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그것을 피하여 죽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생각대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끝난다면 지금 당장 죽을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운 것이고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뛰어넘을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하고 또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삶을 포기해서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죽을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보장 없는 미지의 내세에 무책임하게 자신을 던진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슬픈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지만,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과 그 심판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후회막급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 자살했다면 그는 지옥엘 서둘러 가는 꼴이기 때문에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세상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옥보다야 훨씬 낳을 테니까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어차피 지옥엘 갈 터인데 서둘러 하루라도 빨리 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하셨습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심판이냐? 할지 모르지만, 인생은 각자가 살아가면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심판, 즉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죄를 지었다면 그 죄에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한 법이 없다면 그야말로 세상은 당장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심판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와 벌에 대한 심판과 형벌은 죽은 후에 모든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의 모형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선언합니다(롬3:23). 하나님께서는 옳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롬3:10).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하십니다(롬3:4).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이 선언에 단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자기는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의 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양심이라는 기관을 두셔서 부끄러운 일을 하거나 불법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면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물론 죄를 자주 짓는 사람들은 그 양심이 마비되어서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서 받을 형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는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과 사귀면서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담과 이브입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모르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주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창조물은 경계가 있습니다. 지음 받은 자와 지으신 분의 경계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지음 받은 인간 사이에 분별이 있어야 하고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 한계를 정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창2:15~17, [{주} 하나님께서 남자를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가꾸고 지키게 하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그 이전에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 왜 죽음이 들어왔습니까?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이 말씀에서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죽음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그녀가 그것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창3:6).
뱀으로 나타난 마귀의 유혹을 받은 여자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 남편 즉 아담에게도 주매 아담도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지만, 아내가 주는 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며 이로써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롬5:12).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죄 값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나..](롬6:23a).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결국 자기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면 왜 내가 아담이 지은 죄 값으로 죽어야 하느냐?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죄인에게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죄 지은 일이 없다.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행동으로 나오지 않고 마음속에만 있어도 그는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이, 너는 간음하지 말라, 하고 말하였음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그 여자에게 어떤 성추행이나 혹은 성폭행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녀를 한번 품에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그는 이미 간음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아무도 몰래 혼자 야동(야한 동영상)을 보고 흥분하거나 동일한 상상을 했다면, 성경말씀에 따르면 그는 이미 간음했음으로 간음죄를 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에게도 피해 준 일도 아니고 상처를 주지도 않았으며 그 누구도 야동을 보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몰래 그 장면들을 즐기고 생각하고 누구를 마음에 품고 따라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를 폭행하거나 사람을 죽여야 살인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살인의 원인이나 동기는 이미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니 어떤 살인자 속에도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요일3:15).
우리가 들어나지 않게 마음속으로 친구들이나 이웃이나 부모형제를 미워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살인자로 보십니다. 세상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었더라도 그것이 밖으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속에 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겉모습을 보는 사람과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저지른 것은 관대하고 실수라고 말하고 죄로 여기지 않으나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하면 죄인이라고 하며 죽일 놈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죄 값은 사망인데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그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려고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고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이와 같이 주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나에게 무죄라는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치러야할 죄 값을 예수님께서 이미 치르셨기 때문에 내가 그 죄 값을 치러야할 책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며](행16:31).
모든 사람들의 죄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함으로 아직도 죄인으로 살아가며 그 죄 값을 자기가 담당하려고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사채로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하여 날마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고 죽음의 협박을 당하며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어느 날 형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네 빚을 다 갚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순간 그 빚을 내가 갚지 않았으나 나는 더 이상 빚쟁이가 아닙니다. 이는 빚에 시달림을 당해 본 사람은 그 의미를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하고도 멍청하게 형님이 내 빚을 갚았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빚쟁이로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빚은 청산되었는데도 두려워하며 자기가 갚겠다고 몸부림치고 스스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읽고 가장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경책이 말씀하며 거리의 수많은 십자가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믿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같이 하나님께서 누구를 지옥과 천국행을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들로부터 구원 받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같이 교회를 오래 다니거나 헌금을 많이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침례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받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사람의 강도도 함께 매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즉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불렀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낙원에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을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눅23:39~43, [매달린 범죄자들 중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으나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지만 이 사람은 어떤 부당한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9~43).
두 강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도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써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주님임을 믿고, 자신의 주(主)로 고백함으로 주께서 그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구원은 이와 같이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 강도는 죽기 직전에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였으므로 낙원을 약속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구원 받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나 지식이나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를 구원하실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 누구든지 구원 받게 됩니다. 한편강도는 강도짓만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가 착한 일을 할 기회도 없었고 헌금을 많이 할 기회도 없었고 교회를 오래 다닐 기회도 없었고 남을 위하여 봉사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구원은 어떤 선한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오직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분으로 믿고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착한 일을 하거나 어떤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 받은 한편 강도는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난 것 같지만 그의 혼은 영원한 낙원에 주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죽음이 언제 임할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 받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행위로 살아야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작품이며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야할 목적이고 의무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엡2:8~10)[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모두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하여 지금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간절히 원하시는 바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누구나 구원 받은 뒤에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오 [주]여, 주께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기 때문이나이다, 하더라.](계4:11).
구원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음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받고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3:15~17).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잘 속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제 몫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식이 없거나 어리바리 한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없다] 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하나님은 없다]는 것은 마치 자기에게는 자기를 낳은 아버지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혹 있어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첫출발점이 있을 것이고 그 출발점이 한 사람으로 종결될 것이며 그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라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부모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형님께 “뿌리도 없고 애비도 없는 놈”이라고 내침을 받았습니다. 호적에서 파내 버리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만약 형님이 나를 호적에서 파내 버려도 형제간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다른 이름으로 소식도 없이 산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형제지간입니다. 나에게 아버지가 중요하면 그 아버지를 낳으신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중요합니다.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님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내가 차려놓은 음식을 잡수고 갈 수도 없는 소용없는 일이며 사람들의 전통일 뿐,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길이 없는 인간의 시작이나 뿌리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웠고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나름대로 다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도 한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분이듯이 하나님이 둘이 될 수 없으며 창조주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한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길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그는 속이는 길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지옥의 길입니다. 아버지가 한 분이고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른 모든 것은 그럴듯한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어떤 이름도 주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 (행4:12).
세상엔 종교도 많고 숭배하는 인물도 많고 교주들도 많지만, 그 누구도 “나를 믿는 자는 천국에 간다.”고 말한 자가 없습니다. “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한 자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하셨습니다.
세상에 4대 성인이라고 존경받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4대성인이라는 말은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4대 성인 가운데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석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포함됩니다. 그 중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석가도, 공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지 않았고 자기를 믿어야 구원 받는 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자기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자기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도 부활도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해 준 것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죽어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4대 성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공부한다면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 무덤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죽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공자를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든가 석가가 가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태어났다 자기 죄로 죽어 무덤을 남겼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신다는 약속을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분이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십니다. 지금 누구든지 구원 받기를 원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모든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구원은 아주 쉽고 간단한 각자의 선택입니다.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으면 됩니다. 오늘 이시간 기쁜 소식(복음)을 들은 여러분 모두가 구원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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