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조선왕릉의 기본 이해
1. 무덤의 종류
*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
* 원(園):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빈의 무덤. (예) 영우원, 현륭원
* 묘(墓):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 (예) 연산군묘, 광해균묘
* 총(冢): 주인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유물적 가치가 있는 무덤. (예) 천마총, 금관총, 무용총
* 분(墳): 주인도 알 수 없고 중요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는 오래된 무덤. (예) 송산리고분, 복천동고분
2. 능의 소재와 기수
* 조선 27명의 왕과 그 왕비 및 추존왕까지 73명, 42기의 능이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에 위치함. 도성 10리 밖, 100리 이내 원칙.
*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묘로 격하되어 왕릉 숫자에서 제외됨. 포함할 경우 총 44기임.
*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2기는 개성에 위치함.
* 단종의 장릉은 도성에서 100리 밖인 강원도 영월에 위치.
3. 능의 종류
*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삼강릉(선조), 동원상하릉, 삼연릉(헌종)
* 능의 배치는 우상좌하, 우왕좌비, 상왕하비의 원칙.
4. 왕릉의 풍수지리
5. 왕릉의 기본구조
* 진입공간: 속(俗)의 공간, 제향공간: 성과 속의 만남, 능침공간: 성(聖)의 공간
6. 왕릉의 표준구성도
* 명당을 향해 들어가는 진입공간은 충파(衝破)를 피하기 위하여 之자 玄자 형태의 기분좋게 구불거리는 부드러운 곡선이어야 함.
[주요 명칭 해설]
* 재실(齋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으로 능참봉이 머무는 곳이다.
* 금천교(禁川橋)는 능역의 성스러움을 구분짓는 다리이다.
* 홍살문(紅箭門)은 악귀를 물리치는 붉은 색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삼지창이나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 수복방(守僕房)은 능을 지키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능지기들이 지내는 방이다.
* 수라간(水刺間)은 수라를 짓는 주방이다.
* 정자각(丁字閣)은 매년 돌아가신 날 기신제(忌晨祭)를 지내는 곳으로 건물의 모양이 고무래 정(丁)자를 닮았다고 하여 나온 명칭으로 읽을 때나 말할 때는 '정짜각'으로 발음하여야 함.
* 장명등(長明燈)은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다.
*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나와서 놀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 망주석(望柱石)은 혼유석 좌우로 설치되며 신성구역임을 알리고 멀리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세운 기둥이다.
* 문석인(文石人)을 중계에 세우고, 무석인(武石人)은 하계에 세워 문관우위를 나타내고 있다.
* 석양(石羊)과 석마(石馬)는 양과 말 모양을 하고 있는데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의 경우에는 코끼리, 사자, 낙타, 기린, 해태 등으로 석물이 다양화된다.
* 국장기간은 5개월이다.
※ 그외 명칭이나 왕릉에 대하여 보다더 상세히 알고싶은 분들은 아래 사이트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artofgolf/222706875602
Ⅱ. 선정릉의 이해
1. 조선왕조 계보도
2. 성종의 능 선릉(宣陵)
- 성종 1457년 출생, 재위 1469년 ~1494년.
- 성종은 세조(1417 생, 재위 1455~1468)의 장남 의경세자(덕종 추존)와 세자빈 한씨(인수대비, 소혜왕후 추존)에게서 태어나다.
- 1457년 성종이 태어난 지 2달만에 부친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자 세조는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에게 사약을 내리고,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야사에 꿈속에서 세조를 저주하며 침을 뱉어 피부병에 걸리게 했다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다.
-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가 총애하며 키웠다.
- 1460년 한명회의 3녀 장순왕후 한씨(1445~1461)가 해양대군(예종)의 세자빈이 되다. 세조와 한명회 사돈간.
- 1461년 장순왕후가 인성대군(1461~1463)을 낳고 그해 17세에 사망하다. 원손 인성대군도 3세에 요절함.
- 1467년 한명회의 4녀(막내딸)인 공혜왕후 한씨(1456~1474)가 자산군(성종)과 결혼하다. (외손주인 인성대군 사망 4년만에 한명회의 두번째 도전!)
- 1468년 세조 52세로 사망하여 그해 광릉에 능을 조성하다.
- 세조는 생전에 왕릉 조성을 검소하게 할 것을 지시하면서 석실, 석곽, 병풍석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수림과 식물을 잘 가꾸라고 명을 내리다.
- 이에 따라 석실을 회격실(灰隔室)로 하여 산릉조성 동원인력도 6천명에서 3천명으로 줄였다.
- 1468년 차남인 예종(1450 생, 재위 1468~1469)이 19세에 즉위하다. 정희왕후(1418~1483)가 수렴청정하다.
- 1469년 예종(성종의 숙부)이 재위 14개월만에 사망하다.
- 1469년 의경세자의 차남 잘산군(乽山君)이 장인 한명회(1415~1487)의 영향력으로 장남 월산대군(16세)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4세)을 젖히고 13세에 즉위하여 성종이 되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다.
- 1474년 성종의 원비인 한명회의 막내딸 공혜왕후 한씨가 자식 없이 19세로 사망하다.
- 1476년 성종이 20세 되어 친정을 시작하다. 그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7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한명회 등 훈구세력 견제를 위하여 김종직 등 사림을 등용하다.
- 1476년 임신중이던 숙의 윤씨가 계비가 되어 4개월 후 연산군(1476 생, 재위 1494~1506)을 낳다.
- 한명회는 부자관계인 예종, 성종과 겹장인을 맺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결국 두 딸로부터 왕실의 후사를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504년 연산군이 폐비 윤씨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 1479년 윤씨가 폐비되고, 1482년 사사되어 현재 고양 서삼릉에 묻혀있음.
- 1480년 정현왕후(1462~1530)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다.
- 1494년 성종 25년 집권 후 38세로 죽다.
- 1495년 연산군이 부왕 성종의 능을 조성하며 묘지문(墓誌文)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어머니(폐비 윤씨)가 할머니(인수대비)와 한명회에 의하여 폐위 사사됨을 알고 후일 복수극을 일으킴.
- 이후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선릉에 이장하려다가 신하의 반대에 부닥치자 그 신하 1명을 참형하고 1명은 귀양 보냄.
- 1530년 정현왕후(1462~1530)가 사망하자 중종이 성종 옆에 능을 조영함.
- 따라서 현재 선릉에는 성종 옆에 한명회의 막내딸과 폐비 윤씨 대신에 셋째 왕비인 정현왕후(1462~1530)가 묻혀있음.
-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부장품 욕심에 선릉을 도굴하였으나 값진 것이 나오지 않자 관을 불태움.
- 선릉의 원찰(능사)은 봉원사임. 봉원사 명칭은 연산군이 지음.
3. 중종의 능 정릉(靖陵)
- 중종 1488년 출생, 재위 1506년 ~ 1544년.
- 성종의 차남이며 성종과 후궁이었던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장남 연산군(1476 생, 재위 1494~1506)의 이복동생이다.
-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신수근, 임사홍 등을 척결하여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 1506년 즉위하자 원비 단경왕후(1487~1557)를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비하다.
- 1518년 제1계비인 장경왕후는 세자(인종)를 낳고 6일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다.
- 1545년 인종(1515 생, 재위 1544~1545)이 25년 세자생활 끝에 왕위에 오른 후 8개월만에 죽다.
- 1518년 제2계비가 된 문정왕후(1501~1565)는 4명의 공주를 낳고 세자(인종)를 잘 기르며 입지를 다지다.
- 1534년 왕비가 된 지 16년만에 아들(명종)을 낳자 왕권에 대한 욕심 생기다.
- 1545년 아들 명종(1534 생, 재위 1545~1567)이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죽어 12살에 즉위하자(독살설 있음)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조선의 서태후가 되다.
- 1519년 중종은 훈구파에 휘둘려 조광조의 사림파를 숙청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키다.
- 1545년 문정왕후는 남동생 윤원형(소윤)과 함께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키다.
- 문정왕후는 원찰 봉은사의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고 유교 국시의 국가에서 불교 진흥을 획책하다.
- 1545년 당초 중종은 고양 원당의 서삼릉에 있는 장경왕후의 희릉에 묻히다.
- 1562년 아들 명종 대에 문정왕후 자신이 중종의 곁에 묻히고자 보우를 시켜 풍수가 안좋다며 중종을 정릉으로 이장하다.
- 그러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재실과 홍살문에 물이 차는 일이 벌어져 장지로 부적합함이 나타나다.
-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공릉동의 태릉(太陵)에 묻어 중종과 문정왕후 모두 홀로 눕게 되다.
- 문정왕후는 대신에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가 바로 옆 강릉(康陵)에 함께 누워있다.
- 조선왕릉으로서 단릉인 능은 중종의 정릉,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3기이다.
- 1544년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7일만에 폐비된 첫사랑 단경왕후 신씨를 못잊어 찾다.
- 왕릉 조성시에 임꺽정(1521~1562) 수배령이 내려지는 등 정국이 불안정하여 편안할 정(靖)을 넣어 정릉(靖陵)이라 하다.
- 정릉도 임진왜란 때 왜적의 도굴로 파헤쳐지고 시신도 불태워지다. 조선왕릉 중 도굴된 능은 선릉과 정릉뿐이다.
4. 성종-중종 상하 왕계도
첫댓글 총장님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