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9, 38-43. 45. 47-48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강원방과 인천방에서 오셨네요.
이 미사를 보시면서 방장에게 신청한다고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저 사람들은 어떻게 미사에 참석했을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겠지요.
여기에 방장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미사가 아니라 다른 의도로 오고자 하는 분들에 대한 우려로, 일단 방장들에게 분별 권한을 주었습니다.
방장들이 알아서 모시고 오면 되고, 또 왔다 가는 분들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오셨다 가시면 주소를 알게 됩니다. 소문내지 마십시오. 아파트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둘째, 사제관에서 본 모든 것은 함구해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미사 때 받은 은혜와 그날 제가 한 공지와 강론은 말씀하십시오.
하느님이 허락하시어 여러분이 자연스럽게 미사에 오실 수 있는 날이 있을 겁니다.
이 두 가지 꼭 지켜 주십시오.
지금 제대 위에는 비안네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고, 또 어떤 자매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제대보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서운동 수녀님들은 호야를 보내주시어 에어컨 바람도 막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에어컨 바람에 초 꺼질까 봐 에어컨을 못 켜고 미사를 드렸더니 등이 땀에 흠뻑 젖어 힘들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많이 있죠?
섬세하시다, 열려 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등등
이런 예수성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개방성입니다.
개방성, 열려 있다는 겁니다.
아마 제가 가끔 이야기 했을 거예요.
제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을 때 내 멘토는 아버지였고, 나중에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우리 아버지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사신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모습이셨냐?
그 크기는 태평양 바다보다 더 큽니다.
대개 스케일이 큰 사람은 산의 모습은 그릴 수 있어도 자기가 지나간 길에 어떤 나무가 있었는지는 안봅니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섬세한 사람은 하나하나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은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그림을 못 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큰 스케일 만큼 그분의 섬세함은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성심을 나타내는 용어가 ‘열려 있다.’라는 것입니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제가 겪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해드리니,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해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첫 번째, 군종신부 때의 일입니다.
훈련소에 가서 천주교 신자 아이들과 미사를 하며 어려운 것이 무어냐 물었어요.
많은 애들이 ‘신부님, 자꾸 도둑질하게 됩니다.’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들어보니, 모자를 누가 자꾸 가져가고, 또 밥을 먹을 식기를 가져간대요.
숟가락은 잃어버릴까 봐 목에 걸고 훈련을 하는데, 모자는 화장실에 큰일 보러 앉아 있으면 뒤의 큰 창문으로 휙 가져간대요.
가져가는 사람도 자기 모자를 잃어버려서 가져가는 거겠죠?
또 자다 보면 숟가락도 없어지고.
그런데 모자 없고 숟가락 없으면 훈련받을 때 얻어터지고 얼차려를 받으니 괴롭대요.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했어요.
‘그래, 괜찮다. 훔쳐라. 군대에서는 자리 이동하는 거지 훔치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이 머리에서 저 머리로 옮겨 다니는 것뿐이다. 그냥 편안하게 훔쳐라.’
그랬더니 그때야 ‘신부님, 확실하게 훔치겠습니다. 이것이 자리 이동하는 것이군요.’
하며 우리 애들 얼굴이 환해졌어요.
그렇게 편안하게 해주었던 적이 있어요.
만일 이 질문에 ‘이놈아, 순교하더라도 어디 남의 것을 훔치냐? 얼차려 받고 매 맞더라도 절대 훔치면 안 된다.’
헸으면 그 아이는 정말 살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시골 본당에 있을 때 군수가 천주교 신자예요.
그분이 군수가 된 다음 제일 어려운 점이라며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요.
군수다 보니 3개 종파 행사가 있으면 가야 하죠.
밑에 있는 개신교 신자 공무원은 미리 자기는 절에는 절대 못 간다고 하고 오지 않는대요.
그런데 자기는 군수이니 안 갈 수도 없고, 가면 모두 부처님을 보고 절을 하는데
이럴 때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 멋쩍대요.
‘신부님, 성호를 긋거나 묵주기도를 해야 하나요?’
아니, 절 행사가서 무슨 성호고 묵주기도입니까? 판 깨는 일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해주실래요?
저는 절하라 했어요.
왜냐? 군수는 ‘장(長)’입니다.
천주교 신자임과 동시에 그 군에서 제일 어른입니다.
그러면 그 군을 모두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어요.
불교 신자도 내 군민이고, 스님도 내 군민입니다.
‘군수님, 절하세요. 대신 절하시면서 부처님을 보고 저분은 하느님이 동양에 파견한 성자다.
물론 교리는 다르나, 동양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대답을 듣고 군수님이 ‘아휴, 신부님 속이 시원해요.’ 하셨죠.
신앙을 지켜 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 제도나 법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이 그 법에 묶여 있어서는 절대 안 돼요.
법이라는 것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아무리 맑은 물도 그릇에 들어가 있지 않고 그냥 바닥에 떨어지면 그 물의 존재는 없어져요.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담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 그릇을 우리는 법, 구약에서는 율법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릇이 더 중요해요, 물이 더 중요해요?
당연히 물이 더 중요하죠.
그릇은 수단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교회법은 신앙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신앙보다 앞에 서게 되면 사랑은 없어지고 차가움과 딱딱함만 남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 학자들에게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 같다고 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율법이 하느님 위에 올라가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사랑을 율법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릇이 그릇 노릇만 해야 하는데 하느님 노릇을 하려는 것이 문제죠.
신앙을 지킨다고 하면서 우리 교회가 그 법에 신앙을 가둬두었던 모순의 역사가 2000년간 얼마나 많았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지금 상황을 본다면, 그때와 같다 하실 수 있어요.
그때는 율법이고 지금은 교회법이죠.
물론 교회법은 반드시 필요한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법이 하느님의 사랑을 뛰어넘을 때,
교회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갈등이 있을 때,
교회는 이제껏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는 법에 얽매여 교우들을 인도하려 한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죠.
어차피 지상의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기에, 영원한 교회는 천당뿐이 없어요.
이 지상의 교회는 늘 불안한 교회요, 마치 떨어지면 부서지는 질그릇 같은 교회이기에,
그 깨진 조각에 상처받은 신자와 사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은 이렇게 좁은 분이 아니라 열려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대에서 모자 훔치는 병사에게 ‘이놈이 어디서 도둑질을 해?’하며 귀싸대기 때리시는 분이 아니라,
등 두드리며 ‘괜찮다. 군대에서는 훔치는 단어가 아니라 자리 이동이야.’ 하시며 감싸 안아 주실 분,
절에 가서 절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군수에게 ‘석가모니는 내가 동양에 파견한 사람이야.’ 하시며
군수의 마음의 폭을 넓혀주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없어지고 차가움과 규칙만 남아버린다면, 이것은 그릇이 물 노릇을 하는 거죠.
교회법과 율법이 하느님보다 상위법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법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 열어있는 마음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얼마나 열려 있는 분인가 보여줍니다.
오늘 주제는 예수님의 개방성이라 했죠?
사도 요한은 어떤 인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지만 막지는 못했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시죠?
‘내버려 두어라. 내 이름으로 좋은 일하는 사람이 내 반대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하시죠.
그 보고를 받고 ‘내가 찾아가서 요절을 내고 고발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했었어요.
‘세상 어떤 놈이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요.’
어쩌면 그 사람은 돈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을 거예요.
하지만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 사이비 교주 노릇을 했다면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의를 보이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냥 두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개방성, 받아들이는 마음이 드러나죠.
하느님의 사랑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넓게 열려 있습니다.
불교 신자, 개신교 신자, 심지어 무당 할머니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식 다섯을 낳아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키우지 못합니다.
일찍 가출한 자식부터 변호사까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사람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역설 같지만 사실입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맹자, 그 성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해서 지옥에 빠졌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한국에 천주교 들어온 것은 200여 년밖에 안 됩니다.
그전 우리 조상들은 다 절에 다니고 무당 쫓아다니고 장독대에 물 떠 놓고 치성드렸어요.
그 분 중 세례받은 분 없어요.
그렇다면 그분들이 다 지옥 갔느냐?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피조물들, 하다못해 네발로 기는 짐승들도 모두 하느님 사랑권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쁜 고양이나 개를 보고, 또 아름답게 큰 나무나 풀 한 포기를 보고도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 때가 있지요.
슈바이처 박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이 세상 역사에는 비록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소위 익명의 크리스천이 참 많습니다.
세례명 없고, 성당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어도 정말 착하게 사는 분이 참 많죠.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지조차 몰라도,
하느님이 모든 이에게 똑같이 심어준 아름다운 종소리인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자기 재산을 다 내주면서 어려운 사람 돕고 살아요.
성경을 달달 외워도 한평생 참다운 봉사 못 해본 사람도 태반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겠습니까?
단지 세례만 받지 않았다고 너는 지옥에 가라 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전 애초부터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려계신 분입니다.
법정 스님이 세례받지 않았다고 지옥에 갔을 거냐 이겁니다.
아니지요?
그분이 선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책을 많이 써주시어, 그 책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치유를 받았습니까?
그분은 명동에 가면 성당에 앉아 조배했다고 합니다.
익명의 크리스천들은 보편적 구세사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밖에는 절대 구원이 없다 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가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후 바뀐 것이 ‘교회 밖의 익명의 크리스천들은 삶 자체가 늘 하느님을 향해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단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례받은 우리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익명의 크리스천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시며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누구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상을 받겠지만, 대신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빠져나가지 못할 큰 벌을 받는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 버리고,
다리가 자꾸 죄를 짓게 하면 다리를 잘라 불구로 살면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 하십니다.
또 죄를 짓고 떨어지는 지옥의 특징 하나가 나왔어요.
구더기가 파먹는데, 그 구더기는 불에 타 죽지도 않는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구더기가 내 온몸을, 눈알이고 내장까지 파먹고, 내 몸에서 구더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살아야 한대요.
죄짓지 말아야겠죠?
손을 잘라 버릴 정도의 각오, 다리를 잘라버릴 정도의 각오로 죄짓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지만,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셨어요.
강론을 정리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어떤 법이나 제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추월합니다.
그러나 법이나 제도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보다 효율적으로 나누고 보존하는데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법을 성실히 지키고, 또 2천 년 동안 내려온 교회의 제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바른 양심 안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성심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성심은 열려 있어야 하고, 나를 내줄 줄 알아 야하고, 희생할 줄 알아 야하고,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 이름을 걸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혼내시지 않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저 사람도 언제가 나를 찾아올 것이니 너희들 괜히 역성 부리지 말아라.
나를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나 죽일 놈이라 하지 않아. 또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너희와 똑같은 형제야.
너무 잘난 척하지 마라. 너희도 저 사람보다 더 죄에 떨어질 수도 있는 약한 인간이다.’ 하십니다.
예수성심을 닮도록 애쓰도록 합시다.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2021년 연중 제26주일 (09/2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