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앞자리에 우리 아파트 이름을 새겨 넣은 ‘OO헤어 갤러리.’ 깔끔한 간판 아래 환한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이 숍에서 한 명뿐인 헤어디자이너이자 주인인 그녀에게 파마를 부탁한다. 바로 집 앞인데도 첫걸음이다. 어쩌다 번쩍 눈에 띄어 들렀다가, 그녀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왠지 모를 신뢰감과 아늑한 분위기에 넙죽 머리를 맡긴 개다. 짜하게 이름난 미용실에서 파마 한 번 하려면 전화 예약에다 외출 준비며, 오가는 시간으로 하루를 날리는 형편 아닌가. 입던 옷 그대로 동네 미용실에 앉아 마음에 드는 파마를 할 수 있다면야 오죽 편하리.
결과부터 말해 보라면, 기분 좋게 ‘예감 적중’이다. 우선 모발에 손상을 주지 않은 채 탄력 있게 나온 파마 컬이 만족스럽다. 거울 속에 비춰 본 뒷모습에서 커트 솜씨도 나무랄 데 없음이 확인된다. 젊은 헤어디자이너들보다 몇십 년은 더 체득했을 노하우를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거기에다 전에 다니던 미용실보다 몇만 원이나 저렴한 파마 비용이면 일거양득, 일석이조, 대·박.
#2. 백화점에서 행운을 사다
옷이 날개라는 말, 중년 이상의 연령층 에겐, 더욱 솔깃할 테다. 자유자재한 몸매의 결점을 커버하여 나이 팍 들어 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우아하게, 감추고 추슬러 올려 줄 한 겹 날개 구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층층을 돌아보던 백화점에서 어쩌다 ‘영 에이지’ 매장의 그럴싸한 원피스를 찾아낸 건 행운이랄까. 두껍지 않은 모직 천이 상체 쪽을 부드럽게 감싸 줄 것 같고, 치마 부분은 풍성하면서 그다지 짧지 않은 것이 ‘올드’층의 내가 입어도 무난할성싶다. 검정 바탕에 흰색과 붉은색의 체크 무늬도 썩 마음에 든다. 티셔츠처럼 안감이 들어 있지 않고 뒤트임을 지퍼 대신 단추로 처리하였지만, 코트 안에 입기엔 ‘딱’이다.
“한 번 입어보세요. 잘 어울리시겠어요.”
귀엽게 생긴 판매원 아가씨가 민첩하게 적시타를 날려 준다. 어쩜, 사이즈도 맞네. 정가(定價)도 엄청, 싼 편인데 오늘부터 30% 할인이란다. 망설일 필요가 있으랴. 눈요기 쇼핑 끝에 건져 올린 옷 하나로 단박 기분이 날아오르는 이 여자, 참 알뜰한 걸까, 한심한 걸까.
#3. 길거리 구두 병원에서 낭만에 젖다.
길거리에서 구두의 반란이 실로 난처하다. 이런 일도 있다니, 하이힐의 앞쪽 밑창이 벌어진 위급 상황인데 119에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근처의 구두 병원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택시를 불러 타고 곧장 집으로 가는 수밖에. 망연자실 서 있다가 두 눈의 촉수를 한껏 높여 훑는다. 이쪽저쪽 아래위로 한참 동안의 탐색전에 눈이 시려 갈 즈음, 차도 건너편 구두 수선집 하나가 레이더망에 포착된다. 구세주다. 가까스로 구두를 맡기고 방전된 몸을 간이 의자에 앉히고 보니 어마나! 뜻밖에도 풍광이 기막히다.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며, 오가는 사람들과 씽씽 달려가는 자동차들까지 모두 한 컷의 멋진 풍경이다. 길거리 자리치고 이만한 명당이 있으려나. 무릎 위에 펼쳤던 책을 도로 덮은 채, 구두 수선을 하러 왔다는 생각도 잠시, 막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의 가을 색에 젖어든다.
“아저씨, 구두 수선집이 이만큼 분위기 있는 곳은 없겠어요. 나무 그늘이 넓어 여름에도 시원할 테죠?”
“남향이라 겨울에도 춥지 않은걸요,”
구두 정형외과 전문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술에 여념이 없으시다. 수술대 위에 놓인 구두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과일 향인 양 먹고사는 구두 병원 의사, 그의 거룩한 손이 능수능란하다. 수술이 끝나면 내 구두는 전보다 더 튼실한 희망에 차오르겠다. 우울하게 뭉개졌던 발도 다시 충전되겠지. 지금 수술이 한창인, 지하철 o역 출구 커다란 가로수 아래의 구두 병원은 오늘 내게 감동적인 선물이다. 마음도 쉬고 풍경도 담아 보는 낭만까지 안겨 줄 줄이야.
#4. 과일 트럭에서 횡재를 낚다
과일 장수가 트럭으로 싣고 온 단감을 파는 중이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아 놓은 삼천 원, 오천 원인 단감들이 생생하고 때깔도 좋다. 한입 베어 물면 단물이 듬뿍 나올 듯하다. 알이 굵은 것으로 수북한 오천 원짜리 무더기에 눈을 주었더니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 고르란다. 마주 보이는 대형 마트엔 ‘브랜드, 파워 14년 연속 1위. 브랜드, 가치 13년 연속 1위, 고객 만족도 7년 연속 1위’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지만 이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단감 몇 개에 사천구백 원이었다. 이 정도면 최상급 수준으로 더는, 고를 것도 없다.
“그냥 오천 원짜리로 담아 주세요.”
과일 장수 아저씨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번진다. 내 수월한 결정이 고마운가 보다.
“자, 보세요. 전부 알이 굵고 좋지요? 우리는 물건 속이지 않아요.”
이럴 땐 그냥 음미하는 거다. 한 소쿠리의 감을 비닐봉투에 거꾸로 털어 부으며 큰 것 한 개를 더 얹어 주는 저 기분을, 오천 원어치의 횡재에 마음의 주름살이 좍 펴지는 이 느낌을 말이다. 삶? 그리고 행복? 그게 어디 지적(知的)이며 고상한 것인가.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소한 것들임을 진즉 눈치채지 않았던가. 광활한 세상에 한 개의 점에도 못 미칠 우리가 괜한 ‘무게 잡기’와 ‘폼, 잡기’에서만 벗어나도…….
도시의 하루가 저문다. 풍경속 사람 풍경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어느 순간엔 떠도는 바람이 '흔들려라' 부추기고, 어느 때는 가로수에 앉은 가을이 '물들라' 속삭이는 시간이 또 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제자리로 돌아온 자들이 밝히는 안온한 불빛이 아파트 창마다 새어 나온다. 어제 그저께처럼, 내일 모래처럼.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