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8.
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인 말레이시아와의 원정 게임에서 한국이 말레이시아에게 0대1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 패배로 인해 국내 축구계는 발칵 뒤집혔고 국민들 또한 분노했다. 귀국 후, 즉시 문정식 감독이 경질되고 김정남-김호곤 콤비가 감독과 코치를 맡게 되면서 팀을 재정비 했으나 본선 진출은 거의 물 건너 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약체인 네팔이 홈인 카투만두에서 말레이시아와 무승부를 이룬 게 아닌가! 네팔이 한국을 도운 것이다. 네팔 덕에 한국이 기사회생 할 수 있는 찬스를 잡게 됐다.(한국은 네팔 원정 게임에서 2대0으로 이겼고, 홈에서는 4대0으로 이겼다.) 한국이 서울 홈 게임에서 말레이시아를 이기면 최종 예선에 오를 수 있게 된 거다. 우리 선수단은 물론 국민들도 말레이시아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헌데, 말레이시아戰을 하루 앞두고 '경기 당일,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발표됐다. 그동안 말레이시아에게 '수중전'에서 여러차례 개피를 본 한국으로서는 비는 너무도 재수없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말레이시아 선수단은 비 소식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이 때 대한축구협회에서 재빠르게 융통성(?)을 발휘했다.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접한 대한축구협회는 200여만 원을 들여 잠실 운동장 잔디에 대형 비닐을 덮는 수완을 발휘했다. 급한대로, 경기 당일 아침에 내리는 비라도 막아 보려고 취한 고육지책이었다. 얼마나 비가 무서웠으면 협회에서 이렇게 신속한 행동을 취했겠는가!
운명의 1985년 5월 19일. 잠실 운동장. 잔뜩 흐린 날씨에 보슬비가 조금 씩 내리긴 했으나 천만 다행으로 경기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의 비는 아니었다. 전날 깔아 놓은 '값 비싼' 비닐 덕분에 잔디 상태는 최상이었고......
이 날 한국은 초반부터 말레이시아를 압도했다. 만능 플레이어인 14번 조민국(당시 고대)을 센타포오드로 박아 놓고 좌-우 측면에서 센타링을 올려주는 작전으로 임했는데 특히 레프트 윙 16번 김석원이 볼을 잡으면 관중들이 크게 환호했다. 김석원은 팬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화려한 페인팅에 이은 돌파로 관중들을 매료 시켰다. 첫 골은 페널티킥 득점이었다. 전반 12분 경에 허정무가 말레이시아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얻은 페널티킥을 주장인 10번 박창선이 깨끗이 성공시켜 기선을 잡았다.
그 후 바로 두 번 째 골이 터졌는데 이 골이 백미였다. 왼 쪽 측면에서 김석원이 말레이시아 수비수를 앞에 두고 두 세 번 멋진 페인트 모션을 취한 뒤, 왼 발로 낮게 센타링해 주었다. 그 볼(약간 스핀이 걸린...)을 문전 앞에 기다리고 있던 조민국이 다이빙 헤딩슛으로 골네트를 가른 것이다. 골이 들어간 걸 확인한 조민국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하며 잔디에 누웠고..... 결국 한국이 말레시아를 2대0으로 완파하면서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됐는데 안타깝게도 김석원으로서는 말레이시아戰이 대표팀에서의 마지막 게임이 되고 말았다.
김찬기 감독의 아들인 김석원은 중대부고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공격수다. 고 3 때인 1978년,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제 20회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출전해 이라크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대회에서 김석원은 팀내 최다 득점(4골)을 기록했다. 청소년 대표팀(당시 감독: 김찬기)은 그 이듬 해인 79년에 도쿄 세계 청소년 대회에 아시아 대표로 출전했으나 1승 1무 1패로 조별 예선 탈락을 했다.(파라과이에게 1대3, 캐나다에게 1대0, 포르투갈과는 0대0 무승부) 그 때 주요 멤버는 김석원을 비롯해서 故오연교-김용세-이태호-정용환-박윤기-이길룡-이상룡 등이었다. 그 대회 우승팀이 루이스 메노티 감독이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는데 우승의 주역이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몬 디아스였다.
김석원의 원래 나이는 59년생이라고 하는데 호적에는 6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79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 이어 81년 멜보른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도 참가를 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당시 청소년 대표팀에는 김석원(고려대), 최순호(포철), 최인영, 전종선(이상 서울시청), 김삼수(동아대), 곽성호(한양대), 이경남(경희대)등 실력파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 대회에서도 한국이 1승 2패로 조별 예선 탈락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첫 게임에서 이태리를 4대1로 꺾는 기염을 토하며 위성 생중계를 시청하는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에이스 스트라이커 10번 최순호가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면서 2골을 터뜨렸다.
김석원은 79년에 대전상고의 이태호, 영등포공고의 쌍룡(故이길룡/이상룡)등과 함께 고려대에 입학을 했는데 같은 해 연세대에도 정해원(안양공고)-왕선재(동아고)등의 스타급 선수들이 입학을 해 70년대 중반에 이어 또 한 번 高,延大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 무렵 고려대에는 이 선수들 외에 대학에 늦게 입학한 이강조와 황석근-조긍연-김현태 등이 있었고 연세대에는 장외룡, 정성교(대표팀 GK)등 호화 멤버들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와 연대가 맞붙는 날이면 서울 운동장 혹은 효창구장에 대관중이 몰려들었다.
고려대 졸업 후, 유공에 입단한 김석원은 대학 시절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량을 발휘하면서 당당히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이 됐다. 당시 월드컵 대표팀의 김정남 감독은 아시아 예선에서 김석원을 계속 주전 멤버로 기용했고, 김석원은 그 기대에 부응을 했다. 어릴 적부터 김석원의 열렬한 팬이었던 필자는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김석원이 맹활약 해줄 걸로 예상했었다. 특히 김석원은 '질 좋은' 잔디구장에서 유독 좋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그 기대감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석원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국 말레이시아戰 후에 대표팀에서 제외되고 말았다.(김석원이 제외되면서 당시 88팀의 수퍼스타 김주성(조선대)이 월드컵 대표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김석원은 100m를 11초 7에 끊는 준족(駿足)의 윙이었다. 차범근 이후 가장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윙이었는데 자기 스피드를 자기가 이기지 못해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스피드를 갖고 있었다. 김석원은 기존의 한국 윙들 하고는 플레이 스타일이 크게 달랐다. 수비수를 앞에 두고, 돌파하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김석원은 단순히 스피드를 이용한 직선 돌파가 아닌 무릎을 이용한 세련된 페인팅을 장기로 삼았다.
김석원은 신장(176cm)에 비해 뛸 때의 보폭이 넓은 편이었는데 바깥으로 치는 척 하면서 안으로 접고, 안으로 접는 듯 하다가 바깥으로 치고....남미 선수들을 연상케 하는 이 변화무쌍한 페인팅이 천하일품이었다. 더구나 김석원은 패스를 받을 때 서서 받질 않고 반드시 움직이면서 볼을 받았기 때문에 수비수들로서는 마크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왔다.
그러나 김석원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 또한 확실하게 눈에 띄였다. 우선 체격이 호리호리한 편이라 몸싸움에 강하질 못했다. 터프한 수비수를 만나면 꽤 고전을 했으니까.... 게다가 득점력도 그다지 높질 않았고 기복도 심한 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출중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붙박이로 자리 잡지 못한 것 같다.
핸섬한 마스크의 김석원은 운동 선수 답지 않게 매우 온순한 성격이었고, 또한 성실한 선수로 소문나 있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김석원을 지도했던 '독사' 박종환 감독은 김석원을 가리켜 ‘잔소리가 필요 없는 선수'라고 극찬하셨을 정도니까...... 머리 좋은 걸로도 유명한 김석원은 특히 영어 회화를 수준급으로 구사했다. 81년 멜보른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때 우리 선수단의 준통역 역할까지 했을 정도로 지적(知的)인 선수였다.
김석원 나이: 61년생(실제 나이는 59년생이라고 함.) 포지션: 레프트 윙 및 라이트 윙 신장: 176cm 출신교: 중대부고-고려대 소속팀: 유공 대표경력: 82-85
주요 타이틀 1978년 제 20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우승(이라크와 공동 우승) 1980년 제 22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우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