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승
새벽 빗소리에 깬 후 잠을 못 이룬다.
눈알은 뻑뻑하여 모래를 잔뜩 집어넣은 듯 까끌거리는데 한 번 달아난 잠은 당최 다시 올 생각을 안한다.
티뷔를 켠다.
소리를 잔뜩 죽인 화면에선 재방송인 오락프로에 한 떼의 개그맨들이 나와 웃고 떠들지만 내겐 그저 입만 뻐끔거리는 무언극이다.
화면에 나오는 자막만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려준다.
입을 헤벌리고 보다가 다시 끈다.
까끌거리는 눈도 진정시킬 겸 잠도 청할 겸 억지로 눈을 감는다.
하지만 정신만 더 명료해 질 뿐이다.
시계의 초침소리는 오늘따라 더 크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나 매일 똑같은 자리를 뱅뱅도는 시계바늘이나 같은 형벌을 받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일어나 불이라도 켜고싶지만 예민한 남편 깰까 싶어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훅 끼쳐오던 흙냄새, 엄마따라 밤마다 미역감으러 가던 앞개울,
저녁이면 이남박 가득 감자를 담아 개울가에 모여 깎던 친구들ᆢ
그러다 금세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뀐다.
며칠 안남은 시모의 제사며 사이 안좋았던 시부모께선 무덤에서도 투닥투닥 하실까?
머릿속 여기저기 숨어있던 온갖 생각의 돌기들이 일제히 일어나 저요~ 저요~ 한다.
자볼까 하고 눈을 감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더 어지럽다.
안방에서 세상모르고 코를 고는 남편이 부럽다.
에휴~ 속두 편하지ᆢ
혹시라도 깰까 조심스럽게 까치발로 다니며 스탠드 전등과 책을 꺼내 홀로 거실에 엎드려 몇 자 읽는다.
하지만 그건 그냥 글씨를 읽는 것 이지 내용은 우주밖에서 맴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청승을 떨어야 잠이 와 줄 것인가?
잠시 엎드려 있자니 갑자기 옥수수가 생각난다.
여름 밤,
마당의 무쇠솥에서 금방 쪄 낸 옥수수로 오빠랑 내기를 하곤 했다.
옥수수를 길게 한 줄 남겨선 엄지를 옆으로 댄 후 요령껏 밀어 옥수수 알을 누가 더 길게 떼어내는가 하고 말이다.
찰진 강원도의 옥수수알이 10개 쯤 붙어있는 모양은 꼭 누에 같았다.
쉬임없이 뽕잎을 먹어대던 누에들ᆢ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는 비오는 소리와 똑같아서 몇 번씩 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이제 누에는 비단으로의 화려한 변신도 하지만, 인간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더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늘에서 내린 천충이라고 한다.
갑자기 이명이 울린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자라는 뇌의 명령인가?
이제 진짜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자.
정중하고도 간절한 내 초대에 맘을 돌린 잠이 꼭 와주기를 기대하며ᆢ
참 나도 청승이다.
첫댓글 마지막 문장에서 잠을 한 명의 손님처럼 예의를 갖춰 청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미소 짓게 만듭니다. 비록 불면의 고통에서 비롯된 글이지만, 그 시간을 이토록 따뜻하고 풍성한 문학적 공간으로 채워낸 고선생님의 감수성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김동출
그야말로 청승이지요.
잠이 안오는 밤은 청승의 도가 더 넘치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