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임○진
동학천도교 입도 23.02.02.
무체법경 개강 25.04.27.
오늘은 포덕 166년 10/16 목요일
입도 988일
개강 173일
그도 그러한 마음(其其然之心)
“그도 그러함을 아는 사람과
그도 그러함을 믿는 사람과
그도 그러한 마음을 기쁘게 느끼는 사람은
거리가 같지 아니하다.”
知其其然者
恃其其然者
快哉其其然之心者
距離相異
1) 우선 “그도 그러함(其其然)”과 “그도 그러한 마음(其其然之心)”
2) 안다(知)와 믿는다(恃)와 기쁘게 느낀다(快哉)
3) 믿는다의 한자가 信이 아니라 恃를 쓴 이유는?
자전을 찾아보니
恃는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라는 뜻
信은 의심하지 않다는 뜻
“수도는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샘의 근원을 보아야 한다”
정○택
저도 이원재 동덕님이 동지까지 69일에 대한 숫자를 매일 기록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저는 매일 아침에 부모님의 환원기도식을 모실때,
아버님 환원 4,532일 어머님 428일로 모시고 있습니다. ^^
동학/천도교 포덕 1년(서기 1860년)
수운 대신사 경주 용담정에서 구도 끝에 한울님을 만나다
귀향한 최제우는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서 기도에 몰입했다. 당시 구미산 용담정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참담한 은둔처였다. 바깥 세계와 단절한 채 엄청난 추위와 싸우며 도를 구하지 못한 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출간인부동귀(出間人不同歸)'의 각오로 6개월간 맹렬정진에 들어갔다.
드디어 다음해 경신년(1860년) 4월 5일 '한울님'을 만나는, 즉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그를 통해서 한울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구한다는 영부(靈符)와 세상 사람을 가르칠 주문(呪文)도 받았다.
마침내 동학을 창도(創道)하다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한 1860년 4월 5일을 동학을 창도한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천일(天日)기념일'이라고 명명하고 기리고 있다.
그리고 한울님의 덕을 온 세상에 편다는 뜻으로 포덕(布德)이란 이름을 붙어 기준 연도로 삼고 있다. 동학이 창도된 해(1860)가 포덕 원년이다.
최제우는 득도한 뒤 거의 1년간을 수행과 수련으로 보냈다. 그런 수행기간을 거친 뒤 포덕 2년(1861년) 6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포덕을 시작했다.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 정신을 널리 알린다. 한울님이란 절대의 신이 다른 어느 초월적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모시고 있음을 깨우쳐 준 것이다.
고난의 가시밭길, 끝내 순도(殉道)하다
동학의 노랫소리가 온 천지에 그득하자 조정에서는 탄압을 한다. 1861년 11월에 경주 관아에서는 활동 중지명령을 내린다. 그래도 백성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최제우는 경주 용담을 떠나 울산과 부산을 거쳐 그 해 12월에 전라도 남원에 당도한다. 그리고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을 머문다. 그 곳에서 동학의 중요 경전 등을 저술했다.
다음해 1862년 7월에 경주로 돌아와 은신하며 지낸다. 그러나 9월에 경주 관아에 붙잡혔으나 다행히 10월에 석방돼 용담으로 돌아온다.
그 뒤 피신과 귀향을 반복했으나 끝내 1863년 12월 10일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에게 체포돼 대구 감영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將臺)에서 혹세무민이라는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명을 쓰고 참형을 당했다. 결국 천명을 지키기 위해 형장으로 올라가 41세의 나이로 순도(殉道)했던 것이다.
# 최제우의 발자취를 찾아
최제우의 단심이 혼곤히 배어 있는 경주 용담성지는 최제우 순도 이후에 폐허로 방치돼 오면서 중건과 퇴락을 거듭했다.
70년대 초에 고(故)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도교인들의 모금운동으로 1975년 10월에 용담정을 준공했다.
울산과 양산은 천도교의 역사에서 경주 용담성지 못지 않게 중요한 성지이다. 동학을 창시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울산의 여시바윗골에 있는 동학사적지는 지난 2004년 천도교 중앙총부가 문화체육부와 울산광역시의 후원으로 복원을 했다.
기도처였던 내원암은 내원사로 품격이 높아지고 비구니 사찰로 탈바꿈했다. 여러 차례의 중창 불사를 통해 규모가 꽤 큰 절집으로 자리잡았다.
내원사와 통도사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3대 교조 손병희가 다녀간 흔적도 남아 있다. 그동안은 손병희가 내원사에 온 기록은 있지만, 통도사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천도교에 관심이 많은 한 산악인이 손병희 일행이 통도사를 찾은 흔적을 찾아냈다. 통도사 경내의 암반에 내원사를 다녀간 손병희와 그 일행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