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너희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쓴다.
그대는 자신에 대한 허구의 모습을 창조해 낸다.
그런 다음 타인에 대한 허구의 모습을 창조한다.
그때 그대는 꿈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다.
허구 속에서는 누구도 편안하게지낼 수 없다.
오직 실제 사실 위에서만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대 자신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결코 행복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마야 속에서,
자신이 창조한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놀이를 하고 있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과거를 들여다 보고,
그 속임수를 전부 보고,
자기 삶의 모든 허구성을 깨달은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본 사람이다.
그대는 히말라야를 오를 때에도 라디오를 들고 간다.
침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신문을 보라.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변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붓다는 단지 보리수 아래 앉아 전 세계를 변화시킨다.
한 사람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지만 그것이 분기점이 된다.
역사는 그날로부터 나누어진다.
역사는 두번 다시 그 이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으면,
자신의 무를 자각하게 되면,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리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앎 자체가 하나의 혁명이다.
오직 허구를 떨쳐 버릴 때만 분명히 볼 수 있다.
허구는 그대의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이다.
밝은 눈을 가지면,
그때 삶은 시가 된다.
꽃을 보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바쇼는 말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꽃처럼 피어날 뿐이다."
말은 너무 많은 관념들로 무거워졌다.
모든 경전을 옆으로 치워 놓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