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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우리 기드온 찬양대의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 복귀했을 때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먼저 사도바울의 선교 보고가 나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이 바울의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영접하고 환대했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튿날 그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3차 전도 선교 여행에 대한 보고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에 관해서 그들에게 보고하면서 19절에 보면 이렇게 합니다.
바울이 무난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말하니,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행한 일을 낱낱이 말했다. 주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주어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교를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감당했던 종에 불과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그게 바울의 선교였어요. 바울이 모든 선교를 마친 후에 마지막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진행하셨다.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신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자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진행하면서 바울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종에 불과하다.
이것을 가리켜서 현대 선교학에서는 미시오 데이 하나님의 선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한 그 선교를 내가 한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일을 스스로 하신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전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우리가 봉사하고 헌신하지만 그것을 계획하고 하게 하시고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선교사, 그리고 파송한 단체, 선교 단체죠. 그 모든 것들은 선교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교의 도구예요. 수종드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잘 받들면 됩니다.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잘 받든 다음에 모든 영광을 주인에게 돌려야 합니다. 내가 했다. 이 일은 내 일이다. 우리가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부터 주객이 전도되는 거예요.
선교사와 성도는 그 놀랍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부름받아서 쓰임 받았다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누린 거예요. 그냥 쓰임 받았으므로 영광을 누리는 겁니다.
선교사가 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웅이 되거나 요즘 영웅들이 많잖아요. 각 분야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도 영웅들이 스스로 영웅 된 사람들이 많아요. 영웅이 되거나 스스로 방방 뜨면 안 됩니다. 교회도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그 한 일을 자랑거리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한 일을 잘 정리해서 그것을 모델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전체를 그 실패와 어려운 전철들을 다시 밟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면 안 돼요.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겸손으로 무장해야 되고 그런 순간에도 낮아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뿐이니다. 할지니라
주님의 가르치심이에요. 일을 잘 감당했어요. 최고 능력 있게 정말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게 주의 일을 했어요.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또 교회 중직자로서 여러분들이 맡은 분야에서 일을 잘 감당한 후에 자꾸 주님하고 겸상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턱 들어와가지고 뭐 굉장히 된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리 와서 먹어라 그래도 아닙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저 우리가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야 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그것을 한 거예요. 바울의 이 마지막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의 사역을 스스로 행하셨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낱낱이 보고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것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만약에 바울이 방방 뜨고 바울이 자기 치적을 자랑하고 내가 주어가 내가 돼가지고 내가 여기서도 일을 하고 내가 저기서도 저 일을 하고 해서 자기를 드러냈다면 사실 그런 일을 감당한 사람이 바울이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그걸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분위기는 이미 깨진 거예요. 마음이 상하는 거예요. 주님께 돌려야 될 것을 지금 저 종이 다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했어요. 바울이 잘한 것은 나가서 선교를 잘한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무리를 잘한 거예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도록 그걸 잘해야 여러분 마무리를 잘해야 그게 성공적인 인생이 되고 성공적인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적대자들에 대한 바울의 지혜로운 대응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갔더니 환대하는 동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바울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어요. 바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디서 잘못 들려온 그 소문 그것을 가지고 바울을 오해하면서 바울을 아주 이렇게 꼴아보고 있는 거예요. 나를 세우고 있어요.
지난주에 내년에 있을 우리 교단 선교대회, 모록회에 있을 선교대회 때문에 답사를 다녀왔는데 마라켓이라고 하는 거기 사게 되는데 그 광장에 잠깐 들렸는데 거기는 낮에도 밤 우리는 낮에 갔었고 밤낮으로 거기가 사람들이 꽉 찹니다.
근데 거기 가면 아주 신기한 게 있어요. 뱀쇼라는 게 있어요. 이렇게 보니까 나팔 부는 소리가 들려가지고 보니까 이렇게 뭐가 이런 게 있어 그 사람 앞에 자세히 보니까 코브라가 톡 이래 왜 이 나파를 부냐 무슨 요소를 부리냐 그랬더니 나팔을 불어가지고 이 뱀을 자극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 공격적인 모습으로 쫙 이렇게 저도 거기 그전에 몇 번 방문한 적 있는데 뱀은 무서워요. 젊을 때는 안 무서웠어. 근데 요즘은 무서워 그래가지고 그때는 막 그 어떤 사람이 뱀을 막 이렇게 들고 장난치느라고 나한테 쫓아오는 거예요. 그 얼마나 막 무서워하면서 도망가는지 몰라요. 내가 지옥은 절대 안 가야 되겠다. 지옥에 가면 저런 뱀이 많다는데
이러고 공격하려고 자세를 하고 있는 코브라, 코브라 같이 어디든지 저와 여러분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싸움을 싸우고 선한 길을 가려고 해도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나를 세우고 있는 존재들이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바울도 마찬가지였어요. 바울은 평생 동안 어디를 가든지 바울을 틈을 보고 바울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왔던 예루살렘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참 고단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예수님 이후에 최고의 업적을 남긴 바울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어. 20절에서 22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 들어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라. 내가 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에게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지금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을 거란 말이에요. 큰일 났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야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유대인 중에서 믿는 자가 수만 명 있는데 그분 수만 명 대부분이 아직은 유대주의자요. 예수 믿어서 크리천이 됐는데 유데오 크레티앙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아직은 율법주의자들이에요. 철저하게 율법을 붙드는 율법과 유대의 풍습을 지키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것은 바울하고 이 사람들하고 같지만 바울이 율법이나 유대인의 풍습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아직도 율법과 유대의 풍습이 중요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라는 건 원래 유대의 풍습과 율법을 넘어서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의 권위입니다. 유대인처럼 되지 않아도 구원받는 거예요. 유대인도 구원받고 율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 그게 복음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유대인처럼 돼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잖아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어요. 우리한테 무슨 유대인 비슷한 게 나 있어요? 이런 걸 하고 다녀요. 뭐 머리를 기르고 다녀요. 유대인 옷을 입고 다녀?
아니잖아요. 우리가 미국 사람 같아야 복을 구원을 받습니까? 미국 사람들이 우리한테 복음을 전해줬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미국 사람처럼 옷 입고 미국 사람처럼 말해야 된다. 우리 막 이렇게 국 떠서 밥 먹으면 안 된다 미국 사람처럼 썰어야 된다 그런 거 아니잖아요.
복음은 미국 사람이든지 유대인이든지 한국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받는 능력이예요. 아멘
구원 얻은 후에도 마찬가지예요. 구원 얻은 다음에도 우리가 미국 사람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복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해도 괜찮아요. 기본적인 윤리 예루살렘 교회가 결정했던 네 가지 목매어 죽인 거 피채 먹지 말라 음행 이런 것들 다 이거 기본적인 것만 금지하고 유대인이 지키던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물론 그 후에 이 기독교회가 그래도 꼭 요긴한 것들 십계명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우리 신앙 윤리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나 그것이 관계없이 우리는 크리스천이 될 수가 있어요.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거예요.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잖아요. 근데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이 볼 때 복음은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조차도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이 더 중요해서 누군가가 거기를 건드리면 못 견디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런 딜레마가 항상 있어요.
사실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은 문화에 해당되는 거예요.누구나 문화가 있잖아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여러 가지 반복된 삶을 통해서 문화가 형성됐어요. 그게 주다이즘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한국 문화가 형성이 됐어요. 거기에 복음이 전해질 때 이 딜레마가 이제 문제가 오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유대 문화를 갖지 않은 이방 세계의 복음이 전해질 때 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게 하고 유대인처럼 살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갈등을 했어요. 예루살렘 공예에서 그걸 결정한 거예요. 그러지 말자.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믿게 하자.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율법을 몰려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예수 믿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 그러면 누가 예수 믿겠어요? 그러지 말자 하고 결정한 것이 예루살렘 공예 교회 1차 공예에서 결정한 사항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결정을 해놓고 수만 명의 유대인들은 아직 이게 몸에 배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바울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바울이 못마땅한 거예요. 바울이 나가서 율법 지키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는 뭐라고 했어요?
여기에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런 적은 없어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그냥 그대로 믿으면 된다 한 거지.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을 일부러 못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적대자들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나는데 여러분 소문이라는 건요. 절대로 소문을 100% 믿으면 바보예요. 누가 한 번 전해주는 말은 한 번 걸러야 돼 그래서 이쪽 얘기도 들어보고 저쪽 얘기도 들어봐야 돼요. 그럼 분명히 다릅니다. 들어올 때는 한 번 두 번 꺾어서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자기 유일하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하기 때문이 지금 바울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몇 번 꺾어서 들어오니까 바울은 해로운 사람이고 막 반율법주의자고 아주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바울이 오기만 해라. 이제 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바울을 잡아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겠다 이렇게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만큼 이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이 바울이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복음이 새로운 곳에 전해질 때는 복음과 문화의 갈등이 항상 있어요. 이걸 딜레마라고 합니다. 그 민족과 그 사회가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 믿는 어떤 한국, 아프리카 여러 지역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나름대로 그 종족마다 그 도시마다 문화라는 것이 형성이 돼서 그게 그게 자기들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방식이에요.
그래서 선교사가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것과 부딪히면 일단 마음을 닫아 안 된다. 좀 못된 거다. 그래가지고 마음을 탔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복음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의 문화 속에 복음을 전할 거냐 이게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서 타문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찰스 크래프트라고 하는 탁월한 언어학자이면서 치유 사역자가 있었어요.
이분들이 미국에서 나이지리아로 선교사로 보냄을 받아 사역을 탁월하게 해서 교회가 일어났어요.근데 이제 본부에서 가만히 보니까 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무슨 문제가 있냐면 아프리카는 가보니까 일부 다처제가 있어요.
일부 다처제 기독교적입니까? 반기독교적입니까? 일부 다처제 아니 제 질문에 무슨 함정이 있는 게 아니에요. 대답을 해도 괜찮아요. 기독교적이에요. 반기독교적이에요. 성경적이에요. 반성경적이에요. 아니 구약에 아브라함도 후처가 있었잖아요. 그 드라가 있었고 야곱은 부인이 몇 명 4명이나 있었고 솔로몬은 처첩이 천 명이 넘었고 모여오고 구약은 성경이 아닌가 그렇게 탁 잘라서 말할 수가 없어요.
근데 이제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다처가 일부 일처로 자리매김을 하는 과정이 있어요. 옛날에 일부 다처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이 나가 전쟁을 많이 하니까 많이 죽어 그러면 어떻게 나머지 사람들은 살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여러 여성들과 살아주는 것이 여기 잘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회를 유지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한 사람하고 살기도 힘든데 내 사람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그게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당시에는 보통 가족들끼리 생활을 꾸려가기 때문에 가족의 숫자가 노동력인 겁니다. 그래서 부인이 많고 애를 많이 낳아야 가계가 돌아가 경제활동에 들어가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일부 다처가 당연한 거였어요.
이게 성서적이냐 아니냐 기독교적이냐 반기독교적이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의 그 시대가 상황이 만들어내는 문화예요. 굉장히 제가 지금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어서 이게 지금 유튜브를 타고 가면서 이제 악플이 달릴 가능성 악플을 달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기 생각을 안 하는 사람들은 그냥 얘기만 듣고 이제 막 퍼 나르는 거죠.
그렇게 해서 형성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일부 일차로 갈 때는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돼.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부인이 혼자 그 일을 다 하면 죽어. 첫째 부인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이 일을 나눠서 사니까 가게에도 돌아가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문화는 대개 첫째 부인 둘째 분이 싸우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첫째 부인 둘째 부인 있는 집을 봤어요. 맨날 싸우는 집이 있고 어떤 집은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 형님 동생 하면서 지금도 그러자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고 그게 하나의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문화예요.
근데 그 일부 일처제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고용이라는 다른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해서 노동력을 대신하는 제도가 그게 일반화되면서 일부 일처제가 가능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프리카에 딱 이분이 선교사로 가보니까 일부 다 천거예요.
서구적 관점에서 우리 한국도 이제 마찬가지입니다만 이거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보통 선교사들이 예수 믿으려면 일부 일치해야 된다. 근데 이미 4명 있는데 어떡하란 말이야 그 예수 믿으려면 나머지 3명은 내보내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 목사가 된 사람 중에도 일부 외쳐요. 사모님이 여러분이요 사모님 원 사모님 2 사모님 3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 내보내고 너는 목사가 돼야 된다.
아주 단순한 논리지만 찰스 크래프트 박사가 볼 때는 그렇게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일단 그건 또 그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하기 전에 먼저 무조건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고 그런 것을 일부 일체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돼 시간을 가지고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돼. 그 한 세대가 지나야 되고 그래요 안 그래요 쫓아내면 어떡하냐고 살아야 지금까지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부응하는 데 본부에서 딱 보니까 이건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래가지고 결국은 경고하고 소환해서 선교사에 잘라버렸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돌다가 나중에는 그의 탁월한 그런 학문적인 소양을 인정받아서 훌러대학 교수가 되면서 기독교와 문화인류학 이라는 탁월한 강의를 만들어내서 지금은 이제 그게 일반적으로 용인이 됩니다.
근데 나중에 그분한테 배웠던 그 교회는 가보니까 폭발적으로 성장했어요. 그 문화와 복음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그 문화와 문화를 반문화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문화를 바꿔가는 거예요. 그 사람도 예수 믿고 세대가 지나면서 이거보다는 이게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바꿔가도록 이제 그런 그게 그게 선교가 가서 복음만 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 그들이 가진 문화를 이해하고 그리고 그들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어느 부분은 존중하고 그리고 때가 되면 바뀔 것을 서서히 어떤 변화 그것도 스스로 바뀌도록 기회를 주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처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도 그랬어요. 우리의 문화는 유교 문화였어요. 아시죠? 삼강 오륜 모든 우리 문화 윤리 체계가 삼강 오륜이었어요. 한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앉으면 삼강 오리온도 모르는 것이 맨날 어른들이 삼강 오륜도 모르는 것이 삼강 오륜이 뭐예요? 그러면 잘 몰라 자기도 삼강오륜은 알아 저놈은 상강 오르는도 모르는 놈이다. 상놈이다. 그놈은 취급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근데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서구적으로 이렇게 활동하고 그러면 그분 우리 양반들이 볼 때는 어때요? 저 상놈들이구나 저놈들이 그러면 어떻게 돼요?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무조건 그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게 삼강 오륜을 그 체계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그건 구원과 관계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건드려서 그래가지고 미국식으로 살아라. 처음부터 그래가지고 마음을 닿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아주 지혜로웠어요. 저도 어렸을 때 라빈선 선교사라고 미국 사람이 와가지고 시골교회 사경회를 하고 말도 말도 키 크고 막 멋있게 생긴 분인데 말을 잘 못해요.
근데 사경회를 잘 하는 걸 어릴 때 이렇게 봤어요. 근데 그분들이 저희 할아버지가 굉장히 그 당시에 이제 그 지역의 어른이었는데 진짜 한국 사람보다 더 와서 예의 바르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그 반감을 안 갖는 거예요. 미국 사람도 그거 예의가 있구나. 그 사람이 뭘 알아서 그런 건 아니야. 거기 와서는 그걸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삼강이 뭐예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마땅히 지켜야 될 도리가 있다. 3강이요 오류는 뭐예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 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모르죠?
몰라도 괜찮아요. 구원받는데 괜찮아 나도 적어 왔어. 부자 유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이 있고, 군신유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고, 부부 유별은 부부 사이에는 침범해서는 안 되는 인륜이 있고, 장녀유서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고, 붕우유신은 친구와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내 어렸을 때 술 드시고 오시면 맨날 삼강오륜을 얘기하잖아. 삼강오륜 앉혀놓고 근데 교회 가니까 교회도 삼강 오륜을 얘기해. 그게 뭐 무슨 율법도 아니에요 근데 한국교회는 삼강 오리온이 중요해요. 부부 유별, 남녀유별 그래서 남녀 출세 부동석 우리 어릴 때 어린 것들이 맨날 그랬어요. 남녀 칠세 부동석이다. 그래가지고 여자애들 괴롭히고 그랬다고 어디 여기 왔느냐 그러고 웃겨.
하여튼 돌아보면 근데 실제로 한국은 그 당시에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남녀가 같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실제로 우리 어렸을 때도 교회에 가면 따라 앉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남녀가 섞이기 시작하는데 그게 굉장히 교회에서 이슈가 됐어.
누가 거기 남자 자리에 앉았대 옛날 어른들이 지금 와서 보면 여기 경천동지 하늘이 막 놀래 나자빠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일이 이렇게 섞여가지고 앉아 있어 남녀가 한국 사회에서는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때 미국인들이 볼 때는 못 보고도 하고 키스도 하고 하는 사람들이 볼 때 너무 웃기잖아요. 그래가지고 다 그냥 석 앉아 교회에 오면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도 교회 못 갑니다. 다 그걸 지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당을 지을 때도 기역자를 지었어요. 남녀가 같은 공간에 못 들어가니까 강단을 여기 기억자에 끝에 놓고 이쪽은 여자만 들어오고 이쪽은 남자만 들어오. 이것이 서서히 좁혀지면서 이렇게 섞여서 앉게 된 것은 약 거의 100여 년이 걸린 겁니다.
문화가 바뀌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지금도 우리는 이 한국적 문화를 교회 안에서 사용해요.
다 몰라도 장유유서는 알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가 그래요. 안 그래요. 근데 나이들 저도 나이를 먹고 보니까 그게 좋더라고 속으로 여러분들이 목사님도 꼰대가 됐구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좀 기다려주면 좋죠. 그래서 가능하면 자기보다 연장자한테 물이라도 먼저 들도록 하는 것이 우리 정서에는 맞아.
근데 뭐 그거 관계없이 먼저 막 먹고 그러면 싸합니다. 뭔가 뭐가 좀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그거 참 중요하거든요. 제가 한국에 방문했다가 어떤 선배님이 식사를 초대했어요. 그래가지고 저 시골까지 갔어. 차를 몰고 또 안 좋은 시골은 아니지만 아예 서울 근교지만 어느 산골에다 초대를 했어. 근데 이 GPs가 잘 안 돼 그래 계속 이쪽으로 갔다가 그 밤에 저쪽으로 갔다가 전화했다가 막 일하다가 한 30분 늦었어. 차가 막 시골에서 뒤집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밤에 좁은 길로 가니까 갔더니 그 30분을 못 기다리고 두 부부가 다 먹어버렸어. 갔더니 갔더니 고기가 조금 남고 더 드셨어. 그리고 자기들 구경하면서 나는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의상 조금은 먹었지만 다시는 그분들하고 식사를 하지 말아야 되겠다. 야 이런 예의가 있나 이게 한국 사람은 그 예의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장유유서도 나쁜 건 아니야. 가능하면 지켜주면 돼요.
근데 그게 절대적 가치는 아니잖아. 그죠? 그러나 선교사들이 와서 볼 때는 이 사람들은 이걸 굉장히 중요한 문화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돼요?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그걸 지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외국 선교사님들이 우리 집에 오면 그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한국 사람이 하는 것보다도 더 공손하게 하니까 할아버지 마음이 열리는 거예요. 자식처럼 그분을 대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게 뭐 절대적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맞춰준 거죠. 그래서 복음이 받아들이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 문화에서는 중요하지만 언젠가 없어질 거야. 그러나 그거 가지고 싸우지 않아.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복음 전하고 누군가에게 크리스천의 그런 빛과 소금이 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문화를 배려해 주는 게 좋아요. 내 입장에서 하지 말고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그분들의 종이 돼 주는 거예요.
바울은 그걸 잘한 거예요. 유대인에게 와서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처럼 바울은 지금 아주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어요. 그러나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미 경지 자유인의 경지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에게 가서는 이방인들에게 맞춰줬는데 유대인에게 와가지고 나는 그동안 이렇게 살았으니까 절대로 그렇게 그런 게 없어 이방인에게 와서 또 이방인처럼 맞춰줘.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요청을 하잖아요. 가지고 데리고 온 사람들이 이방에서 왔으니까 이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자.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를 풀어주자.
어떨 때는 바울이 못하게도 해요. 그래서 자기 입장을 밀고 나가는데 지금은 양보를 해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건 오해를 풀어주고 그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으면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나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바울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하겠다. 그게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자유고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23장에서 24장에 사람들이 23절에서 24절에 그 예루살렘 교회가 요구한 대로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유대인의 결례를 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다 제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에요. 그런 유연성이 있어야 돼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율법과 풍습을 넘어서기도 하고 지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도를 깨달은 사람의 능력이에요. 굉장히 큰 사람이에요.
그다음에 바울은 바울의 사역을 보면 수신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대화를 하거나 어떤 관계를 할 때 상대방 상대방 중심에서 대화도 하고 상대방 중심에서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근데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방법이에요. 우리는 예수 믿고 막 기도 생활하고 뭔가 열심히 뭔가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내 중심이야. 아니 막 말이 안 통해 이상하게 그렇게 돼요. 상대방은 어찌 됐든 간에 내 입장만 주장하는 사람이 돼요.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도 아니고 바울의 방법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방법 성육신 하셔서 오셔서 하늘의 그 신비한 진리를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전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유대인의 문화를 가지고 전하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언어로 전환하고 여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또 못 배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어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서는 율법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또 탁월한 율법적 논리를 가지고 딱 전하는 거예요. 이게 수신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입니다. 성육신 이론이라고도 해요. 바울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 이방인을 너무 이방인이네 이방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유대인에게 와서는 유대인에게 맞추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형식보다는 의미가 중요한 거예요. 그 형식에 너무 얽매이면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을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수신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선교사가 무엇을 전하느냐 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듣느냐 이게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복음을 탁월하게 전해도 너무 어렵게 전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전해도 상대방이 못 알아들어 또 어떤 경우는 맞는 말인데 알아듣고 싶지 않아 막 기분이 나빠 우리하고 자꾸 부딪혀. 그러면 잘못된다는 거 중요한 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터이니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들으시오.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듣든지 안 듣든지 이 말씀을 전파하라. 이 말씀을 오해해가지고 그냥 여러분들 교인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아주 고상한 말로 내가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뭔 얘기인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훌륭한 말은 하는 것 같은데 잘 이해는 안 돼. 그럼 되겠어요. 여러분들에게 맞는 말로 지금도 나도 이 말을 하면서 이게 내가 진짜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여러분 알아들어요. 무슨 얘기인지 제가 막 이렇게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하는 것은 알아듣도록 하려고 그런 거예요. 개떡처럼 말하면 찰떡처럼 알아들어라. 저도 옛날에 한두 번 그런 적 있어요.
회개합니다. 아니 개떡처럼 말해놓고 어떻게 찰떡처럼 알아들으라고 그래? 찰떡처럼 말해도 개떡처럼 알아듣기가 쉬운데 이 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100% 전달되는 게 아니에요. 20% 30%밖에 전달이 안 돼. 노이즈가 너무 많이 껴 그러니까 철저하게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유대인은 유대인에게 맞게 이 문화는 두 가지 차이가 있어요. 하나는 지옥 한국하고 서양하고 다르잖아요. 또 우리 한국 사람들도 한국에서만 산 분들하고 디아스포라고 산 사람들이 달라요. 그래서 한국에서 탁월한 설교자가 와도 별로 은혜가 안 되는 것은 그거보다는 이 디아스포라 목회를 한 분이 와서 전하면 훨씬 은혜가 돼. 왜냐하면 그게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우리를 만져주기 때문에 그런 거야.
지역 세대 간에도 마찬가지예요. 세대 간에도 세대 간의 격차 문화가 있더라고. 우리 교회는 3분의 2가 20대 30대 40대니까 굉장히 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근데 60을 넘어가면서 우리 청년들에게 맞는 내가 언어와 그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여기 MZ세대라든가 20~30대는 한국말은 한국말인데 뭔가 다른 한국말을 많이 쓰더라고 지금 언어를 다시 배워야 됩니다. 요즘 말을 또 줄여써가지고 그게 이상한 한국어가 됐어요. 갑분싸 해 그러면 뭐요? 갑분싸가 뭐요? 그랬더니 갑자기 분위기 싸네. 이걸 이해 못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 많이 있죠. 그런 걸 쓸 때는 좀 풀어주시는 것이 우리를 또 배려하는 거예요. 권사님들한테는 이렇게 풀어주셔야 됩니다. 아멘
현타가 온다. 그래서 현타 난 처음에 뭔가 그랬어. 현타가 뭐예요? 현실 자각 타이밍이 됐다는 거예요. 모르는 분들이 많네요. 지금 우리 권사님들 그런 거였구나 현타가 왔다 이런 이제 용어들 그 신세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뭐 이렇게 그 사람들을 내가 이해를 하고 거기에 좀 맞춰주고 또 젊은이들은 또 연세 드신 분들을 만날 때는 거기에 또 맞춰서 용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간에 예의고 그렇게 할 때 정말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좋은 인간관계가 되고 사역도 마찬가지예요.
사역도 바울과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탁월하셨어요. 하늘의 그 신디한 복음 얼마나 그 높은 의미의 도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삼척동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 수신자 중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되십시다.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후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드러내시고 아멘 본질이 아닌 걸로 자꾸 붙들고 싸우지 말고 그런 건 어지간한 건 양보하고 본질을 붙들고 또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상대방 입장에 설 때 여러분 그걸 통해서 복음도 전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