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날의 벗이여
봄이 온다, 봄은 그리운 사람처럼 다가오지만 내 마음처럼 머물지 않는다. 향기로운 말은 돌담의 매화 꽃망울에 맺히고 새물에 떠다니는 달빛처럼 더다니는 시심(詩心)을 한 모금씩 나눌 뿐이다. 그래도 봄이 오고 그대는 무지개를 타는 듯 녹진나루로 건너올 것이다.
나의 작은 서장의 오른편 위에는 ‘이문회우’(以文會友)가 걸려있다. 나는 엉뚱하게 ‘매화서옥도’를 떠올린다. 이 또한 배접된 욕망의 향이다. 전기의 그림으로 들어가면 깊은 산 속 매화가 만발한 집에 푸른 옷의 선비가 앉아 벗을 기다리고, 거문고를 멘 붉은 옷의 선비는 다리를 건너 초옥을 향해 다가간다. 매화는 춘설인 듯 온 산을 뒤덮는다. 지음(知音)과 반승(伴僧)이 저절로 떠오른다.
며칠 전 광주에서 찾아온 선배가 해미원에서 저녁을 들고 책을 선물로 주었다. 젊은 날 광주고 문학반에서 인연을 맺은 선배들이다. 집에 와 살펴보니 위항도인(葦杭道人) 초정 박제가 선생의 ‘궁핍한 날의 벗’이었다. 안대회씨가 옮겼다. 같은 기획위원인 정민교수는 ‘새로쓰는 조선의 차문화’로 놀랐다. 지금가지는 동다기가 다산과 초의를 저자로 추정했지만 이 ‘끽다’(끽다)의 본 저자는 18세기 진도 쌍정리로 유배온 ‘전의 이씨’의 글임을 정민 교수는 밝혀낸 것이다.
앞서 박제가 선생의 글을 모은 안대회를 착각했던 것이 우습기도 한다. 나는 장자의 헛방에 어질어질해 진 듯하다. 간서치 이덕무는 학처럼 걸출하였지만 박제가는 무인의 매서운 눈빛을 가진 개혁자로 알려진다. 영숙永淑은 백동수白東修(1743~1816)의 자로서 그는 이덕무의 처남이다.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고, 의협심이 대단했으며, 사람 사귀기를 좋아한 쾌남아였다. 이덕무가 그를 위해 지어준 <야뇌당귀>에서 그의 호협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박제가를 박지원, 이덕무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도 바로 백영숙이다. 그 역시 서얼로 후에 장용영 장관을 지냈다. 그의 좌절이 박제가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조선의 최고 도회에서 궁핍한 선비가 겪는 염량세태를 통해 당시 서얼 출신 인텔리의 고뇌와 울분을 표현하였다.
초정 박제가의 ‘그림 그리는 법’(讀畫法) 제문 衡山화첩후발에 수록된 목우도(牧牛圖)는 ”아! 그 사람과 더불어 그러한 즐거움을 함께 누릴 방법은 없을까?”라 하였다. 그에 앞서 공제 윤두서나 다산 정약용, 초의와 소치가 한양에 들어올 때 큰 영향을 미쳤던 이재(彛齋) 권돈인의 시 한 구절은 그림보다도 더 난향이 그윽하다. 若道風霜易摧折(약도풍상역최절) 바람과 서리에 쉽사리 꺾인다면 山房那得長留香(산방나득장유향)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라며 추사의 나그림에 화제를 붙였다.
지나친 기이함은 상서롭지 않고 시운(時運)을 쇠하게 하네라며 공자의 괴력난신을 경계한 정신을 되살리고 있기도 하다.
진도는 천년 동안 사회정치적으로 서자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배자들이 들끓는 우범지대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수탈의 대상으로 착취를 하거나 공도화로 버려졌었다. 가장 가까이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정간첩들이 잠입해 국가전복을 호시탐탐 노리는 곳으로 세뇌하였다.
세상사는게 힘들고, 벗들이 당신을 지루하게 만든다면 천 년 전 백 년 전 벗들과 사귀라고 이야기 한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상고도회의문의례 尙古圖會文義例》에서 여러 옛날 선인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아 그들의 본받고 그들과 대화하라고 했다.
‘꽃에 미친 김군’에서는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고 했다. 김군은 꽃집의 배달원이다.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또 다른 안대회의 번역집 ‘선비답게 사는 법’도 크게 본다면 그런 선비들과 벗이 되게 해주는 그런 책이라 한다. 이 책속에는 13년간 일기를 쓰고 34살에 요절한 《흠영》의 작가 유만주가 있으며, 입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절식하라고 말씀하시는 성호 이익선생이 계신다. 단정한 자세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제자들에게 몸소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지 보여주시는 퇴계선생도 있다.
대부분이 위인 같은 선비들이 등장하지만, 계집종을 희롱하다 아내에게 들켜 부끄러워하는 나이든 선비도 있고, 좋은 글을 짓고 세상에 인정받고 싶지만 오히려 옛문체와 틀리다고 귀양을 가게되는 이옥(1760-1813)은 세상을 비꼬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누구에게 늙어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글을 지어 노탐(老貪)을 욕하기도 하는 김정국(1485-1541)도 소개했다.
옮긴이는 「박제가론」에서 분세질속(憤世嫉俗)의 격정으로 “병든 사회의 깨어 있는 지성 박제가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이게 아니야!’를 외쳐댔던 지성인이었다.”면서 가슴속에서 솟구쳐나오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분노를 세상을 향해 고함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단언하였다. 소천하신 봉두난발 백기완선생이 다시 떠오르게 한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살아가는 세상살이는 현대냐 과거냐는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 어떻게 현명하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시인으로 태어났다’고 임동확시인은 열정적으로 확신하였지만 나는 동네 신문나부랭이를 만지며 시간을, 어설픈 감성을 땜질하며 나이를 채워 아직도 귀가 순하지 못하다.
며칠 전 광주 무봉선원에서 한 스님께서 달마도를 보내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진도에서 80년대에 군수를 역임했던 박 모씨의 자제분으로 늦깎이로 불가에 귀의 하였지만 뛰어난 화재(畫材)는 숨기지 못한 듯하다.
문 밖에 봄꽃 향기가 은은하면 궂이 멀리 있는 벗의 발자국을 초조하니 기다릴 일이 아니다. 술이 덜 익었다고 아내를 재촉할 일도 아니다. 내 안에 제대로 시가 익어가는지를 스스로 묻고 다져야 할 일이다.
진도가 어찌 외로울 리가 있을 것인가. 바다의 물결처럼 풍류가 그치지 않는 고장. 편운 조병화선생은 일직이 ‘진도는 정이 넘치는 곳’이라고 노래하였다.
나는 스스로를 결코 궁핍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이른 봄 매화서옥도 학처매자도 동쪽 울타리에 황국을 심지도 않았지만 늘 옥순봉과 학정봉 벗삼은 덕신(德神)산 아래 맑은 물소리와 남쪽 섬 동백숲 향에 발을 담그며 삼십삼천 종소리로 머리를 감았으니 해인이 담긴 아들의 글읽는 소리나 아내의 흰머리를 애써 헤아려 무엇하겠는가.(박남인. 신축년 옥주 읍성 동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