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쓰시게 하라(막 11:3)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의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감람산과 베다니에 이르러 예수님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냅니다. 가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오라(2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을 알고 계셨다는 능력보다는 ‘쓰시고 나면 즉시 돌려보내실 것(3절 새번역)’이라는 세심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나귀 등에 앉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은 왕의 행렬을 연상케 합니다. 게다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는 것은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하는 있습니다. 왕이 타는 짐승은 아무나 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마굿간의 구유에서 성탄의 첫날을 보내셨지만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을 비로소 왕의 행렬로 드러내셨습니다.
성경은 메시야로 오실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실 것(슥 9:9)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백성은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 찬송하며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황실과 투쟁하여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고 부강하게 세울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겸손한 왕에 만족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 19:6)는 고함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려고 하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떤 사람이 ‘무엇 하려느냐(5절)’는 질문을 했습니다. 타인의 물건을 허락없이 사용하는 것은 절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주가 쓰시겠다(3절)’는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돌려보낼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축구공 하나에 많은 이들이 울고 웃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임에도 유명한 선수 앞으로 달려가 유니폼을 교환하려는 장면들이 중계되기도 합니다. 동일한 유니폼이지만 누가 어떤 상황에서 입었고, 신었는가에 따라서 새롭게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많은 나귀 가운데 하나였던 그 어린 나귀가 주님께서 사용하셨던 특별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특별함 없이 평범하지만 누구에 의해 쓰임을 받았는가에 의해서 의미와 가치가 변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8)’고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군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지만 인간과 함께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명예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는 그의 동역자가 되는 특별한 성도의 삶을 축복합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사우디 왕자 빈 살만 앞에 우리나라 4대 총수들이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하는 사진이 화재가 되었습니다. 재력과 명예의 측면에서 빠질 것 없는 이들였지만 자리를 마련한 사우디 왕자의 재력과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잔치를 벌이고 사람들을 초대(눅 14:16)했지만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밭과 소를 사서, 장가 가서, 등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 정당해 보입니다만 누가 초대했는지 모르는 무지와 불순종의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기꺼이 우리를 ‘주께서 쓰시게 하는’ 믿음을 축복합니다.
어린 나귀가 주님께서 쓰신 이유는 아무도 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초대되려면 어울리는 옷과 차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된 이가 쓰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게 하도록 준비된 믿음의 삶을 기도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순종한 결과는 어린 나귀는 왕을 등에 업고 찬송을 받는 영광에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찾으시고 그의 영광을 위해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관종은 아니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