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뒤에 교육관 자리에도 큰 건물이 있다. 30년대 중후반에 용정중앙교회는 계몽운동으로 야학교가 있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관이 따로 있었으며 청년회와 여신도회 활동이 활발하였다.
용정시 건설거리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2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 건물 2층에 치과가 있다.
<1934년 세번 째 건축된 용정중앙교회>
<북간도에 세워진 최초의 카나다장로교회 , 용정시교회 (용정중앙교회) 간추린 약사!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빛날 지명이 있다면 북간도에 있는 용정이다. 비암산에 일송정이 있고 해란강과 말 타는 선구자가 있는 그 용정 말이다. 용정은 순전히 조선인에 의해 개발되고 형성된 북간도 최초의 조선인의 마을이다. 그리고 그 용정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굳건하게 만든 것은 용정에 기독교 신앙과 함께 계몽운동을 펼친 카나다장로교회다. 카니다장로교회는 1교회 1학교 운동을 펼쳤으며 자유사상, 민주의식,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교회 창립자는 문자 그대로 독립운동가였고 교우들은 거의 다 <간도국민회>회원으로 계몽운동과 만세시위,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다. 1920년 일제의 대학살 때 불에 탄 학교와 교회는 대부분이 카나다장로회 소속이었다는 사실이 용정의 독립운동 모체가 캐나다장로교회였음을 웅변해준다.
용정은 1877년 김언삼, 장인석, 박윤언이 14호의 남녀노소를 이끌고 두만강에서 삼합으로 들어와 고단한 여정 끝에 육도하와 해란강 합수목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1893년에 용정에는 34호 개간민들이
있었고, 이상설의 서전서숙이 세워졌을 때는 96호의 조선인과 5호의 한족으로 409명의 인구가 있었다. 1910년에는 1,238호에 5,8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인에 의해 세워져 성장하고 있는 용정에 경천동지할 복음이 들어왔다.
1898년 그리어슨, 푸트, 던칸 막레의 파송으로 시작된 카나다장로교회의 북간도선교는 1902년에 시작되었음을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국 카나다 장로회에서 파송한 구례선이 1902년 함경도를 경유하여 간도와 해삼위에 전도함과 1906년에 중국교인 싼진선생의 동양리와 양무정자에 전도함을 위시하여 조사 김문삼과 선교사 업아력과 조사 김계안과 선교사 부두일, 박걸 등과 목사 김내범 등이 근근자자히 상계전도한 결과 신자가 시증하고 교회가 일흥하여 1921년에 간도노회를 조직하게 되니" 677, 678쪽
용정시교회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1906년에 카나다장로회의 간도 최초의 교회, 용정시교회가 설립되었다. 구춘선과 이보연이 이주해 온 신자들과 새 신자들을 인도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용정시교회는 북간도 전도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 구례선, 업아력, 부두일, 매길노, 박걸 등이 번갈아 순회하여 교회를 섬겼다.
1909년 용정시교회에 조사(전도사) 김계안이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간도지방 순회전도사로 사역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간도에 카나다장로회 교회가 간도에 자리잡게 되었다.
1910년 조사김계안과 성도들이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1913년 선교사 박걸이 용정에 선교부를 세웠으며 용정시교회를 섬겼다. 선교사 부두일, 서고도, 배례사도 자주 내왕하였다.
1913년 전도목사 김내범이 용정시교회에 파송되었다. 그는 북간도에 있는 교회들을 순회하며 성례전을 집행하였다.
1913년 조사 김계안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산하에 영신소학교를 세웠다.
1916년 김내범 목사의 지도아래 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중건하였다.
같은 해에 부인전도회가 만들어졌으며 임뵈뵈, 정신태, 김철나가 부인전도회 책임자로 일하였다.
같은 해에 민산해가 제창병원을 설립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1917년 박영헌 목사가 전임목사로서 용정에 거주하며 교회를 섬겼다.
같은 해 카나다선교부가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1918년 박례헌 목사 서고도 선교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부임하다.
1920년 용정시교회에서 토성보교회가 분립하였다.
1921년 박례헌 목사는 박걸 선교사와 용정시교회에서 동사목회를 하였다.
1922년 제2회 간도노회가 용정시교회에서 열렸다.
1922년 서고도 선교사와 용정시교회에서 동사목회를 하였다.
1923년 박례헌 목사 용정시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다.
1930년 박례헌 목사 사임하였다.
1931년 이태준목사(은진학교 교감)임시 당회장으로 강단을 섬겼다.
1932년 문재린 목사가 부임하였다.
같은 해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34년 3월 춘계부흥집회(강사 : 김선우 목사)를 열었다.
1934년 문재린 목사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옛 건물 헐고 그 자리에 2층150평 벽돌 건물을 지었다.
1936년 대지 250평 구입하였다.
1938년 춘계 부흥집회를 열었다(강사 : 김형숙 목사)
1938년 교육관을 건축하였다.(80평)
1938년 야학교를 시작하였다.
1940년 선교사들이 강제출국 당하였다.
그들이 떠나면서
용정선교부는 문재린 목사,
은진학교, 명신학교는 김두식 명신학교 교장,
제창병원은 허상훈 장로에게 사후처리를 위임하였다.
1941년 북간도 모든 교단과 교회가 <만주조선인기독교회>합병되다.
<종교보국>의 어용도구로 전락하다.
1945년 해방, 소련군의 진주하여 교회 핍박을 시작하였다.
용정시교회(용정중앙)42년 역사를 대략 살펴보았다.
42년 역사 속에서 교회는 망국민들의 설움을 달래줄 뿐 만아니라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이르게 되는 부활의 메시지로 망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었다. 교회는 뜨거운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어 청년들을 역사의 일꾼으로 양육하였다.
카나다장로회는 독립운동을 지지하여 모든 교회 창립자들이 거의 다 독립운동가였다.
어느 책도 용정시교회 이름이 용정중앙교회로 바뀐 것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용정중앙교회 터를 오랫동안 찾아헤맸는데 금번에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비록 일반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김계안 조사가 시무한 교회. 그리어슨, 바커, 스코트. 프레이저 선교사가 섬긴
교회의 터라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이 오르르 밀려왔다.
우리 민족에게 용정을 주시고 용정시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돌린다.
2024년 10월 18일
우담초라하니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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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이전, 문홍복 주핑,<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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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영금, 문영미 엮음 <기립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2006
7. 양봉송 ,<항일촌 혁명촌 인재촌 회룡봉>, 경신진인민정부 회룡봉촌민위원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