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 |
국가 |
그리스 |
분야 |
희곡 |
해설자 |
김종환(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정교수) |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는 서구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희곡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중요한 작품이고, 동양과 서양을 가릴 것 없이 어느 독자에게나 감명을 줄 수 있는 수작이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을 위시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이 희곡 문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현대 희곡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 비극의 구조는 상당히 복잡하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그 어떤 극작품보다 정교한 플롯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압축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내용이 안티고네의 큰오빠이며 크레온의 생질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이란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인과관계의 맥락 속에서 치밀하게 전개된다.
<안티고네>의 플롯과 구조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일가에 관련된 신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스 극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을 토대로 쓰인 것이어서, 사건의 중간에서 바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발생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현재적 맥락에서 재구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은 <안티고네>가 시작되기 전 이야기의 요약이다.
테베는 아테네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다. 테베의 전설에 따르면 아게노르의 아들 카드모스가 델포이의 신탁에 따라 테베에 나라를 건설했다. 카드모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무서운 용과 전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아테나 여신의 말에 따라 그 용의 이빨을 자신의 나라가 될 테베 땅에 심는다. 이 씨앗에서 사나운 거인족이 생겨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다섯 명만이 살아남는다. 이들은 카드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카드모스와 함께 새로운 나라 테베를 건설한다. <안티고네>에서 언급되고 있는 “용의 씨들”이란 표현은 이 고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테베인들은 “용의 이빨”이란 씨앗에서 태어난 자손들이다.
카드모스는 폴리도로스를, 폴리도로스는 라브다코스를, 라브다코스는 라이오스를 낳는다. 라이오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아폴론의 신탁이 내린다. 이 아이가 자라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는 내용이다. <안티고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브다코스 가문의 불행”이란 바로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함으로써 파생된 불행을 뜻한다.
겁이 난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이를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부모로서 차마 아이를 직접 죽일 수 없어서 목동에게 아이의 양 발목을 밧줄로 꿰어 묶어서 산속에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지체 없이 시행된다. 그러나 목동은 차마 어린아이가 산속에서 죽도록 할 수 없어서 아이를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맡기고 테베가 아닌 곳에서 아이를 키워 달라고 부탁한다.
시간이 지나고 코린토스 목동이 아이가 없는 코린토스 왕 폴리보스에게 그 아이를 데려가자 왕은 흔쾌히 그 아이를 양자로 삼고,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양자임을 모른 채, 멋진 청년으로 장성해 코린토스 왕과 왕비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우연한 기회에 몸서리치는 신탁을 듣게 된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이다. 그는 이 신탁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게 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도중 세 갈래 길에서 마차에 탄 한 노인과 그의 수행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노인이 바로 라이오스 왕이다. 라이오스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퇴치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델포이로 가는 중이었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둘 다 성미가 급했는데, 서로 먼저 길을 가기 위해 다투게 된다. 라이오스가 성급하게 오이디푸스를 모욕하고 때리자, 이에 격분한 오이디푸스는 이들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라이오스와 수행원들 모두를 살해한다.
테베에 도착한 오이디푸스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퇴치하고, 이로 인해 테베의 왕으로 추대된다. 라이오스 왕의 소식이 끊어져 그 종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아내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들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그리고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두었다.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두 딸과 두 아들이 바로 이들이다. 약 15년의 행복한 세월이 지나갔고 테베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신들은 더 이상 오이디푸스가 범한 죄악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저주로 인해 테베에는 역병과 기아가 찾아들었고 모든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다. 절망한 테베의 백성들은 오이디푸스를 찾아가 다시 한 번 테베 백성들을 구해 달라고 간청한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궁전 앞 제단 주위에 모여 탄원하는 백성들 앞에 등장한 오이디푸스의 대사로 시작된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단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의 전모가 하나씩 밝혀진다. 오이디푸스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고, 부친 살해가 밝혀지고, 친어머니와의 저주스러운 결혼 사실이 밝혀진다. <안티고네>의 주인공인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지만,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오카스테)가 낳은 오이디푸스의 여동생인 셈이다. 테베의 왕으로 등장하는 크레온은 이오카스테의 남동생이며 안티고네의 외숙부다. <안티고네>에서 “아버지의 업보로부터 이어진 불행”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안티고네>의 내용은 이 작품과 더불어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연결된다. 따라서 이들 두 작품의 내용을 알아 두는 것이 <안티고네>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비극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은 먼저 집필된 <안티고네>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자신이 부친 살해범이란 사실을 알게 되며, 근친상간의 저주받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식이자 형제자매를 낳은 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크레온에게 어린 두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유배를 떠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유배 길에 오른 오이디푸스와, 그가 떠난 집안의 반목과 질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의 큰딸 안티고네는 아버지를 따라 유랑 생활을 하고, 작은딸 이스메네는 집에 머물며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사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집안은 더욱 어지러워진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크레온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도 모자라 서로 반목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아테네 근처의 콜로노스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대화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어지러운 나라 상황과 집안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에 실망한다. 두 딸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충실한 반면 큰아들인 폴리네이케스는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처남 크레온이 모두 이해타산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이디푸스의 후원을 바랐고, 오이디푸스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유해를 차지해서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오이디푸스는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과 거짓 참회를 비난하면서 그들과의 화해를 거부한다.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도움으로 오이디푸스는 어지러워진 마음을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종결되지만, 오이디푸스가 죽고 난 후에도 오이디푸스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안티고네>에서 계속된다. 오이디푸스는 평화로운 임종을 맞이했고 그의 영혼은 축복받은 성소(聖所)에 받아들여진다.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유해를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비밀리에 안치한다. 오이디푸스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간의 불화가 깊어져 치열한 싸움이 진행된다. 오이디푸스의 큰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도망쳐 그곳에서 아르고스 공주와 결혼한다. 그 후 아르고스 동맹국들과 연합해 일곱 장수들을 이끌고 그의 조국 테베를 공격하고, 그의 동생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방어한다. <안티고네>에서 “오빠의 불운한 혼인”과 “일곱 장수들”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전투에서 테베가 승리했지만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다 죽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명한다. 그러나 조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던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판에 그대로 방치하고 매장을 금지했으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매장을 금하는 크레온의 명령에 모든 백성들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인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시체를 묻어 주기로 결심한다.
크레온의 명령과 경고에 대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대사로 <안티고네>는 시작된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 즉 신의 법을 크레온 왕의 명령보다 우위에 두는 안티고네와, 국법을 고집하는 크레온의 갈등이 이 극의 가장 근원적인 갈등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의 집필 연대보다 앞선 기원전 441년에 집필되었지만,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서막(序幕) 또는 프롤로그는 현대극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의해 극의 상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단계다.1) 서막은 12∼15명 정도의 코러스가 등장해 첫 번째 합창이 진행되는 등장가(登場歌) 또는 파로도스(parodos)로 이어진다. 코러스는 주인공의 상황을 전달하거나 주인공과 대화하면서 충고하기도 한다. 또한 코러스는 사건을 해설하기도 하고 관중의 의견을 대변하기도 하며, 극의 분위기와 감정을 고조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나아가 작가 정신을 드러내어 사건의 윤리적 틀과 인물의 행위를 판단할 기준을 설정해 주기도 한다.
등장가 이후 삽화(揷話) 또는 에피소드(episode)로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삽화는 현대극의 막(幕)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단계다. 그리스 비극은 대개 네다섯 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고, 각 삽화의 끝에는 코러스의 합창이 배치된다. 코러스의 합창은 코러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부르는 송가(頌歌, strophe)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부르는 답송(答頌, anti-strophe)으로 구성된다. 답송은 대개 송가에 응답하는 시절(詩節)로 구성된다. 종막(終幕) 또는 엑소도스(exodos) 이전에 네다섯 개의 삽화와 코러스가 배치된다.
종막 또는 엑소도스는 현대극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코러스의 언급으로 극이 종결된다. <안티고네>의 종막은 사자가 등장해 무대 밖에서 벌어진 내용, 즉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아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의 사망 소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식과 아내의 자살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크레온의 절규로 마무리된다. 코러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온의 삶을 예로 들어 인간의 오만함이 어떤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지적하며,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신을 경배하고 지혜롭게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지적하며 극을 마무리한다.
비극에 관해 최초로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란 완결되고,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구성되고, 일정한 길이를 갖춘, 고상하고 진지한 인간 행위의 모방”이라고 정의하며,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켜 감정의 정화(catharsis)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비극의 주인공은 높은 신분의 인물이어야 하며,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져야 하고, 주인공의 몰락이 천박한 욕망이나 타락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결함이나 과오에 기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위가 이기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티고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안티고네>는 공주라는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져 비참하게 파멸한 안티고네라는 여인의 운명과, 오만한 마음과 경직된 사고로 인해 자식과 아내를 잃은 크레온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처한 가혹한 운명 앞에 쉽게 조아리지 않는다. 안전을 위해서는 왕의 명을 따라야 하지만, 안티고네는 현실적으로 위험한 “신의 법”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대가로 크레온에게 사형 언도를 받는다. 안티고네는 동기간의 사랑으로 인해 왕명을 거역하는 인간이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인간이고 어느 한순간도 천박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리하여 헤겔은 <안티고네>가 가장 숭고하고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이며 여주인공 안티고네는 “지상에 나타난 인물 중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2)
보통의 경우 비극은 선과 악의 충돌이나 정의와 불의의 충돌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이 작품은 국가의 공적인 법과 개인적 윤리의 대립 가운데 제각기 의의를 가지고 있는 선(善)의 충돌을 보여 주고 있다. 크레온이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온이 대변하는 국법의 논리와 안티고네가 대변하는 신법(神法) 혹은 개인의 양심에 기반을 둔 윤리는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부분적인 선의 충돌을 보여 주고 있다.
안티고네가 중시하는 것은 크레온의 명이 아니라 양심에 따른 “신의 법”이다. 그러나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신법도, 크레온이 주장하는 국법도 절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부분적이고 상대적이며, 상대의 원리를 포용할 수 없는 배타적인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족 없는 국가도, 국가 없는 가족도 완전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양자는 서로를 포용할 수 있어야 완전한 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3)
안티고네는 신의 불문율로 크레온의 명령에 도전한다. 명령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한 안티고네를 추궁하는 크레온에게 안티고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그녀의 대사는 그녀의 성격은 물론 신의 법과, 크레온의 명령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법 사이의 대립을 보여 준다. “인간들을 다스리는 신의 정의는 당신의 명령이나 법과는 무관합니다. 저는 인간인 당신의 명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에 우선할 만큼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의 법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그 어느 누구도 말할 순 없지만, 신의 불문율은 과거나 현재의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 숨 쉬는 영원한 법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신의 불문율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죽은 사람을 매장해 흙으로 덮어 주지 않으면 그 영혼이 구천을 떠돌면서 사자(死者)들의 나라인 명계(冥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적절한 장례식을 치러 망자를 애도하고 시신을 대지에 매장하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스인들에게 대지에 묻히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고,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방치하는 행위는 신의 법을 어기는 행위였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에 위배되는 인간의 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오빠의 시신을 매장도 하지 않은 채 개와 독수리의 밥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안티고네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다. 그녀의 완강한 성격은 ‘오만함’과 연결되기도 하면서 아버지 오이디푸스와 공유하는 성격적 특징이다. 이러한 특질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적 결함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안이한 굴종과 타협과는 달리 존경받을 수 있는 자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티고네에게 중요한 것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다. ‘행위’보다는 ‘존재’를 앞세우는 태도다. 크레온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폴리네이케스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했는가”다. ‘존재’보다는 ‘행위’를 중시하는 태도다.4) 그러므로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가 자신의 생질임에도 불구하고 테베에 대한 폴리네이케스의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시신 매장 금지 조치는 사자의 영혼을 구천에 떠돌게 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다.
크레온이 자신보다 더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당돌하게 비난하는 안티고네에게, 크레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무 완강한 정신은 가장 먼저 꺾이는 법. … 그녀의 오만한 정신은 이제 만천하에 명백하게 드러났소. 그녀는 이중으로 오만의 죄를 범하고 있소. 한 번은 법을 어기고 시신을 매장했을 때, 또 한 번은 법을 조소하고 오만하게도 자신의 행동을 당당하게 변호할 때.” 이렇게 안티고네의 오만함을 언급하면서 그녀를 처벌하려는 크레온 자신이 오만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점과, 크레온의 오만이 마침내는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하이몬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은 이 극이 제공하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의 눈을 잃은 테이레시아스가 예언자로 등장해, 크레온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극이 제공하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실명한 밀턴은 ≪실낙원≫ 제3권에서 “하늘의 빛, 안에서 빛나고, 내 생각 그 힘을 얻어 빛을 발하니, 그곳에 눈이 있어 모든 안개 걷히고 흩어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보고 노래하게 하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영혼의 눈으로 본다는 주제는 문학작품에서 흔히 다루어진다.
코러스는 인간의 오만이 파멸을 부른다는 것을 거듭 경고한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오만한 인간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반드시 파멸에 이른다는 코러스의 논평으로 이 극은 종결되는데, 그만큼 인간의 오만은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에 걸쳐 있는 중요한 주제이고, 인간을 비극으로 이끄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신의 저주를 부른다. 또한 많은 그리스 비극에서도 인간의 오만은 가장 큰 비극적 결함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어떤 오만한 인물도 신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안티고네가 너무나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녀는 또한 이 극에서 왕의 명령에 맞서 동기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우리에게 깊은 연민을 자아낸다. 안티고네와 같이 완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크레온도 아들의 죽음과, 그 소식을 접한 아내의 자살을 알게 되자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 “난, 내 아들과 아내를 죽게 한 어리석고 못난 인간이오. … 무거운 운명, 날 짓누르고 있고, 나의 인생 무(無)로 사라져 버렸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구나!”
그러므로 크레온의 반성과 자기 인식은 오이디푸스의 자기 인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두 인물 다 슬픔과 고통을 겪고서야 비로소 지혜로워지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죽은 후 너무나 늦게 자신의 과오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내와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고백하는 크레온은, 자식으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와는 대조적이다. 이와 같이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은 주제, 인물, 구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시작된 오이디푸스 집안의 이야기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거쳐 <안티고네>에 이르러 완결된다.
오이디푸스 3부작을 거치는 동안 오이디푸스 집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스메네뿐이다. 그녀 역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오빠의 시체를 매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안티고네와는 달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스메네의 판단과 현실적인 행동은 안티고네의 고결한 정신과 비교해 볼 때 결코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가문에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안티고네>에는 가혹한 운명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을 뿐, 왜 그렇게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게 내려진 부당한 재난조차도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신이 주관하는 우주 질서의 일부로 파악되었다.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는 불가해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힘이 이성의 영역 밖에서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는 불안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코러스는 계속해서 운명의 힘 앞에 오만방자한 자는 반드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크레온의 명을 따랐더라면 안티고네는 파멸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파멸을 예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또한 어느 한순간도 비굴한 행동을 한 적이 없고 동기간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는 고결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안티고네의 몰락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독자에게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상기시킨다.
안티고네는 당당하고 의연하고 변함이 없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자질일 것이다. 과거든 현재든 안티고네는 안티고네이고, 안티고네는 안티고네이기 때문에 파멸한다. 그녀의 성품과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다시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파멸하지만 결코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인물이 아니다.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둬 죽이려고 하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자살하는데, 이는 자신의 뜻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식적인 행위다.
안티고네와 마찬가지로 크레온의 몰락 또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만한 마음으로 자신의 명만을 따를 것을 고집했지만, 고통을 통해 마침내 지혜로운 인간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종막에서 크레온은 스스로 재앙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는 것과, 자신의 판단과 오만함이 자식과 아내, 그리고 생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성숙한 내면의 눈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주위의 모든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 얻게 된 지혜를 통해서….
모든 비극에서 그러하듯이 크레온의 자기반성과 인식은 너무 늦다. 고통 없이는 쉽게 배우지 못하고 현명해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바로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숱한 고난과 고통을 겪고서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그리 헛되지 않다.
각주
- 1) 이하의 극 구조에 대한 내용은 Oscar G. Brockett, ≪The Theatre: An Introduction≫(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4.), p.96∼101 참조.
- 2) G. W. F. Hegel, ≪Hegel’s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Vol. 1, ed. and trans. E. S. Haldan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55.), p.441.
- 3) G. W. F. Hegel,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 vol.2, trans. T. M. Knox (Oxford: Clarendon P, 1975.), p.1213∼1215.
- 4) 임철규, ≪그리스 비극≫(서울: 한길사, 2007년), p.286∼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