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잡는 게 매다!
- 정양호 선교사 (KPM소속)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은 스포츠 경기장에서 코치들에게 일상화된 말이다. 그 경기에서 “지느냐 이기느냐” 가 그 코치나 선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기기 위해 어떤 때는 나이도 속이고, 어떤 때는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기도하고, 경기규칙을 어기고 심판과 뒷거래를 하여 짜고 치는 고스톱 등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기려고 한다. 가장 공정하고 엄격해야 할 올림픽위원회의 비리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면 천국을 향해 경주하는 곳에 모인 교회는 어떠할까? 신앙의 경기는 질이 아주 다른 차원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욕망을 배제하느냐? 못하느냐? 얼마만큼 배제하느냐? 얼마만큼 낮아지느냐? 얼마만큼 그 욕망에 대항하여 처절하게 대패배 하느냐의 치열한 싸움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죄의 삼위일체에 대항하여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끊임없는 전쟁터이다. (1요2:15-17) 확실히 달라야 할 아주 새로운 전장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신학교 시절 어느 날 설교학 시간이었다. 근엄하신 설교학 교수는 소위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이야기하던 끝에 “꿩 잡는 게 매야!” 라는 이야기를 힘주어 말하였다. 그 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고단한 주경야독을 하였던 나는 이 말을 가장 싫어한다. 세상 사람들이 좋은 결과, 즉 성공 만을 목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하려는 욕망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고 묵묵히 걸어야 할 목사 후보생들인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아주 의아해 하였다. 공부를 하면서 그 교수 목사의 교회에서 근무하는 여전도사님과 사례비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큰 교회니까 좀 넉넉한 사례비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내 상식을 뒤집어 놓는 액수였다.
“전도사님 그러면 어떻게 생활해요?”
“심방비로 채우라는 거예요.”
참으로 놀라웠다. “촌지”그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또 한번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아이고 먹고 살려고 환장 하는구나!‘ 당시에는 속으로 그냥 흘려버렸었지만 결코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
기독출판사 규장에서 제1회 목회자 이슬비전도 세미나에서 일산 신도시의 한 여성도가 “이슬비 전도 편지” 간증을 하였었다. 그 교회에서 실시한 이슬비전도훈련을 받고 남편 식사 챙겨줄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가 부흥했다고 간증하자 참가한 모든 분들의 아멘과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에 가족의 식사까지도 희생하는 것에 대해 일리는 있지만 자랑거리는 못 되는 것 같다고 하자, 같은 테이블의 한 목사는 교인들을 다 저렇게 만들어야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 후 그 목사의 목회를 보면서 역시 ‘꿩 잡는 게 매로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의 탐욕의 끝이 어디인가? 인간이 얼마만큼 더 사악할 수 있단 말인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양을 잡아먹고 할퀴는 이리의 탈을 쓴 목자에게 할퀸 상처로 인해 신음하는 양들이 얼마나 많을까? 언제부터인가 유행한 가나안(안나가) 성도가 요즘 대략 100 만명을 헤아릴 거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교회의 위기, 즉 교회 지도자들의 위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주의 종들이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바른 진리 문제가 잇슈가 되어야 정상인데 도덕, 윤리 같은 자질문제, 건덕에 덫에 걸려 휘청거리고 있다.
가시적 지상교회, 본질적으로 너 나 예외 없이 불완전한 질그릇 공동체이다. 허물투성이요, 문제투성이지만 값을 매길 수 없는 그 복음 때문에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 아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언론에 줄타기는 안한다 해도 동기(motivation)까지 평가(evaluation)하는 주님의 심판대의 동영상 기록(고전4:5)을 본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기절초풍 할 것이다.
오직 그 복음만을 위해 최선의 최선을 다했던 전도자 사도 바울도 역시 많은 유혹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다.(고전9:27) 마치 복싱 선수가 쉴새 없이 쳐서 몸을 단련하는 것처럼 “몸(육신의 욕망)을 복종시키라”는 뜻이다. 우리의 입(맛)도 길들이지 않으면 입이 요구하는 대로 종처럼 끌려가야 한다. 취미나 골프가 아무리 좋은 운동이라도 길들이지 않으면 교회의 건덕을 해칠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도 역시 철저히 절제하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 부도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악의 열매가 겉으로 드러난 경우라면 이미 그 정신 상태나 신앙 속에 뱀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죄의 전염성은 가히 폭발적으로 순수한 공동체를 일순간에 파괴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