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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선 지연작전(미원-함창전투)
1. 작전개요
소백산맥 지연전은 7월 14일 이후 국군 2개 군단 5개 사단(수도사, 제1,제2,제6,제8사단)이 소백사낵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기계화 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5개 사단(제1,제8,제12,제13,제15사단)과 제1군단 예하 1개 사단(제2사단) 등 6개 사단의 공격을 17일간 방어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작전이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기동력이 저하되자 김일성이 직접 수안보(?)에 나타나 정면 승부만이 아닌 대담하게 산길이나 산등성이를 따라 우회 기동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으로부터 타격을 가하라고 강조한다.
이에 김책은 전선사령부를 수안보로 옮기고 7월 21일부터 총공세를 개시했다. 북한군은 제15사단을 미원-상주 방면에, 제1사단과 제13사단을 문경-함창 방면에, 제8사단과 제12사단을 풍기-안동 방면에 그리고 제1군단의 제2사단을 청주-보은 방면에 투입하여 소백산맥 줄기의 동남부지역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대구 방향으로 신속히 진출하고자 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맞아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영동-함창-안동-영덕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되 부득이한 경우 낙동강선으로 철수한다는 개념에 따라 7월 19일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에, 미 제25사단이 상주 정면에, 미 제24사단은 예비로하고, 국군은 수도사단과 제1사단이 고은-미원-화령장-함창 부근에서, 제6사단이 문경-점촌 부근에서, 제8사단이 풍기-안동 부근에서 방어하고, 동해안에는 국군 제3-23연대가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5사단과 제766부대를 저지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2. 북한군과 국군 현황
가. 북한군 현황
국군이 담당한 소백산맥 지역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2군단(중장 김무정) 예하 제1.8.12.13.15사단과 제1군단(중장 김웅) 예하 제2사단이 투입 되었다.
제1사단(소장 최광)은 의용군 병력이 30% 수준에 비무장 병력도 15%로 8,000명 수준이다
제2사단(소장 최현)은 춘천.이천에서 40% 손실을 입고 의용군으로 보충 10,000명 수준이다.
제8사단(소장 오백룡)은 7월 초 강릉에서 제1경비여단을 기간으로 하여 증편된 사단으로 10,000명 수준이다.
제12사단((소장 최충국)은 10,000명 수준이다.
제13사단(소장 최용진)은 예천지구전투부터 참여하며 11,000명 수준이다.
제15사단(소장 박성철)은 9,000명 수준이며 마필 60여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 국군 상황
7월초 제1군단(김홍일 소장, (수도.제1.제2) 창설에 이어 제2군단(김백일 준장, 7.20부로 유재흥 준장 ,제6.제8)을 7월 12일 함창에서 창설하였다.
수도사단(준장 김석원)은 7월 10일까지 진천 남쪽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후에 청주 남쪽 국사봉-매봉선으로 철수하여 제8제1.제18연대 순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17연대를 배속 받았다.병력은 6,700명 수준이고 105mm 4문을 보유하였다.
제1사단(백선엽 준장, 7.25일부)은 7월 12일까지 음성-괴산 부근 전투를 종결하고 13일 미원지구로 이동해 제11연대 .12연대.13연대로 병력은 5,600명 수준이고 105mm 4문을 보유하고 북한군 제15사단과 대치중이다.
제6사단(대령 김종오)은 7월 9일 수안보에서 보은으로 이동했다가 10일 문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7월 12일 제2연대를 이화령에, 제19연대를 조령에, 제7연대를 사단 예비로 6,500명에 공병대대, 제16포병대대(7.17부로 제3포병대대와 교체)가 배속 되어 북한군 제1사단과 대치한다.
제8사단(대령 이성가)은 7월 12일 단양 전투를 종료하고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한 후5번도로 를 중심으로 제10연대.제21연대. 제18포병대대, 공병대대를 보유하고 6,0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제12사단의 진출을 기다라고 있었다.
제2사단(대령 이한림)은 7월 21부해체되며 제5연대(1개 대대 수준)는 7.25일부로 제1사단 11연대에 편입되고, 제16연대는 제8사단에 편입(7.21일부)되며 제20연대(1개 대대 수준)는 7.26일부로 제1사단 12연대에 편입된다.
3. 미원-함창 전투
가.전투 개요
미원-함창 전투는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 및 그 배속 부대가 상주 방면으로 남진하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사단과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에 맞서 7월 14일부터 7월 31일까지 미원,고은,화령장,함창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다.
국군 제1군단은 7월 13일 청주-괴산 선에서 철수하여 제1사단이 미원 북방에 수도사단(제17연대 배속)과 제2사단이 고은리와 문의 일대에서 각각 방어준비를 갖추었다.
반면 북한군은 제1군단 예하 제2사단이 청주 점령 후 옥천 방향으로,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이 괴산 점령 후에 상주 방면으로 진출하려 했다.
고은리의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14일부터 북한군 제2사단과 격전을 치렀다. 16일 미군의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황이 되자 제1군단은 각각 회인과 보은으로 철수시킨다.
이 무렵 제1사단은 1개 연대가 괴산 방면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거리고개에서 전투를 하고 주력은 미원 일대에 배치 된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여기서 주력부대를 속리산 동쪽으로 산간지역으로 진출시킨다. 이때 문경 부근의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17연대가 보은에서 상주로 이동중에 화령장에서 적의 대부대 기동을 탐지해 대성공을 거두며 이에 따라 춘양으로 가려던 제1사단을 화령장에 투입한다.
제1사단은 22일 화령장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공방전을 벌이고 25일에 미 제25사단 제24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소속이 제2군단으로 변경되어 함창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은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할 때까지 제6사단과 협조하여 함창지구 전투를 수행한다.
이에 앞서 7월 20일에 보은에 집결 중이던 수도사단이 전선 조저에 따라 안동으로 이동하였으며 제2사단이 회인에서 허ㅘㅇ간으로 철수하였다가 7월 21일 부로 해체되어 제16연대가 제8사단에, 제5연대와 제20연대가 제1사단에 각각 편입 되었다.
나.전투 경과 및 탐사 /탐문 결과
(1) 거리고개-미원 전투
제1사단은 음성-괴산선에서 7월 13일 03:00에 철수를 개시하여 14일에 부흥리 거리고개 일대에 제13연대에서 철수로를 엄호하는 가운데 11.12연대가 미원으로 들어온다.
북한군 제15사단은 1개 연대로 국군 제1사단을 따라 미원-보은으로 진출하고 사단 주력(제45.48연대)은 괴산-상주 방면으로 진출토록 명령을 부여 받았다.
7월 15일 청안을 점령한 북한군 제15-50연대는 16일 05:00경 부흥리 일대의 국군 제1-13연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국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역습으로 한때는 거리고개를 다시 확보하기도 하며 군단의 명령으로 국사봉-517고지선에서 21일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여기서 청주방면의 제2사단이 청주-옥천방향으로의 진출을 바꾸어 국군제1사단과 수도사단이 대전 방면으로 전환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50연대 또한 제15사단 본대의 진출을 보장토록 상주방면으로 전한명려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적정이 미미한 가운데 제1사단은 20일 춘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은을 거쳐 이동중 다시 화령장으로 이동명령이 수정되었다.
이유는 수도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함창으로 이동 중에 화령장 근처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선두부대를 두 차례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자 육군은 국군 제2군단의 서측방 위협으로 간주하고 황급히 병력 투입을 지시한 것이며 화령장 일대에서 23일부터 전투를 재개한다.
"거리고개의 먹구렁이와 발목 묶는 쇠고랑"
나는 ''99년 9월부터 '3년 5월까지 육본에 근무하다 '03년 5월에 증평지역에 있는 제67동원사단에 포병연대장으로 내려와 근무를 했다. 사실 이 기간에 나는 충북지역과 경북 북부지역, 그리거 충남지역 동쪽에 있는 웬만한 격전지를 탐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어떤 숫자의 강박관념없이 자유인처럼 현장에 가서 만나본 지역주민의 제보, 그리고 전투지역에 남아 있는 정보는 그 후 내가 다시 육본에 '05년 12월에 복귀하여 발굴업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곳 거리고개는 부흥리에서 올라서는 고개다. 국군 제1사단 제13-2대대가 점령을 하여 뺏겼다가 다시 역습으로 되찾기도 한 곳인데 참전용사님이신 황대형 어르신이 부대로 찾아와 안보강연을 하신 후에 이곳에 함께 동참하였다.
이곳에서 전투를 하신 황선배의 이야기로는 부흥리에 81mm 박격포 4문을 놓고 왔다가 다시 역습을 하여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4월의 어느날 우린 거리고개에서 북쪽으로 426고지를 향해 올라간다. 이날따라 밖에 날씨가 확풀려 따가운 봄빛이 내리쬐이고 있는데 참나무들이 서서히 움이 트기 시작하였다. 고개에 차를 대고 올라서는데 어르신도 감회가 새로우신지 잘도 오르신다.
길이 이미 초목으로 우거져 제대로 있을리 없지만 지도를 들고 고지를 향해 오르는 사람은 나와 용사님, 그리고 보좌하는 정보장교 정대위 뿐이다.
나는 산악탐사에 항상 선두에 서서 가는 것이 일상이라 이날도 앞에서 걷고 얼마를 가는데 주변에 참나무들이 빼곡하다.
"뭐야, 스톱. 엎드려!"
나의 긴장된 목소리에 나무들마저 떨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내 머리 위에 있는 참나무에서 뭐가 툭 떨어졌는데 나는 불발탄인줄 알고 소리친 것이다. 통상 전쟁터 나무가지에 박격포탄이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터이다. 그러고서 가만히 보니 뭐가 움직인다. 뱀이다.
엄청 기럭지가 긴 뱀이 나 때문에 놀라서 멍청하게 움크리고 있다가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이곳의 나무에 올라있다 아무도 나타나지않는 산중에 사람을 보니 놀라서 떨어진 것이다.
"뱀아 우린 너하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갈 곳으로 빨리 가고 우리를 보호해 줘라" 나는 '00년부터 전쟁터에 있는 뱀은 영혼이 있는 것이라 믿어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황선배님이 내 뒤에서 지켜보다 앞으로 나서며 미신이라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며 전쟁중에 펜티를 갈아입지않는 것이나 수염을 깍지않고, 여자의 속옷을 입고 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얼마를 걸어 더 깊이 들어가니 드디어 전쟁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미원방향으로 파낸 엄청 큰 호에 아직 그 당시의 유품이 있어 만져보니 쇠고랑이다. 북한군이 병력을 배치하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다. 실탄을 다 소모할 때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이곳은 아군이 역습으로 탈취한 곳이니 상황을 그려보면 북한군은 죽었다고 봐야 한다. 황 선배님 이야기가 이곳을 점령한 후에 부흥리로 박격포를 회수하러 특공대를 조직하여 들어갔는데 북한군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계도 서지 않고 집에서 먹을 것을 먹고 있는데 대부분 어린 학생이었다 한다. 그래서 적 1개분대를 사살하고 다시 박격포를 가지고 이곳 426고지로 돌아 왔다고한다.
"청천면 송면 6.25 전쟁 참전 전우회의 요구 : 용사를 발굴하라!"
국방장관에게 6.25참전 전우회에서 국방부로 청원서가 날라들었다. 유족도 없는 용가가 청천에 매장되어 있다고 발굴하여 현충원에 모셔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근원을 찾아 청천면에 가서 전우회를 찾았다. 괴산군 출신 김종호란 분이 유력인사인데 새건물을 한동 지어주었다 한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용사님들을 만나 사연을 들었다. 사실 내용은 지역 청방대를 함께 하는 분이 지방빨갱이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런데 함께 작전하던 사람들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피난온 여럿이 함께해서 이름을 기억 못하고 있다. 당연히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분이였다. 안내하는 곳을 가보니 아니 바로 전우회관 뒷편에 3구가 나란히 잘 모셔져 있다. 그래서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안장되어 있었습니까?"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고 원래는 길이 저만치 있었는데 넓혀져서 바로 주변이 된겁니다."
"그렇다면 매년 이곳에서 추모행사도 했을 것인데 지금 옮겨버리면 누가 추모행사를 해 드립니까? 여기 분들은 유족관계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식 안장이 안됩니다. 무연고 유해가 되는 겁니다."
"아니 국방부에 전사자 명단에 있을 거 아닙니까?"
"명단은 13만 여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지금 아무도 이름을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유족을 찾아가요?"
"발굴하면 그렇다고 유해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50년이 넘어서 모두 분해되어 자연으로 승화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영구히 이고장에서 싸운 용사로 추모의 대상이 되는데 파버리면 그 위상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용사님들은 나의 말에 동의하고 나를 칭찬해 주셨다.
(2) 고은리-국사봉 전투
청주 방면의 국군 수도사단(김석원 준장)은 7월 13일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미호천 남안의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국사봉(282m)-고은리-성무봉(431m) 선으로 물러났다.
사단의 좌측은 제2사단이 봉무산에 일대에 우측은 제1사단이 미원일대에서 각각 방어 중이었다.
14일부터 적의 공격이 게속 되고 성무봉은 제18연대에서 최초에는 병력을 배치 하지않고 있다 적에게 피탈되고난 후에 역습으로 되찾았다. 또한 국사봉 일대는 제8연대 제2대대(대대장 대위정승화)가 배속된 진주경비대대를 독려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지원하는 전폭기가 오폭으로 제18연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군단은 대평리에서 미 제24사단과 임무 교대한 제17연대 제2대대를 보은에서 고은리 동쪽으로 배치시킨다.
북한군은 어쩐일인지 공격을 감행하지않고 시간을 아군에게 줌으로써 국군은 제17연대(김희준 중령)2,3대대를 공격부대로 장암리-효촌리 선을 공격하여 탈환하기도 하며 7월 16일부터 전차를 동반하여 공격해 옴으로써 16일 야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보은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와같이 철수하게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좌측의 국군 제2사단이 봉무산에서 물러나고 그 좌측 미 제24사단이 대평리에서 물러나 유성쪽으로 철수하게 되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보은에 도착한 수도사단 전투력은 48%수준인데 제1사단이 57%, 제2사단이 55%이었으며 여기서 이틀간 정비후에 제1연대가 함창으로, 제18연대가 예천으로, 제8연대와 사단사령부가 안동으로 이동한다.
"전쟁터에서 생긴 알력"
7월 11일 오근장에서 제1연대와 제9연대의 통합이 이루어 진다. 병력은 제9연대가 많은 데 지휘관이 제1연대장(이희권 중령)이 연대장이 되다 보니 제1연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서로 알력이 발생하여 지원이나 정보교환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한바 사단장의 건의로 다시 윤춘근 대령이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고 이희권 중령은 군단사령부로 전출된다.
"청원 문의면 구룡리의 150여구 유해의 실체?"
전 국회의원이며 집권당의 사무총장까지 하신 신경식님이 어느날 동작동 사무실로 날 찾아오셨다. 현충원에 오시는 길에 제보를 하나 하러 오셨다 한다. 고향이 충북 청원 문의이신데 이곳에 6.25전쟁 당시에 많은 전사자가 동네 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가리킨 곳이 문의 봉화봉 일대고 일부 지역은 대청호에 수몰 되었다 한다.
사실 이곳은 바로 북쪽이 국사봉-시루봉 사이에서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킨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고은리 야산에 가면 흔적이 남아 있고 유해도 10여구를 발굴 하였던 곳이다. 과련 사실을 알려드리니 한번 가보라 하시며 본인이 집필한 책을 한권 주셨다.
"이 과장님 헨드폰으로 현장을 보여주세요?"
그런데 신의원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어느 분이 국군의 유해가 150여구가 묻혀 있다고 엄청난 제보전화를 주셨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 함께 현장을 가기는 곤란하다며 구룡리에 가서 현장을 보여주면 헨드폰 영상을 보면서 안내 하겠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으로 달려가 산덕리 구룡리 괴곡리의 마을 주민들을 만나 혹시나 전쟁 당시에 국군의 유해가 묻혀진 곳이 없는지 탐문했지만 없다고 한다.
전쟁은 했느냐는 질문에 이곳이 아니라 회인의 국사봉에서 피반령에 이르는 산이 내륙으로 공비들의 루트였다며 군인은 별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공동묘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서 공동 묘지를 찾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푯말이 붙여진 묘들이 많았다. 이 곳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현장 확인결과 맞다고 한다.
푯말의 형태가 꽤나 오래 되어 보이지만 6.25전쟁 때의 것은 아니였고 묘의 형태는 거의 봉분이 무너져 내려 아쉬움이 더했다. 비록 누구의 묘라할지라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 묘들이 어떻게 푯말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충북지역 어디에선가 무연고 묘들이 발굴 되어 왔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도저히 국군의 가매장 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라 우린 발굴을 실시하지 않기로 했다.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에 나온 유해?, 5.18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침투한 북한군의 유해?"
그런데 얼마전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숨져간 분들의 유해와 미확인 보도자료이지만 북한군 특수부대가 들어와 죽어갔고 그들의 유해가 충북 어딘가로 옮겨져 묻혀다가 뭐 어떻게 되었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네게 누군가 전화가 왔다. 과거에 충북지역 상당구내덕동에서 발굴된 유해에 대한 내용이였다. 이곳은 내가 직접 조사를 실시하고 발굴도 일부분 통제하여 보았기에 아는대로 답변했다. 해당 지역은 현재 청주 대성고등학교 인근인데 과거 학교의 강당 신축공사시 유해 10여구가 나왔고 '07년 11월 24일 공사중에 허벅지뼈와 박클, 군화밑창 등이 나와 시립묘지에 가매장 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이 과거 청주상고 뒷편으로 '50.8~9월 경에 이곳에 인민군 병원이 있었다며 인민군이 많이 매장 되었을거라고 한다. 그래서 우린 다음에 2월 말에 다시 들어가 주변을 탐사하여 유해 2구를 수습하고 끝냈는데 이것이 어떻게 광주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특작부대와 연결이 되는지 의문이 갔다. 하기야 여기서 문경새재가 그리 멀지는 않다.
"국사봉 아래 마을에서 멱살 잡히어 죽다 살다." "나쁜 놈들 왜 이제서 와?"
청주 남일면 면대장님이 나보다 한참 선배되는데 한번은 오라해서 갔더니 챠트를 만들어 이곳 국사봉 전투를 소개하며 유해발굴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발굴사업을 통제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한 예비군 중대장은 처음이다. 동네 사람들 인터뷰도 미리 다 해서 자료를 내게 내밀으신다.
나는 하나하나 챙겨보면서 가능성이 많은 곳부터 가보기로 하고 효촌리 공군사관학교 울탈리부터 살폈다. 개인호가 원혀이 보존된 채로 길게 연결된다. 다음은 매봉과 시루봉으로 향했다. 이곳도 개인호가 수없이 연결되고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다음은 무심천을 건너 국사봉 밑의 화당리로 갔다. 마침 논에 모내기를 하고 있고 동네 입구는 도로보수 공사로 차에서 내려 걸어들어가야 했다. 어르신 몇명이 당산나무 밑에 앉아 계서 인사를 올리고, 이미 면대장이 사전에 돌았기 때문에 내가 온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는 눈치다.
"예비군 중대장, 저기 마을 입구 큰 당산나무 있잖아 그 밑에 장교가 죽어서 묻혔고 권총도 있어?"
"혹시 그후에 길을 포장하거나 넓히면서 훼손되지 않았을까요?"
"아냐 있어. 한번 파봐요."
우린 지탐기를 대고 확인하여본 결과 금속성 물질이 탐지되어 뿌리옆을 몇삽 굴토하여 탄피를 찾았다. 그러나 그걸 찾아놓고 나니 아무런 탐지가 안된다. 여기저기 시굴을 몇군데 더 해보고 있는데 모내기하던 사람들이 새참시간이 되어 논둑에 자리를 잡고 몇명이 우리에게 온다.
"너이놈새끼, 잘왔다?"
아니 나이가 꽤나 되신 어르신이 갑작스레 내 멱살을 쥐고 얼굴이 상기되어 금방이라도 한바탕 하실 모양이다. 나는 어리둥절할 시간도 없이 호흡이 막혀 죽을 지경이였다. 얼마나 힘이 많은신지 내 두 손으로 그걸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말문도 안나왔다.
"어르~시~ㄴ 놓고 마~ㄹ 하세요?"
옆에 있는 어른들이 2~3명 달라붙어 겨우 말려놓았다. 어르신이 옛날에 씨름선수였나보다. 무척 당혹스런 우리는 현장을 빠져나가야했다. 면대장이 무척 미안해 한다.
그런데 어르신이 씩씩거리던 호흡을 가다듬더니 나보고 오라 한다. 머뭇거렸더니 한 동네분이 괞찮다며 화해하라 한다. 가만히 보니 어르신이 다리 한쪽이 정상이 아니다. 장애인인데 6.25전쟁 피해를 입은거라며 나를 불러 당산나무밑에 안았다.
"여보, 당신을 욕보인거 아냐. 억울하고 분통한데 늦게라도 찾아와 고마워서 그런거야?"
"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알고보니 어르신은 군대도 못갔다. 국사봉밑에 살았는데 포탄이 터져 다리를 잃었다. 겨우 어떻게 출혈이 낭자했는데도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 국사봉에서 전투한 정승화 대위가 본인 집에 있었다 한다. 나중에 참모총장이 되어 찾아와서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다친 것은 다친 것이고 국군이 지금 공사 비행장 활주로 부근이나 BOQ부근에 수없이 널려 있는데 누가 수습을 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시체를 모두 거둬갔다.
"나라 위해 싸웠는데 국군이 올라간 이후에도 누가 찾지를 안해. 그래서 우리가 묻었어."
"그래서 분통이 나는거야. 동네 개들이 물고 난리치고 여우나 늑대들이 대낮에도 나타나 뜯어먹고 있질않나 빨갱이 놈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고 경찰은 와서는 남일처럼 치우라고만 하고 가!"
어르신 말이 모두 맞다. 창피하기도 하고 그만큼 먹고살기 힘드니 유해는 두번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니 당신이 죄송할거야 없지라며 전쟁이 끝나고 현역 군인이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처음이란다.
"이리 오슈?" 논둑에 앉아 있는 분들이 우릴 부른다. 목발 하나를 짚고 어르신이 앞장서서논둑으로 갔다. 이양기로 하면 빠를텐데 줄을 띄어 모심기를 한다.
"자 한잔 하슈?"
"저는 근무시시간이라 못합니다."
"이걸 마셔야 매장 장소를 알려주겠소. 그리고 하늘의 용사님 영혼이 반겨주고 용서할거요."
이곳으로 공군사관학교가 들어서며 터파기 공사에 얼마나 많은 유해들이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 활주로 공사간에도 많은 전투 유품이 솓아져 나왔지만 누구 한명 수습하는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니 전쟁이 끝나고 현역 군인이 내가 처음으로 마을에 나타났다는 말에 정말 놀랐다.
이곳은 제8연대와 제17-3대대가 주로 전투를 하는데 8연대가 전쟁전 대대장 월북사건이 났던 부대다. 여기에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더군다나 육군참모총장까지 배출한 부대인데 전후에 동료유해를 찾는 노력이 없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물론 다른 부대들도 사실 제대로된 발굴은 안했고 살아난 전우들이 동료를 찾으러 다니곤 했다.
국사봉을 오르는데 능선에 검은 물체가 움직인다. 살모사다. 나는 묵념을 하고 사라지도록 기다렸다. 그 영혼이 국군인지 적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군인의 영혼이라 믿고 싶었다. 이곳 일대에서 지금까지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중령 이리 와 보세요. 피아를 어떻게 구분해요?"
'01년도 1월에 나는 우리가 발굴하고 있는 현장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세상에 알리는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애환이 넘치는 사진 100여장과 당시의 유품을 전시하는 것인데 계룡대 본청 동서남북 문앞에서 1주일씨 전시하였고 국방부로 올라와 전쟁기념관에서 기획전시와 국방부 본관에서도 전시를 하였다.
본청에서 전시할 당시는 전 국가보훈처장을 하셨던 박장군이 정보본부장으로재직하면서 찾아주셨고 그외에 일부 함참 간부급 등이 이 사진을 지켜보았다.
"장관 왔어요?"
우리가 전시하고 있는 본관 1층의 신문지 배달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통과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의식없이 오는 분들께 현장 모습을 전해주려 동분서주 하는데 바로 그곳의 사무실에 있는 선임자 한분이 조용히 나를 부른다. 장관이나 차관 또는 합참의장 등 높은 분들이 왔는냐고 묻는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정보본부장하고 인사복지실장만 왔다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지 XXX들"이라며 누구 덕에 장관하고 별달고 있는데 이 숭고한 자리에 와보지도 않느냐고 혀를 끌끌차신다. 깜작 놀란 나를 보고 "당신만 고생하고 있어요. 높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일을 하지 어떻게 발굴하고 있는데 찾아와서 보고 격려를 해 주어야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어느 날에 재향군인회에서 연락이 왔다. 롯데월드 옆에 있는 회관에 와서 전시회를 1주간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다시 짐을 싸들고 그 곳에 가 전시회를 하는데 이 곳은 예비역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관심이 많았다. 어느 분은 사진을 보다가 분개하여 이렇게 놔두고 "정부는 뭐하고 있었느냐"고 큰소리를 내는 분도 있다.
그런데 누가 와서 나를 좀 보자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와보면 안다고 하며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가서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그 수행비서가 "육군 참모총장이신 정승화 대장"이라 한다
5공 청문회 와 재판과정(12.12사태와 관련)에서 많이 보았던 얼굴이다. 경례를 올리고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내 손을 꼭 쥐어주시며 "당신이 지금은 애국자요"하며 칭찬을 해 주신다. 그러시면서 발굴 과정을 물어보시더니 질문을 하셨다. 피아판단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유품과 전사 사실, 지역주민 증언내용 등을 종합하여 한다고 하니 참 잘하고 있다고 하시며 참고하고 한가지 사항을 알려 주었다.
"나는 청주 국사봉에서 대위 달고 대대장을 했어요. 그런데 병력이 한 200명도 안돼. 중대장이야. 그런데 병사들 옷이 없어. 전쟁이 나고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옷 한번 갈아입지 못했어요."
"그러시면 당시에는 군장이 없었습니까?"
"있기야 있었지. 그런데 한강을 도하하면서 죄다 버리고 몸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베낭이 없어. 처음 입고 있던 군복을 그대로 입고 전투하는데 비는 또 얼마나 내리는지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어 사람이 아니라 황토 흙덩이야. 어떤 병사는 군복마저 없어서 민간인 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학교 교복을 입고도 전투했어요. 발굴 하면서 전투복은 안나오지요?"
"네, 옷종류는 전부 썩어서 나오는 경우가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국사봉에서 전투하는데 저놈들이 어디서 획득했는지 옷을 잘입고 있어요. 한번은 우리가 공격하여 저 놈들을 물리쳤는데 죽은 놈들 옷을 베껴서 우리 병사들이 입었어요. 그러니 공산군 옷 입었다고 무조건 공산군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불렀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한 5분여의 대화에 한번도 나를 무시하는 발언은 없었다. 반말이 없이 아주 겸손하게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보은 회인에 남겨진 한!"
나는 제6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에 보은 회인을 찾았다. 참전용사님 황대형어른과 함께 한번은 왔고 한 두번은 우리 인원들과 전투지역 탐사차 왔었다.
이곳은 제1사단 병력이 재반격으로 북잔간에 이 곳에 들려 하룻밤을 묶다가 공비들에게 기습을 당해 1개 소대가 전멸한 곳이다. 먼저 용곡리 우레실에 들어가 그 당시부터 살아계신다는 어르신을 만났다. 이야기는 국군은 못봤어도 공비들은 수두룩하 보았다 한다. 바로 국사봉이 아지트로 많은 인원이 공공연하게 줄지어 산능성이를 타고 이동해 다녔다고 한다. 주로 경찰이 낮에만 들어와 있다 오후가 되면 어디로 빠져나가버리고 그놈들이 판을 치고 살았다 한다.
"그러면 이 일대에는 군인이 죽어서 묻힌 곳은 없겠습니다.?"
"그건 잘 모릅니다. 내가 10살이 되어 전쟁인데 그전에도 빨갱이들이 이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전쟁이라는데 저놈들이 몇명을 포승 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저기 산중턱 우리밭 언저리에 한명은 죽어서 묻혀 있어요."
"군인이니 경찰인지 혹시 아시나요?"
"그건 확실히 몰라요. 부상당한 인원이 죽으니까 그 곳에 대충 묻어서 나중에 보니 뼈기 노출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좋게 묻어주었지요."
"혹시 이 곳 어딘가에 많이 죽어 있다는 소문을 못들으셨나요?"
"아 패잔병에게 1개 소대가 죽었다는 곳이 있는데 지금 그 집이 월남전에 참가한 해병대출신이 살고 있어요" 우리는 어르신을 모시고 그 집으로 향했다.
"작전에 실패한 용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용사는 용서할 수 없다."
이곳 회인 전투는 '50. 9.29~30어간에 보은 지구를 탈환하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패잔병들에게 당한 뼈아픈 패배로 무려 1개 소대 병력이 전원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제15-1대대가 지휘소를 회인에 설치하고 3중대는 오봉산(서쪽에 봉우리가 다섯이라 하여 붙여짐)에서 내려와 죽암리-회인에 이르는 도로 상에 초소를 배치하고 부락에서 숙영하였다.
"정지, 누구야?"
쫄병 김이병이 수하를 한다. 고참 김병장은 마을에 내려가 주모앞에 엎드렸다. 야밤에 패잔병 무리들이 이동간에 마을에 국군이 잠들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하여(지역 프락치의 연락?) 당당하게 걸어서 들어왔다.
김이병은 김병장을 불렀으나 이미 한잔술에 주모 품에 안긴 김병장이 그 애타는 목소리를 들을리 없었다. 패잔병이 초소에 와 태연하게 신병의 총을 내리고 입에 자갈을 물린 후에 병력이 어디에 잠들고 있는지 확인하여 수류탄을 까고 총을 난사했다.
오늘 나는 그집에 간다. 소주 한병을 사서 들었다. 늪실부근인데 마침 월남전 참전 해병대 용사님이 계시다. 요양중이란다. 이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으니 알고 있다 한다. 누가 살지않아 페허가 된 집을 본인이 수리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혹시 그 당시에 유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저 앞 밭에 묻혀 있다가 그 다음 해에 병력이 와서 발굴해서 화장까지 해서 갔어요."
기막힌 사연은 또 이어진다.
"새말에 가면 한동네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10집이 넘어요."
우리는 다시 그 곳으로 이동해서 이장님을 찾았다. 하지만 말을 안하신다. 동네분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한다. 아니 우리가 무슨 프락치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유해발굴하는 발굴단이라해도 못믿겠다는 눈치다.
그동안 얼마나 고초를 당했으면 그럴까하는 마음이 아프다. 결국 회인 파출소에서 순경이 한명 나타나서야 신뢰가 해결 되었다.
"들어온 군인이 가담한 지역주민 모두를 죽여버렸습니다."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중인데 우리는 그 교각 밑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한 15명은 묻혔지요."
사연은 이렇다. 이 동네에 육군 중위출신 군인이 한명 있었고 장가를 들어 그 집에는 색시와 부모님 등 여럿이 살고 있는데 북한군이 진입하고 나서 빨갱이들이 이 식구들을 잡아다 다 죽였다 한다. 여인은 자기들 몸종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하면서 결국은 국군이 올라온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색시마저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다.
마침 해당 군인이 제1사단 소속으로 이곳에 들어와색사를 찾고 부모님을 찾으니 다 죽은 뒤였다. 한맺힌 장교는 이 일대에 부역을 했다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모든 사람을 다 잡아 저 교각이 있는(그당시는 개천가)곳에다 다 쏴 죽여 버리고 일부는 도망치다가 여기저기 죽었는데 정말 온동네가 피바다였다고 한다.
"돌아버린 장교님 세월을 용서하소서. 죽어간 넋들이여 하늘날에서는 편가르기 마소서!"
"제11연대 3대대장 이중령과 부대대장, 운전병을 찾아라?"
직접 대대장을 묻었다는 참전용사님이 전화를 했다.
회인에서 처절한 희생과 보복의 핏발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같은 시기에 미원으로 진출한 제1-11연대 제3대대 또한 북으로 이동하는 패잔병과 조우하여 차량으로 움직이던 대대장 이중령, 부대대장 이궁하 대위, 운전병이 전사했다.
기습을 받다보니 유해처리는 곤란하고 바로 이동 명령이 떨어져 출동해야 했다. 그래서 용사님이 직접 산모퉁이 소나무 밑에 가매장하고 떠났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잊어지고 말았는데 방송에서 유해발굴 한다는 것을 보고서 전화를 주신 것이다.
하지만 괴산-미원-청주.대전을 연하는 19번도로가 단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 되어 현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우리의 판단은 이 용사님이 지금('10)전화를 하지만 아마 대대장이란 직책을 고려시 제1사단에서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현충원을 찾게 되시면 저누분들과 확인하여 전화를 다시주시라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다.
(3) 화령장 전투(제17연대)
화령장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에 위치한 곳으로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북한군 제2군단 제15사단은 7월 10일 음성을 점령한 후 제50연대를 청안-미원을 경유해 보은으로 진출시키고, 그 주력(제45.48연대)은 괴산-상주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하지만 문경에서 국군 제6사단의 분전과 유엔 공군기의 폭격으로 포병으로 진출이 느려져 제1사단을 따라 진출하던 적15-50연대를 미원에서 접촉을 피하고 16일 야간에 상주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한다. 그러자 육본은 수도사단에 배속 되었던 제17연대를 함창으로 보내 제2군단의 예비로 사용토록 하였다.
그러나 화령장을 지날때 지역주민의 제보로 이미 북한군 일부가 상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역청년단장 등과 상곡리 일대로 대대장이 진출중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여 심문결과 이들이 적 제15-48연대라는 것과 곧 본대가 금곡리에서 휴식할 예정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이동중인 부대를 이곳 일대에 매복하기로 한다.
드디어 17일 오후에 적 부대들이 모여들고 저녁을 먹기 위해 휴식을 하고 일부는 냇가에서 목욕을 하는 등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기습적인 사격으로 각종 포와 탄약을 실고 가던 우마차의 소들과 말들이 날뛰어 아비규환이 되었다. 적 250여 명이 사살하고 소총 1,200정을 노획한다.
같은 시각에 연대는 미 제25사단 제24연대와, 포병등 예하부대들이 상주방면에 투입되었음을 알고 먼저 지나간 부대를 추격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후속하는 부대를 격멸하기로 하고 부대를 49번 도로를 따라 동관리 일대 서쪽 산기슭에 매복하게 된다.
드디어 7월 20일경 앞선 부대들의 상황을 모르는 적 제15-45연대가 이 골짜기로 모여들어 집중적인 사격을 받고 356명이 사살되고 26명의 포로 획득과 기관총 53종, 소총 186정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어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쌍방간(북한군:미군)에 무차별적 포병사격이 가해져 제17연대는 장교 3명과 사병 16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게 되며 미군은 북한군의 침투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쟁 공포증에 걸려 공용화기 등을 버리고 후퇴해 버렸다.
"보이지 않는 시체-적군 유해를 발굴해 달라?"
전사에 나오는 내용을 다 믿고 안믿고는 나름의 문제다. 나는 유해발굴 책임자로써 모든 전사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가치란 바로 점검을 통해서 진실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이미 충주의 동락전투에서 이 부대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기록이하면 그렇다. 그러나 북한군이기에 그 유해를 확인하는 과정은 진실성에 의문점을 갖게 했다. 그 많은 시체가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현장에서 발굴을 직접 해봤던 나는 동네분들의 진술이 일관 되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곳 전투도 비록 아군이 몇명 전사하지는 안했지만 나름 북한군의 유해는 많이 묻혀 있으리라 보았는데 우린 동관리에서 그것도 뼈조각 일부인 1구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한번의 발굴이 아닌 여러번의 발굴이 이루어져야 했다. 상주가 고향이신 6.25전쟁 참전 전우회 회장 박희모 장군(갑종출신)이 연락이 와 찾아가 만났더니 화령장의 유해를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번의 노력끝에 발굴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실효성이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선뜻 받아들이질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 얼마가 지나 다시 발굴단으로 직접 찾아와 화령초교(폐교)자리에 역사관을 만들려고 한다며 북한군 유해를 발굴하여 보관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신다. 하지만 없는 것을 발굴하라니 참 난감했다. 이분은 내가 야전에 서 만난 첫번째 사단장님이고 안보국장인 박대령은 나의 첫번째 대대장님인데 입장이 난처했다.
그래서 다시 동관리, 상곡리로 내려가 지역주민을 만나 그 당시를 추적해 갔다. 갈령에서 내려서면 첫번째 주유소가 나오는데 그래도 그분이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함께 한나절을 의견을 교환한 결과 북한군 시신이 주로 강가에 널려 있었는데 사실 다 장마시기에 훼손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시체가 이곳에 없었고 대부분 긁어모아서 한곳에 매장하게 되는데 그곳이 지금 길을 넓히고 있는데 그 밑으로 들어가 발굴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과연 전사에 낭오는 내용처럼 500여 명이 죽었는지는 의문점이 남았다.
지역 주민의 신고정신으로 북한군을 격멸은 했지만 북한군이 주둔하는 시기에 이곳에 있던 유력인사나 군인,경찰, 공무원의 가족들이 모두 붙잡혀 가고 일부는 프락치들이 인민재판을 통하여 죽이기도한 공포의 3개월이 있었다고 한다.
"견훤의 숨터인 청계사"
이곳에 가면 삼국시대 상주 지방에 있던 지방 부족장인 아자개와 견훤의 전설이 살아 있다. 살곡리에서 청계사로 들어가면 그 절 입구에 천연장벽인 엄청 큰 바위더미가 나타난다. 이곳에 올라 망을 보면 누가 들어오는지 훤하게 보인다. 그래서 들어가 스님을 만나고 전쟁관련 비화는 없는지 물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모른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견훤이 어린시절 때를 기다리며 은거했다는 바위를 알려주어 그곳에 들어가 보니 정말 기이하게 생긴 견훤의 발가락이란다. 이곳에 은거하면 누가 찾아들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화령장-동관리 전투간 기습을 받은 북한군이 동쪽 산으로 피신하면 당시에 길 동쪽편에 병력이 배치되지 않했으니 얼마든지 소개하여 살아 남을 곳이였다.
"동관음에 1개소대가 묻혔다."
나는 6.25전쟁 참전전우회 회장님의 화령장-동관리 북한군 유해를 발굴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못해 당연한 것이지만 과거 나의 직속 상관이란 점에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전우회에서 연락이 왔다. 갈령 밑에 국군 제1사단이 1개소대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설마 하면서도 참전용사님 증언이라니조사를 나가야 한다. 갈령에 도착하여 탐사반 1개팀을 형제봉으로 올려 보내고 1개반을 청계사 뒤로 올려 보냈다.
"국군 제1사단의 갈령 전투('50. 22~25)
국군 제1사단은 보은에서 '50. 7월 20일 춘양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17연대의 화령장 전투 긴급히 22일 화령장으로 진출하여 미 제25-24연대장으로부터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11연대에서 1개 대대를 미군 포병대대를 엄호토록 하고 제12연대를 동관리로 제11연대(-)를 송계초등학교와 585고지 일대에, 제13연대는 화령장에 위치하되 1개 대대를 585고지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제17연대는 봉황산에 위치하여 배후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격퇴하도록 하였다.
비무장 인원들이 많았던 제12-1대대는 장자동-형제봉으로 공격을 하게 되며 먼저 들어와 있던 미군들이 북한군의 포격에 혼비백산하여 버리고간 무기가 산더미같이 있어 이걸 가지고 전원 무장을 했다 한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형제봉은 점령하지 못하고 7월 24일 미 제25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안동으로 이동하고 봉황산의 제17연대는 예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1개소대가 묻혔다는 관음동 산 언저리에 묵은 밭이 있다." 어떤 정황인지는 모르지만 제12연대 1대대가 공격을 한 것은 사실이니 우린 탐지기를 들고 하룻동안 그 일대를 탐지해야 했다.
하지만 관음동이나 맞은편의 585고지 일대도 우리는 전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밭언저리에 볼록하게 올라온 곳이 아니냐는 질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내가 직접 삽을 들고 우리 모두가 굴토 했으나 밭을 개간하면서 밀어논 흙일 뿐이다.
"화령장에서는 우리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어요. 오히려 경들못 전방고지에서 많이 상했지"
나는 황대형 선배님께 이곳 전투를 물었다. 제13연대 기관총 사수였던 용사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용사님중에 기억력이 최고다.
제17연대가 전공을 세워 모두 1계급 특진을 했고 우리는 들어갔다가 미군이 와서 상주서북방으로 이동해 들어갔지 큰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나는 제1사단의 전투 기록은 너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건 기록이 사후에 그렇게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예의리 무명고지에 남아 있는 미군 전투화"
49번도로-24번도로-997도로를 이용해 상주에 갈 수 있다는 루트를 따라가다 예의골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데 괭이를 들고 밭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다.
"어르신 좀 쉬셨다 하세요?"
"뭐하러 다니는 분들인가요?"
벌써 미군들은 전쟁중에도 왔고 우리가 가지전에도 한번 다녀갔다고 한다. 이곳은 메 제25사단 제24연대가 일시적 점령하여 전투하고 포병들은 무차별적 포탄을 퍼부었던 곳이다. 하지만 병력 구성원들이 얼굴이 까만 인원이 많았고 대부분 어려서 사실 전투력 발휘는 아니였다.
하지만 이 어른의 이야기는 국군이 먼저 높은 고지(585m)에 올랐고 경찰도 왔다 갔다고 한다. 미군은 그 후에 왔다가 이 산에서 육박전까지 하다 밀려서 내려가고는 오지않았다는 설명이다. 전쟁의 실체는 살아남은 자가 기록에 남겨야 이루어지는 평가이기에 그 가능성만 우린 판단하고 지역 일대를 모두 탐사하게 된다. 남쪽 서원리쪽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서면 쉽게 오른다는 안내를 받았다. 어르신은 국민학교 3학년때 전쟁이라고 한다. 허나 이 동넨 전쟁도 몰랐다는 이야기다.
우린 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개인호나 교통호는 보이질 않는다. 소문대로 미군은 포탄과 비행기로 싸우고 북한군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폭탄(네이팜탄)에 놀라서 엄폐된 곳을 찾기에 바빴다. 많은 인원이 죽어가고 미군은 걸어서 산을 올랐다. 그러나 후방으로 침투한 적이 포병부대를 기습해 포탄사격이 멈추자 다시 역습으로 고지를 빼앗아 버리고 미군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산은 완전히 불에 타버려 개미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아래서 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동네 아이들이 올라서고 어른들이 올라서고 탄피와 포탄 신주를 구해 돈으로 바꾸고 엿으로 바꾸고 한때는 수입도 괜찮았다고 한다.
우리는 포탄이 떨어진 탄흔이 군데군데 있음을 확인하고 한 탄흔을 굴토하였다. 탐지기 소리가 요란해서다. 그런데 파고 보니 미군전투화가 나왔다. 전투화 끈을 매는 코다리에 철이 있어 요란했던 것이다. 혹시나 미군 유해를 발굴하나 싶었던 기대감이 사라졌다.
"낙서리에 탱크를 올라탄 미군 탱크"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낙서리로 향했다. 노인정에 들러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고 서원리에서 들었다며 미군탱크 사연을 물었다.
"그걸 이제와서 뭐하러 조사해요?"
"우리를 살려준 미군인데 혹시 유해라도 어딘기에 있다면 발굴해서 본국으로 보내드리려고요."
"양키 놈들은 소풍온 기분이야. 저기 다리있잖아요. 거기다 놓고 나와서 냇가에 가 목욕해"
"그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다고 하던데~"
"덥기만 해, 비도 억수같이 자주 내렸어요."
"혹시 어르신이 탱크를 보셨나요?"
"논둑에 떨어진 것은 보았지. 그런데 먼저 지나간 탱크가 내려오다 다시 북한군이 공격했는지는 몰라도 그 탱크 위로 올라탔서."
"그럼 타고 있던 미군은 어떻게 되었어요?"
"북한군이 데리고 갔지. 그 다음은 몰라요. 미군은 무기며 차량이며 놓고 도망가 버려"
"이곳에서 예의리 높은 산에 포병이 사격을 했다고 하던데?"
"바로 밑에 동네 평지리에 깔려 있었지. 그런데 북한군이 벌써 주변 산속으로 밤에 들어왔어요."
"남장동 빼골에 유해가 있소"
평지리에 가서 미군 포뵹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어나간 미군은 못보았다 한다. 미군이 들어오고 얼마안되어 북한군이 동네에 나타났는데 북한군이지도 몰랐다고 한다. 일부는 총도 없고 군복도 아닌 교복을 입고 있는 인원도 있고 밥을 굶었다고 해서 밥도 해서 주었다고 한다. 불쌍하니까.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북한군이고 미군부대를 침투한 후에 다시 상주로 갔다 한다. 우린 이야기를 따라 25번 도로상 능암리-남장동으로 갔다. 집집마다 들려서 탐문을 해 보았다. 남장동에서 남장사에 오르는 길에 개천이 있는데 이곳에도 미군 포병이 있었고 군인들이 죽어서 개울에 버렸고 빗물에 떠내려 갔다고 한다.
북천은 동쪽으로 흘러서 낙성동에서 동천과 만나 병성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흐른다. 이곳에 높은 산이 노음산(725m)이 있고 신라시대 고찰인 북장사, 남장사란 절이 있는데 전쟁과는 임진왜란시 악연이 있고 6.25전쟁과는 악연이 없다한다. 북장사 괘불탱화는 우리가 소문으로 알고 있는 파랑새의 전설이 깃든 불화란다.(그림을 그리던 스님이 파랑새이고 보지 말라 했는데 문틈으로 보아 완성되기 전에 날아갔다는 설)
남장동 일대는 감나무가 천지다. 곶감이 여기저기 매달려 상주곶감의 발상지같다. 그러나 북천에 유해가 버려졌다면 이곳 어딘가에 유해가 있으리라 믿어지는데 누군가 빼골에 있다며 손수 안내를 자청해서 우린 그곳에서 시굴을 해보았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길이 확장 되어도 강쪽으로 되어 별로 변함이 없는데 왜 없을까?
"지역 주민 누군가 약하러 밤에 몰래 파갔다"
한참을 발굴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른 한분이 다가섰다.
"뭘 찾아요?"
"6.25전쟁 때에 군인이 묻혀 있다고 해서 파고 있어요."
"묻힌 곳이 거기가 아니고 우리집 옆인데 전쟁끝나면서 사람들이 파갔어요. 약한다고 파갔는데."
허무했다. 나라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병들은 사람 살린다고 파가서 어떻게 했는지 참 아니다. 이렇게 용사드님들은 죽어서도 희생이다.
(4) 함창 부근 전투('50. 7. 28~29)
갈령부근에서 내려온 제1사단은 상주를 거쳐 7월 26일 오전에 함창에 도착하여 국군 제6사단의 전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후방차단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제13연대는 군단의 서측방을 방어를 위해 경들못 밑의 국사봉 일대로 전개 시키고 제11,12연대는 3번/34번도로 우측방에서 공격을 개시히여 오정산(810m)을 넘어 오천리가지 한때 진출하지만 제6사단 정면의 적이 우회하여 901번도로 영강 북안에서 농암-어룡산 부근으로 공격해 옴에 따라 명에 의거 부대를 제11연대를 국사봉 일원, 제12연대를 경들못 일원, 제13연대를 32번도로 경들못 위 366-428고지로 재배치 한다.
또한 이곳에서 부대 통합이 이루어지는데 제11연대는 제2사단의 제5연대와, 제12연대는 제20연대를 통합하며 제16연대는 안동의 제8사단에 편입된다.
이 당시에 국군 제6사단은 제3번 도로를 중심으로 작약산-조봉 정면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50.7. 28일 04:00에 경들못 서측방 아천리에서 적의 공격을 시작으로 북한군 제1사단 1개 연대및 제13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어 전투가 개시되며 이미 북한군은 그동안 많은 전투로 피로증이 겹치고 병력이 아군의 포병과 비행기 폭격으로 손실되어 남한에서 학도병을 강제 징용하여 전장에 내보내는 처지가 되었다.
"경들못에 내 전우들이 들어가 전사했어요."
제13연대 소속인 황대형 용사님이 '05년도 어느날 증평에 우리 연대에 오셨다. 국사봉과 경들못 위 428고지에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 국사봉에서는 그리 많은 피해는 없었지만 경들못 위에서 전투중에 한밤중에 적이 기습공격하여 밀리는데 그만 저수지속으로 수없이 들어 갔다고 한다.
우린 아천리 감바위부터 양범리서낭당 고개까지 탐문을 하는 가운데 바로 감바위 시골버스 타는 곳의 가계 주인장이 당시에 제13연대에 소속되어 노무자로 전투를 한 용사라는 것을 알았다.
"감바위 고추밭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
당시에 이 32번도로 상에는 시신이 깔려 있었다 한다. 국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주로 죽어 치우지않고 널려있는데 북한군이 총도 없고 군복도 안입고 포로를 잡았더니 15살도 안된 학생이 있다고 한다. 가게주인은 제13연대를 따라 다부동까지 갔으며 북진간에 집으로 돌아와 전쟁 후에 군대를 다시 갔다가 왔다고 한다.
"그럼 지금 참전용사님이 아니겠네요?"
"그건 몇 년 전에 보훈청에 관련 사실을 인후보증으로 최영희 장군(당시에 연대장인데 집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이 확인서를 써주어 참전용사증을 받았어요."
황대형 용사님이 물었다."여기 경들저주지 물이 다 빠진 적이 있는지요?"
"여기에 북한군도 수없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물을 완전히 빼서 확인한 적은 없어요.내가 군에 갔다온 기간('54~'56)은 몰라도 계속 살았으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밭에 몇구 묻어있는 시신이 있긴 한데 적군인지 아군인지는 몰라요"
"아니 이곳이 집이고 노무자로 참여했다면서 모르신다니?"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데 홀딱 옷을 벳겨가 버려서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묻었다고 해요."
"아버지는 피난을 가지않으셨나봐요?"
"못갔지요.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운이에요"
우리는 밭언저리에 볼록한 지역을 파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온 정보장교 정대위가 의리도 있고 국가관도 좋고 전남 광주출신 학사 장교인데 열심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보은데 갑작스레 바로 옆 풀섶에 무언가 지나간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하여 작업을 중단시키고 지켜보니 검은 독사다.
"또 뱀이야" 나는 묵념을 하고 기초굴토를 중지시켰다. 이곳은 나중에 내가 육본에 들어가 집중 발굴했지만 유해는 없었다
"뭉우리 고개, 안용리 금광굴에 묻혀 있는 민간인 유해?"
지역주민이 두곡리 뭉우리 고개, 은척 무릉리에 유해 묻힌 곳이 있다하여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뭉우리 고개에는 고개 북쪽편 밭에 시신이 묻혔다고 하는데 탐문결과 민간인 피해지역으로 판명되어 아쉬웠다. 무릉리지역은 인민재판에서 죽은 시신을 묻어놓은 곳이고 나중에 유족이 발굴해 갔다고 한다.
탐문 도중에 연세가 무척이나 많으신 분이 안용리에 금광굴이 있고 아군이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다 전원 전사하여 수십구가 있다고 한다. 직접 보신거냐는 질문에는 가보지는 안했고 소문이 그렇다고 한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래서 열심히 안용리로 향했다. 안용리에는 광산이 많았다.
"우리 형님이 이곳에 묻혀 있소"
'00년도 6월에 나는 본인의 형님이 수창봉에 묻혀 계시다며 발굴을 요구한 민원인을 대동하고 이곳에 온 적이 있다. 형제가 함께 군에 들어와 한명은 돌아가라하여 형이 동생보고 집에 가라하여 돌아왔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원인은 대전에서 조그만 회사의 사장인데 그동안 몇번에 걸쳐 함께 전투했던 동네 형과 형님을 찾으려 수창봉에 올랐다 한다.
"수많은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삽/괭이 들고 올라서다"
민원의 이야기는 그당시 전쟁때는 군인들이 지역별로 함께 갔다고 한다. 대전이 적에게 피탈당하고 부산으로 피난중이던 형제는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함께 문경으로 들어와 제6사단 제19연대가 되었다 한다.
민원인이 이안에서 점심을 샀다. 안용저수지 우측으로 들어서 흑연광산이라는 곳을 지나 수창봉에 올라서니 산 전체가 개인호다.
"형제들이 와서 개인호를 무려 한달이상 머물며 이 일대를 다 파보았소"
능선이 5km는 족히 되는데 9부능선아니면 바로 능선 정상에 정멀 엄청난 개인호가 깔려 있다고 하는 표현이 맞다. 아니 도대체 몇명이 점령했기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있는지 놀라는 순간도 잠시 함께한 민원이 하는 말이 형제를 찾으려는 유가족들이 와서 거의 한달이상 호마다 다 파보았다 한다. 기막힌 이야기다. 얼마나 아팠을까. 모두가 대를 잇는다며 형이 돌아가고 동생이 전장터에 남는 것인데 동생을 내보내 살게한 형님을 찾는 동생의 인간적 미안함이 얼마나 클까! 그후에 우리는 이곳을 샅샅이 재발굴하였지만 수천개의 호에서 단 1구의 유해만을 찾았다.
"그건 빨갱이들이요"
그런데 오늘 또다시 그 걸었던 길을 따라 광산굴을 찾아간다. 이안에서 차량으로 한 10분을 달려 저수지둑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선동이라는 곳에서 논에서 일하는 한 어른을 만나게 되어 우리의 목적을 알려주니 깜짝 놀라시며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죽은 군인은 모두 찾아 갔어요. 그 광산굴이란 곳은 지금 폐쇠되어 있는데 북진하면서 빨갱이들을 붙잡아다가 경찰이 죽인겁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길을 돌렸다. 편안히 계시라고 간절한 묵념은 올렸다. 전쟁이 죄인이다.
"상주대학교 자리, 공검 지평리에 국군이 많이 전사하여 묻혔다."
여기저기 소문을 들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0에 하나가 살아남고 9는 훼손이나 확인불가 경우가 많다. 상주대학교는 지금 경북대학교 상주켐퍼스로 바뀌었으며 그 정문자리일대라 하는데 이곳은 3번도로를 따라 내려 가면서 계속 전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발생한 가매장지역일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부지 조성간에 이미 다 훼손되어 현장 보존이 어렵고 그 뒷산들은 개인호 등 전투 흔적이 그리많이 남아 있지않았다.
공검 지평리는 경들못 바로 밑에 동네로 이안천이 굽어흐르고 있는데 국사봉일대 탐사간 많은 개인호를 발견하고 탐지를 했으며 발굴 작전도 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유는 많은 분들 이야기가 시신을 강물에 떠내려보내버리거나 강바닥에 묻었다 한다.
"공검 중소리에 적군 20구, 아군 1구를 묻었다"
한 제보자가 전화를 했다. 본인이 직접 참여했다며 가보면 동네사람들이 다 안다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날에 차를 몰아 중서리로 갔다. 중서리는 국사봉 서쪽 마을로 이안천 북안이다.
우리의 임무는 국군 전사자 발굴이지 북한군은 아니다. 물론 지금까지 발굴된 13,000여 명의 발굴유해중에 적군이 1,500여명은 된다. 하지만 알고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다가 나오는 유해중 유품이나 지역 주민제보 등을 기초로 피아판단을 하는 것이다. 일단은 현장을 조사하러 조사팀을 보냈다. 이미 국사봉일대는 두번에 걸쳐 탐사가 이루어졌다.
"홍수시 강물에 다 떠내려 갔다."
이럴경우에 우리는 난감한 경우가 많다. 지역주민을 만나 진술을 들어보았다. 북한군이 강을 건너려 이 동네에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어느날에는 강건너 국사봉지역에서 병력이 강을 넘어 들어오기도 한다. 묻혀진 유해는 주로 강변인데 그동안 수차례 홍수로 강변이 다 휩쓸려 나가고 강둑이 다시 만들어져서 찾기는 힘들다고 한다.
전사에도 보면은 제13연대 제3대대가 연대 예비에서 이곳 국사봉을 28일 새벽에 점령하고, 여기에 제6-19-제2대대가 합세하여 이안천으 도하하여 공격하는 북한군 제1사단 예하부대를 격멸했으며 강변에 50여 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동네에 야전병원이 있는데 아군 3구를 주민들이 묻었다"
함창에서 점심을 먹는다. 하름한 식당에 들러 한식으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손을 씻으려니 수돗가가 없다. 주방에 들어가 닦아야 했다.
주방장이 가게 아저씨다. 우리 복장을 보고 좋은 일 한다며 칭찬을 해준다. 나와같은 나이 55세다. "우리 동네에 전쟁 때에 야전병원이 있던 자리가 있는데 옛날 어른들이 그곳에 국군이 묻혀 있다고 하던데요."
"혹시 그곳이 어딘지 모르시나요?"
"오동리에 가셔셔 노인정에 들르면 알 것입니다. 옛날 병원 자지를."
우린 숨차게 밥을 먹고 바로 그곳에 가서 이장님을 찾아 6.25전쟁을 격으신 어른을 찾았다. 뭣때문에 그러느냐며 묻던 이장은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즈 장소는 본인도 안다고 하여 함께 갔다.
이곳 일대는 많은 부대들이 거쳐가면서 지휘소가 위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현장을 찾았고 몇명의 어르신들이 나와서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우린 '09년도에 이곳에서 1구의 유해를발굴했다. 그러면 3명이라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에 의문이 들어 주변을 더 넓게 확장하여 발굴해 보았지만 없다.
저멀리서 어느 분이 걸어오신다. "여봐요 거기 유해 사람들이 약한다고 파갔어!"
제1사단은 3번도로상에 지향되던 적의 공격이 제1사단으로 지향되는 싯점에 좌우 인접 전선이 무너져 전선을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에따라 미 제8군사령관의 명으로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인접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어서 제12연대의 도하지점인 낙동리를 확보토록 하고 8월 3일까지 철수를 하여 우측은 제6사단과 좌측은 개전이래 최초로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된 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