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3-13/190305]사모곡-엄마의 40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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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머니 49재(齋)가 성큼 다가왔다. 49재는 亡子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식 제례의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받기까지 49일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기간에 망자가 좋은 생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족들이 7일에 한번씩 일곱 번의 재를 지내는데, 이를 칠칠(77)재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初齋는 돌아가신 날부터 쳐서 7일째 되는 날, 막재는 49일째가 되는 날에 행한다.
전북 진안군 마이산 탑사(태고종) 주지 진성스님(법렵 33년)은 당신의 친어머니 모시듯 초재부터 막재까지 祭物을 비롯해 祭禮에 모든 정성을 다했다 한다. 그 까닭은 할머니에서부터 연유한다. 8살, 2살 아들을 둔 채 27살에 청상과부가 된 우리 할머니, 마이산에서 돌탑을 쌓은 이갑룡(1860∼1957) 처사와 인연이 돼 친정언니와 함께 일평생 塔寺를 찾아 지극정성 供養을 드렸다. 오죽하면 ‘냉천 할머니’로 불렸겠는가. 당시에는 임실 오수 봉천마을에서 탑사까지 걸어다니기 일쑤였다. 내가 태어나던 1957년( 정유년) 이 처사가 우리 고향마을을 방문, 30세 아버지가 업어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주지스님은 이갑룡 처사의 증손자. 보살할머니라 불리는 며느님이 그 道를 이어받았고, 장손인 이왕선 님이 비로소 태고종에 入籍, 혜명스님이 되었으며, 진성스님은 혜명스님의 둘째 아들이다. 두 집안의 世交로 치자면 70년이 훌쩍 넘었다. 숙모는 수마이봉 천황문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갑룡 처사는 1930년경 지금도 믿기 어려운 ‘天地塔’을 쌓으셨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 그 천지탑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오직 총생들의 건강과 발전을 비는 기도를 드린 후 燒紙를 하셨다. 그러니 장례식 때에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주지스님의 청청한 불경 낭송이 이어졌고, 49재도 탑사에서 지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당신을 포함하여 조부모와 어머니를 ‘永久位牌’로 탑사에서 모시자는 것은 아버지의 遺言.
49재를 늦출 수는 없어도 사흘 내로 당길 수는 있다는 얘기에 3월 2일(토) 오전 9시에 지내기로 했다. 당일 9시까지 서울 영등포구, 양천구에서, 경기 판교, 여주에서, 충남 논산에서, 전북 전주에서, 전남 광양에서 탑사 주차장에 승용차 7대가 나래비를 섰다. 9시부터 9시 30분까지 ‘侍輦(시련: 고인의 영혼을 대웅전내 檀에 모심)’과 ‘對靈(대령: 고인의 영혼을 간단히 대접해 맞아들이고 다기에 냉수를 부으며,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해 재를 진행함)’에 이어 본격적으로 ‘灌浴(관욕)’의식을 진행한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8호 전북영산작법보존회의 쟁쟁한 스님 다섯 분을 모셨다. 범패(어산.염불)팀의 김제 영천사 현법스님과 김제 성덕사의 도홍스님, 익산 태봉사의 법진스님, 나비춤과 바라춤을 추는 작법(승무)팀의 김제 용봉사 법전스님과 전주 천지사의 비구니 현진스님이 그들이다. 도홍스님은 紙花와 製菓의 명인이란다. 오늘의 祭床을 위하여 5일전에 오셔 하루 두세 개씩을 쌓았다고. 관욕은 고인의 영혼을 불전에 모시기 전에 목욕시켜 드리는 것을 말하며, 고인이 생전에 했던 악한 행위를 씻어내는 것을 뜻한다. 권욕 다음에 이어지는 ‘神衆作法(신중작법: 재가 끝날 때까지 일체의 장애와 마구니(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여 재가 무사히 치러지도록 엄호하여 주기를 권청하는 의식)’과 ‘上壇勸供(상단권공: 불단에 공양을 드리며 法食-불법의 법도에 맞게 식사하는 것-을 베풂. 지장청이라고도 함)’ 사이에 대구에서 온 경상도고전무용전담팀 이수자 박영숙과 그의 제자의 살풀이춤과 紙錢(종이돈)춤이 펼쳐졌다. 대웅전의 공간이 넓지 못한 게 유감이다. 완전한 작품인 바라춤 등 멋진 퍼포먼스가 眞價를 발휘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이어서 ‘觀音施食(관음시식: 고인의 영혼을 대접하는 일반 제사의식)’과 ‘奉送(봉송: 부처님과 보살님을 먼저 돌려보내고 고인의 영혼도 다음 생을 기약하며 보내는 의식. 고인의 옷가지와 신위 그리고 상주들의 喪章 등을 태움)’을 끝으로 ‘脫喪(탈상: 상주를 벗어나 평상인으로 돌아가는 의식)’은 끝이 났다. 주지 진성스님이 직접 선곡하셨다는 권미희의 '슬퍼하지 말아요'라는 배경음악과 관음시식 후 부르는 ‘回心曲(회심곡)’ ‘極樂舞(극락춤)’은 말 그대로 예술이어서 喪主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려 네 시간에 걸친 의식은 장엄하고 품격이 있었다. 한마디로 슬픈 자리였지만 의식은 멋졌다. 49재 자체를 처음 보는지라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랐는데, 100% ‘고객만족’. ‘이렇게 하는 것이 49재로구나. 이렇게 고인을 보내는구나’ 싶었다. 틀림없이 우리 어머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49재. 초재부터 7재까지 총비용 500만원이 많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재를 주관한 주지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별도의 봉투를 드렸다. 얼마나 신경을 썼으면 법보신문과 현대불교신문의 사진기자들을 초대하였을 것인가. 더구나 그들이 전과정을 찍어 USB를 보내준다는데 오직 고마울 따름이다. 혜명스님이 수맥을 귀신같이 찾는다는 ‘천신기’를 꺼내 보여 준다. 양손으로 천신기를 나란히 세우더니 “망자의 49재 잘 했습니까” “망자, 극락왕생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이 천신기, 신기하여라. 앞으로 나란히 하고 있던 천신기가 천천히 안쪽으로 합쳐지는게 아닌가. 6개월간 천신기에 몰입했다는 혜명스님 “천신기는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틀림없다. 틀림없다. 참말로 틀림없다.
아, 어머니는 이제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보내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세상의 흐름이 이런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대체, 어디로 가셨을까요?
스님들이 말하듯, 영락없이 極樂往生하셨겠지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참말로 많은 것을 주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징징 졸라대는 어린애에 다름 아닙니다.
아, 언젠가는 하늘같은, 땅같은 은혜를 갚고자 하였건만,
이제는 ‘빈 말’과 ‘공염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1년에 두세 번 산소에서 습관처럼 절을 올리며,
각자 제 설움에 울음이나 몇 번 찍어내겠지요.
그것도 ‘효심’ 때문이 아니라
사는 게 힘들다며 ‘제 설움’에 울겠지요.
하지만,
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어머니를 결코 보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우리의 ‘껍데기’셨던
어머니를 어떻게 잊거나 보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73년 동안 그 모든 것을 주시고도
되레 미안해 하신 우리의 母川인 어머니.
40년을 모신 할머니 슬하에서
永眠하소서.
-불초 넷째 울며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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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희의 찬불가 '슬퍼하지 말아요' 가사는 이렇다.
어떤 강심장도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그대는 이승 나는 저승
나는 여기 영단
향연 속에 촛불 켜고
위패로 앉아 있는데
그대들은 무릎 꿇고 절을 하네요
엎드려 울고 있는 가여운 그대여
슬퍼하지 말아요 울지도 말아요
어차피 한번 오면 가는 것이
세상의 정한 이치
지난 날의 추억일랑
먼 하늘로 보내고
서러운 마음 잊고
우리 이제 이별해요
울고 있는 그대 너무
가여워 안아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먼 하늘과 땅이어라
사랑하는 그대여
고개를 들어요
그대들의 불행을 내가 다 가져가니
이제는 행복하세요
오래오래 살아요
우리네 요령소리 뒷소리로
나쁜 곳은 피하고
목탁소리 북소리로
극락임을 깨달아
고단했던 내 영혼
이제 편히 쉴래요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우리 먼 훗날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