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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미술과 예르미타시 전시 모두 스마트폰 촬영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사진도 다 폰카예요. ^^
한국의 호랑이 그림은 중국과 일본과 달리 친근한 이미지가 강하다는게
전문 큐레이터 분의 설명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시죠.
이 용호도 쌍폭 그림 중에 오른쪽 용그림은 2000년 1월에 한번 전시한 적이 있지만
왼쪽 호랑이 그림은 처음 공개하는 작품이라고 하시네요.
19세기 작품으로 조선 호랑이 그림 중에는 가장 큰 그림이라고 합니다.
너무 커서 가정집에는 맞지 않아서 궁궐이나, 사찰, 관청 등에 걸었을 것이라고 하고,
신년에 액운을 막기 위해 정월 초에 걸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이날 큐레이터 설명은 조선의 호랑이 그림 중 까치가 등장하는
호작도(虎鵲圖)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호랑이와 까치가 같이 등장하는 호작도가 그려졌지만
중국 호작도의 까치는 호랑이를 보고 놀라는 장면으로 그려진 반면
한국의 까치는 호랑이의 등장을 반기고 널리 알리는 듯한 것이 큰 차이라고 합니다.
즉, 한국의 까치그림은 경사을 알리는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략 크기가 이정도입니다.
앞서 본 것보다 작은 크기의 용호도입니다.
이 정도 크기면 가정집에 걸어두고 감상할 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호랑이가 새끼를 돌보는 그림을 유호도라고 하는데,
한국의 유호도는 특히 가족간의 사랑이나 우애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답니다.
이 그림에서 한가지 이상해 보이는 것 있지 않으세요?
어미로 보이는 호랑이의 무늬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의 점박이 무늬잖아요.
주역에 보면 호랑이는 군자의 표상이고, 표범은 군자와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와 표범을 함께 그리거나 무늬를 섞어서 그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 그림에서도 표범과 호랑이가 부모자식 처럼 다정하지요.
이처럼 호랑이와 표범이 서로 노는 그림을 호표상희도 라고 한다네요.
김홍도가 그린 출산호도로 조선 호랑이 그림 중에 걸작 중 하나로 꼽는 그림이랍니다.
호랑이가 산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이런 류의 그림을 출산호도라고 부르는데요.
호랑이가 산에서 나온다는 것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는 등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출세를 뜻한다고 하네요.
이 그림도 김홍도의 작품인데요.
당시 대나무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선비화가 강세황이 대나무를 그린
공동작품입니다. 실제 진품은 위쪽 대나무가 더 많습니다.
아래에 호랑이를 좀더 크게 찍은 사진을 올려봅니다.
털 하나하나를 붓으로 터치하여 그려낸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드라마에서는 김홍도가 호랑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호랑이를 보러 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 호랑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40대 후반에 얻은 외동아들 긍원의 호랑이 그림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화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아버지의 공력에는 많이 못미치는 듯해보입니다.
그림 설명에는 그럼에도 조선 호랑이의 개성을 보여주는데는 모자람이 없다 라고 쓰여있네요. ^^;
이 그림이 정확하게 새끼 호랑이를 돌보는 유호도라고 하겠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슬하손이라고 부른다는데요.
여기저기 쓰인 글귀를 보면 삼산불로초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에 사는 호랑이를 그린 것입니다.
불로장생 등의 복을 비는 길상화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조선 호랑이 그림중에 걸작으로 치는 작품입니다만
작자 미상이라고 합니다. 심사정의 호인 현재 낙관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준법과 필치로 보아 심사정의 것으로는 보기 어려워 후대에 낙관만 찍은 것으로 본다네요.
무려 78마리의 호랑이를 하나의 화폭에 담은 이 그림은 선비화가인 유치봉이 19세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집단생활을 하지 않는 호랑이이므로 평론가들은 인간의 세태를 호랑이에 비유한 것이라고 평합니다.
한 부분을 크게 촬영해 본 것입니다. 무늬를 보니 역시 호랑이와 표범이 구분없이 같이 놀고 있군요.
그런 점에서 호표상희도의 범주에도 들어가는 그림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의 호랑이 그림>---------------
전문 큐레이터분의 공식 해설시간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물어보니
일본 호랑이 그림은 조선이 필법으로 호랑이를 그리는 것과 딜리 묵법을 사용한다고 하네요.
단어와 그림에서 대략 눈치 채셨겠지만 조선 호랑이 그림은 글씨를 쓰는 것처럼 선을 이용해
호랑이를 그리는 반면 일본은 먹으로 굵게 몰골법으로 그린다는 겁니다.
그림만 보아도 한눈에 확연하게 다른 게 느껴지시지요?
그리고 일본의 경우 호랑이가 살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의 문물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호랑이를 상상의 동물처럼 여기고 신성시했다고 합니다.
불교의 선종이 유행하고 본격적인 무가정권이 시작되던 무로마치 시대 14세기부터 호랑이
단독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유행한다고 합니다.
무인정권과 호랑이 그림은 뭔가 잘 맞는 느낌입니다.
일본의 호랑이는 주로 묵법으로 그린다는 설명을 들으니 한눈에 일본 호랑이 그림이란 것을 알아보겠어요. ^^
1823년 칸쿠라는 일본 화가가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칸쿠는 중국상인을 통해 호랑이 두개골을 구하여 그 위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서 형상을 연구했고,
호랑이의 관절 움직임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살펴서 이전의 호랑이 그림과 달리
매우 사실적인 표현을 해냈다는 평가를 듣는 화가라고 합니다
17세기에 가노쓰네노부라는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목계라는 선승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화가는 나중에 궁중화가로써는 가장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다고 하네요.
소가 조쿠안이라는 화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활개치던 모모야마시대에 그린 큰 병품그림입니다.
호랑이 그림을 보면 앞서 호랑이를 치밀하게 연구했다는 칸쿠의 호랑이 그림에 비해
매우 도식적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마 용호도 라는 이 작품은 도교국립박물관이 소장하는 작품으로
17세기 에도시대 작품입니다.
용과 호랑이가 불법의 가르침을 수호한다는 독특한 믿음을 가지면서
14세기 경 시작된 호랑이 그림은 15~16세기를 거치며 크게 유행하게 된답니다.
에도 초기 궁중화가로 크게 활약했던 가노 나가노부의 세 아들이 각각 그린 그림이라고 하네요.
이 그림의 가운데 있는 분은 유마거사로 유마경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인물로
인도 불교 초창기의 재가신자로 문수보살이 인정할 정도로 크게 깨닫고
불교교화에 큰 공을 세운 분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일본에서 호랑이는 불법을 수호하기도 하고, 부(富)와 힘을 상징하기에
인기있는 그림의 소재였다고 하네요.
중국의 호랑이 미술은 그림이 아니라 주로 유물들이 전시되어 사진에 담지 않았습니다.
30분 큐에이터 설명을 듣고 25분 정도 자유관람을 한 후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예르미타시박물관전을 보러 가기 위해 본관을 나섭니다.
-----------<예르미타시박물관전>---------------
예르미타시박물관전은 1991년 소련과의 수교 1주년 기념으로
당시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이후로 두 번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26년 만이군요.
예르미타시박물관이 있는 상트페테프부르크는 로마노프왕조 시절
표트르대제가 1703년 설립하여 1713년부터 1918년까지 200년 넘게 러시아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지금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당시의 건물들이 남은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지요.
이번 전시의 부제가 [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미술]라고 붙게 된것은 먼저
예르미타시박물관 건물의 메인이 미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예카테리나 2세의
겨울궁전을 본관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프랑스 본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프랑스 미술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
바로 예르미타시박물관이리고 합니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부호들이 수집한 미술품까지 모두 합쳐져서 지금의 소장품이 되었다네요.
이번 전시는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프랑스 미술 300년을 조망해 보는 게 목표라고 하네요.
전시실에서는 역시나 스마트폰으로만 촬영이 허용됩니다.
-----(고전주의 시대, 17세기)
태양왕 루리 14세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가된 프랑스.
이때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젋은 프랑스화가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왕실 주도의 화단에 활력을 넣는다고 합니다.
성화 관련 작품도 많았지만 평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르 냉 형제의 작품도 인기였다고 하네요.
성 체칠리아라는 작품으로 성 체칠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고 하네요.
고전주의의 성격대로 평온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로 그린 자크 블랑샤르의 작품입니다.
17세기 세바스티앵 부르동이란 화가의 작품으로 이 화가는 자기 고향이 개신교가 널리 퍼진 곳임에도
로마에서 활동하다보니 자신의 배경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많이 그렸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모세와 타는 덤불'이라는 제목으로 모세가 타는 덤불에 다가가 신의 호명을 듣는 장면으로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인물 표현은 당시 부르동이 심취했던 라파엘로의 영향이라고 하네요.
성 베네딕트 생애의 한 장면 이란 이름의 그림으로 (독이 든 와인 잔의 기적)이란 부제가 붙습니다.
성 베네딕트 일생을 그린 열두 작품 중 하나로 그에게 불만을 품은 수도승들이 포도주에
독을 타서 그를 독살하려 했으나, 성 베네딕트가 잔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을 낭독하자
잔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 풍경화로 큰 인기를 끌던 클로드 로랭의 "엠마우스로 가는 길의 풍경"이란 작품입니다.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 앞에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고전주의의 원리를 가장 충실히 따랐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로랭은 자연을 지극히 일반적이고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렸답니다.
'전투'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아담프란스 판 데르 묄렌 이란 궁정화가의 작품입니다.
실제 이 장면은 어느 전투를 직접 그린 것은 아니고 화가의 상상으로 그린 것인데,
이 화가는 루이 14세를 따라다니며 여러 전투를 지켜본 경험이 많아 좀더
사실감 있게 전투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 이런 전투장면 그림이 인기 있었다고 하는데요.
실제 예카트리나 2세는 경매에서 루벤스나 램브란트의 작품보다 이 작품을 더 비싸게 구매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2만4천프랑에 나왔지만 예카트리나 2세는 3년간 지속적으로 딜을 해서
결국은 1만프랑에 구매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답니다. ^^
위 그림 중 한 부분만 촬영한 것인데요. 굉장히 그림이 사실적이지요.
조제프 비비엥이 그린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초상인데요.
이 건축가는 17세기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건축가 중 한명으로 꼽는다고 하네요.
베르사유궁을 비롯해 마를리궁, 파리의 앵발리드 대성당 등을 설계했다는데요.
루이 14세의 아첨꾼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로코코와 계몽의 시대, 18세기)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 침체 속에서
야외에서 열리는 화려하고 우아한 연화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인기를 얻는다고 하네요.
화가들도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며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등
점차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네요.
이번 전시 곳곳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의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들을 해 놓았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라는 작품입니다.
샤를앙드레 반루 라는 화가의 작품으로 제목만 들어도 어떤 장면인지 아시겠지요?
영국 수상을 1721년부터 1742년까지 역임한 로버트 월풀 경의 초상을 누군가 보고 있군요.
굉장한 미술품 수집가였던 분이지만 사후에 손자가 미술품들을 통째로 예카테리나 2세에게
팔아버리면서 자기 할어버지 초상인 이 작품까지 팔았다고 하네요.
예르미타시박물관이 소장한 그림이 1만2천점이나 되는데 그 중 4천점이 이렇게 엄청나게
미술품들을 수집했던 예카네리나 2세가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작품 하나하나를 구매하기도 했지만 좋은 콜렉션 전체를 통째로 구매하는
대범한 수집 스타일을 보였다고 하네요.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아들인 황태자 루이입니다.
하지만 왕위를 직접 물려받지 못하고, 이 황태자의 아들인 루이 1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네요.
무대의상을 입은 젋은 여성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로코코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러시아 귀족들은 이런 유적들을 찾아 여행하는 게
유행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여행을 그랜드투어라고 불렀다네요.
그 당시 귀족들과 함께 여행했던 화가들이 그린 스케치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손녀인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초상이라고 합니다.
무척 총명하고 예뻐서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을 받았는데,
독일로 시집가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장루이 부아이유 라는 화가가 그렸다고 합니다.
장바티스트 마리 피에르의 작품입니다.
문화가 있는 날이어서인지 굉장히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티볼리의 폭포라는 작품입니다.
피에르 자크 볼레르의 난파라는 작품.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가혹하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혁명과 낭만주의의 시대, 19세기)
19세기 들어 프랑스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혁명들을 겪으며 변화를 맞습니다.
'신고전주의'를 계승한 화가들과 더불어 '낭만주의' 화가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이야기에서 주제를 찾기도 합니다.
몇몇 화가들은 빛과 공기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한 시기라고 하네요.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나 오볼레스카야의 초상'이란 작품입니다
에밀 오귀스트 샤를 카롤뤼스뒤랑 이란 화가가 그렸는데요.
이 화가는 상류층의 초상화가로 명성이 굉장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면 이 화가가 인기 있었을 것 같죠? ^^
젊은 어부의 장례라는 작품으로 아리 세페라는 화가가 그립니다.
-----(인상주의와 그 이후, 19세기 말 이후)
19세기 말 이후 고전적 예술양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혁신적인 화가들이 등장하는데요.
1880년 이후 클로드 모네는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색채의 표현에 집중했고,
폴 세잔은 반대로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탐구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20세기 미술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여는 개성의 시대를 걸었다고 하네요.
건초더미를 테마로 많은 그림을 그리고 호평을 받았던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의 건초더미'라는 작품입니다.
여성을 많이 그렸던 르누아르의 여인의 얼굴이란 작품입니다.
폴 세잔의 작품입니다. '마른 강 기슭'이라고 하는데요.
빛을 중심으로 그린 모네와 달리 물에 비친 형태마저 정확한 대비를 이루는
세잔의 특징이 잘 비교가 되는 듯 합니다.
앙리루소의 작품으로 '방브 수문 좌측의 방어시설 경관'이라는 다소 딱딱한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식 화가수업을 받지 못한 알리 루소가 세관원으로 근무했던 당시를 추억하며 그린 풍경화라네요.
이 사진은 당시의 부호였던 세르게이 슈킨이나 이반 모조로프 라는 사람의 집입니다.
소문난 미술품 수집가로 자신들의 집을 이런 미술품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몄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을 1918년 레닌의 명령으로 소장품들이 전부 국유화 되었고, 이 작품들 중 상당수가 고스란히
예르미타시 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고 하네요.
서양의 300년 근대미술사를 진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 되실 때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고, 해설 시간을 맞춰가시면 더욱 감동의 폭이 깊어지실거예요.
3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가시면 입장료 6천원도 절반 가격에...^^;
이상 어제 다녀온 박물관 이야기를 마칩니다.
길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도 2/28에 다녀왔는데, 자세한 설명과 함께 올려주셔서 다시 한 번 감상합니다.
호랑이 전은 큐레이터 없이 보고 나왔는데, 도움되었습니다~^^
아 같은 날 보셨군요. 요즘 국박 좋은 전시가 많아서 참 좋아요. ^^
즐감하고 갑니다~감사합니다
넹 시간 되실 때 다녀와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