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670 (용문면 신점리 508-10번지)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30-18:00 / 동절기(11월~2월) 09:30-17:00
매주 월요일 휴무(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무료 관람
경기도 양평 어디까지 가봤니?
용문산 용문사를 방문하고 내려오는 길에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을 발견해서 한 번 들어가 보았다.
친환경농업박물관이라고 해서 그냥 그런줄만 알았다. 농업자체에 문외한이 내게 친환경까지 더해 생소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용문산 관광단지내에 접근성이 용이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관람객이 한 명도 없다.
불안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면서 신형 농기구들이나 둘러보고 빨리 나오면 되겠지라는 가벼운 생각 뿐이었다.
입구 오른쪽으로 꽤 넓은 휴식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Sustainable Agricultral Museum of Yangpyeong
친환경의 의미로 sustainable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유지될 수 있는"
아마도 자연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지으면서도 반복해서 자연을 유지되도록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대동여지도에서의 양평의 표시와 양평의 지명의 변천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양근군에서 지평군으로 그리고 1900년 이후로 양평군
왼쪽으로 용문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 호수를 베고 눕다. <신증동국여지승람>
左據龍文右枕湖
"용문산 자락을 감싸안은 두물머리 고장"
갑자기 훅 들어온 양평의 지명 설명에 반했다. 이렇게 들어가자마자 제대로 관람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은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로 구분이 된다.
먼저 양평역사실을 먼저 둘러보고 이어서 친환경농업실이 이어진다.
용문산의 묵향(墨香)
양평의 대표적인 "용문산"과 관련된 옛 문인들의 한시(漢詩)를 만날 수 있다.
제용문사(題龍門寺) "용문사 시를 짓다"
용문도중절구(龍門途中絶句) "용문 가는 도중에 읊은 절구"
용문사 1,100년된 은행나무 모형을 제작했는데 가운데 전시공간을 위해 실제보다 크게 제작되었다.
빔프로젝트로 은행나무의 화면이 투영되고 옆으로 은행나무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진이 둘러져 있다.
뿌리 부분의 둘레가 15.2m 라니... 정말 놀랍다.
가을 이시기에 방문하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떨어진 은행나무잎으로 노랗게 물든 바닥을 보는 것도 정말 좋았다.
양평 혹천면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부족사회가 번창하던 먼 옛날, 함왕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적격한 지도자가 없어서
항시 문제가 돌출하였고 또한 해결할 수 없어 고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정해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왕혈에서 튼튼하고 총명한 눈동자를 가진 옥동자가 나왔다.
그들은 그를 하늘이 점지하여 준 자기의 지도자라 생각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함씨들은 자기들이 열망하는 국가를 형성했고, 자기들의 성지를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날로 번창하여만 갔다.
번창일로를 걷던 양근 함씨 부족들은 얼마가지 못하여
다른 부족들의 침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룩한 성지가 무너지고
위대한 왕도 죽어 함씨들의 국가는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망하고 말았다.
그 무렵 그 옆을 지나던 과객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저렇게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니 국가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양근 함씨들은 선조인 왕이 태어난 바위를 밖에 두고 성을 쌓았음을 깨달았다.
그 뒤 그들은 성지를 양근 함씨 선조의 어머니인 바위를 중심으로 성을 쌓아 번창하려 하였으나
함왕은 또다른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국가는 융성하지 못했다.
양근 함씨들이 모두 흩어져 살아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 있는 것이라 한다.
그후 현재에 이르도록 양근 함씨 후손들이 그 바위에 보호책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선조로 모시고 있다.
전설은 이러하지만 실제로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지방 호족들이 각지에서 일어날 때,
이 일대에서 일어난 강력한 호족세력 중 함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함왕은 보통 이 사람을 가리킨다.
함규는 이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지만
결국 고려 태조왕건에게 귀부하여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양평의 민속
양평 상여 회다지 소리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27-3호)
상여 소리는 상여를 옮기면서 부르는 노래이며,
회다지 소리는 상여가 장지에 이르면 망자의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상여 소리의 가사는 회심곡이 주로 쓰이며,
회다지 소리의 가사는 회심곡, 시중잡기, 답산가, 초한가, 옥설가, 토끼타령 등이 쓰이고 있다.
요즘 보기힘든 상례 때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인 상여(喪輿)의 모습이다.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靈輿)로 나누어진다.
용문산령제는 양평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통 제례의 하나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太宗)이 친히 용문산 아래에서
국가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국가적 차원으로 제를 거행하다가 이후에는 그 규모가 축소, 변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홰동화제는 양평 강하면 항금마을의 정월대보름 달맞이 행사로, 마을에서는 흔히 "동화 매기" 또는 "동화 태우기"라고 부른다.
정월대보름 날 밤에 올라오는 달을 맞아, 마을 가운데 있는 논바닥에서 동화를 태우며 풍년과 무병장수를 빌었다.
양평의 사찰
양평 사나사
양평 사나사(舍那寺)는 용문산 서쪽 백운봉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절로 대경대사(大鏡大師)가 923년 제자와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고려시대 양평 지역 호족인 함규(咸規, 이후 왕규로 이름을 바꿈)가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양평 보리사지
양평 보리사(菩提寺)가 있었던 터는 용문산 기슭인 연수리 마을에서 상원사로 들어가는 입구 좌측의 넓은 구릉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현재 '선운사'라는 사찰이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보았던 보물 제361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현기탑비의 출처가 바로 용문산이었다.
양평 상원사
상원사(上院寺)를 세운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으나, 남아있는 석물(石物)들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원증국사 태고 보우(圓證國師 太古 普愚)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하였고,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왕사를 그만둔 뒤 잠시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양평 용문사
양평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시기에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용문산의 오래된 절들과 인연을 맺었던 많은 고승들의 금석문(金石文) 기록을 통해
오랫동안 절의 세력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현기탑비와 사나사, 상원사, 용문사의 전각들과 불교 유적들을 영상물로 소개하는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보물 제531호인 용문사 정지국사탑(부도)과 탑비
양평의 유산
고창제 - 향토유적 제43호
고창(鼓唱, 高唱)이란, 신사(神祀, 산신제)에서 고인(鼓人, 광대)이 노래를 한다는 뜻으로,
고창제는 강하면 성덕3리 국수당을 중심으로 성덕리 전체 주민이 각각 나누어 준비하고,
음력 2월 3일에 격년으로 지내는 산제사이다.
전설에 다르면 고려시대에 이 곳에 솥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는데 솥 제작에 실패를 거듭하자
쇠말(錢馬)과 토말(土馬)을 만들어 놓고 탑을 쌓은 다음 산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고 이후 솥이 잘 만들어 졌다고 전해진다.
고창제를 지내고 회계(會計)를 하기 위하여 작성한 문서인 신사치성기(神祀致誠記)와
국수당 돌탑 정면 감실(龕室)내에 매장되어져 있던 쇠말(錢馬)과 토말(土馬)을 전시해 놓았다.
양평지역 출토 도기와 토기 유물
양평지역 불교 유물
양평지역 대표 승려 "원증국사(圓證國師) 태고 보우(太古 普愚)"
원증국사 태고 보우는 고려 말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
1356년 공민왕(恭愍王)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고, 1371년에는 국사(國師)로 추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사가 머물던 양평의 전신인 양근(楊根)이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원증국사 태고 보우가 있던 대원사 터의 석탑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양평의 정신
위정척사의 선구자 "화서 이항로"
양평의 벽계(檗溪)는 화서 이항로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배움의 장이다.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나라를 지킨 명장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충장공 양헌수(梁憲洙,1816~1888)"
의병장 김백선의 친필로 꾸며진 서예 병풍
항일의병으로 이어진 화서 이항로 선생의 가르침
한국전쟁 "지평리전투"와 "용문산전투"
지평리전투 포스터와 굳은 의지가 담긴 결사 철모
감성 역사 "구둔역"
이제부터는 친환경농업실이다.
농업환경생성
자연환경에서 살아있는 생명들이 서로 상호 작용하여 생동하는 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
일반농업 토양
일반농업 토양이라 해서 오염된 토양은 아니다.
화학 비료나 농약 등이 농업에 있어서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화학비료, 농약 등 화학자재에 의존하게 되면 토양의 힘이 떨어지고 생태계가 불량해진다.
친환경농업 토양
좋은 퇴비(유기물)나 자연적인 자재를 공급하게 되면 토양의 체질이 좋아지며,
꾸준한 지구력이 생기고 태양 에너지 흡수도 원활하다.
따라서 좋은 토양 속에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하며 생태계가 유지된다.
지렁이, 개미, 애벌레, 쥐, 두더쥐 등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통일미"라고 불리던 통일벼는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자체 개발한 벼 품종이다.
고투입화학농업으로 인한 농업잔해로 오뎜된 환경
이러면 안된다는 이야기지 뭐..
북한은 아직도 인분뇨를 비료로 사용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똥도 훔친다고...
뽕나무
"오디"라 불리는 열매를 식용한다. 오디를 먹으면 소화가 촉진되어 방귀가 뽕뽕 나온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땅의 힘을 돋우기 위해서 해마다 한 번 이상 흙을 갈아주는 경작(耕作)
경작을 마친 땅에 인위적으로 거름을 주어 영양분을 제공하는 시비(施肥)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물을 논과 밭에 공급하는 수리관개(水利灌漑)
식량증산을 위한 농업근대화 정책
권농별유사(勸農別有司)를 임명하는 임명장인 차정첩
농업을 권장하는 별유사의 임무를 맡기는 내용이다.
별유사는 관청에서 호적 등의 사무를 보는 직책이다.
전통농업의 가치 재발견
우리 선조들의 농사기술을 각종 농사서적과 유물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1429년(세종11)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 "농사직설"
1655년(효종6) 조선 중기 종합농업기술서 "농가집성"
1872년(고종6) 조선 후기 문답식 종합농서 호영재(湖英齋)집 "농포문답"
1919년 일제 강점기 종합농업서적 "조선농업대전"
수생식물
수생식물은 수중의 영양 염류를 제거해 물을 정화하고
어류와 동물성 플랑크톤 등 각종 수생 생물의 산란과 서식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수생생물들은 생활형태에 따라 물속에서만 성장하는 침수식물,
뿌리를 물속 흙에 내리지 않고 수명에 떠다니는 부유식물,
뿌리는 물속에 내리지만 잎과 줄기가 물 위에 떠 있는 부엽식물,
습지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정수식물 등으로 나뉜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인 경장과 수리관개에 대한 내용을 연출한 전시공간이다.
가을철 농가의 풍경
우리에게 익숙한 가을철 농촌 모습을 친근한 농기구들과 함께 재현 전시한 공간이다.
체험마당
양평 산나물 탁본체험, 올바른 식습관을 위한 동영상, 양평 특산물 지도, 포토존 등이 있다.
양평의 산나물
양평 특산물인 산나물의 종류와 효능 및 먹는 방법과 지역 주요 재배지 등을 소개한다.
영상실에 들어갔더니 양평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컨셉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혼자서도 꿋꿋하게 영상물을 끝까지 시청했다.
엘리베이터 오른쪽 옆 커다란 공간에 항아리들이 예쁘게 줄지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갤러리 미지로 이동한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개관15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1층 갤러리 미지)
양평의병의 항일운동!
"동아시아의 빛이 되다"
입구는 폐역인 양평 구둔역이 겜성 충만하게 오버랩되어 꾸며져 있다.
첫 번째 "상흔을 거닐다"
양평의 근대문화유산 구둔역을 재현한 공간에서 기차를 타고 120여년 전으로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상흔을 입다"
일본의 근대화과정과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조선의 대응에 대해 다룬다.
양평 지평은 일제의 민비(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 후
지평 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명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지평의병은 이방인에 의해서 사진으로 기록되고, 책으로 발간되면서 기록으로 그 실체가 밝혀졌다.
영국의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한 맥켄지에 의해 발간된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맥켄지는 지평의병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의병장을 만나서 일본을 이길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의병장은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게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맥켄지는 또한 일본군의 잔악한 민간인 살해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우리가 많이 봐왔던 의병사진이 사실 맥켄지가 남겨놓은 지평의병의 사진이었다.
세 번째 "상흔이 남다"
양평의병의 항일투쟁이 동아시아 독립민족운동에 미친 영향과 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운요호 사건
청일전쟁
러일전쟁
괴뢰만주국과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 전쟁
의병의 역할과 기능
양평의병의 할약과 의미
양평의병의 기치(旗幟)
을미의병과 양평의병
양평의병의 탄생과 최후
동아시의 빛이 된 양평의병
남겨진 상흔은 치유하여야 한다.
헛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추모의 장이 이어진다.
한말 위정척사파인 유인석, 홍재학 등의 유생들과 함께 항일의병 투쟁을 전개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도총재로 선출되는 등 항일운동을 위해 한 평생을 받친
의병장 화남 박장호의 친필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서 한다. (화남)"
양평의병의 넔을 위로하고...
빛에 투영된 그림자로 오늘날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양담배 연기속에 사라지는 육십억환"
"간첩잡아 상금타니 나라좋고 나좋다"
예상치 못한 오랜 관람시간이었지만... 경기도 양평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워서 뿌듯함마저 느껴지는 유익한 관람이었다.
아내와 장모님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얼른 뛰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