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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 말세에 고통하는 때(1-9)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께 소속된 모임으로써,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세상과는 다른 모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관심도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세계에 관심을 둔 채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단지 종교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는 세상을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건 다시 오시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닙니다.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살았던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 곧 종말의 사건은 기쁨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임할 때, 세상의 형편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노아는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괜찮고, 다른 사람은 안되는 것입니까?
물론 노아도 세상 사람과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고하신 심판을 생각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곧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종말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다른 삶입니다.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의식이 사라졌기에, 현실이 보이게 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좋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하고, 돈이 함께 하는 것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고 하나 교회가 아닌 것이고, 종교단체의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이 말이 과연 여러분을 얼마나 긴장되게 합니까? 성도가 말세를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고 해도, 말세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고, 관심도 없다면, 말세를 믿지 않는 자와 다를 것이 뭐겠습니까?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때가 되었을 때, 참으로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야 돈이 생명인 것 같고, 육신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 되지만, 종말론적 의식으로 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든 상관없이, 종말 곧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의식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 되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말세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말세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세상은 말세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고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이 곧 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삶이 어렵고 힘들어서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말세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겪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면, 말세를 아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고통스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고통스러운 때는 언제입니까?
2-5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로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과연 이러한 것으로 고통스러워합니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자랑하는 것, 교만한 것, 비방하는 것’ 등, 말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성도라고 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남을 비방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 역시도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자신의 그런 것들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도가 말세에 대한 의식, 곧 종말론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에 소망을 둘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나의 성공이나, 자식의 출세, 재물, 그러한 모든 것들이, 결코 소망이 되는 것들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절감할 뿐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희생과 봉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사랑에 매어 있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비방하고, 거룩되지 못하고,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한 자기 실체일 때, 결코 덤덤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에게 매인 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 애통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말세의 때를 가리는 거짓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세의 때보다는, 현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불평하는 길로 이끌어 가버립니다.
6-7절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인을 유혹하는 것처럼,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를 유혹하는 것이 거짓된 교훈입니다. 거짓된 교훈의 특징은, 여러 가지 욕심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은 아무리 배운들, 진리에 이르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 역시 말세의 때를 살면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정체를 파악하면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말세의 때를 잊어버리고, 무엇이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여전히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거짓 교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행함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직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행함을 요구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소망을 두게 하는 거짓된 교훈으로부터, 그 마음이 돌아서야 합니다.
말세의 때에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만을 중심에 둘 때,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2. 성경의 유익(10-17)
하나님이시면서도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려죽으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2-5절)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은, 참으로 기가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떳떳하게 아무렇지 않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실상 자기 사랑에 매인 모습임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 사랑과 은혜를 언급조차 할 자격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드시면서 고치시고, 생명으로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크다는 고백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이 전부인 그의 나라를 구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의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의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기에,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하며 아파하기 마련입니다. 의가 미워하는 것은 곧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악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의를 향한 감각이 죽어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에 대한 감각이, 죽은 자의 상태와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6-7절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 내용에서 죽은 자의 상태와 같은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요즘 교회에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는 세미나가 성행합니다. 이 세미나의 취지는 말씀대로 살면, 가정이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곧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움으로써 인간의 실상을 발견하고, 내가 부인되어지고 낮아지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길로 이르고자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남겨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가정 행복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교인들을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으로 만들고, 목사를 잘 섬기는 추종자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남겨 놓으셨겠습니까? 왜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까? 이것이 자기 욕심으로 성경을 배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남겨 놓으신 것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14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성도가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하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자기 욕심으로 성경을 배웠다는 증거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할 일에 거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할 위치에 있는 디모데가, 과연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말하지 말고,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진리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것이 세상이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속이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해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으로 하와를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로, 말씀을 가볍게 여기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결국 사탄의 유혹에 불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자들이, 거짓된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속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배우고 확신할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서, 성경이 디모데에게 있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가정의 행복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열심도 아니고, 오직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성경을 배움으로 얻은 열매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이처럼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성경을 배움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주는 유익인 것입니다.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익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열심과 지식으로도,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온전해 질 수 있는 길은, 온전한 분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분의 온전함으로 인해서, 온전함의 혜택을 누리는 것만이, 죄인된 인간이 온전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고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 하셨음을 알게 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게 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욕심을 이루어주기 위한 도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고 듣기 때문에, 성경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아니 무엇을 배우기를 원합니까? 성경이 여러분에 어떤 유익을 주기를 원합니까?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마음을 두고자 하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 섭섭함을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는 것보다,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요?
3. 성경은(15-17)
성도는 성경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는 자로 오해를 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사건들, 곧 기적을 여러분은 모두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의 기적들은, 단지 자연 현상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처럼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홍해 사건을 믿고, 오병이어를 믿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사실 그대로 믿는 여러분과, 단지 자연현상을 신화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들을 사실 그대로 믿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성경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합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이 이런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기록된 것이겠습니까?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나눠주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다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의 떡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안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성경을 배우고 읽는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인 것이지, 단지 성경에 있는 기적의 사건들을 의심 없이 믿게 하기 위해,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성도는, 성경의 어떤 기적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일까? 아닐까?’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의 관계에 붙들리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에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도, 구원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육신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게 되면, 욕망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구원의 지혜에서는 멀어진 채, 성경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수준에 있으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사실로 믿는다고 해도, 기적을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세워 놓기 위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로 붙들어 놓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면서, 말씀을 대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이면서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자비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은 간절함이 없는 것이고, 아예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성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이미 세상에 빼앗겨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간절함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여전히 인간의 실상에 대해, 무지한 것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는, 다만 자신의 인생을 꽃피우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관심을 끌만한, 열심과 행동이 중요한 것이지, 구원의 지혜를 얻게 하는 성경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구원의 지혜를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는 행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17절을 보면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향한 중심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잘못됨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성도로 고침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되기를 소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우대하고 높이는 사람 되는 것을 꿈꾸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 바르게 되어 가고, 고침 받고 새롭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 자신들은 성도 됨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취미생활이 아니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