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자로 태어난 사람을 일컬어 ‘금수저’라하고 가난하게 태어나 못사는 사람을 ‘흙수저’라고 표현한다.
매스컴에서 이 말들을 자주 쓰지만 항상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현실적으로 금수저라는 도구는 있지만 흙수저는 없다.
물론 빈부의 격차를 극대화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말들의 어원을 벗어난 표현이 아닌지 알쏭달쏭하다.
영어에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고 표현하면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는 ‘운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은수저라면 값진 것이고 사치품이다.
이것은 동양에서 ‘비단을 감고 태어났다’는 말과 같다.
기독교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영세를 받는다. 이날 영세에 입회하여 어린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또 부모를 대신해서 종교 교육을 해주는 것이 대부, 대모이다.
사내아이들에게는 대부, 계집아이들에게는 대모가 선다. 대부와 대모는 영세 때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은수저를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 은수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반대로 ‘나무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양도 마찬가지인데,
수저는 물론 식기에 이르기까지 양반 계급에서는 은을 사용했고, 빈천한 서민 계급에서는 목기와 목수저를
사용하여 동서양 모두에서 은과 나무는 부귀빈천을 가리는 표징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금수저는 은수저로, 흙수저는 목수저로 바꾸어 사용해봄이 좋을 듯하다.
우리 세대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시골에서 태어난 목수저 출신이다.
어리 적 겨울에는 강추위에 친구들과 논에서 장갑도 끼지 않고 얼음 썰매 타며 손등이 터지는 줄 몰랐다.
그래도 은수저 쯤 되는 친구들은 따뜻한 옷에 장갑까지 끼고 썰매보다 몇 단계 고급인 아버지가 사준 스케이트로
폼 잡고 빙판을 가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 춘곤기라고 해서 쌀이 바닥나는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쌀이 부족하다보니 보리에 고구마나 감자를 섞어 양식으로 대용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나중에는 고구마에 질려 보리쌀만 골라 먹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시골에 적지 않은 집에서 양식에 없어 하루에 두 끼니 정도로 해결하고 그것도 한 번은 죽으로 대신했다. .
쌀과 보리 같은 주곡이 항상 부족하다보니 시골에서는 산에서 풀과 나무를 베어내고 말린 다음에 불을 놓고
화전을 일구었다. 지금 같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경작 방법이다. 거기에는 거름을 하지 않아도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라는 메밀을 심었다. 9월정도 되면 수확을 하여 곡식을 대신했다.
지금의 우리 삶의 수준은 거의 은수저 수준이다. 우리 세대와 달리 부족함을 모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기성세대가 해 줄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 의견으로서는 숲 같은 자연을 자주 접촉하여
인내력과 탐구심과 호기심을 키워주고 독서와 운동을 생활화 하여 인성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