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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 29살 청년 이병철은 대구에 三星商會를 설립한다.
방송(광고): (1953년) 믿고 찾는 백설표 제일제당,
내레이션: 그후 5,60년대를 거쳐 (1954년 제일모직공업 설립) 사세를 넓혀간 이병철은 삼성을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성장하는 데 한계가 오자 1983년 그는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이른바 2.8 도쿄선언이었다(1983.2.8). 국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사업을 밀어부친 삼성 (1983년 9월 12일 반도체 공장기공식), 사업을 전면에서 이끈 건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도 아닌 3형제 중 막내 이건희였다. 60년대 후반 삼성家를 뒤흔든 왕자의 난, 폭풍 속에서도 이건희는 묵묵히 대한민국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해 낸다 (1983년 12월 대한민국 첫 메모리 반도체 64K D램 개발 성공). 그리고 4년 뒤 (1987년 12월) 이건희는 형들을 제치고 삼성그룹의 수장이 된다. 반도체 그것은 삼성家 셋째 이건희의 승부수였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스물두 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삼성家의 셋째 이건희가 띄운 승부수 반도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삼성家의 승계 전쟁 또 왕자의 난도 함께 얘기가 나올 것 같죠.
이시원/배우: 저는 이건희가 셋째인 줄도 몰랐고 왕자의 난이 삼성에도 있었다구? 이렇게 낯설거든요.
허준/방송인: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이에요. 재벌家 싸움 중에는 현대家 정주영 아들들의 왕자의 난이 굉장히 관심이 많았죠. (현대그룹 왕자의 난 (2000년)-정몽구(차남) VS 정몽헌(5남) 경영권 승계다툼), 삼성家는 당연히 그냥 평화롭게 승계가 된 줄 알았거든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사실 역사에서 왕자의 난 중에서 대표로 떠오르는 게 있다면 막내 이방석을 죽이고 자기 형을 쫓아내고 (이방원-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조선 3대 국왕 태종에 즉위), 骨肉相爭이었잖아요. 얼마나 재벌 승계작업이 치열했으면 이걸 왕자의 난으로 표현했을까?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교 교수: 방원은 주도를 하고 그랬잖아요. 이건희 회장은 남들이 싸우면서 최후의 승자, 그렇죠. 漁父之利죠.
최태성: 세종이네요, 세종.
최원정: 세종도 셋째잖아요. 3남 충녕대군(세종), 3남 이건희
허준: 상황이 그렇다는 것,
이시원: 진짜 비슷하네요
박태균: 1969년 둘째였던 이창희씨가 아버지 이병철씨를 청와대에 고발을 해버립니다.
최태성: 왜요?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했다.
박태균: 이병철씨가 사카린 밀수 사건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복귀할려고 하니까 안 된다. 우리 아버지지만 이 양반은 비리가 많아서 안 된다 라고 해 가지고 그냥 청와대에 고발을 해버린 거예요.
이시원: 아버지한테 대항을 했다는 건데 보통은 왕자의 난 하면은 가장 우선은 우선 순위에 있는 후계자를 공격하지 않나요?
최태성: 첫째 형이 새자란 말이죠! 세자를 공격해야 되는데 아버지를 공격했단 말에요?
박태균: 일이 왜 이렇게 됐냐 하는 걸 이해할려면 1966년에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1964년, 이병철 회장, 한국비료공업 설립, 국내 첫民營 비료사업진출----------
박태균: 그 당시 비료공장을 세우기 위해서 여러가지 기계들을 수입을 해 오는데 일본에서 사카린 한 56톤 정도를 밀수를 한 거죠. 이걸 국내 유통을 시킬려고 했다가 부산 세관에 걸린겁니다.
최원정: 사카린 밀수사건 하면 김두환 의원의 오물투척사건이 너무 유명하잖아요. (국회오물투척사건 (1966.9.2)-국회의원 김두환이 정부를 추궁하면서 장관들에게 분뇨를 뿌린 사건), 총리랑 장관들한테 그냥 부었는데 그게 진짜 분노였어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최원정: 와~ 국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죠.
박태균: 장남 이맹희씨가 훗날에 자서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사실은 자신이 현장지휘를 했다 라고 하면서 이걸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서 벌인 밀수사건이었다 라고 했어요. 발각이 되니까 결국은 이병철 회장이 자기는 한국비료 공업을 국가에 헌납을 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 이렇게 되면서 그 당시 한국비료 상무였던 둘째 이창희씨가 감옥에 갑니다.
허준: 그것도 이상해요. 느거 아브지 삼성 사장이제? 둘째가 감옥에 가요? 분명히 첫째가 주도를 했다고 했는데~ 이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시원: 당시에 長男 위주였으니까 첫째는 못 보내겠다?
김동환/삼프로 티브대표: 60년대만 해도 아버지가 야~ 너 결혼해라! 그러면 결혼하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첫째를 보호하기 위해서 차남인 창희씨 보고 니가 좀 갔다온나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 것 같애요.
허준: 첫째가 家業을 이어야 하니 그럼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날 테니 첫째는 살려주시오 둘째야 네가 형을 위해 희생해라!
최태성: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데~
최원정: 대신 감옥에 가고 이러는 거!
김동환: 그리고 이제 맹희씨가 부회장으로서 그룹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경영을 맡겨 보니까 실적이 별로 안 좋아요. 이거 안 되겠다 다시 내가 해야 되겠다. 다시 이제 이병철 회장이 회장 자리로 복귀할려고 했고 그러고 나서 창희씨가 감옥까지 갔다 온 분이 나와서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사건이 터져버린 거죠.
이시원: 원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아니 가만보니까 자기는 한 몫 떼어주지도 않고 아버지가 다시 들어 앉고 이러니까 이거 오히려 당했다 싶은 거 아닐까요.
박태균: 여기서 이제 박정희 대통령은 판단을 해야 될 것 아녜요. 어디 天倫을 저버리고 아버지를 고발해~ 이러구 오히려 이거를 이병철 회장한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럼 이병철 회장이 어떻겠어요?
이시원: 자식이 어떻게 나를?
박태균: (허준씨에게) 연기 한 번 부탁해
허준: (얼굴 표정연기) 내 너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자리 하나 마련해 놨으니까 지방에 내려가서 거기서 조용히 공장장 해라!
박태균: 그러고 나서 이맹희씨도 여기에 관련이 있다고 판단을 해서 이맹희까지 경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허준: (얼굴표정) 첫째가 물러나면서 형이 이렇게 갈 순 없잖아! 형아, 아버지한테 이거 비밀이야!
이시원: 솔직히 첫째의 입장에서는 내 실력도 발휘 못했는데 아버지가 다시 들어앉아? 그럼 둘째를 꼬두길 수 있을 것 같애.
허준: 첫째와 둘째의 합작품~
최원정: 무슨 드라마 보다 더 흥미진진해요.
박태균: 근데 여기에 재미있는 스토리가 또 하나 있어요. 이맹희씨가 어릴 적에 같은 동네에서 놀던 사람이 전두환이야.
최태성: 왜 거기서 전두환이 나와
박태균: 박정희 대통령한테 투서를 전달한 게 당시 청와대 경비단 근무 전두환이었다. 이맹희씨가 이걸로 인해서 이제 밖으로 나가게 되고 父子의 갈등이 굉장히 심해지게 되고 그러면서 이병철씨가 돌아가실 때까지 첫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앙금이 풀어지지 않았다.
최원정: 그래서 이맹희씨가 삼성家의 사도세자다 라는 별명도 있잖아요.
최태성: 2012년 이맹희씨가 셋째 이건희를 소송건 적이 있었어요.
故이맹희/장남: 건희는 늘 자기 욕심을 챙겨왔습니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한 겁니다.
故이건희/3남: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이 제사에 나와서 제사 지내는 꼴을 내가 못 봤어요.
최태성: 이맹희라는 사람이 자꾸 나보고 건희~건희~ 라고 하는데 감히 내 이름을 부를 상대가 아니다. 그 사람 내 얼굴도 쳐다 보지 못한다.
최원정: 형인데?
최태성: 굉장히 激怒해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거 장난이 아니네.
허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최태성: 피도 눈물도 없구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이시원: 왕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父子之間도 없는 느낌, 권력과 돈이라는 게 뭔지
최원정: 첫째 둘째가 제거되면서 자동 승격이 된 거잖아요.
이시원: 金銀이 있었는데 갑자기 탈락해서 銅이 金메달이 됐네요.
박태균: 이병철씨의 회고록을 보면 사실은 셋째는 고려하지를 않았다는 거에요. 일단은 성격도 기업가로서는 맞지가 않다. 기업가는 기업도 잘 해야 하지만 다른 기업과의 관계 그 당시에는 정치가와의 관계 이런 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그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까 너는 들어와서 언론계에 좀 가 있거라. 그래가지고 해외에서 유학을 해서 들어왔고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니까 첫째도 안 되고 둘째도 안 되고 건희 네가 와서 맡아야 되겠다. 이렇게 된 거죠.
최태성: 완전히 로또 맞았네
최원정: 운이 엄청 좋은 거 같지 않아요? 우주의 기운이 쏟아지니까.
최태성: 그러니까
이시원: 이걸 굴러 들어온 복이라고 봐야 되나 업이라고 봐야 되나
김동환: 근데 이병철 회장도 성과위주의 경영을 굉장히 강조했던 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이건희 입장에서도 상당히 머리가 복잡했을 거예요. 당시에 장자승계의 전통이 강한 삼성 그룹의 입장에서 이른바 창업시기의 가신 그룹 이런 분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맹희가 경영권을 인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시탐탐 무슨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에요. 경영성과가 부진할 경우에 사실 장남이 경영자로서 복귀할 수도 있지 않나 라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경영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내레이션: 삼성가 왕자의 난 이후 창업주 이병철 밑에서 본격적인 후계 수업을 받게 된 이건희, 그런데 1970년대 터진 1,2차 오일쇼크 때문에 삼성은 물론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969년 오늘날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을 세워 가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삼성, 세계적인 불황에 핵심부품을 쥐고 있는 일본 업체들의 횡포까지 더해져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 깊은 고민에 빠진 이건희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회사인 한국 반도체가 파산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건희는 즉시 인수를 제안했지만 삼성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 (1974년 12월), 인수 뒤 적자가 계속 되었지만 묵묵히 반도체 사업을 주도한 이건희 (초기형 반도체(손목시계, 컬러티브이) 개발시작),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가 선택한 생애 첫번째 사업이었다.
최원정: 하필 경영 심판대 위에 올랐던 시기가 이제 오일 쇼크로 인해서 우리나라 경제가 매우 안 좋았던 상황이었군요.
김동환: 삼성 같은 경우도 전자산업을 막 시작한 경우였기 때문에 핵심소재 부품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을 해왔거든요. 근데 일본에서 부품 가격을 굉장히 높여 버린 거죠. 이건희 회장이 경영을 하면서부터 삼성그룹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죠.
이시원: 어떻게 하죠? 그걸 타개할 방법이~
김동환: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그때 아마 생각한 것 같애요. 머리 쓰는 산업을 해야지 그냥 임가공해서 수출해서는 그룹을 온전히 경영할 수 없겠다. 이런 생각을 그때 한 거라고요.
이시원: 머리 쓰는 사업이 바로 반도체였던 거예요. 엄청난 先見之明아닌가요? 어떻게 그 많은 사업 중에 반도체를 잠깐 보고 대단한 승부부예요. 자기 사비를 들여서 까지 인수까지 하고요.
최원정: 미래 먹거리=반도체 라는 통찰력이 있었다는 게 대단한 것이었어요.
이시원: 어디 미래에서 왔나
허준: 그 장면을 딱 따서 드라마에서 사람 장사는 이제 끝났다 이러면서
최원정: 진짜 미래에서 왔나
박태균: 이건희 회장이 60년대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MBA를 했는데 70년대 초에 실리콘 밸리를 많이 왔다 갔다 했다는 거예요. 요때를 보면 1975년이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를 창업한 해고 그리고 1976년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개발합니다.
최원정: 목격을 했구나.
박태균: 이제는 PC 라고 하는 컴퓨터의 시대가 오는 시대인데 그걸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시원: 그곳이 산삼밭인 줄 알았군요. 산삼 냄새를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맡았어요.
최태성: 아까 최초의 반도체 회사를 인수했다고 했는데 삼성이 최초의 반도체 회사가 아니었나 봐요?
김동환: 우리나라는 반도체 하면 삼성이잖아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성이 반도체를 처음부터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하시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1950년대 미국 유학을 하고 1960년대 모토롤라에 근무했던 강기동 박사라는 분이 계신데요. 이 분이 1974년에 한국 반도체 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우리나라 반도체의 효시가 되었는데 오일 쇼크가 이 회사를 망하게 한 거예요. 굉장히 힘들어지다 보니까 그걸 이제 당시에 이건희 회장이 50만 달러를 투자를 했는데 사재를 왜 투자를 했겠어요. 인수돈을 가져다 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반대하시는 거예요. 이병철 회장은 물론이고 회사의 중요 임원들이 다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 삼성이 막 티 브이를 만들 때 거든요. 반도체의 반자도 안 들어봤는데 이걸 한다고 하니까 중역회의 이런 데서 다 반대를 하니까 이건희 회장이 그래도 이건 해야 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한국 반도체 지분을 전량 인수를 하고 회사명을 삼성반도체 주식회사로 바꾼 것 까지 하게 돼죠.
박태균: 30대 초반의 이건희 회장은 정말 고민이 됐던 것 같애요. 어린 나이에 후계자처럼 된 것 아네요. 이병철 회장이 앉아 있는 데 바로 왼쪽에 이건희 회장이 앉아 있잖아요. 제가 (박태균 교수) 최원정 아나운서 왼쪽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역사저널 그날에서 안 짤리려면 뭔가 좀 보여줘야 되잖아요. 뭘 보여줄까 결단을 내렸다 이게 실패를 했다 그러면 이제 다 날라가거든요. 나중에 이건희 회장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반도체 사업이 자기 어깨를 엄청나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 젊은 왕세자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건데~ 당시에 간부들의 입장에서는 변화가 두렵기도 했을 것 같아요. 알지도 못한 거 했다가 괜히 나 길거리에 나 앉는 거 아냐 이런 걱정도 했을 것 같고요.
김동환: 이해를 하셔야 될 게 지금은 삼성이 세계 최고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있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때만 해도 60~70년대 삼성은 제일제당이다 제일모직이다 이런 거 하던 회사였고 그때 당시 금성사가 먼저 치고 나갔던 TV산업을 막 따라하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삼성은 사장단에서 우리가 먼저 그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이런 큰 산업을 처음 시작한다는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이시원: 반도체가 이건희의 승부수였네요.
최원정: 내가 후계자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생각한 건데 한국 반도체 인수해서 성공을 하나요?
김동환: 이병철 회장이 그러죠. 공장을 가보자 (1979년) 생산라인을 봤을 것 아녜요 뭐가 막 나오는데 하나에 얼마인데? 하니까 개당 1센트입니다. 그러면 그때 당시 매출이 20만 달러 밖에 안 되니까 거기서 완전히 실망을 해가지고 마! 치이라!
이시원: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중요한 사업이잖아요. 쉽게 넘어가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아버지 난관이 제일 힘들었겠네요.
김동환: 치이라! 그러면 치워야 되잖아요. 이거 해야 됩니다. 라디오 시계 텔레비 이런 데 다 들어가고 이거 계속 쓰일 거니까 지금은 적자 보더라도 이건 하셔야 됩니다. 설득에 설득에 성공한 거에요. 이병철 회장이 연말 연초에 일본에서 경영구상을 했거든요. 일본에서 한 동안 지내기도 하고 일본에 가보니까 반도체를 도루바꼬라고 하더래요. 그게 뭐냐하면 달러박스 dollar box다. 일본에서는 달러를 엄청나게 벌어드릴 수 있는 신종사업으로 일본이 했는데 일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거 우리 정부가 밀어주면 우리도 할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건희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최원정: 반도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땠어요?
박태균: 1980년초 요때가 한국정부도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예요. 뭔가 새로운 먹거리를 우리가 찾아야 되겠다. 그 당시에 전두환 정부에서 청와대에 경제 수석실에 비서관으로 계셨던 분인데 前과학기술부 부총리였던 오명씨가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을 합니다. 우리도 반도체 합시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반도체가 도대체 뭐냐? 설명 좀 해봐. 반자가 반대 反자야? 핼프 半자야?
최태성: 지금도 반도체가 뭔지 몰라요.
박태균: 임자가 한 번 설명 좀 해봐. 그래야 내가 이거 승인을 하지~ 여기 까지 온 거예요.
최태성: 대통령 상대로 반도체 맞춤 과외를 해야 하는 싯점인데, 그렇죠? 대통령이 뭔지 알아야 될 것 아녜요. 당시 전문가들은 전두환에게 반도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요?
--------------각하 맞춤특강 (제목: 半導體工業育成計劃), 1981년 5월 장소: 청와대, 반도체 이보다 쉬울 수 없다--------------
곽재식/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안녕하세요? 각하를 위한 반도체 특별브리핑을 하게 된 곽재식 교수입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곽재식: 오명 선생님께서 직접 나오셨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KBS가 섭외한 사람 곽재식이 대신 나왔습니다. 반도체가 좀 어렵기는 합니다만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각하께서 이해하실 수 있도록 쉽게 정말 정말 쉽게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우리 각하께서 지금 열심히 경청하고 계십니다.
곽재식: 자~ 각하,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요 거(칩), 보이십니까? 이게 바로 반도체라는 거죠. 아주 정말 작죠.
일동: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는데~
곽재식: (손바닥에 넣어서, 유튜버 스타일, 요즘 유행하는 감성으로) 정말 작지요, 이 반도체, 이 작은 반도체 하나가 각하의 운명을 우리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 보시면 철입니다. 철~ 철 같은 경우에 보시면 전기가 잘 통해서 불이 들어오죠. 고무 장갑에 연결해 보면 전기가 흐르지 않아요. 전기가 잘 통하는 물체를 전도체,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물건을 부도체 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도체 라는 건 뭐냐, 어떨 때는 전기가 통하고 어떨 때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 그런 걸 반도체(半導體)라고 합니다.
허준: 어떨 때 전기가 통해요?
곽재식: 좋은 질문 해주셨습니다. 각하, 각하께서 댁에 돌아가시면 영부인께서 맞아주시지 않습니까? 영부인을 보시면 전기가 찌릿하는 느낌,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 그걸 알 수 있거든요.
최태성: 진짜?
곽재식: 보통 사람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왜 그렇게 되느냐 콩깍지가 씌웠기 때문이지요. 아~ 얼굴 선이 아름답다, 어~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그런 식으로 특정한 재료에다가 도핑(불순물)을 넣으면, 실제로 도핑이라는 말을 써요. 약을 쳐 넣으면 그 재료의 성질이 약간 바뀌면서 전기가 통했다 안 통했다 하는 상태로 반도체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최원정: 콩깍지가 핵심이군요.
곽재식: 다음은 저희가 준비한 <半導體工業育成計劃> 자료를 보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반도체 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기 보시면 진공관이라는 부품을 대체하기 위한 재료다. 진공관이라는 것은 유리관을 만든 다음에 안에 여러 가지 전기회로를 집어넣고 내부는 진공이 되도록 공기를 빼가지고 만들어놓은 그런 전기전자 부품이거든요. 진공관은 어디에 쓰느냐? 옛날에 전신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가까운 거리 말고 길게 연결해 놓으면 아무리 해도 신호가 점점 약해 지면서 멀리 있으면 잘 안 들릴 것 아녜요. 그때 중간 중간에 진공관을 이용한 회로를 설치해 놓으면 어떤 신호가 오는지를 가지고 지가 판단을 해가지고 그 신호만큼의 복제된 더 강한 신호를 만들어가지고 다시 뿜어주는 역활을 하는 거예요.
허준: 그래서 스피커 앰프에 진공관이 쓰이는 거에요?
곽재식: 바로 그것입니다. 보시면 진공관이 크잖아요. 그리고 이게 열도 많이 나요. 열이 많이 난다는 말은 전기도 많이 먹는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말은 수명이 별로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고성능의 전자제품을 전기도 적게 들면서 만들려면 진공관을 능가하는 것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가장 기초적인 반도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 보시는 트랜지스터(Tr) 입니다. 트랜지스터의 경우는 크기도 작지요 훨씬 크기가 작은 이 정도의 부품으로 진공관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트랜지스터를 굉장히 작은 크기로 만들어 가지고 작은 칩모양을 안에 다가 조그맣게 설치를 해서 여러 개를 모아 놓은 회로 집적회로 라는 것을 만들게 되는 데요. 요게 조그마한 칩 안에 트랜지스터를 100개 정도를 말아넣어 연결해 놓은 것을 IC라고 합니다. IC에서 성능을 더 증가시킨 것 그런 부품을 LSI라고 하는 데요. 칩 하나에 1000개 수준의 트랜지스터를 집어넣고 연결시켜 놓은 것을 말합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트랜지스터 10만 개를 정도를 연결해 놓은 걸 그런 부품을 VLSI 라고 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 작은 반도체가 어디에 쓰이느냐 가전제품, 컴퓨터, 항공기, missile 까지 온갖 물건에 안들어가는 데가 없는 것이 반도체다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시원: 끄덕이셨어요! 지금 각하께서 이해하신 듯한 뒷모습이야.
곽재식: 이 차트가 손으로 그린 그림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이걸 손으로 그렸을까요. 저는 요 동그라미 그거는 이 정도 재능이 있으신 분이면 한 차관 정도 할 것이라고 봅니다.
최원정: 밥공기 엎어서 그린듯!
이시원: 이 계획이 당시 발표했던 그 건가요?
곽재식: 그 내용입니다. 동그라미의 완벽함 필체의 단정함에선 당시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관료들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렇게 정성스럽게 썼어요. 봐주세요.
이시원: 그리고 원의 그림자 보세요.
곽재식: 각하께서, 시청하고 계시니까 조금만 더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반도체는 뭘로 만드느냐? 반도체는 실리콘으로 만든다. 그래서 미국에 실리콘 밸리 라는 데가 있죠. 실리콘은 그러면 어디서 나느냐. 백사장 가면 널려 있는 모래가 있지 않습니까? 모래의 주성분인 이산화규소 (Si O2) 있거든요. 이산화규소를 영어로 하면 Silicon Dioxide 이산화규소, 모래의 주성분이 규소, 바로 실리콘입니다. 좋은 모래에서 잘 뽑아내면 반도체의 재료인 실리콘이 무궁무진하게 얻어질 수 있는 거죠.
허준: 저희가 흔히 생각하는 실리콘은요. 보형물 실리콘 말랑말랑한 고무 같은 느낌인데?
곽재식: 좋은 질문 해주셨어요. 영어로 쓰면 규소라고 할 때는 silicon 실리콘 이라고 쓰는데 보형물 실리콘 거기다 e자를 붙여가지고 silicone 실리코은 이라고 합니다.
허준: 다른 재료예요?
곽재식: 같은 재료입니다. 같은 규소를 이용해 가지고 규소 덩어리로 돌이나 금속처럼 있으면 반도체를 말하는 실리콘이고요. 그걸 주 재료로 해가지고 고무처럼 뽑아낸게 보형물 실리콘입니다.
이시원: 근데 반도체의 원재료가 모래 라면 진짜 널려 있는 게 모래잖아요. 갑자기 딱 뽑아낼 수 있겠는데요.
곽재식: 이게 사실은 매력이 있는 거예요. 좋은 산업이 있다 그런데 원재료가 석유라면 오일 쇼크 나가지고 석유값이 올라가면 망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세계 여기 저기에 다 있는 것 같은 모래, 실리콘으로 만드는 거죠. 실리콘을 모아서 단단하게 만들면 원통 모양이 됩니다. 이걸 얇게 썰어요. 소시지나 김밥 같이 썰듯이 얇게 썰어요. 썰어내면 썰어낸 한 단 모양 그거를 흔히 웨이퍼 (Wafer) 라고 합니다. 웨이퍼가 일본에 갔다오면 발음이 이상하게 꼬여가지고는 하는 발음이 웨하스입니다. 재료는 달라요. 배고프다고 반도체 뜯어서 드시면 안 됩니다. 그건 밀가루로 만든 거구요.
허준: 우리가 먹는 웨하스 과자가 영어로 웨이퍼 예요?
곽재식: 정답! 영문을 표기한 걸 잘 보세요. 웨이퍼에다 눈에 보이지 않게 회로를 그려넣고 필요 없는 건 깎아 내고 이런 걸 잘 해 가지고 반도체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걸 인제 짤라요. 깎아내기도 하고 하나 하나 반도체가 되는 것이고 그걸 반도체 칩 포장 안에 다 집어 넣으면 그렇게 하면 요런 완성품이 완성되는 겁니다. 새끼 손가락 크기의 이 반도체 64K D램 이라고 하는 반도체 이거든요. 이거 하나가 8천 글자 정도를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을 가진 반도체입니다. 여기에다 8천 글자를 새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불가능하죠. 그런데 반도체 힘으로는 그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1981년 현재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하는 반도체인 것입니다.
이시원: 필요성도 있고 중요성도 알겠고 원재료도 괜찮은데 이걸 우리 나라가 할 수 있나요?
곽재식: 저도 각하께서 뭘 우려하시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과연 이런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 우리는 과연 할 수 있느냐 그러는데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젖가락을 사용하는 손재주가 좋은 민족 아닙니까. 반도체야 말로 우리 민족의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우리 노동자들 우리의 기술진과 학자들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금만 지원해 주신다면 말이죠. 그러면 우리도 곧 일본 못지 않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일본을 뛰어넘는 반도체의 꿈 한번 꾸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모든 것은 다 각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각하, 삼청교육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삼성전자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뭘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일동: 박수갈채!!!
최원정: 아니 어쩌면 각하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할 수 있을까요.
최태성: 삼청교육대냐 삼성전자냐 선택하십시오.
허준: 사람들은 삼성전자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원정: 반도체 일타 강사의 명품강의였습니다.
곽재식: 감사합니다(퇴장).
최원정: 이 정도면 우리 각하께서 충분히 이해가 되셨을 거예요. 저 자료가 당시 실제로 있었던 겨죠?
박태균: 대통령 전두환이 서명한 1981년 5월 상공부 작성 <半導體工業育成計劃>
최태성: 진짜 있었던 자료네요.
이시원: 정말 정성들여서 작성한 것 같았어요.
최원정: 사인이 진짜 사인인 거죠?
박태균: 네~ 진짜 사인입니다.
이시원: 그럼 결재가 떨어졌던 거네요.
박태균: 반도체 기초기술개발에 국가 예산 200억원이 지원됩니다 (82~86년). 이건 아주 큰 돈입니다. 여기에 200억원을 지원한다고 하면서 반도체 관련시설이나 원자재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하하는 반도체 공업육성계획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시원: 정부만 도와 주면 이 반도체 산업도 승산있겠다 했는데 잘 풀리고 있네요.
박태균: 결국에 가서는 83년 2월에 동경에서 반도체 사업진출을 알리는 도쿄선언을 하게 됩니다.
최태성: 사람이든 국가든 정말 도약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포항제철, 첫 쇠물이 쏵~ 흘러나오는 엄청난 순간, 또 현대자동차 독자 개발해서 포니 자동차 출고하는 순간, 삼성의 경우에도 반도체 산업에 진출선언의 그 순간이야 말로 역사적 장면이겠네요.
이시원: 다 크고 큰데 예 (KM 4164 B-12 903C KOREA)는 정말 작네요.
김동환: 그런데 도쿄 선언을 보고 세계 여론이 어떠냐 하면 intel은 과대망상증 환자다. 미스비시가 뭐라고 했냐면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는 이유 라는 정식 보고서를 내요. 기술없지, 돈도 별로 없지, 거기다가 시장도 열악한데 너희가 반도체를 성공한다구 오히려 이것 때문에 망할 걸~ 이런 분위기 예요.
이시원: 이거 뭐 저주하는 거 아녜요
최원정: 저번에는 GM 한국대표가 자체 자동차를 개발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했잖아요. 해외에서 비웃으면 슈퍼 파워 모드로 바뀌잖아요.
박태균: 이 상황에서 삼성은 제일 먼저 뭘 했을까요?
허준: 우리나라에서 말도 안되는 것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뭘 했느냐면 외국으로 나가서 보고 왔어요.
최태성: 그렇지, 정주영 회장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좋은 게 뭔지 알어? 다른 나라가 개발해 놨어 우리는 거기서 출발하면 돼 그런거 아니었어 따라잡기
이시원: 일을 시작할 때는 좋은 기운을 모아서 시작해야 해요.
김동환: 땅을 샀을 것 같네요.
이시원: 원재료가 모래였잖아요. 해수욕장에서 모래를 확보하는 거예요.
최태성: 경포대 사버려?
-----------64K D램 개발팀의 첫번째 과제는?
최원정: 왜 산으로 가요?
-----------KBS<다큐멘터리 극장> (1994년), 1983년 5월 무박2일 행군------------
최원정: 행군거리 무려 64km
-----------문상영(윤다훈 분)/64K D램 개발팀 -64K D램이니까 64km지 256K D램이었으면 진짜 죽을 뻔 했다.
-----------5월의 따가운 햇볕에 이른 더위까지
----------반도체 사업시작: 삼성이 제일 먼저 한일은?
---------한반도를 반도체로(?) <반도체의 신조> 암기 테스트, 다음~ 불합격,
반도체의 신조
하나. 큰 목표를 가져라
하나.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진다
하나.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하나. 이유를 찾기 전에 자신 속의 원인을 찾아라
하나. 겸손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라
하나.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기록을 남겨라
하나. 무엇이든 숫자로 파악하라
하나. 철저하고 습득하고 지시하고 확인하라
하나. 항상 생각하고 확인해서 신념을 가져라
최원정: 이걸 암기해서 외워야 하는 거예요?
이시원: 틀리면 식사금지?
최태성: 극기훈련이네요, 극기훈련~
최원정: 진짜 힘들었겠다.
박태균: 정신력으로만 성공할 순 없지만 정신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 도착, 팀원들 다 들 땅에 쓸어지다.
최원정: 이 정도되면 군대 재입대한 거나 비슷한 거 아네요?
이시원: 요즘은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허준: 이게 삼성에서 일어난 일이라고요?
김동환: 1989년에 삼성 입사했거든요.
최원정: 누가요?
김동환: 제가요, 1990년 연수를 받았죠. 비슷했습니다. (옛추억) 튜레이닝 입고~ 삼성이 반도체에서 대성공을 했기 때문에 웃으면서 기억을 이야기 하지 실패했으면 저러니까 실패했지, 반도체라는게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해요. 기술개발을 했는데 만약에 제조가 조금 늦어지면은 수조원, 수십조원도 손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마 저런 극기훈련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병철 회장이 지시하는데~ 내가 아까 땅 얘기했잖아요.
故이병철/삼성그룹회장: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물 맑고 공기좋고 고속도로 진입이 쉬운 땅 5만평을 알아봐라!
이시원: 그런데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운데요.
박태균: 조건이 하나 맞물린게 뭐냐면 그린 벨트가 있었잖아요. 개발 아직 덜된 지역들이 있습니다. 그땐 아직 여기가 일산-분당이 뜨기 전의 일입니다. 반도체 부지지역으로 기흥을 선택한 것입니다.
최태성: 그 다음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보여요. 자~ 빨리 빨리, K-건설 스타일로 시작, 빨리 빨리 이거 아닙니까.
박태균: 선대회장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거예요. 일단 참을성이 없어, 뭘 하면 빨리 빨리 끝내야 돼, 포항제철-3년 만에 끝내, 조선소도 배 팔아놓고 조선소를 지었잖아요,
김동환: 그게 무대뽀 정신인데 공장지으면서 뭘 했겠어요. 해외에서 장비를 샀을텐데~ 반도체 장비라는게 매우 정밀해서 이게 쿵쾅 쿵쾅하고 움직이면 고장이 날 수 있단 말예요. 장비가 김포 공항에 도착을 합니다. 근데 문제가 뭔가 하면 긴 공장을 거의 완공하는 무렵인데 진입로 4km가 비포장도로인 거에요. 비싼 장비 수입해서 가는데 덜컹덜컹 하면 어떻게 돼요. 근데 갑자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허준: 왜요?
김동환: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거에요.
허준: 가는 동안에 아스팔트를 깔았어요?
이시원: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김동환: 전 직원 다 나와 도로 다지고 콘크리트 타설하고 다 말려버린 거에요. (한나절 만에 4km 길을 만들어버린 底力)
최태성: 한나절만에 4㎞를 깔아버린거에요.
최원정: 믿을 수 없다
허준: 도착했다고? 길 만들어!!
최태성: 야~ 진짜 엄청나구나.
박태균: 저 방위 받을 때 생각해 보면 선임하사가 요기서부터 저기까지 아스팔트 깔면 퇴근이야 그러면 무조건 6시까지 다 갑니다. 이때도 아마 방위가 동원되지 않았나 봅니다. 어쨌던 그렇게 해가지고 생각했던 것 보다 일반관례보다 3분의 1 시간에 완공을 합니다. (1983년 8월~1984년 3월 6개월만에 반도체 공장 완공),
최원정: 직접 참여하셨던 분의 얘기를 안 들어 볼 리 없잖아요. 그래서 모셨습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문상영/64K D램 개발담당: 안녕하십니까? 저는 1983년 메모리 반도체 64K D램 개발에 직접 참여한 문상영 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허준: 64㎞ 달리신 분이죠?
문상영: 네, 저 맞습니다.
최원정: 40년 전이에요, 그때 기억이 생생하신가요?
문상영: 처음에 64K D램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이병철 회장님께서는 좀 연로하셔서 정신이 좀 나가셨구나. 큰 일 났다. 진짜로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실 1971년도에 1K D램이 미국의 인텔에서 개발이 되었어요. 그리고 순차적으로 4K-16K 그 다음에 10년이 지나서 1981년에 64K D램 개발이 됐죠. 그걸 우리가 다 건너뛰고 바로 64K D램을 개발하겠다고 하니까 너무 황당하더라고
최원정: 웨이퍼 라는 단어가 뭔지 몰라서 사전 찾아보니까 과자라고 되어 있어서 우리가 웬 과자를 만든다고? 그러셨다구
문상영: 반도체 전문용어 조차 어느 분야에서는 몰랐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시원: 진짜 맨 땅에 해딩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문상영: 어차피 저희는 원천기술이 없으니까 선진국에서 배워와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문제는 기술을 가르쳐줄 회사가 없었던 거에요.
최태성: 그럼요, 기밀일수도 있는데~
문상영: 그래서 당시에 이건희 부회장님이 미국의 몇몇 회사에 가서 기술 좀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콧방귀도 안뀌고 문전박대를 당한 걸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이크론 (Micron)이란 회사가 자금난에 빠져 가지고~ 이런 얘기를 들은 거죠. 기술이전 명목으로 400만 달러를 내고 기술을 받기로 한 거죠. 부품 꿈을 안고 마이크론 본사로 갔습니다. 근데 첫날 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거예요(연수팀 노트에 적힌 기록). 심지어는 컴퓨터 모니터를 봤다고 쫓겨나고 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 설마 우리가 진짜로 배우러 오겠나 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당시에 일본 샤프(Sharp)社로 연수를 갔었습니다.
이시원: 뭐를 재는 느낌?
문상영: 왜냐면 칫수가 굉장히 중요한데 절대 안 가르쳐주는 거죠. 그렇다고 자를 달고 갈 수가 없으니까 몸으로 칫수를 쟀습니다(신체 부위를 이용해), 보폭이라든지 한 뼘의 길이라든지 팔 길이라든지 손가락 길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 동원해서 칸 수를 재기 시작한 거죠. 저두 그때 몸 사이즈를 처음으로 다 알게 됐어요.
최원정: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겠어요. 빨리 해서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 같애요.
문상영: 근데 막상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게 같은 비행기에 한꺼번에 타서 오지 말고 한 명씩 다른 비행기에 타고 따로 따로 오라고 그러더라고, 83년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미리 대비를 하라는 조처였던 거죠.
허준: 직원들이 포트폴리오가 된 거네요.
문상영: 사람의 가치보다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술정보 기술능력 이것이 더 소중했으니까
최태성: 다소 씁쓸한 현실~
최원정: 연수 끝내고 한국에 와서 성공하셨나요?
문상영: 아니죠, 한국에 와서 수없이 만들어 봤는데 수없이 불량이 많이 나오는 거죠. 퇴근은 꿈도 못꾸고 그러던 어느날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낳았는데 한 번 와 봐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눈치를 보다가 상사에게 말을 꺼냈죠. 집에서 출산을 했는데 나가 봐야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딱 쳐다 보면서 니가 애 낳았냐?
최원정: 사모님한테 엄청 원망 받으시겠어요.
문상영: 결국 그 때는 못가고 나중에 봤는데 제 아내의 눈치를 보는 것 중의 하나가 그겁니다.
최원정: 64K D램은 언제 개발에 성공한 거예요?
문상영: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가 이병철 회장께서 도쿄 선언을 한 그해 12월에 개발에 성공을했죠. 양호한 반도체가 딱 탄생한 거죠.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제일 많이 놀랬는데 왜냐하면 도쿄선언을 하셨을 때 그때 일본의 반응이 너네가 무슨 메모리 반도체를 한다고 그러냐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걸어라 뛰어라 하는 것과 똑 같다 라는 비아냥을 언론에서 많이 했습니다. 그런 일본한테 정말로 우리의 실력을 보여줬다 라고 하니 성취감이나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최원정: 세상이 발칵 뒤집혀진 거예요. 선생님과 직원들이 만들어낸 64K D램이 2013년에 국가등록 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신 오늘의 주인공이십니다.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태성: 반도체가 이건희 회장을 살렸네,
최원정: 그래서 삼성의 제2의 창업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박태균: 삼성의 이미지가 바뀐 겁니다. 설탕 밀가루 만들던 회사가 반도체 회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김동환: 삼성 사람들이 이런 얘기합니다. 삼성 전자가 있고 후자가 있다.
최원정: 반도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출했는데 그 후에 꽃길만 걷게 되는 건 아니지요.
김동환: 사실 메모리 하면 종주국이 미국이잖아요. 일본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많은 지원을 해가지고 일본이 새로운 강자가 되잖아요. 이른바 반도체 치킨 게임이라는 게 시작이 돼요. (치킨 게임-양쪽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피해를 무릎쓰며 극한으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 치킨게임이라는 게 뭐냐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걸 말하는데 일본에서 한국을 저렇게 키우려다가는 큰일 나겠다 해서 덤핑을 시작합니다, 64K D램 가격이 원래 개당 3달러수준이었어요. 근데 이게 1985년에 개당 30센트까지 10분의 1로 폭락합니다. 당시에 삼성이 만드는 64K D램의 제조원가가 얼마냐면 1.7달러였어요. 하나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가 커지는 상황이에요. 누적 적자가 이걸로 인해서 1200억원까지 내려 갑니다 (1984년~ 1987년), 지금은 1200억원이 삼성전자 기준으로는 얼마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최원정: 1200억원이 별거 아니라고~?
이시원: 스케일에 놀라요.
김동환: 아직도 적응을 못하시네, 이때 당시를 현재로 환산하면 수조원 이상의 막대한 적자가 난 건데 당시에 이러다간 정말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최태성: 미국이나 일본은 그동안 돈 많이 벌어서 버틸 수 있지만 삼성은 지금 개발비 회수를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이쯤되면 이건희 퇴출인데요.
박태균: 굉장한 위기가 온 건데 이게 또 위기가 기회가 되버려요. 1986년에 반도체 전체 생산량과 매출액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합니다. 미국 쪽에서 그때 뭔 얘기까지 나왔느냐면 이건 제2의 진주만 공습이다. 예전에는 일본이 그걸 비행기로 와서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건 그것에 비견될 만한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큰 거 한 방 날린 거다. (일본의 약진에 큰 충격을 받은 미국),
최태성: 미국에는 충격이었구나.
이시원: 그럼 미국이 가만 있질 않을텐데?
박태균: 그렇죠, 그래서 이제 미국이 몇 가지 조치를 하는 데요. 덤핑 판정을 써버리는 거죠. 덤핑 마진율을 188%를 때려버립니다.
김동환: 미일 반도체 전쟁의 국면이라는 게 삼성한테는 어마 어마한 호제가 되는 데 사실 덩핑을 치다 보니까 미국 업체들은 인건비에다 워낙 원가가 높으니까 손을 들어벌이는 상황이 됐고 일본은 미국에 괘씸죄가 걸린 거죠. 일본 회사들은 미국의 보복에 생산량을 축소합니다, 공급이 축소된 상황이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64K D램 가격이 폭등하는 데 1985년도 개당 30센트가 1988년에 개당 6달러까지 치솟아요. 그러니까 누적적자가 1200억원이었잖아요. 다 갚고 3200억원 흑자를 기록해요. 그러니까 이게 완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어요. 그게 반도체 산업의 특성이에요. 반도체 산업은 호황일 때는 엄청 돈을 벌다가 불황일 때는 엄청나게 적자를 보는 거에요. 수십 조를 벌다가 수십 조 적자도 나는 그런 산업이라고요.
이시원: 사업은 운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맞아떨어져서 삼성이 살아나네요.
김동환: 운이라고만은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게 운이란 건 적은 돈을 벌 수는 있어요. 근데 이렇게 세계 1등 기업을 만드는 데 운만 작용한다 그거 아니고 준비를 했다는 거죠. 그게 R&D 투자인데 이게 엄청난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돈을 벌 때나 돈을 못 벌 때나 계속 기술 개발비를 넣어야만 1등을 할 수 있잖아요. 근데 그때 분위기가 뭐였냐하면 이게 돈을 벌긴 버는 데 계속 새로운 라인 증설하고 새로운 장비를 사대니까 중역들 마저도 회장님 총기가 좀 떨어지셨나 적당히 좀 챙기셔야 되는 데 계속 넣네, 이런 분위기 마저 있었다구요.
최원정: 외발 자전거 산업이라고 하잖아요. 잠시 주춤하면 그냥 쓸어지고 마니까 계속 투자하고 가동해야 돼요.
김동환: 일본 회사들은 그걸 안 했다는 거예요. 벌었을 때 조금 R&D 하고 적자가 나면 R&D 투자 스톱하고 근데 이병철 이건희 부자는 벌 때나 못 벌 때나 계속 투자를 한 거죠. 그게 결국은 일본 반도체 위에 삼성 반도체가 올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 데 그래서 후일담은 이렇게 얘기해요. 일본은 최고 경영자 위주의 보수적인 경영을 했고 삼성은 오너 경영의 강한 추진력이 만들어낸 결과 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허준: 또 가장 유명한 건 연구진 처럼 이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우리가 반드시 일본 넘어서야 돼 그리고 정말 끊임 없이 노력해 주었던 연구진 직원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아마 지금의 초격차 1위 기업이 탄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원정: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량의 20%를 차지한다고 그러잖아요. 이건희의 이 승부수가 지금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정말 그 순간을 우리가 목격을 했습니다.
최태성: 비전을 제시했던 리더쉽과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팔로우쉽 이런 것들이 단단하게 이루어지면서 그 기적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김동환: 요즘 우리 경제를 되게 걱정을 많이 하잖아요. 어려운 것도 사실인데 그런데 사실 저는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고 봐요. 제조업 분야에서 우리가 철강 자동차 반도체 까지 봤잖아요. 근데 우리가 어느 틈엔가 2차 산업에 굉장히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됐고 로봇 AI 산업에 우리 연구진들이 계속 전력 투구하면 70~80년데 이룬 기적을 2020년대에 못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밖에서 볼 때 우리 한국의 경쟁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하다 라는 것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태균: 우리 경제가 변신해야 될 때에 그 혁신이 잘 이루어진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희가 또 한번 전환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국가와 기업의 정책이 혁신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반면에 왕자의 난 같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원정: 지금 우리가 경제가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비전을 내놓고 노력을 하면서 다른 역사를 쓸 준비를 하고 있지를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오늘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22회 이건희의 승부수 반도체에서 정리).
내용 요약
①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 29살 청년 이병철은 대구에 三星商會를 설립한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공업 설립, 그후 5,60년대를 거쳐 사세를 넓혀간 이병철은 삼성을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성장하는 데 한계가 오자 1983년 그는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半導體 사업을 위한. 이른바 2.8 도쿄선언이었다(1983.2.8). 국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사업을 밀어부친 삼성 (1983년 9월 12일 반도체 공장기공식), 사업을 전면에서 이끈 건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도 아닌 3형제 중 막내 이건희였다. 60년대 후반 삼성家를 뒤흔든 왕자의 난, 폭풍 속에서도 이건희는 묵묵히 대한민국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해 낸다. 1983년 12월, 대한민국 첫 메모리 반도체 64K D램 개발 성공. 그리고 4년 뒤 1987년 12월, 이건희는 형들을 제치고 삼성그룹의 수장이 된다. 반도체 그것은 삼성家 셋째 이건희의 승부수였다.
얼마나 재벌 승계작업이 치열했으면 이걸 왕자의 난으로 표현했을까. 이방원은 주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漁父之利였다. 1969년 둘째였던 이창희씨가 아버지 이병철씨를 청와대에 고발을 해버린다. 이병철씨가 사카린 밀수 사건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복귀할려고 하니까 안 된다. 우리 아버지지만 이 양반은 비리가 많아서 안 된다 라고 해 가지고 창희씨가 그냥 청와대에 고발을 해버린다. 1966년에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된다. 1964년, 이병철 회장, 한국비료공업 설립, 국내 첫民營 비료사업이다. 그 당시 비료공장을 세우기 위해서 여러가지 기계들을 수입을 해 오는데 일본에서 사카린 56톤 정도를 밀수를 하였다. 이걸 국내에 유통 시킬려고 했다가 부산 세관에 걸린 것이다. 사카린 밀수사건 하면 1966.9.2. 국회의원 김두환이 정부를 추궁하면서 장관들에게 분뇨를 뿌린 사건이다.
② 장남 이맹희씨가 훗날에 자서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였다. 사실은 자신이 현장지휘를 했다 라고 하면서 이건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서 벌인 밀수사건이었다 라고 했다. 발각이 되니까 결국은 이병철 회장이 자기는 한국비료 공업을 국가에 헌납을 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 이렇게 되면서 그 당시 한국비료 상무였던 둘째 이창희씨가 감옥에 간다. 첫째가 주도를 했는데 둘째가 감옥에 갔다. 당시에 長男위주였으니까 첫째는 못 보내겠다. 60년대만 해도 아버지가 야~ 너 결혼해라! 그러면 결혼하는 시대였다. 그러니까 첫째를 보호하기 위해서 차남인 창희씨가 대신 감옥에 간 것이다. 첫째가 家業을 이어야 하니 그럼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날 테니 첫째는 살려주시오. 둘째야 네가 형을 위해 희생해라! 그리고 맹희씨가 부회장으로서 그룹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그런데 경영을 맡겨 보니까 실적이 별로 안 좋았다. 이거 안 되겠다 내가 다시 해야 되겠다. 이병철 회장이 회장 자리로 복귀할려고 했고 그러고 나서 창희씨가 감옥까지 갔다 온 분이 나와서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한 것이다. 여기서 이제 박정희 대통령은 판단을 해야 된다. 어디 天倫을 저버리고 아버지를 고발해~ 이러구 오히려 이걸 이병철 회장한테 얘기를 하였다, 그럼 이병철 회장은 자식이 어떻게 나를? 그러고 나서 이맹희씨도 여기에 관련이 있다고 판단을 해서 이맹희까지 경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첫째의 입장에서는 내가 실력도 발휘 못했는데 아버지가 다시 들어앉아? 그럼 둘째를 꼬두길 수 있다. 첫째와 둘째의 합작품~ 근데 여기에 재미있는 스토리가 하나 있다. 이맹희씨가 어릴 적에 같은 동네에서 놀던 사람이 전두환이다. 박정희 대통령한테 투서를 전달한 게 당시 청와대 경비단 근무 전두환이었다. 이맹희씨가 이걸로 인해서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父子의 갈등이 굉장히 심해지게 되었다. 이병철씨가 돌아가실 때까지 첫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앙금이 풀어지지 않았다.
③ 2012년 이맹희씨가 셋째 이건희를 소송한 적이 있었다. 故맹희씨는 건희는 늘 자기 욕심을 챙겨왔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하였다. 故이건희씨는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이 제사에 나와서 제사 지내는 꼴을 내가 못 봤다. 이맹희라는 사람이 자꾸 나보고 건희~건희~ 라고 하는데 감히 내 이름을 부를 상대가 아니다. 그 사람 내 얼굴도 쳐다 보지 못한다. 형인데 굉장히 激怒해서 이야기 하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첫째 둘째가 제거되면서 자동 후계자가 됐다. 이병철씨의 회고록을 보면 사실 셋째는 후계자로 고려하지를 않았다. 일단은 성격도 기업가로서는 맞지가 않다. 기업가는 기업도 잘 해야 하지만 다른 기업과의 관계 그 당시에는 정치가와의 관계 이런 게 중요하였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까 너는 들어와서 언론계에 좀 가 있거라. 그래가지고 해외 유학을 해서 들어왔고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니까 첫째도 둘째도 안 되고 건희 네가 와서 맡아야 되겠다. 이렇게 된 거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은 성과위주의 경영을 굉장히 강조했던 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이건희 입장에서도 상당히 머리가 복잡했을 거다. 당시에 장자승계의 전통이 강한 삼성 그룹의 입장에서 이른바 창업시기의 가신 그룹 이런 분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맹희가 경영권을 인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시탐탐 무슨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경영성과가 부진할 경우에 사실 장남이 경영자로서 복귀할 수도 있지 않나 라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경영을 했을 것이다.
④ 삼성家 왕자의 난 이후 창업주 이병철 밑에서 본격적인 후계 수업을 받게 된 이건희, 그런데 1970년대 터진 1,2차 오일쇼크 때문에 삼성은 물론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969년 오늘날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을 세워 가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삼성, 세계적인 불황에 핵심부품을 쥐고 있는 일본 업체들의 횡포까지 더해져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 깊은 고민에 빠진 이건희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회사인 한국 반도체가 파산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건희는 즉시 인수를 제안했지만 삼성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그는 1974년 12월, 자신의 사비를 털어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 인수 뒤 적자가 계속 되었지만 묵묵히 반도체 사업, 손목시계 칼라 TV 개발을 주도한 이건희,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가 선택한 생애 첫번째 사업이었다. 삼성 같은 경우도 전자산업을 막 시작한 경우였기 때문에 핵심소재 부품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을 해왔다. 근데 일본에서 부품 가격을 굉장히 높여 버렸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을 하면서부터 삼성그룹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그때 아마 생각한 것 같다. 머리 쓰는 산업을 해야지 그냥 임가공해서 수출해서는 그룹을 온전히 경영할 수 없겠다. 이런 생각을 그때 하였다. 머리 쓰는 사업이 바로 반도체였다. 엄청난 先見之明이 아닌가. 어떻게 그 많은 사업 중에 반도체를 잠깐 보고 결단 대단한 승부수다. 자기 사비를 들여서 까지 인수하고, 미래 먹거리=반도체 라는 통찰력이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
⑤ 이건희 회장이 60년대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MBA를 했는데 70년대 초에 실리콘 밸리를 많이 왔다 갔다 했다. 요때를 보면 1975년이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를 창업한 해고 1976년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개발한다. 그걸 목격을 했다. 이제는 PC 라고 하는 컴퓨터의 시대가 오는 시대인데 그걸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나라는 반도체 하면 삼성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성이 반도체를 처음부터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건 아니다. 1950년대 미국 유학을 하고 1960년대 모토롤라에 근무했던 강기동 박사라는 분이 계시다. 이 분이 1974년에 한국 반도체 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우리나라 반도체의 효시가 되었는데 오일 쇼크가 이 회사를 망하게 한 거다. 굉장히 힘들어지다 보니까 그걸 당시에 이건희 회장이 50만 달러를 투자 했는데 왜 사재를 투자를 했겠나. 인수할 돈을 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반대다. 이병철 회장은 물론이고 회사의 중요 임원들이 다 안 된다는 거다. 왜냐하면 그때 삼성이 막 TV를 만들 때다. 반도체의 반자도 못 들어봤는데 이걸 한다고 하니까 중역회의 에서 다 반대를 하니까 이건희 회장이 그래도 이건 해야 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고 한국 반도체 지분을 전량 인수를 하고 회사명을 삼성반도체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⑥ 30대 초반의 이건희 회장은 정말 고민이 됐다. 어린 나이에 후계자처럼 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앉아 있는 데 바로 왼쪽에 이건희 회장이 앉아 있다. 뭘 보여줘야 한다. 뭘 보여줄까 결단을 내렸다가 그게 실패를 한다면 다 날라가 버린다. 나중에 이건희 회장이 그런 얘기를 했다. 반도체 사업이 자기 어깨를 엄청나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해를 해야 될 게 지금은 삼성이 세계 최고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있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때만 해도 60~70년대 삼성은 제일제당이다 제일모직이다 이런 거 하던 회사였고 그때 당시 금성사가 먼저 치고 나갔던 TV산업을 막 따라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삼성은 사장단에서 우리가 먼저 그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이런 큰 산업을 처음 시작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반도체는 이건희의 승부수였다. 이병철 회장이 그랬다고 한다. 1979년 공장을 가보자. 생산라인을 봤다. 뭐가 막 나오는데 하나에 얼마인데? 물으니까 개당 1센트입니다. 그때 당시 매출이 20만 달러 밖에 안 되니까 이병철 회장은 거기서 완전히 실망을 하였다. 아버지 난관이 제일 힘들었다. 치이라! 그러면 치워야 되는데 이거 해야 됩니다. 라디오 시계 텔레비전 이런 데 다 들어가고 이거 계속 쓰일 거니까 지금은 적자 보더라도 이건 해야 됩니다. 결국 설득에 성공하였다 이병철 회장이 연말 연초에 일본에서 경영구상을 한다. 한동안 일본에서 지내기도 하고 일본에 가보니까 반도체를 도루바꼬라고 하였다 그게 뭐냐하면 달러박스 dollar box다. 일본에서는 반도체 사업을 달러를 엄청나게 벌어드릴 수 있는 신종사업으로 일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이것 우리 정부가 밀어주면 우리도 할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건희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⑦ 1980년초 한국정부도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뭔가 새로운 먹거리를 우리가 찾아야 되겠다. 그 당시 전두환 정부 청와대에 경제 수석실에 비서관이었던 前과학기술부 부총리 오명씨가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했다. 우리도 반도체 합시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반도체가 도대체 뭐냐? 설명 좀 해봐. 반자가 반대 反자야? 핼프 半자야? 지금도 반도체가 뭔지 모른다. 대통령 상대로 반도체 맞춤 과외를 해야 하는 싯점이다. 대통령이 뭔지 알아야 되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전두환에게 반도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 각하 맞춤특강, 제목: 半導體工業育成計劃, 1981년 5월 장소: 청와대, 각하를 위한 반도체 특별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반도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대통령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 쉽게 정말 쉽게 설명을 하였다. 반도체는 아주 작다. 이 반도체, 이 작은 반도체 하나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철은 전기가 잘 통한다. 고무 장갑에 연결해 보면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전기가 잘 통하는 물체를 전도체,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물건을 부도체 라고 한다. 그러면 반도체 라는 건 뭐냐, 어떨 때는 전기가 통하고 어떨 때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걸 半導體라고 한다. 특정한 재료에다가 도핑(불순물)을 넣으면, 그 재료의 성질이 약간 바뀌면서 전기가 통했다 안 통했다 하는 상태로 반도체를 만들 수가 있다.
⑧ 반도체는 진공관이라는 부품을 대체하기 위한 재료다. 진공관이라는 것은 유리관을 만든 다음에 안에 여러 가지 전기회로를 집어넣고 내부는 진공이 되도록 공기를 빼가지고 만들어놓은 전기전자 부품이다. 진공관은 어디에 쓰느냐? 옛날에 전신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가까운 거리 말고 길게 연결해 놓으면 아무리 해도 신호가 점점 약해 지면서 멀리 있으면 잘 안 들린다. 그때 중간 중간에 진공관을 이용한 회로를 설치해 놓으면 어떤 신호가 오는지를 가지고 회로가 판단을 해가지고 그 신호만큼의 복제된 더 강한 신호를 만들어가지고 다시 뿜어주는 역활을 한다. 바로 그것이다. 진공관은 크다. 이게 열도 많이 나고 열이 많이 난다는 말은 전기도 많이 먹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고성능의 전자제품을 전기도 적게 들면서 만들려면 진공관을 능가하는 것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바로 트랜지스터(Tr)다. 트랜지스터의 경우는 크기도 작고 작은 크기의 부품으로 진공관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트랜지스터를 굉장히 작은 크기로 만들어 가지고 작은 칩 모양을 안에 다가 조그맣게 설치를 해서 여러 개를 모아 놓은 회로 집적회로 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조그마한 칩 안에 트랜지스터를 100개 정도를 말아 넣어 연결해 놓은 것을 IC라고 한다. IC에서 성능을 더 증가시킨 부품을 LSI 라고 한다. 칩 하나에 1000개 수준의 트랜지스터를 집어넣고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트랜지스터 10만 개 정도를 연결해 놓은 부품을 VLSI 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작은 반도체가 어디에 쓰이느냐, 가전제품, 컴퓨터, 항공기, missile 까지 온갖 물건에 안 쓰이는 데가 없다.
⑨ 그러면 이 반도체는 뭘로 만드느냐? 반도체는 실리콘으로 만든다. 미국에 실리콘 밸리 라는 데가 있다. 실리콘은 어디서 나느냐. 백사장 모래에 있다. 모래의 주성분인 이산화규소, 이산화규소를 영어로 하면 Silicon Dioxide, 모래의 주성분이 규소, 바로 실리콘이다. 좋은 모래에서 잘 뽑아내면 반도체의 재료인 실리콘을 무궁무진하게 얻을 수 있다. 영어로 규소라고 할 때는 silicon 실리콘 이라고 쓰는데 보형물 실리콘은 거기다 e자를 붙여가지고 silicone 실리코은 이라고 한다. 같은 재료다. 같은 규소를 이용해 가지고 규소 덩어리로 돌이나 금속처럼 있으면 반도체 실리콘이다. 그걸 주 재료로 해가지고 고무처럼 뽑아낸게 보형물 실리콘이다. 실리콘을 모아서 단단하게 만들면 원통 모양이 된다. 이걸 얇게 썬다. 소시지나 김밥 같이 썰듯이 얇게 썰어낸다. 썰어내면 썰어낸 한 단 모양 그걸 흔히 웨이퍼 (Wafer) 라고 한다. 웨이퍼를 일본에서는 웨하스라고 발음한다. 웨이퍼에다 눈에 보이지 않게 회로를 그려넣고 필요 없는 건 깎아 내고 이런 걸 잘 해 가지고 반도체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걸 인제 짜른다. 깎아내기도 하고 하나 하나 반도체가 되는 것이고 그걸 반도체 칩 포장 안에 다 집어 넣으면 완성품이 된다. 새끼 손가락 크기의 이 반도체 64K D램 이라고 하는 반도체, 이거 하나가 8천 글자 정도를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을 가진 반도체다. 여기에다 8천 글자를 새긴다고 생각해 보라. 불가능하다. 그런데 반도체 힘으로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81년 현재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하는 반도체인 것이다.
⑩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과연 이런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 우리는 과연 할 수 있느냐. 우리 민족은 젖가락을 사용하는 손재주가 좋은 민족이다. 반도체야 말로 우리 민족의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다. 우리 노동자들 우리의 기술진과 학자들은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가 조금만 지원해 준다면 우리도 곧 일본 못지 않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대통령 전두환이 서명한 1981년 5월 상공부 작성 <半導體工業育成計劃> 반도체기초 기술개발에 국가 예산 200억원이 지원되었다 (82~86년). 이건 아주 큰 돈이다. 여기에 200억원을 지원하면서 반도체 관련시설이나 원자재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하하는 반도체 공업육성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결국 1983년 2월, 삼성 이병철 회장이 동경에서 반도체 사업진출을 알리는 도쿄선언을 하게 된다. 사람이든 국가든 정말 도약하는 순간이 있다. 포항제철, 첫 쇠물이 쏵~ 흘러나오는 엄청난 순간, 또 현대자동차 독자 개발해서 포니 자동차 출고하는 순간, 삼성도 반도체 산업에 진출선언의 그 순간이야 말로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런데 도쿄 선언을 보고 intel은 과대망상증 환자다. 미스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는 이유 라는 정식 보고서를 낸다. 기술 없지, 돈도 별로 없지, 거기다가 시장도 열악한데 너희가 반도체를 성공한다고 오히려 이것 때문에 망할 것이다. 저번에는 GM 한국대표가 자체 자동차를 개발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했었다. 이 상황에서 삼성은 제일 먼저 뭘 했을까. 64K D램 개발팀의 첫번째 과제는 1983년 5월 개발팀 무박2일 64㎞ 행군, 반도체 사업시작: 삼성이 제일 먼저 한일은? 반도체의 信條 외우기, 하나. 큰 목표를 가져라, 하나.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진다, 하나.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하나. 이유를 찾기 전에 자신 속의 원인을 찾아라 하나. 겸손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라, 하나.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기록을 남겨라, 하나. 무엇이든 숫자로 파악하라, 하나. 철저하게 습득하고 지시하고 확인하라, 하나. 항상 생각하고 확인해서 신념을 가져라. 정신력으로만 성공할 순 없지만 정신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반도체라는게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 기술개발을 했는데 만약에 제조가 조금 늦어지면은 수조원, 수십조원도 손실을 볼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아마 저런 극기훈련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⑪ 故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물 맑고 공기 좋고 고속도로 진입이 쉬운 땅 5만평을 알아봐라! 반도체 부지지역으로 기흥을 선택하였다. 그 다음엔 공사가 빨리 빨리, K-건설 스타일로 시작되었다. 선대회장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뭘 하면 빨리 빨리 끝내야 된다, 포항제철-3년 만에 끝냈다, 조선소도 배 팔아놓고 조선소를 지었다, 그게 무대뽀 정신인데 공장지으면서 해외에서 장비를 사서 들여왔다. 그런데 반도체 장비라는게 매우 정밀해서 운송 중에 쿵쾅 거리고 움직이면 고장이 날 수 있다. 장비가 김포 공항에 도착을 했다. 근데 문제는 공장이 거의 완공되는 무렵인데 진입로 4km가 비포장도로다. 비싼 장비 수입해서 가는데 덜컹덜컹 하면 고장이 나기 쉽다. 근데 갑자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전 직원 다 나와 도로 다지고 콘크리트 타설하고 다 말려버렸다. 한나절 만에 4km 아스팔트 길을 만들어버린 底力, 믿을 수 없다. 기적이다. 어쨌던 그렇게 해가지고 생각했던 것 보다 일반관례보다 3분의 1 시간에 완공을 한다. 1983년 8월~1984년 3월 6개월만에 반도체 공장 완공, 40년 전, 이병철 회장이 처음에 64K D램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모든 직원이 큰 일 났다고 생각을 했었다. 1971년도에 1K D램이 미국의 인텔에서 개발이 되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4K-16K 그 다음 10년이 지나서 1981년에 삼성에 의해서 64K D램 개발이 됐다. 삼성이 다 건너뛰고 바로 64K D램을 개발하겠다고 한 것이다. 처음에 어느 분야에서는 반도체 전문용어 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었다. 진짜 맨 땅에 해딩하는 기분이었다.
⑫ 어차피 삼성은 원천기술이 없으니까 선진국에서 배워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기술을 가르쳐줄 회사가 없었다. 당시에 이건희 부회장이 미국의 몇몇 회사에 가서 기술 좀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콧방귀도 안뀌고 문전박대를 당하였다. 그런데 마침 마이크론 (Micron)이란 회사가 자금난에 빠져 가지고 기술이전 명목으로 400만 달러를 내고 기술을 전수받기로 하였다. 부품 꿈을 안고 마이크론 본사로 갔다. 근데 첫날 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 심지어는 컴퓨터 모니터를 봤다고 쫓겨나기도 했다. 설마 삼성이 진짜로 배우러 오겠나 라고 생각했던 거다. 일부는 일본 샤프(Sharp)社로 연수를 갔었다. 공장 칫수가 굉장히 중요한데 절대 안 가르쳐주었다. 그렇다고 자를 달고 갈 수가 없으니까 신체 부위를 이용해 몸으로 칫수를 쟀다, 보폭이라든지 한 뼘의 길이라든지 팔 길이라든지 손가락 길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 동원해서 칸 수를 재기 시작한 거다. 근데 막상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비행기에 한꺼번에 타서 오지 말고 한 명씩 다른 비행기에 타고 따로 따로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83년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미리 대비를 하라는 조처였다.
⑬ 한국에 와서 반도체를 수없이 만들어 봤는데 수없이 불량이 많이 나왔다. 퇴근은 꿈도 못꾸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가 이병철 회장께서 도쿄 선언을 한 그해 12월에 개발에 성공을 했다. 양호한 반도체가 딱 탄생하였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개발에 성공하였다. 일본이 많이 놀랬다. 왜냐하면 도쿄선언을 하였을 때 그때 일본의 반응이 너네가 무슨 메모리 반도체를 한다고 그러냐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걸어라 뛰어라 하는 것과 똑 같다 라는 비아냥을 일본 언론에서 많이 했다. 그런 일본한테 한국의 삼성전자는 정말로 삼성의 실력을 보여줬다. 세상이 발칵 뒤집혀진 것이다. 64K D램은 2013년에 국가등록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그야말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삼성전자다. 반도체가 이건희 회장을 살렸다. 그래서 이건희를 삼성의 제2의 창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탕 밀가루 만들던 회사가 반도체 회사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삼성 사람들이 삼성 전자가 있고 후자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메모리 하면 미국이 종주국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많은 지원을 해서 일본이 새로운 강자가 되었다. 이른바 반도체 치킨 게임이라는 게 시작이 되었다. 치킨게임이라는 게 뭐냐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걸 말하는데 일본에서 한국을 저렇게 키우려다가는 큰일 나겠다 해서 덤핑을 시작했다, 64K D램 가격이 원래 개당 3달러수준이었다. 근데 이게 1985년에 개당 30센트까지 10분의 1로 폭락한다. 당시에 삼성이 만드는 64K D램의 제조원가는 1.7달러였다. 하나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가 커지는 상황이다. 1984년~1987년에 누적 적자가 1200억원까지 내려갔다. 이때 당시를 현재로 환산하면 수조원 이상의 막대한 적자가 난 건데 당시 이러다간 정말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굉장한 위기가 온 건데 이게 또 위기가 기회가 되버렸다. 1986년에 반도체 전체 생산량과 매출액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한다. 미국 쪽에서 이건 제2의 진주만 공습이다. 예전에는 일본이 비행기로 와서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건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큰 거 한 방 날린 거다. 일본의 약진에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미국이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덤핑 마진율을 188%를 때려버린다.
⑭ 미일 반도체 전쟁이 삼성한테는 어마 어마한 호제가 되었다. 미국이 덩핑을 치다 보니까 미국 업체들은 인건비에다 원가가 워낙 높으니까 손을 들어벌이는 상황이 됐고 일본 회사들은 미국의 보복에 생산량을 축소하였다, 공급이 감소되니까 64K D램 가격이 폭등하는 데 1985년도 개당 30센트가 1988년에 개당 6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니까 누적적자 1200억원을 다 갚고 3200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이게 완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그게 반도체 산업의 특성이다. 반도체 산업은 호황일 때는 엄청 돈을 벌다가 불황일 때는 엄청나게 적자를 본다. 수십 조를 벌다가 수십조 적자도 나는 산업이다. 운이라고만 설명하기에 불가능한 게 있다. 이렇게 세계 1등 기업을 만드는 데 운만 작용하는 건 아니고 준비를 했다. 그게 R&D 투자인데 이게 엄청난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돈을 벌 때나 돈을 못 벌 때나 계속 기술 개발비를 넣어야만 1등을 할 수 있다. 그때 분위기가 돈을 벌긴 버는 데 계속 새로운 라인 증설하고 새로운 장비를 사대니까 중역들 마저도 회장 총기가 좀 떨어지셨나 적당히 좀 챙기셔야 되는 데 계속 넣네, 이런 분위기 마저 있었다. 반도체 산업은 외발 자전거 산업이다. 잠시 주춤하면 그냥 쓸어지고 마니까 계속 투자하고 가동해야 된다. 일본 회사들은 그걸 안 했다. 벌었을 때 조금 R&D 하고 적자가 나면 R&D 투자 스톱하고 근데 이병철 이건희 부자는 벌 때나 못 벌 때나 계속 투자를 하였다. 그게 결국은 일본 반도체 위에 삼성 반도체가 올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후일담은 일본은 최고 경영자 위주의 보수적인 경영을 했고 삼성은 오너 경영의 강한 추진을 했다.
⑮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량의 20%를 차지한다. 이건희의 이 승부수가 지금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그 순간을 우리가 목격했다. 우리 경제가 변신해야 될 때에 그 혁신이 잘 이루어진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삼성 반도체 산업이다. 우리는 또 한번 혁신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지금 우리가 경제가 힘들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비전을 내놓고 노력을 하면서 다른 역사를 쓸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