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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대가 풀어야할 숙제
일러두기 = 어디까지나 토론일 뿐 기독교인이나 천주교를 폄하하고 특정종교를 비호하는 목적으로 이글 을 쓰는 것이 아니며 다만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사실을 기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은 철없는 젖먹이 대통령 이하 그를 추종하는 친일민족 반역자 무리와 젖먹이와 부화뇌동하여 망국의 길을 자처하는 인간 말종들~ 또한 그들을 추종하는 종교단체들~ 공정한 논공행상을 하지 않았기에 쥐구멍에 숨어서 숨도 못 쉬고 살아야 할 인사들이 오뉴월에 개 패듯이 맞아야 인사들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대명천지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날뛰는 오늘의 현실! 과거의 중국은 역모에 가담만 하여도 9족을 멸하였고 조선시대에도 3족을 멸하였는데 한겨레를 일본놈에게 내어준 민족반역자들이 나라를 주관하다니 이러한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 하였다. 힘 있는 그들에게 빌붙어 양심을 팔아가면서 살아가는 국민들! 환부역조(어버이를 바꾸고 조상을 거역하는 일)하며 서양귀신에 넋이 나가 무조건 우리 것은 배척하면서 서양 것은 무조건 오케이 하는 입으로는 식자라고 운운하면서 속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맹신자들! 이글은 그들을 위하여 쓰는 나의 충정의 글이다.
제발 고정관념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우리의 헌법 1장의 내용입니다
제20조1항=모든 국민은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항=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
나의 사견이지만 우리 헌법 제20조 1~2항은 우리나라에는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도 종교가 난무하였을 때 국론이 하나 되고 강성한 나라를 이룩한 국가는 드물다.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의 최고의 신인 천신을 비롯해 고등신(나라를 세운 추모 왕), 부여신(왕의 어머니 유화부인), 해와 달의 신, 별신, 조상신, 불의 신 등을 믿었으나 국교는 없었다. 372년 소수림왕이 비로소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국론이 하나 되므로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세계최강고구려가 될 수 있었다. 신라와 고구려도 마찬가지이고 고려도 건국 초기에는 강성한 나라였는데, 유독 조선이 억불숭유정책으로 힘없는 나라로 전락 되었으며 급기야는 하속민족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였다. (고려 때 몽고에게 치욕을 당하였으나 그것은 세계적인 대세였으므로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급선무로 해야 될 일은 국론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해외파인 친일민족반역자 유진오가 우리 땅에 맞지 않는 종교자유를 헌법 화 하므로 국론이 사분오열 된 것이다.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자기네들 이상대로 끌고 가려하니 국론이 분열되어 일치단결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세계의 정보매체와 여론은 기독교와 천주교는 예수에 2000년 전 십자가 사형 사기사건으로 인하여 이태리와 미국을 빼고는 유럽이나 선진국은 교회가 거의 없어지고 불교의 사찰이 세워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왜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만 모르고 있을까? 그것은 기업형의 교회들이 기업형교회가 망하지 않기 위하여 함구하는 것이며, 외국을 다녀와 알고 있는 사람들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일 것이다. 이미 아래에 기술한 내용들은 알 만 한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관광명소로 바뀌어가는 영국교회
영국사회와 영국교회 바로 알기(1)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전략적인 유럽 역 선교(逆 宣敎)
-Strategic Missionary Approach to Reverse Mission to Europe-
1. 현대 영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영국은 과거 19-20세기 세계기독교 선교사에 큰 공헌을 했다. 더불어 세계교회 부흥운동사에 있어서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는 영국 교회가 낳은 선교사들 가령,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와 같은 인물, 그리고 존 웨슬리(1703-91),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92) 등과 같은 역사적인 부흥 설교가를 기억하고 있다. 특히 적지 않은 한국 신학자들이 한국교회 신앙형태를 ‘웨슬리적 정열과 청교도적(puritan) 윤리’로 규정하리만큼 영국교회의 영향력은 비단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서 짙게 배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영국에 대해서 ‘부요한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 판단과 다르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와 기독교문화의 유산이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국 역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쇠퇴를 보이는 기독교후기시대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현실적 판단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제 영국은 과거의 화려한 기억 속에 살면서 현실을 방관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2. 영국교회 현실
미국의 기독교사회학자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는 기독교역사에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했던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현대 영국교회의 얼굴을 ‘관광명소’로 표현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리스로 전했으며, 그리스인들은 기독교를 철학화 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로마로 전했으며,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제도화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영국으로 전했으며, 영국은 기독교를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미국으로 전했으며, 미국인들은 기독교를 기업화했다.”
[Christianity was born in Palestine. They took it to Greece and they made it into a philosophy. They took it to Rome and they made it into an institution. They took it to England and they made it into a tourist attraction. They took it to America and they made it into a business enterprise.]
영국의 크리스천 리서치(Christian Research)의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영국에는 해마다 약110개의 교회들이 개척되고 있다. 반면, 해마다 220개의 기존 교회들이 폐쇄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경우, 5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약 5,500개의 교회들의 평균 회중의 수는 단지 10명에 그치고 있다. 물론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개척된 교회들 가운데는 성장을 경험하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인 영국교회의 형세는 낙관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어느 종교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며 몇 가지 선택사항을 제시한다면, 이들은 대부분 ‘무신론자’라고 표시하는 것을 주저한다.
보통 영국인의 약 70퍼센트(2004년, 통계에서는 약 75%)는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로 ‘크리스천’ 이라고 표시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것은 영국의 총인구 약 5,800만 가운데 약 7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허황된 통계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오늘 영국에서는 인구의 약 7%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이 수치에는 모든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도 포함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7%) 가운데 약 30%만이 ‘거듭난 신자’ 혹은 ‘복음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아마 영국 전체에서보다 서울시내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박 창수(Chang S. Park)
콜 밸리 클러스터(Cole Valley Cluster of Churches in East Birmingham) 협력선교사
제자도 및 기독교 영성 강사(Kingfisher College)
버밍햄 퀸즈 칼리지(MA Dip.)
서울신학대학교/ 동 신학대학원(BA/ M. Div.)
크리스찬 투데이
텅빈 영국의 크리스마스 /김현인 기자
북해의 습기 찬 바람이 스치는 곳에서, 잊혀 진 듯 영국의 크리스마스가 저물고 있었다.
수만 리 이역의 명동이며 강남에선 트리와 캐럴이 숱한 인파를 짓 비벼놓고 있을 것인데, 정작 기독교와 자본주의 수혜의 종주제국인 이곳은 겨울밤의 흔한 한 장면인 냥 그런 냉담함 속에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에든버러 중심가의 크리스마스
오후 7시, 이곳 에든버러 중심가의 넓은 가로에는 사람도 자동차도 신 새벽처럼 흔적이 드물고, 가끔 문을 열어놓고 있는 중국인이나 아랍인의 슈퍼마켓에도 값싼 인조 전나무의 트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길가로 불을 밝힌 어느 집의 창 너머에 오늘이 크리스마스임을 상기시키듯 작은 트리가 내비치기도 하지만, 곳곳의 창연한 교회에도 주간이나 월간 예배를 안내하는 작은 종이쪽지만 바람에 가끔씩 나부낄 뿐, 성탄 장식물 하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 벽면 따라 어느 시절의 거룩함을 회상하고 있는지 관람시간이 끝난 고궁 같은 고요함만 노란 코발트 등 불빛에 맞서 있다. 거리의 외형으로만 보면 영국은 기독교의 나라가 아니었다.
영국은 물론 다른 유럽국가들 처럼 기독교 전통이 깊은 나라이다. 국기인 유니온잭도 잉글랜드와 스콧틀랜드, 아일랜드의 각각을 상징하는 세 개의 십자가가 결합된 모양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의 주요한 역사장면은 기독교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엔, 6천만 인구의 64%가 기독교도라 분류되는 영국도 국교인 성공회는 7천여만에 이른다는 세계적인 교세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내에는 170여만 명이 활동하는 것에 그치고, 반면, 600개의 사원을 갖춘 100만의 회교도와 30여 만 명씩의 힌두교, 시크교도 등 이민족의 종교는 그 세력을 더하고 있다.
특히, 시골 소읍에까지 집회 센터를 만들어 내면서 퍼지고 있는 여러 갈래의 불교는 영국 문화의 새로운 전환적 현상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이나 일본 등지의 불교가 매우 이기적인 기복의례로 고착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의 불교행위가 좌선이라는 자기 변혁의 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서 그 지적 압축력이 일반의 종교적 의례성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BUDDHIST SOCIETY라는 불교단체 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연감에는 좌선중심의 거점그룹의 주소지만도 400여개를 올려놓고 있으며, 그 신장세는 날로 그 속도를 더하면서 물질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영국사회의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국의 일반 저자에서 종교가 기독교라 주장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정작 그들이 작게는 식사 때 성호를 긋거나, 나아가서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등의 모습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일견 영국에서의 기독교는 삶의 가치를 규정하는 잣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이고, 기독교가 빠진 그들의 일상사는 세련되게 치장된 동물적 생활로 내몰린 형상이다.
영국교회의 크리스마스
물론 영국 중부의 농촌지역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치러지는 '건초찬양축제'처럼 생활 깊숙이 스며든 전통의 편린을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상에서 기독교의 기념적 요소는 우리나라의 설, 추석이나 제사의 그것처럼, 흩어진 가족이 모여 애꿎은 칠면조 요리나 뜯으며 담소하고 궁리하는 명절 휴일의 관행에 머무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산타클로스나 주님보다는 눈앞의 예쁜 자동차와 그대의 빛나는 입술이 더 현실적인 것이 되어 있다.
그래 그들은 크리스마스 날 당연히 집안에 있었고, 가정이야말로 실질적인 또 하나의 교회이며 크리스마스인 셈이었다. 가정이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재산의 본거지인 바엔, 우리가 그러하듯, 가정은 개인주의의 소굴이 되어 있고, 그 정도가 심한 만큼 이혼 등의 이합집산 또한 일상사의 것이 되었다. 여기에서 거리도 비고 교회도 비면서 영국인의 마음도 텅 빈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 단체가 그 종주국 격인 영국에 선교단을 파견하게 되는 넌센스 같은 현실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인지 모른다.
북위 53도인 이곳 에든버러는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졌고, 그 이전엔 검은 구름에 버무려져 시도 때도 없이 빗방울을 뿌리는 하늘 아래로 시각을 어림할 수 없는 어두운 낮을 보냈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습기와 잿빛에 눌린 채 햇볕을 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백인종의 붉게 갈라진 살갗은 그들의 천형과 같은 우수를 이기기 힘들었고, 창문이 많은 이층집이나 자동차의 값비싼 선루프, 벗어젖히는 옷맵시는 그것을 비켜가려는 이 종족의 애타는 노고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제 물질생활이 자연환경의 제약을 거의 벗어나게 해주는 듯이 보이게 된 시점에서, 이들의 일부는 아득한 동양의 먼지 낀 유산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찾아내고자 하고 있다. 명동아, 강남아, 우리는 그들이 걸지 못한 크리스마스 성찬물이 애달파 대신 걸어주려고 11월부터 해를 넘기도록 그 소동을 벌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은 어긋난 균형점을 맞추고 있는 것인가.
* 건초찬양 축제 : 크리스마스이브 자정이 되면 짐승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여 겨울을 날 건초가 저장된 외양간이나 마구간에서 찬송가를 불러 줌으로써 가축들의 영성을 밝힌다고 하는 영국 일부 지방의 축제.
예수의 생애에 대한 미스테리
(크리스천들은 부인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마그달레나(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자손을 뿌리며 84세까지 살다 죽었다는 사실은 영국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알려지고 영국 법정에서 공식 확인된 사실입니다.
때문에 법정 결과를 지켜 본 천주교 사제, 수도사, 수녀들과 개신교 목사, 강사들은 그런 판결이 나오자 옷을 찢고 통곡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사태를 우려한 영국 정부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판결을 본 영국 크리스천의 80%가 크리스트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로 돌아 서거나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교회와 성당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각지에서 사제와 목사들이 예수에게 속았다며 목을 매고 자살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대 사태를 불러온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그 증거를 제시한 이들이 말하는 예수의 생애는 대략 이렇습니다.
로마 제국 초기.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유대 왕국에서 태어난 예수는 13세가 되어 히브리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해야 될 즈음 많은 신분 높은 이들이 그를 사위로 맞이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어려서부터 그의 총명함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 인디아의 오릿사주(州)에 있던 나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 왕실의 제례에 참례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인디아에 유학할 것을 권유합니다. 라반나의 권유에 마음이 끌린 예수는 부모에게서 은밀히 나와 상인들을 따라 인디아의 신드지방으로 오게 됩니다.
그후 10년 동안 인디아와 네팔, 티베트에서 팔리어(語)와 산스크리트어를 익히고, 열심히 종교와 각종 학문을 공부하는데 처음에는 브라만교(힌두교의 뿌리)에 속하였으나 나중에는 붓다(불타 - 부처) 샤키야무니(석가모니 - 고카마 싯다르타)의 교리에 눈을 뜨게 되고 그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이사(Issa)라는 법명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24세 때 페르시아를 경유하여 귀국하던 중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조로아스터교 사제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박사와 재회합니다. 집에 돌아온 예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건너가 아폴로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며 소크라테스를 근원으로 하는 그리시아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25세가 된 예수는 이집트로 건너가 형제단이라는 성자들의 모임에 입회해 활동하며 최고의 칭호인 크리스토스(그리스도 -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법명을 수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30세가 된 예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신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위의 이야기는 1887년 러시아의 언론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디아와 티베트를 여행하던 중 라마교 승려에게서 예수의 13세에서 24세까지의 인디아 행적을 담은 불경인 <이사전(傳)>을 보고 고사본(古寫本)들을 입수하여 불어판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聖 이사의 일대기>를 출판함으로써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인디아와 티베트를 방문하여 이를 확인하여 왔던 바 이를 종합하여 1984년 엘리자베스 C. 프로펫트가 발간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의 줄거리입니다.
이를 근거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 이들은 신약성서와 불경에 비슷한 내용이 많은 이유가 위의 이야기처럼 예수가 원래 인디아와 티베트에서 공부한 불교승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붓다는 40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불경 상응부경전)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 (루가 복음 4장 1절)
♤붓다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아함경)
예수는 12제자를 유대 전역에 파견하였다 (마테오 복음 10장 1절)
♤붓다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붓다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지는 것을 예수가 건져 주었다(마테오 복음14장 25절)
♤붓다는 발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 5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 주석78)
예수는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마테오 복음 14장 17절)
♤붓다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하였다 (루가 복음 21장 1절)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무문자설경)
소경의 인도로 구덩이에 빠진다. (루가 복음 6장)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본생경)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루가 복음 2장)
♤니르바나(열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무문자설경)
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루가 복음 16장)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아 타향에서 허랑 방탕하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오히려 환대하며 돌 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장자궁자(법화경 신해품)와 신약성서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루가복음 15 : 11)는 똑같은 줄거리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불교적 교리들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부분으로 법구경에서 붓다가 설파한 사랑과 자비의 설법과 똑같다.
고향에 돌아와 핍박받는 히브리 민중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불어 넣던 예수는 인류구원신화의 완성을 위해 가장 신뢰하는 제자 이스칼리오트의 유다스(가룟 유다)에게 고육지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끔찍하게도 유다스에게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승인 예수 자신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설득당해 스승이 원하는 대로 그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고 예수는 다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6시간 후에 죽은 뒤 3일만에 부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계획한 시나리오로 원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최소 일주일은 걸려야 죽는 데 이상하게도 예수는 6시간 만에 죽습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려는 예수의 연극이었고, 처음부터 예수의 계획에 가담한 마그달레나(막달라)마리아는 재산이 많은 고급 매춘부로서 예수와 깊이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로마 총독과 그 대리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척 하는) 예수의 몸을 장사지내고 계획대로 3일 후에 무덤에 가서 꺼내주고 데려오죠. (애초에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것은 예수가 아닌 바라파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후 예수는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일련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로마 제국 영토인 프랑스(당시 갈리아)에 와서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결혼하여 씨를 뿌리다가 84세 때 죽었습니다.
현재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마그달레나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라자로는 마르세이유(당시 마실리아)에 주교관구 켈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를 세웠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고트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크리스트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후손들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혈족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예수가문의 비밀에 대해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 1118년 성지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수도사 군대)과 그 모체인 시온수도회라는 악명 높은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들은 근대에 들어와 프리메이슨의 모체가 되어 현재 은밀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고, 그것이 중세 성전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개신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크리스챤이 주심 판사를 맡아 3년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 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설명하는 예수의 비밀스러운(?) 생애였고, 이 이야기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알려져 영국 법정에서 역사적 사실로 판결나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고 전 크리스트교 계를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에 반발하는 의견이 불거져 나왔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네루가 쓴 <세계사편력>을 보면, 예수가 불제자라는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는데, <세계사편력>에 보면, 예수에 대해 연구한 권위 있는 학자에 따르면 예수가 중앙아시아나 인디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보통 일주일 후에 죽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불과 6시간 만에 죽은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나오듯이 십자가형을 받기 전에 예수는 이미 로마병사들에게 웬만한 사람은 죽을 정도로 태형(매 맞는 형벌)을 받았고, 거기다 태형에 쓰인 채찍은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어 맞는 이의 살점을 튀어나가게 할 정도로 끔찍한 고문 도구였던 것 입니다.
때문에 이미 거의 죽어 가던 예수는 그 죽어가는 몸으로 십자가를 메고 가면서 계속 또 맞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또 창에 찔려 비정상적일 정도로 이른 죽음을 불러온 것 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가 프랑스에 망명하고 거기서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결혼하여 씨를 뿌렸고, 그 후손인 클로비스가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다는 메로빙거 왕조 시조 예수설의 허구성을 간파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들을 만합니다.
시온수도회 즉 성전기사단은 예수가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완벽한 조작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 중에 예수 대신 바라파스(바라바)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정작 예수는 프랑스에 살다가 84세에 죽었다는 얘기인데 사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만들려는 사악한 음모였던 것 입니다.
사실 이 허구성에 사악한 계획이 담긴 이 조작된 사실을 간직한 비밀결사단체는 다름 아닌 시온수도회 즉 성전기사단입니다. 성전기사단은 프리메이슨의 원래 모습으로 전에는 석공들의 조직이었습니다. 그 석공들은 솔로몬 왕의 예루살렘 성전 건립을 주도했던 자들로 그 주체는 페니키아, 바빌론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숭배 대상이 마르두크(바알, 엔릴, 제우스)로 야훼와 다른 신이었고, 이 우상들을 섬겼던 석공들의 후계자들은 시온수도회(성전기사단)로 조직하여 크리스트교에 속했으나 사실은 크리스트교를 쓰러뜨리려는 비밀결사조직으로 목적을 위해 그 메로빙거 왕조 시조 예수라는 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예수가 못 박히기 전에 바라파스가 풀려났는데 그는 사실 헤로데(헤롯) 왕과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도적이 된 인물로 민족투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민족투사는 예수를 만나 선생님께서 직접 헤로데를 치신다면 우리 유대는 더 큰 영광을 얻을 겁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라고 설득했을 때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자 바라파스는 이 말에 아연실색하여 예수를 책망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바라파스는 예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속 로마군과 유대군을 무찌르다가 결국 잡혀 로마 총독 필라투스의 법정에 섰는데, 과월절 행사가 있어서인지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하고 바라파스는 풀려난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흘 뒤에 부활하고 승천한 뒤, 바라파스는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결혼하고 그녀와 같이 독일(당시 게르마니아)에 가 그곳에서 살리 부족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뒤 메로베크라는 바라파스의 후손이 프랑크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다른 게르만 족들과 달리 유일신을 섬겼고 왕국 건립 후에 손자 클로비스 대에 이르러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솔로몬 왕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했던 석공들의 후계자들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에 반감을 품어 12세기에 시온수도회, 즉 성전기사단을 형성하여 메로빙거 왕조 족보를 왜곡, 허위 날조하여 진짜인 것처럼 꾸며내고 예수를 시조로 치부시켜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라파스가 묻힌 무덤을 예수의 무덤이라고 억지주장하게 만들어 날조했습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으로 계승되어 모든 민중들을 현혹시켜 오늘에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1981년 예수의 후손이란 사람이 메로빙거 왕조가 예수라고 주장한 뒤, 그 거짓된 족보를 보여 사실이라고 믿게끔 만들어 모든 교회를 문 닫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 후손이란 사람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바라파스의 후손이었고, 조상을 배신하기까지에 이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는 예수가 아니라 바라파스여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항하는 이들이 내놓은 주장입니다.
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재판 판결&막달라마리아는 예수의 부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재판 판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 "아페닌 산맥을 넘어 골에 이르리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참고하시고, 이마두 대성사를 서양의 명부대왕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시고 서양을 심판하는 증산도 천지공사의 구원론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 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 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 )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참고>한국의 기독교는 서양과는 다르게 교회를 기업형으로 운영하여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란 진실을 밝히고 수용하는 것이 바탕이 돼야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왜곡하고 조작하고 독점하는 독선주의 형식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 장사꾼들의 속성이며 한국 기독교의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참선이나 명상 태을주수행등에 오히려 심취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진리를 진리 자체로 볼 줄 아는 순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바 국내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 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 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 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 (알로에추출물)(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 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쌌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 하고 있다.
[추천서적] 성혈과 성배
글쓴이: 大圓壹
예수 크라이스트가 결혼을 했고 '막달라 마리아'와의 사이에 자녀가 있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아서 현재 '유럽'의 귀족들 중에 그 후손이 살아있다는 주장을 책으로 펴내 지난주 '런던'에서 발매되자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지(誌)도 이 책의 주장과 반응을 종교 면에 다루며 관심을 나타냈다. 이 책의 제목은 「성혈과 성배」 '성혈(聖血)'이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흘린 피를 뜻하고 '성배(聖杯)'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고 그 뒤 십자가 밑에서 '요셉'이 예수의 피를 받았다는 컵을 말한다.
‘성혈과 성배’+987-* /-*· 책사건 이후로 예수를 믿고 있는 수많은 목사나 신부, 수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독교와 천주교 등 모든 종교단체들이 이 저자들을 허위와 사기죄로 고발하였고, 결국 이 세기의 재판은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의 관심을 받으며 3년간의 법정 투쟁을 거쳐 영국 대법원에서 그 사실여부가 결판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계속해서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나오고, 여러 사람들이 예수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족보를 가지고 증인으로 나서게 되면서 재판이 심상치 않게 나가자 재판장이 3개월 동안 재판을 중단하고 몸져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담당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여러 목사님, 신부님, 그리고 수녀님들 죄송합니다. 저의 집안은 3대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집안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을 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로 망명해서 84세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하 생략).
이 판결문이 나오자 법정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일부 신부와 목사, 수녀 등은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버리며 울부짖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 재판의 결과가 매스컴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영국전체 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예수에게 속았다는 비통의 성토와 함께 자살하는 종교인들이 속출하고 전국이 충격에 빠지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재판결과의 국외 전파를 금지하고 판결문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다른 종교로 바꾸었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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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마을 렌느르 샤토에서 수킬로 떨어진 야산 몽카르두에 있는 예수무덤 이 책의 주제는 지난 2천년 동안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에 관한 것이다. 1972년 영국의 BBC방송은 [르네 드 샤토]의 신비를 "잃어버린 예루살렘 선물"이란 제목으로 헨리 링컨이 만든 필름으로 방영했었다.
연이어 1974년에는 [목사와 화가와 악마]가, 1979년에는 [템플 기사단의 그림자]가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수많은 시청자들은 [피레네]라는 산마을에 살고 있던 19세기 프랑스 목사 이야기로 들끓었고, 그 목사가 수백만 파운드를 벌고 또 없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보물이 묻히는 데서 시작하여 미증유의 역사적 탐험 이야기로 진행된다. - 즉 신비의 양피지(羊皮紙)로 된 문서에서 그 근거를 찾는 성배(聖杯)의 유래, 비밀에 싸인 사회상들, 템플 기사단, 12 ~ 13세기의 카타르(Cathar)교 이단자들, 그리고 1천 3백여 년 전에 사라진 우리 기억에도 없는 프랑스 왕조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이제 10여 년 간의 오랜 조사 연구 끝에 헨리 링컨과 미첼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등 세 사람은 조롱받고 있는 수수께끼 속에 묻혀 있던 연구 조사의 결과를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설득력이 있으며 또 많은 부분이 충격적이다. [르네 르 샤토]의 베일을 벗기는 데 있어 실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물질적인 부(富)가 아니라 폭로되어야 할 비밀이며 논쟁의 여지가 충분한 것들이다. 그것은 [피레네]와 같은 작은 마을에서부터 서방문명의 전역에까지 확산되어 나타난다. 이 비밀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만은 아니다. 이 비밀의 반응은 당대의 정치계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전한 조직체까지 곳곳에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배라는 것이다. 즉 중세의 전설적이고 신비스런 성배일 뿐 아니라 서양 역사를 이뤄 가는 살아있는 골격(역할)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드골이나 앙드레 말로와 같은 사람들과도 연관되어 오늘날 우리 세대로까지 내려온다. 또한 그것은 [르네상스]나 [십자군]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도 놀랍고도 새로운 견해를 던져준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비밀이 그리스도교의 원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관계가 된다는 사실이다.
저자 : 헨리 링컨
1930년 런던에서 출생. 열렬한 친불파로 오랫동안 프랑스의 언어, 역사, 문화에 심취했다. 어릴 때부터 이집트학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상형문자 판독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에 끌려 신화, 비교 종교학, 비학 탐구에 몰두했다. 작가 경력 25년으로 1백 여 편의 TV 시나리오를 썼다. 열성적 강의로도 유명하고 BBC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했다.
리처드 레이
역사적 신비와 비학을 20년간 탐구했지만 원래는 소설가이자 단편작가. 1943년 뉴저지에서 태어나 터프스 대학, 시카고 대학을 거쳐 뉴욕 주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카나다와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미첼 베이전트
1948년 뉴질랜드에서 출생. 심리학 학위를 딴 후 견습 교사로 1년을 보냈다. 역사, 종교, 비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973년에는 사진작가로 나섰다. 1976년 템플 기사단 연구를 위해 영국에 왔다. 거기서 리처드 레이와 헨리 링컨을 만나 르네 르 샤토 신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바빌론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 까지의 비학 및 점성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자 소개는 1981년 1월 책이 처음 출판될 당시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1982년 2월20일자 동아일보 6면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겠습니다.
- 이하 동아일보 기사 -
예수 크리스트가 결혼을 했고 '막달라 마리아'와의 사이에 자녀가 있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아나 현재 '유럽'의 귀족들 중에 그 후손이 살아있다는 주장을 편 책이 지난주 '런던'에서 발매되자 세계적으로 화제와 파문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뉴스워크'지도 이 책의 주장과 반응을 종교페이지에 다루며 관심을 나타냈다. 이 책의 제목은 '성혈과 성배', '성혈(聖血)'이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흘린 피를 뜻하고 '성배(聖杯)'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고 그 뒤 십자가 밑에서 '요셉'이 예수의 피를 받았다는 컵을 말한다.
저자는 3명으로 영국의 TV 프로듀서인 '헨리 링컨' 미국 태생의 소설가 '리처드 레이' 뉴질랜드의 사진작가 '리셀 베이전트'이다. 이들은 성혈과 성배에 얽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10년 동안 추적한 결과를 책으로 쓴 것인데 기독교계에 폭탄적인 내용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하면 예수는 독신생활을 한 구세주가 아니며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 아이들을 가졌고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채 함으로써 '다윗'왕을 계승하려 했으며 결국에는 그의 조국에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들 저자는 예수가 가짜 처형 끝에 살아남았다는 전설은 2세기경의 '그로시스'파(영적인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려 했던 이단 기독교도) 에서부터 전해왔고 그의 결혼설은 최소한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저자들은 예수의 아내와 자녀들이 고대 프랑스의 '골'지방으로 가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왕국의 '메로빙'왕조 통치아래 동화된다는 것이다. 그 후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지하로 잠적하는데 1099년 예수의 후손으로 추측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이용'이 십자군들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에서 '다윗'왕을 다시 계승했다고 지적했다. 이점에 대해 성당기사단(聖堂騎士團,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됨)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란 비밀조직은 예수가의 비밀을 신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저자들은 '시온의 소수도원'이란 조직은 '유럽'과 '영국'의 많은 귀족들이 예수의 먼 친척이란 징표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 책의 저자가 예수가의 비밀을 캐내게 된 동기는 저자 중 한사람인 '링컨'이 남부 '프랑스'의 한 신부가 1890년대 이 지방의 부와 얽힌 비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매혹 당하면서부터다. 이야기란 그 신부가 성당기사단(聖堂騎士團)의 비밀기록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내용 중에 '시온의 소수도원'이 간직했던 비밀을 밝히는 고대서류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는 '시온의 소수도원'멤버가 돼버렸다고 주장할 정도로 기록 등을 신봉하게 됐다고 털어놓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이 출간되자 영국에서 곧 베스트셀러가 됐으나 성직자와 비평가들의 분노와 비난도 대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때 예수를 동성애자가 아닌가 암시하기도 했던 성공회의 신학자 '휴 몬트피오리'주교는 이 책에 대해 '아마튜어적이고 무식하며 괴상하다'고 혹평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이 책이 나오지 않았지만 '시온의 소수도원'의 내부비밀에 대해 저자들에게 알려줬으며 자신도 예수의 후손으로 꼽히고 있는 '피에르 플랑타르'도 잔뜩 화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플랑타르'에게 저자를 소개해준 언론인 '쇼메이오'씨도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을 부인했다. 이같은 관련자들의 부인에도 불구, 저자들은 그들의 주장이 학자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들이 반문하는 내용이 재미있다. '어떤 한 사람(예수를 지칭)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한가, 아니면 처녀의 몸속에서 태어나 물위를 걷고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한가.'
- 기사 끝 -
이상으로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은 끝을 맺고 있는데 그러나 이런 1982년의 사건 이후로 예수를 믿고 있는 수많은 목사나 신부, 수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독교와 천주교 등 모든 종교단체들이 이 저자들을 허위와 사기죄로 고발하였고, 결국 이 세기의 재판은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의 관심을 받으며 3년간의 법정 투쟁을 거쳐 영국 대법원에서 그 사실여부가 결판나게 되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계속해서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계속 나오고, 여러 사람들이 예수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족보를 가지고 증인으로 나서게 되면서 재판이 심상치 않게 나가자 재판장이 3개월 동안 재판을 중단하고 몸져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의 담당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여러 목사님, 신부님, 그리고 수녀님들 죄송합니다.' '저의 집안은 3대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집안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을 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로 망명해 서 82세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하 생략).
이 판결문이 나오자 법정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일부 신부 와 목사, 수녀 등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찢어 버리며 울부짖는 사 태가 발생하고 이 재판의 결과가 메스콤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 자 영국전체 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예수에게 속았다는 비통의 성토와 함께 자살하는 종교인들이 속출하고 전국이 충격에 빠지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재판결과의 국외 전파를 금지하고 판결문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후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다른 종교로 바꾸었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런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 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예수에 대한 영국대법원의 종교재판 결과를 간단히 소개 하면서, 이런 기록이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러 일이 알려진바 없다고 해서 사실 그자체가 은폐내지는 부정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이런 결과는 예수를 몰라보는 처사로서 분명 예수님을 음해 하고자 하는 사단의 짓이라고 매도할지 모르겠으나, 영국에서 그것도 대법원에서 할 일 없어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니다. 영국은 나름대로 기독교의 국가로서 명맥을 이어온 나라이지만, 재판 당사자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3년간의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런 결과를 내린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께서도 의문점이 있으면 옛 신문의 기록을 찾아보시거나 나름대로 알아보세요.
베스트셀러 <다 빈치 코드>의 뼈대를 제공한 책. <다 빈치 코드>에서 댄 브라운은 작중 인물인 티빙 박사의 입을 통해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를 비롯한 마가렛 스타버드의 이론 대부분을 설명한 바 있다. <다 빈치 코드>는 예수의 혼인 사실과 그의 신부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규명한 추리/범죄물이다. 이 책은 로마 가톨릭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을 다뤄 출간 즉시 화제가 되었다.
소설은 그러려니 해도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는 가톨릭 학자가 쓴 책이라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마가렛 스타버드는 1983년 미국에서 출간된 <성혈, 성배>(그리스도가 결혼했고 그의 혈통이 서유럽으로 유입됐다는 내용의 책)를 읽고 불경스런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 반박을 위해서 시작된 연구는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를 출간하는 것으로 일단락 짓게 된다. 그녀도 성배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은 예슈아(예수)와 미리암(막달라 마리아)이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딸이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슈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미리암은 이집트로 도망쳐 딸, 사라를 낳는다. 이어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메로빙거 가문의 이름 속에 예슈아(예수)의 혈통은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예수와 그의 혈통을 믿는 프로방스 사람들을 15,000여명이나 학살한 프랑스 역사가 있고, 13C 종교재판은 같은 이유로 수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한 바 있다. 로마 가톨릭은 신의 아들인 예수가 결혼했으며 그의 혈통이 프로방스 지역으로 흘러들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가렛은 예수의 혈통을 임신한 채 이집트로 피신한 막달라 마리아가 로마 교회와 종교사 가들이 그토록 찾아헤맨 '성배(예수의 피를 담은 잔 Sangraal) 전설'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성배 수호를 둘러싼 민간전승인 아더왕 전설이다. 또, 실재했던 시온 수도회나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 장미십자회는 성배를 보호하고 비밀을 지킨 결사체였다고.
이들은 가톨릭 교회에 해당하는 성배 교회(Church of the Grail, '사랑의 교회')를 세우고, 타로 카드와 미술품, 음유시, 가문의 문장 등을 통해 성배의 진실을 전파했다고 한다. 심지어 십자군 원정은, 예수의 혈통이 예루살렘을 통치(천년왕국의 도래)하길 원했던 성배 교회의 도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왜 로마 교회는 예수의 혼인과 그의 신부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부정했을까? 책은 말한다. 개종 후 가톨릭 교리와 성서의 탁월한 해석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근본적인 여성혐오의 잔해까지도 가져왔다고.
기독교 개종 전까지 마니교 신봉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여성은 소유품에 불과했고, 물질세계의 고난을 영속시키는 주원인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재앙이었을 터. 정말로 그는 막달라 마리아를 (성서에서) '창녀'로 묘사함으로서 신부를 모독한다.
이렇게 고대 기독교 초기에 번성했던 여성 숭배는 남성주의를 우위에 두는 정통 교리에 짓눌려 사라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마가렛은 서구 패러다임에서 '여성의 복원', 즉 남성-여성의 균형을 통해 편향된 기독교를 치유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성배 교회를 믿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믿건 어떻든 간에 오늘 당신은 기독교의 숨겨진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성배 교회의 진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책을 읽어보고 판단하면 될 테니, 앞서서 흥분하지 마시길. 그 점에 있어서는 마가렛을 믿어도 좋을 듯 싶다. 9년의 시간을 들여 쓴 책인 만큼 논거는 충분하니까.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 마가렛 스타버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예수가 결혼한 사실을 굳이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예수의 결혼 사실 유무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의 결혼 사실이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성경에 고의로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구세주가 아닌 예수를 구세주로 미화하고 우상화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로서 그러한 거짓된 말이 2000년간이나 사실로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계속 예수를 우상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도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가 결혼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더러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결혼을 하였고 그 상대는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사실에 대해 밝혀진 사실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보았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예수가 포도주를 장만하였다 (요한복음 2: 1-10)
[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객들의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혼주 측이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한복음 2: 9-10)
[연회장이 포도주를 준비한 예수에게 한 말로 여겨진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신랑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와 신랑이 동일 인물임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예수가 떨어진 포도주를 더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니 당연히 위의 신랑은 예수인 것이다. 즉 가나안 혼인 잔치는 예수의 결혼 잔치였던 것이다.]
♠ (요한복음 1:38)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당시의 유대의 구전 관습법 (미슈나)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랍비(교사, 율법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랍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나안 혼인 잔치 이후부터 예수에게 랍비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 그 당시 공동체에 속한 에세네파의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당시 유대 관습은 남자가 결혼 적령기 이후에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세기 후반의 어느 유대교 작가의 기록에는 고의적인 독신 생활을 살인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만일 예수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 의 관습상 아주 특별한 일로서 한번은 성경에 언급이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이 한 번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성혈과 성배 p343─ 행림 출판사)
♠ 예수의 아내는 막달라 마리아 이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는 항상 예수의 어머니나 다른 여인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가장 중시하던 제자 시몬 베드로를 항상 남자 제자들의 명단 제일 앞에 기록하듯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이기에 여자 명단 제일 앞에 기록해 놓았다. 십자 가 처형 때나 무덤에 찾아 갈 때도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앞서, 제일 먼저 갔었다고 기록되어있다.
♠ 마리아가 예수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행위(마가복음 14:3-9)는 이집트에서 유래된 유대의 풍습으로 신부가 신랑에게 하는 행위이다. 구약성경의 솔로몬의 노래에도 왕에게 기름을 발라주는 신부의 이야 기가 기록되어 있다.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전도 할 때부터 유대 지방까지 시녀처럼 예수를 따라 다녔다. 당 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지방의 관습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동행도 없이 여행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였기에 예수를 따라 장거리 여행을 계속하였던 것 이다. (성혈과 성배p343 -행림출판사)
♠ 요한복음에 있는 나사로의 이야기에는 마르다(나사로의 누이)가 나사로의 집에서 나와 예수에게 인사 를 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부를 때까지 집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요복11:20)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래 마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마르다와 함께 그 집으로 왔으며, 제자들이 그녀를 책망하자 집 안으로 들어가 예수의 지시를 기다렸다고 되어있다. 유대법에 아내는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남편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집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인임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남부 이집트 나그함마디 마을 동굴에서 발견된 신약성경을 기록한 1600년 전의 고문서인 나그 함마디문서의 빌립 복음서에는 구세주의 반려자(ompanion)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예수는 모든 제자들 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셨으며, 그녀에게 늘 키스를 하시곤 했다 (성경엔 없다. p.122 -불지사 간행)라고 기록되어있다.
♠ 서구사회에는 유대의 전승이나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사실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는 세 명의 자식(장녀:타말, 장남:예수 바라바, 차남:요셉)까지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성경엔 없다 p131)예수의 결혼 사실은 결혼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애당초 만들 때부터 편집된 성경을 통해서도 위와 같이 분명히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교회에서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관계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게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말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기록한 곳도 그렇게 짐작할 만한 부분도 없다.
우선 예수는 성경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의 둘째아들 이삭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배다른 형,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첫째아들인 이스마일의 먼 후예는 이슬람의 메시아 '마호메트(무함마드)'입니다. 고로, 하나님=알라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랍인입니다. 백인이 아닙니다, 황인이지요. 또한 느부갓네살, 솔로몬, 다윗 등도 모두 고대 셈계 황인종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사'라는 이름으로 쿠란에 등장하며, 역시 마호메트와 동급의 메시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해는 기원0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12월 25일이 아니라 4월의 어느 날 입니다.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 이사전
지금까지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알려지기로는, 기원 전 5년 12월에 나서 기원 후 30년 4월까지, 만 33세 4개월의 일생 중에 탄생부터 12세까지와, 30세부터 33세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만 알려져 있을 뿐, 13세부터 29세까지의 17년 사이는 예수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과연 이 사이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부친의 목수업을 돕기만 하고 지내왔을까. 설사 그렇게 목수업만 거들고 30세까지 지나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목수 일만 해왔기 때문에 별로 기록할 거리가 못 되어서였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지나온 경과일진대, 조금이라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17년이란 긴 세월을 그냥 비워두고 언급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그 비밀이 무엇일까?
그리고 예수가 사랑을 제창하고 신의 아들로서 자처하며, 병을 고치는 의술이라든가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 같은 것, 그리고 또 그만한 인격과 신념을 갖게 된 데에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무슨 이유가 없을 수 없다. 단순히 부친의 목수 일만 거들었을 뿐으로는 아무리 특출한 자질을 타고 났을지라도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설사 유대인은 구약성서를 읽고 그들 민족의 전통 교훈을 배운다 하여도 기껏 율법학자나 예언자 정도, 제사장 정도는 모를까,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된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의 대부분이 17년간의 비밀 시기 속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가 그리스도 노릇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게 된 것이 17년간의 비밀에 싸인 시기 중이었다면, 왜 그것을 기록하여 17년의 공백을 메우지 않았느냐, 왜 그런 좋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감춰야만 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에는 무슨 중대한 곡적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을 푸는 열쇠가 17년간의 예수의 행적을 알아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 의문을 풀 수 없는 것이라고 단념하고,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뜻으로「비밀」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생리는 수수께끼를 그냥 두고 넘기는 성격이 아니다. 언젠가 이것을 풀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겠다고 유럽의 학자들은 오랜 연구를 거듭해 오는 줄 안다. 결국 이는 풀리고 말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르게 요즘에 와서 이의 실마리가 풀리려 하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몇 년 전의 프랑스 학자 필립 드 슈아레가 발표한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라는 저서를 한국의 한양대학교 민 희식(閔憙植)교수가 국내에 전한 것을 모 신문에 발표한 것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그 17년간의 수수께끼란 다름 아닌 예수가 인도, 티베트 등지로 수학 차 다녀간 세월이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순서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 라반나라는 사람이 일단의 브라만 승려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지혜를 구하러 갔을 때, 유대 나라의 제사에 참석하게 되어 거기서 어린 예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라반나는 너무나 그 총명함에 놀라 제사장 힐렐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사는 나사렛 마을로 찾아가서 브라만의 지혜를 배우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예수는 공부하기를 열망하였기 때문에, 양친도 승낙하였으므로 일행을 따라 인도로 들어가서 쟈간나스 사원에 브라만 승려가 되어 공부하기도 하고, 베나레스의 유명한 의사 우드라카에게서 높은 의술을 전수 받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만의 사성계급인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브라만 교도의 미움을 받아 목숨까지 위험해졌으므로 북쪽으로 피하던 중, 불교 승려의 구함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의 성자 피차파치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 배운 사본이 티베트 랏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하여 소개장을 받다가 그곳에 사는 동양 제일의 현자(賢者)라는 맹구스테에게서 그 사본을 배우며, 또 심지어 영계의 힘을 빌어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까지 터득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예수는 라호르를 거쳐 귀국하는 동안 석가모니의 모범을 따라 병자를 고쳐가며 설법도 하면서 돌아간 기간이 17년 걸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전기 민 희식 교수가 최근 주간중앙지 17면에 게재된 주장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민 교수는 예수가 인도 등지에서 불교 승려 노릇을 하여 그 이름도 이사(Issa)라 하여 우리나라 원효대사와 같은 고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필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예수가 불교 수행을 하여 고승으로까지 되었다면 어찌하여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 교주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예수는 그냥 불교를 참고로만 배웠지 그 깊이에까지 들지 않았으며,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여 신의 종교를 펼쳤을 뿐이라고-.
이러한 본인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1987년 2월에 번역 간행된 서양인의 저서에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as Notovitch)라는 사람이 인도를 여행하다가 발견했다는 문제의 이사전(Issa傳)에 예수가 6년에 걸친 불경 연구를 말한 것은 있어도 승려노릇을 했다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고, 그것을 시사 할만한 구절도 없음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예수가 진정 승려 노릇을 했다면 머리를 깎고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아야 하는데 이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또 승려복을 입었다는 확증도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예수가 귀국 도중 페르샤에서 옛날 자기가 탄생할 시 찾아왔다는 동방박사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동방박사라는 사람들은 마기승(Magi僧) 즉 조로아스터(Zoroaster)교도들로서 예수는 이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불교보다 그쪽에 더 기울어진 것 같다는 설이 있고 보면, 이것은 완전히 불교 공부라 하는 것도 견문을 넓히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알게 하고, 동시에 불교 진리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함도 알게 한다. 또 예수는 불경 공부를 한 후에도 계속 자기 고국에서 지녔던 창조주 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불교인이 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예수는 불교 승려들이 환대해 주는 대로 처사(處士)처럼 눌러있으면서 불교 연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는 고승은커녕 전혀 승려노릇을 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불교에 와서 배워간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오늘날 타 교인이 불교를 배워서 그들의 종교를 위해 써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이러하다면 불교 측으로 보아서는 별로 달가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오히려 불교를 배반하고 불교와 상치되는 교를 창안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 예수가 승려였다는 문제를 놓고 고찰해 보았으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인도와 티베트에 다니면서 학식과 인격을 도야하였기에 그리스도 노릇도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어째서 감추고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나, 그 까닭은 예수가 신의 독생자로 자처 또는 만들어지고, 그리스도까지 높여짐에 따라 신의 아들이 어찌 사람들에게 배웠다고 할 수 있겠느냐, 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타교에 가서 배워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신상 있을 수도 밝힐 수도 없다 하여 극비에 붙여진 것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라면 기독교계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밀은 언젠가 폭로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토마스 복음서」나「이사전」의 노출이 바로 그런 것이요, 앞으로 이것이 더 밝혀져서 기독교는 성경의 재편성, 교리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이 약간 시도되고 있는 듯도 하다. 그것은 소위 1985년 9월에 번역 발행된 이른바 성약성서(成約成書)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가 인도 티베트 등지를 다녀간 것이 수록되었으나 배워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르치고 다닌 성자로 우상화되어 있음이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이 서문에 보니 서양 등 기독교계에서 "사탄의 책"으로 몰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여러 저서들을 통하여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극비로 간직되어 있다는 63개 비밀 사본도 공개하고, 만천하에 정식으로 발표되어야 할 시기에 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먼저 가까운 Public 도서관에 가서 " Jesus in India " 이란 책을 빌려보십시오. 또는 'Issa in India " 라는 책에도 아래내용 들이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못 찾겠으면 직원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컴퓨터로 찾아보면 나옵니다.) 아니면 아무 책방에 가서 콤퓨터에"Jesus in India"혹은 www.google.com 에 들어가 "tombofjesus" 라고 만 쳐도 많은 사실들이 올라옵니다.
또 " Les Grands Classiques De L`inde " ( French Edition ) 란 책에 Page 230 (사진 8장 으로 구성 되있고 네 번째 사진 ) 이 "Jagannatha Puri Temple"이고 거기서 예수님이 참선수행 했던 곳 입니다. 확인하고 리플을 ......
▒ 한겨레 기획특집 4회
글쓴이 : 빌리 그레함 ( 목사. 미국 ),
마르틴 슈나이더( 베를린 퀠른 캠퍼스 신학대 교수, 독일)
옮긴이 : 김 요셉 ( 한총.신.대 교수, 밥존슨 신학대 교수역임)
예수는 인도 에서 승려생활 을 하였다. ( 4 편 )
이번 주에는 보병궁 전도서 에서 전하는 바에 따른 "인도에서 승려 생활한 예수님"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의 청년기인 13∼29세까지의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 부분들이 중세기 때 로만 캐톨릭(콘스탄틴) 에 의해 삭제 되 미국 등, 그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만은 성경이 마치 66권으로만 된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허나 나머지는 이스라엘, 또 이라크 내 하미르크 국립박물관에 보존 돼있습니다.
따라서 최근「예수의 잊어버린 세월」,「법화경과 신약성서」등이 세상 에 공개되면서 점차 알려지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교계에서도 인정하는 "보병궁 복음서 " 가 전해 지면서 예수님의 인도생활이 자세히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또는 해외에서도 한인 목사들 에 의해 철저하게 이 사실들은 비밀리 해왔기에 외국 사람에 의한 외국 신학대학을 공부하신 목회자님들만 아십니다. 허나 이 사실을 밝혀 봐야 이단으로 몰리기에 그냥 말없이 계실 뿐입니다. 그럼 여기에 보병궁 복음서의 일부를 싣습니다.
<보병궁복음서 11장 12절, 16장 1∼2절>
인도의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배우도록 하시요 이것은 성기(聖氣) 교육의 일부이니까요. 요셉의 가정은 나사렛의 마미온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마리아는 그 아들 예수에게 엘리후와 살로메로 부터 얻은 교훈 불경(佛經)과 힌두교 경전인 베다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예수는 베다의 찬가와 아베스다 경전을 읽기를 즐겨 했으나 무엇보다도 좋아한 것은 다윗의 시편과 솔로몬의 실랄한 말을 읽었다.
<보병궁복음서 21장 19절, 23장 3∼10절>
예수는 그리시나 신(神)을 모신 자간나스의 절에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 이곳에서 베다성전 마니법전을 배웠다. 예수는 인도의 의술을 연구하려고 뜻을 세워 인도의 의사들 가운데 으뜸가는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었다. "우도라카"는 물, 흙, 식물, 더위와 추위, 햇빛과 그늘, 빛과 어둠의 용법을 가르쳤다. "우도라카"는 말한다. 자연의 법칙은 건강의 법칙이다. 이 법칙대로 살면 결코 병에 걸리는 일이 없다....한편 자연계의 물상(物像)은 모름지기 인간의 요구에 응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의료의 비약이 된다.
<보병궁복음서 36장 1∼4절>
티벳트 랏사에 한 교사를 위한 사원이 있었다.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인도의 성자인 "피자빠지"는 이미 이들 사본을 읽었으므로 그 내용 가운데 많은 비밀의 교훈을 예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이 직접 읽기를 원했다. 한편 요동(遼東) 전부의 성현 가운데 으뜸가는 사람인 "멩그스테"가 이 티벳트의 사원에 있었다. 에모다스 고원을 횡단하는 길은 험난했지만 예수는 여행길에 올랐고, "피자빠지"는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의 길잡이를 붙여 주었다.
☞ 예수가 인도에 가서 힌두교와 불교 등을 배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약성서에 예수의 13∼29세까지의 기록이 없다고 이 사실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겠습니다.
신약성서의 거의 전부가 조작 됐고 엉터리가 많다는 증거는 예수가 죽은 후 70∼80년 후에 (50∼ 60년 이후 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음)계시를 받았다며 사도 바울에 의하여 고린도서가 제일 먼저 쓰여졌고, 그후 4대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근 80∼90년 후에 신약이 만들어지기 시작 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 본인도 또 그 제자들도 유대교를 신봉했었고 그가 죽은 후 몇 십 년 후에 일부 극소수의 부족들이 부활을 얘기했고 무조건 믿으라는 논리 하에 예수를 신격화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 하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13∼33세까지의 기록은 현재도 분명히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에 공개 및 보관 전시되어 있고 또 그 당시 곧 바로 쓰여진 단지 기행문이라는데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도의 명의(名醫) " 우도라카 "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과 치료법을 배우고 "베다" 및 불경(佛經)을 읽으며, 성인 ‘피자빠지’ 의 소개로 신비의 불교인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 스테 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됩니다.
Jeff Buckley ( 미 ,Yale 대 종교학 교수 )원작, 민 경식 교수 번역판 의 「법화경과 신약 성서」에 보면.......
독실한 불교도이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입니다. 이사(ISSA)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힌두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ISSA)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에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 생활을 합니다.
이샤의 불교 공부는 캐시미르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티벳트에서는 그곳의 밀교계 고승 멩크스테에게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습니다.
불교의 승려인 이사(예수)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 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집니다. 스승인 "멩그스테 "는 예수에게 기적의 비법을 남용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나 그후 .........( 거두절미, 한국 자칭 기독교인들이 잘 아는 내용들... )
예수는 유대교도들에게 모함되어 십자가에 묶였고, 유대교들은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습니다.
예수교 초기의 복음서인 토마스 복음서에 밝혔듯이 억지 부활주장도 결국은 윤회(輪廻) 사상이 깃든 것도 바로 힌두교 영향인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www.tombofjesus.com"에 보면 상세한 부분 이 있으니 참조하세요.
예수, 인도 유학에 오르다(12세)
○ 어린 시절 목수가 된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남부 인도의 오릿사주(州) 왕족인 「라 반나」가 유대나라의 제례(祭禮)에 참석하러 왔던 차에 성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모님을 만나 인도유학을 주선하였습니다. (성약성서 21:1~20)
'해뜨는 방향' 을 향해 떠난 예수는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제자 로 들어가 4년 동안 수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때 예수는 베다성전 등을 배우며,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친구 라마스와 함께 갠지스 강 주변 마을의 노예와 농부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에게 인류는 한 동포이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갠지스 강변의 마을 베나레스는 브라만교의 성지로서 문화와 학술이 고도로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도의 의술(醫術)을 배우기 위해서 당시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합니다. 우도라카의 한 줄기 시 같은 가르침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 자연의 법칙은 건강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대로 살면 결코 병에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 법칙을 어기는 것은 죄이며, 죄를 범하면 병에 걸립니다. (성약성서 23:5~6)
○ 한편 자연계의 물상(物象)은 모름지기 인간의 요구에 응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 의료의 비약(秘藥)이 됩니다. (성약성서 23:10)
○ 인간의 의지는 최고의 의약이니까 …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병을 고칠 수 가 있습니다. (성약성서 23:12)
예수는 우도라카, 승려, 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우주신(본체신)은 한 분이고, 신(인격신)은 ‘한 분 이상’이어서 모든 것은 신(개체화된 인격신), 모든 것은 하나이다. (성약성서 28:4)
갠지스 강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다
○ 어느 날 예수께서 갠지스 강가에서 한 떼의 대상(隊商)들로부터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는 슬픔을 진정하며, ‘한탄이 마음에 떼를 지어 올 때는 모든 것을 잊고 사랑의 일에 깊이 투신하면 슬픔은 사라지고 맙니다.’라는 위안의 서신을 어머니에게 띄웠습니다. (성약성서 30장)
티벳 유학과 예수의 불교식 이름 「이사(ISSA)」
예수의 높고 오묘한 지혜를 인정한 불교도 「바라타 아라보」는 예수님과 함께 유대의 시편과 예언시를 읽고, 베다경전, 페르시아의 아베스타 경전, 석가 부처님의 지혜를 함께 읽었습니다. 인간의 절대 평등을 주장하던 예수께서는 인도의 사회 신분(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고 그를 정죄하려 한 승려 들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이사(ISSA)」였고, 오늘날에도 인도 에서는 예수를 이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티벳의 ‘랏사’에 있는 사원을 찾아가 마침 요동(遼東)의 최고 성현으로 이름이 나 있던 「멘구스테」를 만나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멘구스테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습니다.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도중에 페르시아에 들려서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마기교 승려인 동방박사 3인을 만났습니다. 이 때 예수의 나이는 24 세였습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라는 뜻)’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법명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최후의 외침
예수는 이 비밀형제단의 서약을 받아, 『성실,공정,신앙,박애,의열,성애(聖愛)』의 6단계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 세계의 비밀을 배웠습니 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라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法名)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뜻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러한 ‘사랑을 구현시킬 수 있는 인격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도 유학 시절 예수는 모든 인간의 해탈 가능성을 철저히 가르치는 불교에 매혹되어 승려가 된 후, ‘베나레스(문화와 학술이 고도로 발달된 브라만교의 성지)’, ‘녹야원’, ‘부다가야’ 등지에서 오랜 수도생활을 하고 티벳을 거쳐 29세 때 귀국을 하였는데, 예수는 인도 , 티벳【 밀교계 고승 「우도라카」, 「멘구스테」로부터 심령 치료의 비법을 전수받았습니다. 이들 스승은 예수에게 도술을 이기적으로 남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 다. 그러나 귀국 후 예수는 유일신교인 유대교파들에게 모든 인간의 절대 신성을 부르짖으며 이적을 행하고, 군중을 모아 신의 사랑과 평등사상을 전파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파의 질시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는 데, 이 때 예수가 제자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뒤, “엘리엘리 라마 사박 다니” (Eli Eli Lama Sabachthani :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로 번역되어 왔음)라는 말 한 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의 최후의 말씀은 티벳트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 “엘 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Eli Eli Lama Sammach Sam Bori)라는 다라니(Dha -rani=總持=呪文)로 밝혀졌습니다. 즉 예수님은 극도로 탈진해 생사를 가늠하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福德)을 얻게 되는 권능이 있다고 전해지는 라마불교의 주문(다라니)을 암송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주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죽은 뒤 40~50년 후 예수의 말씀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마지막 말씀의 의미가 잘못 기록되고 또 잘못 번역되어 후세에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바로 앞두고 라마불교의 진언을 암송했다는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인도 성だ텝구도생활』을 밝혀 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입 니다. [인도,티벳,이집트 등에서의 예수의 구도생활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참고서적은 성서의 뿌리(민희식 지음)』, 법화경과 신약성서(민희식 지음)』,『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엘리자베스 C 프로펫트 지음)』, 『인도에 서의 예수의 생애(홀거 케르세텐 지음)』
<히말라야 성자들과 지낸 예수님의 17년 세월> :: 김 현 철(주간 한겨레저널 회장)
필자가 4년 전 인터넷을 통해 서울 교보문고의 서적을 주문하다가 "성약성서"라는 이상한 책이름을 발견, 추적 끝에 이 책이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활 직전(12세-30세) 1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히말라야 성자들과 지냈다는 내용을, 각종 증거를 제시하며 서술한 영문판 서적의 번역본임을 알게 됐다. 그제 서야 "어쩐지 신약성서 어느 곳에도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기록이 없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필자는 몇 해 동안 서울에 드나들면서 "성약성서"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실패 끝에 작년에야 "바안스 앤드 노블" 미국 서점에서 영문 판 원본 "예수님의 잃어버린 세월"(The Lost Years of Jesus(by Elizabeth Prophet, ISBN 0-916766-87-X)"을 입수했다.
이 책에는 1887년 러시아 출신 언론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otovitch)가 북부 인도의 히말라야에 있는 라다크 주의 수도 레(Leh)에서 25마일 떨어진 히미스(Himis) 수도원(해발 3천4백미터, 5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수도원)의 원장을 통해 예수님이 현지에 다녀 간 발자취가 기록돼 있는 3권의 책 중 중요 부분을 번역해 가져와서 발간한 책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Unknown Life of Jesus)" 전문(그 후 이 책은 전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시 불란서에서는 8판을 거듭했다 함), 그 후 인도 캘카타 출신 교수이며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수제자로 유명한 쓰와미 아베다난다(Abhedananda) 및 러시아 출신 교수 니콜라스 로릭(Roerich)박사가 노보비치의 책을 확인하는 작업 끝에 전부 사실임을 인정한 보고서 전문, 1939년 스위스 음악대 교수출신인 엘리자베스 카스파리(Caspari) 박사와 가스크(Gasque) 부인이 이끄는 9명의 히말라야 탐험대가 히미스 수도원을 방문해 똑 같은 사실을 확인한 사건 전모 등을 수록하고 있으며 그 밖에 예수님이 히말라야와 인도에 다녀 간 발자취와 많은 사진 등이 실려 있다.
티벳 망명정부(달라이 라마 왕)가 있는 서 북부 인도의 "다람살라"의 한 티벳 스님은 예수님이 인도와 티벳 등 많은 도시와 히말라야에 다녀갔다는 게 사실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적어도 인도, 파키스탄, 티벳, 네팔, 부탄 등 히말라야를 인접하고 있는 지역의 힌두교, 불교 신자들은 옛 부터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이 이 사실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니까."하며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 천주교회의 신부님 한 분이 "불교와 천주교의 예배하는 전례는 너무 닮았습니다, 부처님 자리에 성모님 상을 올려놓으면 거의 같습니다." 하던 말이 이제야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히말라야와 인도 지방에서 18년간이나 머물렀음을 이 신부님은 알고 한 말이었을까 ? 또 성서 상에 일언반구 이에 대한 말씀이 없음은 예수님이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후대 성서학자들이 그 내용을 의식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일까 ?
이 밖에 서점에 가면 "동양 성자들의 생애와 가르침( 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Far East, by Baird T. Spalding, 한국어 번역본은 '초인생활')"등 성서 상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예수님의 행적들을 각종 증거를 들어 기록한 책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발견, 그동안 필자가 너무도 무지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인간의 모친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성자들은 바로 현재도 서로가 한결 같이 형제애를 지니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종 종교 신도들이 알게 되는 순간, 종교 때문에 전쟁과 불화로 얼룩지고 있는 이 세상은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지 않
http://blog.naver.com/bando1009/120013908768 에서 옮김
35. 예수는 젊은 시절 인도에서 승려생활을 하였다
♠ 예수는 13세 때 인도로 건너가 29세까지 17년 간 인도, 네팔, 티벳 등지에서 승려로서 생활을 하고 29세 때 이스라엘로 돌아와 인도에서 배운 불교의 교리와 석가모니의 행적을 자신의 사상과 행적으로 꾸며서 설교에 이용하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예수의 행적과 설교는 불경상의 석가모니의 행적, 설법과 너무나 똑같이 모방되어 있다.
가. 예수의 청년기를 기록한 고문서 <이사전>발견
성경에는 예수의 13세 때부터 29세까지의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예수의 12세 이후의 청년기의 밝혀지지 않은 행적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많은 학자와 탐험가들이 연구와 탐사를 거듭해 왔었다.
그러던 중 1887년 러시아의 언론인이자 저술가인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인도와 티벳지방을 여행하면서 인도불교의 한 종파인 라마교 스님으로부터 인도 라닥크 주의 수도인 레(Leh)시의 하이미츠(Himis) 7대 사원에 흩어져 있던 예수의 생애에 관한 티벳어로 기록해 놓은 수천장의 고대 양피지 두루말이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13세 때 상인을 따라 인도로 건너간 예수가 29세 때까지 인도, 네팔, 티벳 등지에서 불교승려로서 수행한 행적과 예수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고문서들이었다. 예수의 인도에서의 승려로서의 이름은 이사(Issa)이며 예수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고문서들은 <이사전(傳)>이었다.
노토비치는 고문서의 고사본(古寫本)들을 입수하여 불어판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성(聖)이사의 일대기>를 출판함으로써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노토비치의 <이사전(傳)>이 발간된 이후 철학자 스와미 아베다 난다, 러시아의 과학자 니콜라스 로에리치 교수, 스위스 음대의 카스파리 교수 등 수십명의 사람들이 인도와 티베트를 방문하고 확인하여 노토비치의 주장을 뒤받침해 주었다 . (사진4:불교신문, 사진5 주간중앙 참조)
이러한 목격자들의 보고서를 묶어 미국의 엘리자베스. C. 프로펠 교수가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The Lost Years Of Jesus)>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여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87년 동국출판사에서 번역, 동명으로 발간한 바 있다.
나. 예수의 인도에서의 승려생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고대 양피지 문서의 최초 목격자인 러시아의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불어판 <이사전>은 14장 244절에 걸쳐 번역되어 있는데 4장 10절부터 8장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동방에 와서 불교를 공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4장 10절)
이사(예수)가 열 세살이 되어 이스라엘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해야 될 즈음…(4장 11절) 단순한 손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던 부모의 집에 부자와 귀족들이 드나들어 이사를 사위로 맞고자 하였으니…그의 교훈적인 설교가 유명해졌기 때문이다(4장 12절) 이사가 아버지의 집을 은밀히 빠져 나와 예루살렘을 떠나 상인들과 함께 신드 (Sind)로 향했던 것이 바로 그 때였으니…(4장 13절) 이는 대 붓다의 법을 연구하기 위함이라(5장 3절) …이사께서 오릿사 나라에 있는 주거나우에 가시니 그곳은 비앗사크리슈나의 시 신이 안치된 곳이다.
이사께서 그곳 백인 브라만 사제들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으셨더라(5장 4절) 그들이 이사께 베다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과 기도의 힘으로 병을 치유하는 방법, 경전을 사람에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방법을 가르치니라(5장 5절) 이사께서 주거나우, 라자그리하, 베나레스 그리고 다른 성지에서 6년간 지내셨더라. 그가 바이샤와 수드라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사전의 예수의 불교 수행기를 종합해 보면 13세 때 인도로 건너온 예수는 14세 때 인도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사드 등을 공부하다 브라만교를 떠나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에서 6년 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승려생활을 한다.
예수의 불교 공부는 카시미아를 거쳐 라다크 주(州)의 수도 레에서 팔리어(語),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계속되며 이어서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심령치료와 초능력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그렇게 하여 불교의 고승이 된 이사대사(大師) 즉 예수는 29세 되는 해에 페르시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불경과 석가모니의 행적을 모방한 교리를 펴나가며 자신을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세주로 미화해 나갔다.
다. 교황청에도 소장되어 있는 <이사전(傳)>고사본
노토비치의 <이사전(傳)>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노토비치가 책을 발행하기 전에 키에프市의 유명한 대주교 플라톤 신부에게 원고를 보였고 파리의 로텔리 주교에게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그중 한 신부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고 인정하고 출판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는 충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1328년경에 포르데논의 오도릭 신부가 최초로 티벳을 다녀왔고 3세기 후에는 예수회 앙토니오 안드라다가, 1661년에는 그루에베와 도르빌의 신부들이 다녀왔다. 그리고 그들이 복사해 왔는지는 모르나 바티칸 도서관 내에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여러 동양언어로 기록된 <이사전>의 63개의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처음 밝힌 노토비치는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로부터 항의와 박해을 받았다. <뉴욕타임지>를 비롯한 <19세기저널>지는 옥스퍼드 대학의 막스뮬러 교수와 아치발트 더글러스 교수가 노토비치의 <이사전> 발견에 대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몰아 부치는 글을 게재 하였다. 기독교 단체 측의 박해가 잇따르자 노토비치는 고사본 자료들을 프랑스 정부에 넘기고 숨어버렸다.
라. 감춰진 노토비치의 <이사傳> 고사본의 내용이 한국에서 공개되다.
불문학자로서 19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 받은 바 있는 한양대 민희식 교수는 인도 여러 곳을 답사하고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된 채 공개되지 않고 있던 노토비치의 자료들을 1986년 프랑스에서 발굴 입수하여 그 자료와 연구결과를 토대로 예수는 불교승려였다고 공식 발표하고 특별강의를 계속함으로써 이 충격적 사실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신학 대학에까지 초청되어 강의를 하였다.
민교수는 그의 저서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통해 기독교의 신약성서 중 많은 부분이 법화경 등 불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진 5: 1986.10.26 주간 중앙 보도) 민희식교수는 예수의 일대기에 관해 성경보다 인도의 불교 문헌이 더 정확한 이유는 예수에 대한 기독교 측 문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씌어졌으나 불교 측 문헌은 그 당시의 견문 기록이기 때문 이라고 밝혔다.
신약성경은 대부분 불경을 모방한 것이다. 러시아의 언론인 니콜라스 노도비치가 예수는 13세 때 인도로 건너가 17년 간 인도, 네팔, 티벳 등지에서 승려로서 생활을 하고 29세 때 이스라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힌 이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인도와 티베트를 방문하여 이를 확인하여 왔던 바 이를 종합하여 1984년 엘리자베스 C. 프로펫트가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을 발간하여 다시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이후 국내외의 많은 학자와 저술가들이 예수의 인도에서의 승려생활과 더불어 불경과 신약성경의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함께 밝히는 저술을 활발하게 발간하였다. 이는 예수가 인도에서 배운 불교의 교리와 석가모니의 행적을 자신의 사상과 행적으로 꾸며서 설교하는데 이용하였던 것이며 그래서 신약성경의 예수의 행적과 설교는 불경상의 석가모니의 행적, 설법과 너무나 똑같이 모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가 불경을 도용하여 자신의 설교로 사용하고 석가모니의 행적을 자신의 행적으로 꾸며서 포교를 한 근본 이유가 가짜 구세주 행세를 행하여 하나님의 진짜 구세주의 역사를 가로 막고자한 마귀 신의 역사였음을 밝히지는 못하였다. 신약성경에 예수가 불경을 모방하여 설교한 부분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광범위하다. 일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석가는 40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불경 상응부경전)
-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 (성경 누가복음 4장1절)♤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아함경)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하였다 (마태복음 10장1절)♤석가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석가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
-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지는 것을 예수가 건져 주었다(마태14장25절)♤석가는 발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 5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 주석78)
-예수는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마태복음14장17절)♤석가는 과부의 두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
-예수는 과부의 한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하였다 (누가복음21장1절)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무문자설경)
-소경의 인도로 구덩이에 빠진다 (누가복음 6장)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본생경)
─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누가복음2장)
♤니르바나(열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무문자설경)-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누가복음16장)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아 타향에서 허랑 방탕하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오히려 환대하며 돌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장자궁자(법화경 신해품)와 신약성경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누가복음15:11)는 똑같은 줄거리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불교적 말씀들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부분으로 법구경에서 석가모니가 설파한 사랑과 자비의 설법과 똑같다.
그리고 석가와 예수의 탄생설화, 아시타 선인과 동방박사, 책봉식과 세례식, 소년시절의 성인이 될 징조, 카이샤파와 요한, 마아탕가와 사마리아 여인, 신앙의 힘으로 잠재운 폭풍, 살인마와 길 잃은 양, 경전비방과 성령모독, 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말법시대와 말세 등 신약성경상의 예수의 설교와 행적들의 대부분이 위와 같이 불경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참고 도서: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 ─ 서울 출판 미디어간행, 윤청광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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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짜증납니다.
제목과 본문 내용은 왜 이렇게 다릅니까?
명확한 자기 주장과 논증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도대체 남의 글을 잔뜩 인용해서.. 기독교를 공격하고...
호교론자의 반격을 초래하여, 또 다시 카페 게시판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 뻔한 글을 올리는지.. 원...
벌써 수십년 전부터 나돌 던 얘기를 우리 카페에서 앵무새처럼 그대로 반복해야하는 명분은 뭔지....
기독교가 이집트신화 및 주변국의 신화를 빌려쓴것은 맞구요,
두부의 죄로 인하여 온 인류는 원죄를 타고 났다는것과 그 원죄를 대속한게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믿음의 힘으로만 천국을 간다,,
인권이 말살된 신권중심 방향설정으로는 미래의 인류를 이끌 역동성이 없을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처녀 잉태설을 믿느니 현대과학의 처녀 임신설을 믿어야 옳지요
종교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가 아닙니다.
현 세대가 풀어야할 숙제라는 제목... 본 글에서... "헌법의 종교의 자유"에 관해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관한 [글쓰는 이의 논증]을 기대하도록 부추긴 글쓰는 이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무언의 약속도 약속인데
실제 본론의 전개는... 흔히 떠돌던 기독교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줄줄이 인용하고 끝내버렸습니다.
그러면 초두에 마치 중립적 입장에서 비판하겠다는 또 하나의 무언의 약속도 어긴 셈입니다.
차라리... 제목부터.. 처음부터... 기독교를 비판한다.. 의혹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러한 부정적인 의혹이 있다.... 이러면 양해할 수 있죠
도대체... 거론해야할 헌법 조항에 대한 분석과 명료한 의견 개진은 어데로 갔습니까?
결국,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들의 반격을 초래할 뿐 아닙니까?
도대체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종교적 신앙의 문제에서 "주관적 입장 대 주관적 입장"을 늘어놓자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현 시점에서
정론직필 카페를 어지럽히자는 심산이 아니고 뭡니까?
님의 반응이 황당하군요.
6월 5일에
"애수(일명 예수)가 실존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분이 계시길래 저도 시간내서, 자료 찾아서 올려준(?) 게시물입니다.
님은 다 알고있었던 내용일지 몰라도 처음 읽는 분들도 분명 있을겁니다. 저도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무척 혼란스러웠고, 제게는 기독교를 바로 보는 계기가 됐던 글입니다.
현재 회원들의 반응을 보십시요. 님이 이상하신가요? 제가 그런가요?
제가 이 카페에 분란을 일으켜 무에 이득이 있겠습니까? 민족통일을 염원한다는 분들이 이리도 편협하고 냉소적이어서야 원...
사실 '현 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가 종교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들의 반격이 두려우십니까?
반통일분자들의 반격이 두려워서 통일관련 글은 어떻게 올리시는지...
모르긴해도 통일이 되면 현 남측의 기독세력이 가장 큰 분란을 일으킬것입니다. 이 카페에 이런 글이 배척당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글이 환영을 받나요?
실망입니다.
이제 개독관련글은 삼가했으면 하는 바입니다.
요즘 사막의 잡신에 대해 너무 많은 화제가 올라 왔네요.
뿌리깊은나무 님 잘 보았습니다.
/뿌리깊은나무님/
참.. 희안한 논리이십니다. 제 댓글을 너무 비트셨습니다.
제가 지적한 1차적인 것은,
님의 게시글 제목-초두의 발제-내용-마무리가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글을 마치, 낚시질 하듯이 올리고.. 제목이나 초두의 제시와는 달리, 자기 의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들 걱정은 핑계거리 아닙니까?
다시 말합니다.
나는 님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그럼.. 글을 올리실 때 님의 의견이 존중받을만하게 올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낚시질하듯이 올리시지 말구요.
글의 내용이 저의 견해죠.
제가 쓴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낚시질해서 머하게요?
무엇을 낚기위한 낚시죠?
그리고 무슨 논문도 아니고 님의 말씀처럼 논리따지고 기승전결이 있어야합니까?
진실은 긴 말이 필요없는 겁니다.
중언부언은 현학의 허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출처를 밝히지않은 것에 대해 나무라신다면야 할 말이 없읍니다만, 그 외에는 님의 감정 문제같아요.
개독의 믿음-사기를 전제로 자신을 믿으라..뇌를 보관해주겠소..??
소망-쩐만이 믿음이다...쩐을 다오..
사랑-최고의 믿음은 떡이다...빤쮸를 벗어라..???
그냥 현실이 그런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