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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 샨티 샨티 땡큐 옴
문수보살은 불법의 깊은 의미를 체득하고 있는 현수(賢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나는 이미 보살의 청정한 행에 관해서 설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대는 보살의 광대무변한 공덕의 의미를 설하여 주시옵소서."
현수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잘 들으시오. 보살의 공덕은 광대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의 힘에 의하여 그 중 일부의 공덕을 설하고자 합니다. 내가 설하는 것은 마치 큰 바다 속의 한 방울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堤心]을 낸 보살은 오로지 꾸준하게 깨달음을 구하여 동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일념(一念)의 공덕을 여래가 설한다 해도 그 일념의 공덕을 설하여 마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보살이 여러 가지 행을 닦은 공덕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설한다고 하여도 다 설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나는 공덕의 일부를 설하지만 그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품는 것과 같고 또 대지(大地)의 한 티끌과 같습니다.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스님[三寶]에 대한 깊고 청정한 신심을 갖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감각에 따르는 욕망이나 재물을 구하지 않고 세간의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며, 중생의 고뇌를 없게 하여 맹세코 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배워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생각하고 모든 지혜를 닦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깊고 청정한 신심은 견고하여 부서지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정법과 스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화엄경> 제 8장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
야곱이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리로 가서, 곡식을 좀 사오너라. 그래야 먹고 살지,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그래서 요셉의 형 열 명이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갔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그 때에 요셉은 나라의 총리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였다.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들이 형들임을 알았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그들에게 엄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먹거리를 사려고,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때에 요셉은 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첩자들이오. 이 나라의 허술한 곳이 어디인지를 엿보러 온 것이 틀림없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총리 어른, 소인들은 그저 먹거리를 사러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식들입니다. 소인들은 순진한 백성이며, 첩자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였다. "아니오! 당신들은 이 나라의 허술한 곳이 어디인지를 엿보러 왔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소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모두 열둘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소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잃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 말이 틀림없소. 당신들은 첩자들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진실을 증명할 길은 있소. 바로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당신들이 막내 아우를 이리로 데려오지 않으면, 당신들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오.
당신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보내어, 당신들 집에 남아 있는 아우를 이리로 데려오게 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가두어 두겠소. 나는 이렇게 하여, 당신들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시험해 보겠소. 바로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당신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당신들은 첩자라는 누명을 벗지 못할 것이오."
요셉은 그들을 감옥에 사흘 동안 가두어 두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오. 당신들은 이렇게 하시오. 그래야 살 수 있소.
당신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당신들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만 여기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나가서,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이 허기를 면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반드시 막내 아우를 나에게로 데리고 와야 하오. 그래야만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음을 면할 것이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다."
그들은, 요셉이 통역을 세우고 말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요셉이 알아듣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듣다 못한 요셉은, 그들 앞에서 잠시 물러가서 울었다. 다시 돌아온 요셉은 그들과 말을 주고받다가, 그들 가운데서 시므온을 끌어내어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끈으로 묶었다.
요셉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이 가지고 온 통에다가 곡식을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이 낸 돈은 그 사람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에서 먹을 것은 따로 주게 하였다. 요셉이 시킨 대로 다 되었다.
그들은 곡식을 나귀에 싣고, 거기를 떠났다.
그들이 하룻밤 묵어갈 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다가, 자루 아귀에 자기의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렸다. "내가 낸 돈이 도로 돌아왔다. 나의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어!"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떨면서, 서로 쳐다보며 한탄하였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그 동안 겪은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 나라의 높으신 분이 우리를 보더니, 엄하게 꾸짖고, 우리를 그 나라를 엿보러 간 첩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첩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들로서 열두 형제입니다. 하나는 잃고, 또 막내는 가나안 땅에 우리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라의 높으신 분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어디, 너희가 정말 정직한 사람들인지, 내가 한 번 알아보겠다. 너희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은 여기에 나와 함께 남아 있고, 나머지는 너희 집안 식구들이 굶지 않도록,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의 막내 아우를 나에게로 데리고 오너라. 그래야만 너희가 첩자가 아니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알 수 있겠다. 그런 다음에야, 내가 여기 잡아둔 너희 형제를 풀어 주고, 너희가 이 나라에 드나들면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루를 비우다가, 각 사람의 자루에 각자가 치른 그 돈꾸러미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는 그 돈꾸러미를 보고서, 모두들 겁이 났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의 아이들을 다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잃었다. 그런데 이제 너희는 베냐민마저 빼앗아 가겠다는 거냐? 하나같이 다 나를 괴롭힐 뿐이로구나!"
르우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저의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막내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야곱이 말하였다. "막내를 너희와 함께 그리로 보낼 수는 없다. 그 아이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 그 아이가 너희와 같이 갔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찌 하겠느냐? 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어서 스올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다는 거냐?"
-(<창세기> 42장)
오늘 화엄경에서 [감각에 따르는 욕망이나 재물을 구하지 않고 세간의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며, 중생의 고뇌를 없게 하여 맹세코 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를 보자.
여기서 중생을 구한다는 것은, 중생도 깨달으면 좋다는 것을 알린다는 것 같다. 소유에 애쓰지 말고 존재론적 사유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은 이 말들 듣기는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소유가 삶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으로 우리는 살기 위해 알맞은 것만 취해 왔고, 성선택으로 우리는 쾌감의 정점에 있는 것들을 만들어 왔다. 그럼 중생과 깨달으려는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깨닫는다는 것은 탐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꾹 참는 것이다. 본능에서는 불화산처럼 타오르는 데 이를 인식론적으로 누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제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선택이 만든 것들을 취하기 위해서다. 자연선택은 규범에 따른 패턴 선호로 마련된 인식이지만, 성선택은 오로지 상대를 취하기 위한 유희적 활동이기에 노력으로 눌렀던 욕망이 순식간에 나오게 된다. 그것이 불거져 나오는 동안 정돈된 인식은 무의식 창고에 깊숙이 쟁여진다. 그래서 바람은 무섭기도 하고 본능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생각은 <연애 : 생존기계가 아닌 연애기계로서의 인간>을 보고 해본 것인데, 더 웃긴 것은 오래전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진화심리학이 궁금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기억이 거의 안 난다. 이 책을 넘기면서 든 생각은 전에 원리에 대한 궁금증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현상은 왜 저럴까? 이는 분리 사고일지도 모른다. 이걸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분리 사고에서 통합 사고로 가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노력은 해볼 것이다. 인생 뭐 있나? 단기 계획을 세우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 아닐까? 흐르는 대로.
창세기 막바지에 다다른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는 앞에 조금 나오고 그 뒤는 전부 이스라엘 족보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고 개입하고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배려하고 배신하고 살인하고 질서 없이 결혼을 하고 등등의 이야기는 지금도 공감이 가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 같다는 생각만 들게 한다.
어제 정재승의 ‘뇌로 보는 종교’를 보았다. 신을 떠올린다는 측두엽은 실제로는 종교 영역이 아니고 종교 인지는 더 많은 것들이 종합해서 일어나는데, 결론적으로 신은 인간이 창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보이지 않는 현상을 상상하는 추론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가 등장했는데, 이야기가 내용이 다 달랐다. 그걸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냥 ‘허무한 인생’이었다. 알아도 알아내지 못하는 이 불가지론의 세상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그저 무(無)이고 환(幻)이고 공(空)이라는 인식을 갖고 ‘허무한 인생’이라고 하며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속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향모를 땋으며>에 나오는 글을 보자.
[이 새로운 단어(‘퍼퍼워’가 “버섯을 밤중에 땅에서 밀어올리는 힘”)의 세 음절에서는 축축한 아침 숲에서 행해지는 꼼꼼한 관찰의 전 과정을, 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영어에는 이를 일컬을 수 있는 말이 없다. 이 단어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의 세계, 보이지 않지만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로 가득한 세계를 이해했다. 나는 이 단어를 부적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으며, 버섯의 생명력에 이름을 붙인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길 갈망했다. ‘퍼퍼워’라는 단어를 가진 언어로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솟아오름과 출현을 나타내는 그 단어가 우리 조상의 언어에 속한 것임을 알았을 때 그것은 내게 이정표가 되었다.]
위 글에서 “이 단어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의 세계, 보이지 않지만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로 가득한 세계를 이해했다.”를 보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라는, 즉 분리가 아닌 통합의 세계, 소유 관계로 시선을 던지는 게 아닌 존재 관계로 묶으려는 시선의 확보, 이런 것들이 엮여지는 문장을 나도 쓰고 싶다. 계획만 세우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글이다.
[그러자 예전에 내 방 벽난로 속으로 바람이 불어 대면 바닷가로 떠나고 싶어 했던
것 이상으로 나무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나는 불로뉴 숲을 지나 트리아농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때는 불로뉴 숲이 가장 세분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세분화된 모습이 각기 달라 숲이 가장 다채롭게 보이는 시간이자 계절이었다. 잎이 다 떨어졌거나 여름 잎이 아직 남아 있는 나무들이 멀리 보이는 어두운 숲 맞은편 여기저기 넓게 확 트인 부분에서조차도, 두 줄로 쭉 들어선 마로니에 나무들이 노랗게 물든 채로, 화가가 방금 그리기 시작해 일부만 색칠하고 나머지 부분은 아직 칠하지 않은 채 나중에 그릴 인물들의 부수적인 산책을 위해 남겨놓은 작품처럼, 산책로를 햇빛 속에 환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 감탄이다. 이게 분리가 아닌 통합의 글쓰기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여 감사합니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웃음을 지으면서 카말라가 소리쳤다. “그래요, 귀하신 분, 아직은 마음에 차지 않아요. 나한테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려면 옷을, 그것도 멋진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고, 신발을, 그것도 예쁜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지갑에는 돈을 두둑이 넣고 있지 않으면 안 되고, 카말라에게 줄 선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숲에서 온 사문이여, 이제 아시겠어요? 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셨나요?]
이야기 흐름상 반어법일 것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어지럽다.
뭐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그렇다.
얼굴 한쪽이 약간 부어서일 것이다.
죽만 먹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문장들을 만남에 감사한다.
거기에 내 생각도 개진할 수 있어 감사한다.
옴 샨티 샨티 땡큐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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