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늘은 푸르고 장마의 흔적은 계곡깊이 흐르고 무더위는 금수산 용아능선 바윗길을
덮고 그리 오래전 자주 갔든 산길을 노구를 끌고 다녀왔다. 시절은 흐르면 돌아오는 것은 항상 잔인할 뿐이다.
타협 이란 어느 경지에 오르는 이들에게는
무너지는 순간이라 한다. 저명한 요리사나
고명한 도예가나 기술분야에서 수준을 넘어서는 분들은 타협이 마치 일순간의 자신의 경력을 놓아버리는 순간이라 한다.
유명한 미숼렝 스리스타의 주방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 별하나를 잃는 것은 마치 자신의 능력의 벼랑으로 느끼는 순간 남이 만든 틀에 갇혀 버리고 심신의 어느 부분이 소멸되는 듯이 광기를 동원하더라도 유지 시킬려고 마치 밤하늘 별을 따올것 같은 모습을 가진다. 무릇, 요리사뿐 아니라 과학자나 생물학자나 철학자나 자신의 이론이 반론이나 검정과정에 대한 질문이나
여론을 싫어하고 마치 철옹성 같은 선지자가
되고 싶어한다. 마치 독재자 처럼 군림하고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이 나부끼기를 바란다.
타협은 마치 자신을 좀 먹는 암처럼 나타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지 않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소아적인 사고가 지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영원한 선두주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늘 앞서는 모습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예란 마치 인간이 만든 신이 되고 싶어하는 바벨탑을 세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스로 성찰이라는 타협은 자기가 만들지 않어면 마치 앞만 보고 가는 직행 특급열차 같은 꼴이된다. 늘 한쪽으로 달리는 고속열차는 반대 방향으로도 똑 같은 속도로 달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진정한 스승은 자기를 밟고 넘어서는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냉엄하고 공정한 스승이 되는 것은 제자에게 냉정하고 믿겨름이 되기를 바란다. 배우는 자들이 타협이라는 독약을 마시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마음조차 가지는 것을 보기가 싫은 것이다. 공자도
제일 보기 싫은 일이 제자들의 타협으로 자신들이 머무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끝임없이 누구에게 배우고 얻기를 바랏는지 모른디. 붓다도 열반으로 가기전에 제자늘에게 질문을 하라 하셨다. 믈어볼 것이 있어면 질문을 하라고 했다. 세번의 기회를 주어도 제자들은 돌아가시는 붓다에게 열반을 하시지 말아달라고 했다.
삶과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라 하셨다.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깨달음의 길로 가라고 하고 열반하셨다. 예수도 마찬가지 였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탈을 쓰면 진리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원하면 질문을 하라 하였지만 마찬가지로 최후의 만찬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가르침을 배우라 하셨다. 인간은 자신들과 끊임없이 배움과 깨달음으로 가야한다. 신에게 바라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은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심의 들러리가 아니다. 기도란 자신과의 타협을 가지는 길이다. 세상은 자신이 가야하는 길이다. 신이나 하늘이나
타인들은 바라만 보는 태양판 같은 존재일 뿐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하늘도 땅도 움직인다. 마음도 맹세도 진리도 움직인다.
산을 다니는 산꾼은 늘 변하는 시절을 제일 먼저 아는 사람들이다. 산길도 변하고 움직인다. 나무도 바위도 지나가는 바람도 움직인다. 세월이 지나면 변하고 움직인다.
만물은 모든 것은 원소로 이루어졌기에 다른 것으로 결합 하고 변하는 것이다. 존재란 영원불멸은 없는 것이고 때가 되면 소멸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그때 그 존재가 정답일 뿐이고 지금은 맞는 것 뿐이다. 지나가는 것은 옳은 것은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공空일 뿐이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금은 지구의 물질이 아니다. 우주의 물질이 지구에 충돌하여 생긴것이라 한다. 영원불멸의 지위를 만든 인간들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것이고 필요를 모르는 사람들은 돌멩이일 뿐이다. 다이아몬드나 명품이나 필요를 하는 존재들에게는 귀하지만 필요가 없는 존재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진리란 변하지 않기 위해 만들고 만들어 각인 시킨다. 진리도 지나고 나면 변하는 것 뿐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지구의 생물들의 유전자는 진화를 하지못하면
유전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인간들도 어느 순간 1억년 이상 존재한 공룡이나 생물들 처럼 사라진다. 자연은 타협은 없다. 변하는 것은 진리이다. 노자나 공자나 붓다나 예수나
한 말씀으로 하시는 말은 자신이 만든 진리의 말은 존재하지 않고 지나간 시절 어느 선지자들이 하신 말을 대신 전하는 진리라고 했다. 지금의 인류의 삶은 변하고 변하기에
결국은 타협의 모습으로 가는 방법읗 모두가
나타내는 것 같지안 결국은 어떻게 변할수 밖에 없다. 변화의 끝은 소멸이다. 타협은 단지 조금의 여유라고 할수 있다.
산을 다닌지는 오래되다보니 산에서 인연들은 참으로 소중하고 귀중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늘 다가오고 사라진다. 언젠가 선배되시는 분이 하신말씀이 "산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마치 목욕탕에서 만나는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 하셨다. 산에 오면 사회의 탈을 벗고 만나는 것은 똑같은 조건이라고 하셨다.
20대때 만난 동생되는 전문 산악인이 있었다. 산을 너무 좋아하고 그땐 몇날을 종주만 다니던 시절이라 전문 산꾼이었다.
설악산을 겨울 동계로 일주일 이상을 다니고
지리산을 몇날을 계곡을 오르고 내리고 하던 시절이 었다. 히말라야 원정대가 처음 만드는 시절이라 운이 좋았는지 동생은 선발되어 북미 멕켄리 겨울 훈련에도 따라가고 하였다. 그러나, 결혼 한지 얼마되지 않고 여건이 최종선발에서 제외 되었다. 개인 기술산업도 열심히 하고 사는 동생이었는데 이따금 산을 가면 늘 술에 취해
한탄 아닌 한탄을 하고는 하였다. 30 대쯤 되어서 회사일로 멀리 파견 나가 있을때 친구에게서 비보가 전해왔다. 산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산에서 만난 동생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히말라야를 가지못한 충격이 크나큰 여파로 결국은 돌이킬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산을 진정으로 좋아하면 자신과 타협할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너무 크나큰 총격이었다. 늘 자주 가던 영남알프스의 깊은 골짜기에서 추모제를 하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 를 옭아메는 것은 어떻게 믹을수가 없다. 산은 늘 우리를 안아줄 뿐이다. 산이 우리에게 무어라 하지는 않는다. 산은 타협을 모른다.
우주는 은하계의 태양계를 만들고 지구를 만들어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생물을 만들었다. 우주는 타협으로 지금의 우리 존재를 만들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동일한 존재이다.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가 진행되는 동인 다음세대로 진화가 이어지도록 메케니즘은 있다. 박테리아를 예를들면 새로운 당분을 소화하고 이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여 더 자주 분별하는 능력이다. 나무들은 뿌리를 땅속깊이 내려 지하수를 흡수하여 경쟁자와 높이 를 겨룬다. 새들은 온갖 구애행동으로 소리나 오색찬란한 외모나 날개를 이용하여 암궛을 모은다. 이런 여러 가지 성공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신진대사와 성장, 외모, 행동을 조종하는 유전자들이다. 유전자가 생물체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킬수 있다면 이 유전자는 다음세대로 넘겨져 지속적으로 성장기회를 얻고, 실패하는 유전자는 소리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개미들은 대부분 암컷이다. 생식능력이 있는 것은 여왕개미 뿐이다. 생식능력이 없는데 대다수의 개체가 대신 친족의 관계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것을 진사회성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충이나 기타 생식능력이 사라진 종들의 암컷들이 각 개체의 사회성의 구조상 진화 과정에 타협으로 만든 유전자 때문이라 한다. 인간들도 혈연관계의 자손들을 돌보는 것은 진사회성 때문이다. 개미들은 식량이 모자리면 자신을 먹이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종족 보존이란 유전자가 전달되지 못하면 소멸된다고 한다.
붓다는 " 개를 기둥에 묶어놓으면 개는 끈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기둥을 빙빙 돌면서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눕기도 하지만 기둥을 떠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도 육신에 묶여 탐욕을 일으키고 매달려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욕심의 갈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수행자여,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은 맑어면 깨끗해진다.
얼록새가 하나지만 몸의 색깔은 수없이 많듯 사람역시 몸은 하나 지만 마음의 얼룩은 얼룩새의 몸 빛깔보다 더 많은 것이다."
인간은 바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줄에 묶인 개처럼 늘 같은 지리를 맴도는 처지 인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빛깔을 만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이다. 결국은 깨달음을 얻어지면 하나 일 뿐이다. 텅비우는 타협의 그늘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없는 것 뿐이다. 바라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허상이라는 것이다 . 그대 가슴에 가득찬 얼룩을 지워버리는 것이 현명한 타협을 가진다는 것이다.
언어나 생각이나 관념이나 모든 척도는 자기가 느끼는 만큼으로 살아가지만 안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진리라는 것도 믿을수 없는 의심의 관조가 있어야한다.
관조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세상 모든일을 관조하는 것을 체념으로 잘못이해 하는 경우가 많다. 체념이란 품었던 생각이나 기대, 힁망등을 아주 버리고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체념은 일종의 자기보호이다. 관조란 바라보고 깨닫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나 징검다리가 되어야한다. 무위 無爲라는 것은 체바퀴같은
행위하는 삶을 버리고 진정한 행복과 안식을 추구하는 것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모두는 아무것도 하지않는 빈마음으로 무의도식으로 먼저 생각하는 젊은 세대나 일부 어른들의 반론은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사소한 것에 모든 것을 연결하는 요즘시대에 무위나 관조나 차라리 체념으로 모든 것을 마치 크나큰 깨달음으로 타협을 하는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는 것은 삶의 끝으로 가는 막장이지 모른다. 인간은 태어나길 바라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만물은 환경에 의해서 탄생을 하고 소멸한다. 부모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젊은 세대는 무슨 철학자의 사유처럼 울부짖는다고 한다. 금수저 운수저 운운 하면서 마치 세상 의 모든 짊을 혼자 지고 사는 철학자 처럼 고통만 강조하는 것은 깊은 물속으로 가는 바보짓이다. 자신의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닌 관조하는 자신의 것이다. 아름다운 자신의 인생은 에너지 펄펄 끓는 청년시절을 느끼고 쉽게 노하거나 삐지지 않고 거를건 거르고 담을것만 가리는 관용하는 살이 되어야한다. 바로 배우고 익히며 타협을 하는 삶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인생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빛이되고 싶어한다. 세상은 빛나는 사람들이 좌우한다.
그레서, 모두가 밤하늘 의 별이되기를 바란다.
빛은 순간적이고 화려하며 강렬하다. 일단 빛이 비추면 주목을 한다. 스포트라이트는 자존감과 명예를 드높이는 매력적인 요소이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것들은 나름대로 삶의 한순간이 되어도 좋은 것이다.
정작 빛나는 것들은 자신보다 강한 빛에는 사라진다. 생명이나 삶에는 빛이주는 순간적인 찬란함은 도움이 되는 경우는 없다.
자신의 모습에만 원하는 것을 채우면 그만이다. 만물은 밤과 낮의 볕이나 어두운 휴식인 밤과 살아가는데 절실한 볕이 필요하다. 볕도 빛이 오래동안 온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볕이 나타내는 낮이 되면 빛은 모두 사라지고 태양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화려하지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볕은 보이지도 않고 표도 나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근한 관계는 볕이 필요하다. 살갑고 따뜻한 애정과 너그러운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살가운 느낌이 삶을 윤택하고 오랫동안 유지하게 한다. 빛이란 스스로 내는 자신만의 광도가 지나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볕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모두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모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때로는 끄덕이고 때로는 고쳐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서로에게 볕이 되어가야 하는 것은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우주의 새로을 세상을 여는 일이다. 누군가가 에게 볕이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아름다운 일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상의 산물이고 생각이라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대로 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마음이란 단지 뇌의 기억과 자신이 유리한대로 느끼는 착각과 오해를 가지고 하는 편한 이해라는 안착이라는 것이다. 상대를 아는 단순한 한면으로 하는 자기 당착이라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도 볼줄 모르는 처지에서 모든 것을 자기 결정대로 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데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2살정도 되어도 하는 이해도를 9살이나 심하면 성인이 되어도 이해도가 적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기를 원하면서 모든 관계설정을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면서 짧은 상대의 정보로 마음대로 정해버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가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새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을 아는 것은 단순한 미디어 한 부분이지만 남들이 하는 소문이나 한 단면으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동조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간다. 빨간색이 싫어서 무조건 싫다. 고향이 저쪽이라 싫다. 잘난체 하는 것이 보기가 싫다. 모든 것을 상대의 단면을 자신의 마음에 정해놓은 허상에 이끌려 사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는 속도는 지금세대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한다.
늘 고정되고 자기 편한대로 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허상이다. 자기가 만든 허상을 가지고 오늘도 상처를 만드는 것이다.
내 마음도 볼줄 모르는데 어찌 남들의 마음을 생각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가? 마음은 상상에서 오는 고통일 뿐이다.
" 내가 보기에 인간 지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인간이 원래 죄의 목록에서 보면 가장 최악에 속하는데도 스스로를 우두머리 동물로 선언한 데 있다."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인간과 동물은 지구에서 같은 분류이다. 우리라는 개념은 인간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이다.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 우리 자식, 우리 아들등 으로 친밀감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내 남편, 내 마누라등 나에게 직접 필요한 단어를 잘못 사용한다.
멀리서 오는 며느리와 같이 사는 며느리와는 차이가 있다. 오랜만에 보는 것에 더욱 고맙고 감사를 하는것이 인간들의 습성이다.
사실은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다른 모든 생물도 마찬 가지이다. 어떤 동물은 처음부터 도축되고, 사냥감이 되고, 쫏기고, 독살되고, 귀여움 받고, 공포의 대상이 되려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동물에게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잘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사랑에 대한 것은 극히 자기중심이다. 흰쥐는 사랑스럽고 시궁창 쥐는 혐오 스럽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사랑스럽고 들개들은 위헝하고, 사육하는 거미는 사랑스럽고 독거미라고 칭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논리는 인간들이 정하는 자기당착이다. 동물들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모피를 입고 애견를 안고 다니는 자태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를
자주본다. 그들의 세계는 인간의 침입이 없이 자연속에 살아간다. 인간어 감정과 고정관념은 예부터 동물들에게 위험했다.
동물 애호가들의 마음 속에는 낭비에 가까을수록 다채로운 진화과정에서 선택된 몇몇 동물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죽여서 먹는 동물이든 집에서 사랑스럽게 키우는 동물이든 결정기준은 종이 한장 차이다. 인류 역사상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지금저럼 혼란스러운 적이 없다. 인간들 입맛에 따라 변형시킨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것이 동물 사랑일까? 독일은 동물 사랑을 가장 많이 하지만 야생동물을 포함한 동물들 5천만 마리 이상을 사육하면서 동물보호를 외치고 있다. 동물들이 인긴들을 5천만 명을 가두고 사랑한다면 어떨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은 자유로워야 한다. 타협은 없는 것이 자유이다.
인간은 방금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명한 사람으로 존재해 왔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본래 착한 사람이 되어있기에 그렇게 착한 행동을 하고 갑자기 뿌듯해 지는 것은 환상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의 순간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깨어있다. " 라고 하셨다. 나뿐만 아니라 운갖 것들이 그렇다. 미래에 언젠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것들이 모두 그렇다. 미래의 언젠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렇게 존재한다. 해탈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일 뿐이다. 만약 그것이 획득되는 것이라면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잃을수도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히려 혼란의 그름이 걷히고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깊은 하늘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 나리는 우리 안에 있으며 항상 존재한다. 모든 세상의 이치는 스승의 발치에 항상 있으며, 모든 수행이나 모든 여정을 거치거나, 우리는 이미 파랑새 찻아 다녔지만 이미 목표는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마음을 다잡고 떠나온 곳을 바라보면 이미 떠나기전에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도착한 곳에서 알게되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장애물이나 우회로나 갈림길이나
강의 어느곳에서 굽이 굽이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깨닫게 해주는 것 뿐이다. 강이나 길이나 자유를 향해 흐르지 않는다. 강이나 길이나 자유롭다. 단지 지금도 무엇을 구하는 문명인 이라는 타이틀과 타협을 하는 방법을 찻아다니는지 모른다. 모든 깨달음은 이미 누군가가 가버린 산길을 찻아 가는 산꾼일 뿐이다. 산은 마냥 오늘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지나간 용아능선은 어찌 이리 잔인하게
돌아오는 산길이 되어있나?
젊은 날의 기억이란 그리 고운 자욱처럼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노년의 고뇌인가?
한 줄기 바람조차 잠들어버린 금수산 암릉길에 노송은 바위 낭떠러지에서 오래동안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