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으로 동일하게 봄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은 뿌리이고
삼라만상은 전부 다 나와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고 많은 佛世界 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마음은
모두 다 하나의 헛된 마음, 妄念 으로부터 생겨 났습니다.
하나의 마음만 벗겨내면 차별이 사라진
평등한 동일 생명의 내면이 빛나게 됩니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맑고 밝은 지혜의 눈으로 중생과 부처를
한 몸으로 볼 뿐입니다.
이렇게 한 몸으로 同一 하게 보는데
부처님이 갖추신 다섯 가지 눈이 필요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 몸으로 본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 자체가 언제나 거기에 如如 하게 있기에
過去 現 , 未來 로도 구분지울 수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하나를 보면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하고,
안을 보면 밖을 보지 못하며,
밝은 곳에서는 볼 수 있으나
어두운 곳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는
매우 부자유스러운 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게서도 우리들과 같이
육신의 몸을 지녔기에 당연히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天眼 은 제한적인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먼 곳이나
미세한 사물까지를 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눈을 말합니다.
山河石壁無障碍 라 하여 가만히 앉아서도
먼 곳으로 觀 을 보내면 그곳의 사정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생까지도 알아내고
지옥이나 극락 세계까지도 다 통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통의 눈을 부처님이 갖추시고 삼천 대천 세계를
마치 손 안의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선정을 닦아 천안을 갖추게 된
신기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慧眼 은 우주 만물의 근본 자리를 밝히는
지혜의 안목을 말합니다.
낱낱이 구별되는 만법의 현상 너머에 내재되어 있는
공적한 자리를 깨닫는 눈입니다.
공과 무상의 도리를 증득하여 현상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집착을 떠나 보내는 그런 눈입니다.
이러한 참다운 지혜의 눈을 부처님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法眼 이란 진리를 구별해 낼 줄아는 안목입니다.
일체법을 분명히 비추어 볼 줄 아는 눈으로써 현상 너머에 있는
만법이 평등해진 가운데 또 뚜렷이 자리잡고 있는
별까지도 구별해 내는 눈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중생들을 능숙하게 교화하는 안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그리하여 본생명체의 眞實 一如相 과 현상계의 萬法 差別相 을
다살펴 볼 줄 아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五眼 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육안 하나뿐인데 부처님이 갖추신
오안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 번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고기눈이나 부처님의 오안이나 전부 다
눈썹 밑에 있다 라고 합니다.
밑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두 눈으로써
모든 사물을 일차적으로 살피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나 오안으로 보나 사실은 똑 같습니다.
우리들이 보아도 장미는 붉고 백합은 희고,
부처님의 오안으로 보아도 역시 장미는 붉고 백합은 휠 따름입니다.
이 도리를 알아차리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 說是沙
많은 여름날 밤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십시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많고 많은 별들을 보면
이런 표현이 어쩌면 이해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두 번 반이나 왕복할 수 있는
그 긴 강에 있는 미세한 모래 수를
일컫는 것은 나중에 뭔가를 언급하려 함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佛世界 如是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世界 란 한 부처님이 교화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교화할 수 있는 일불세계를 娑婆世界 라 합니다.
저 길고 긴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 만큼의 많고 많은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 수 만큼이나 있다는 불세계는 너무나도 많을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불세계를 언급하는 까닭은
이 불세계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마음도
다양하게 많음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佛 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 悉知
모든 사물 하나하나와 내가 한 몸이 되고
나아가 세상의 중생들과도 내가 하나로 되니
다른 중생의 마음을 내 마음 알듯이 환히 알게 됩니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신통안을 갖추고 삼생을 꿰뚫고
시방 세계를 다 둘러 보시니 국토마다에 있는
모든 중생의 온갖 마음씀씀이를 완전히 압니다.
더구나 부처님은 중생과 자신을 따로 떨어진 존재로 보지 아니하고
본질적으로 일체라는 입장에서 보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何以故 如來 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우리들이 四相 을 떠나보내고 깨달음이나 법도
다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들 마음만은 진실이고
뭔가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은 들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개인적인 특수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으키는 갖가지의 차별된 마음,
모든 마음인 것입니다.
즉 妄念 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그런 순간이 쉬지를 않으니 모든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生滅 을 거듭하는 妄念 은 이 마음들을
일어나게 하는 본질적인 마음자리는 아닌 것입니다.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참마음일 터인데
온갖 사물에 찰나찰나마다 생각을 갖다 붙이고
계속 흘러보내고를 멈추지 않으니 마음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적인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자니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왜 그렇느냐 하면 마음의 자리가 고상하게 높거나,
우리들 중생이 어리석어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가 空寂 한 자리이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고
내어 놓을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는 석가, 달마와 같은 聖賢 이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는 나와 너가 없고 남녀가 없으며 노소가 없고
승속도 다 벗어난 자리인데 어찌 時間 이라는 구분을 지워
지나간 마음이니 현재의 마음이니 미래의 마음이라 할 것이
있으며 또 그 마음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생각해 보아도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지금 우리들에게 잡혀 있지 않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도 '현재다'하고 인식하는 곧바로
계속 과거로 되어 버리니 현재 또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는 당나라 때
『금강경』의 대가 德山 스님을 점심도 못 얻어먹고
굶게 한 이야기가 늘 따라다닙니다.
덕산 스님은 금강경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별명을 周金剛 이라고 하였는데
항상 금강경에 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가득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방에서 웬 사람이 나타나 문자를 부정하고
見性 成佛 을 주장하며 경전 대신에 "
그대로 마음을 깨달아야 부처다.
"하고 큰 소리 친다기에
그말을 꺾어 주려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웬 소리냐. 삼천 위의와 팔만 세행을
천겁 만겁 동안 공부를 해야
성불을 할 수 있는 거지."하며 발끈하여
남방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풍주라는 지방에 이르러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떡장수 노파가 있었습니다.
시장하던 터라 덕산 스님은 그 노보살 떡장수가 에게
떡을 좀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노보살 떡장수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떡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여쭈어 볼 게 있습니다.
스님 등 뒤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이것들은 내가 평생토록 연구한
금강경에 관한 논문과 책들이지."
"그러면 제가 금강경에 대해 하나 묻겠습니다.
대답을 해 주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스님께서 대답을 못하시면 우리 집에서뿐 아니라
이 동네에서는 떡을 잡수실 수 없습니다."
"좋다. 나는 일평생을 『금강경』을 연구하였다.
그래서 금강경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스님,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방금 점심(點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라고
결정적인 질문을 날렸습니다.
點心 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마음에 점을 찍는다 하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주금강 덕산 스님은 답을 찾았지만
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보살 떡장수는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
"스님 금강경 연구만 하지 마시고 龍潭 스님을 한 번 찾아 보시지요."
그래서 남방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용담 스님이
계시는 절을 찾아 들어 갔습니다.
노보살 떡장수에게서 혼이 났으면서도 아직도
학자적인 거만이나 아만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 노장이 보이는데 느낌이 용담 스님 같아
일부러 들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용담 용담 하더니, 못도 안 보이고 용도 안 보인다.
潭又不見 龍又不見 "
"그대가 진정 용담에 왔네."하며
그 소리를 듣고도 용담 스님은 덕산 스님을
쾌히 받아 들였습니다.
함께 저녁 공양을 든 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밤이 깊어 덕산 스님은 객실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밖이 어두워서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에게
촛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덕산 스님이 촛불을 들고 신발을 찾아 신으려는 순간
용담 스님이 촛불을 확불어 꺼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워졌고 그순간
덕산 스님의 마음은 활연히 밝아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곧 예배를 하였습니다.
용담 스님은 덕산 스님이 근기를 다 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강력한 침 한 방을 쓴 것입니다.
지혜를 구비하고 있으면 사람 사람의 근기를 환히 뚫어보고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禪師 들이 법을 쓰는 도리가 이렇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이 부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날 용담 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덕산 스님의 大悟 를 인정해 주면서
자신의 법맥을 이어가는 제자로 공포하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에 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법당 앞에 쌓아놓고 불을 놓아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실토를 했습니다.
"천하의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의 터럭을 太虛空 에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세상의 중요한 일을 다 안다고 해도
물 한 방울을 큰 구렁에 떨구는 것에 불과하다."
덕산 스님과 용담 스님이 이 이야기는 바로 知識 의 세계와
智慧 의 세계와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적어도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세계를 인정하고 열렬한
동경으로 탐구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마음이 밝아지면 지금까지 보고 알고 있는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영 다른 것은 아닙니다.
다르다고 하는 가운데 또 사실 그대로이고,
사실 그대로인 가운데 또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꿈 속에서 보았던 山河 가
꿈을 깨고 난 뒤에 보는 산하와
결국에는 같은 산하라는 이치입니다.
이렇게 같다고 하더라도 이왕이면
꿈을 깨고 난 뒤의 진실한 산하를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꿈을 깨고 난 뒤의 세계,
즉 진실한 지혜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믿음,
열망이 있어야 참된 불자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