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함혜자 | 날짜 : 09-01-15 14:14 조회 : 1988 |
| | | 새해를 맞이할 때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달력을 바꿔다는 일이다. 올해는 선택의 여지없이 글씨와 메모난이 큰 달력을 걸었다. 그전 같으면 취향에 맞는 달력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올해는 취향에 앞서 편리성이 우선 순위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어느 집이나 다를 바 없이 국회의원 사진이 있는 한 장짜리 벽보 형 달력이 대부분이었다. 도배를 새로 하지 않은 한 해가 지나면 또 그 자리에 새 달력이 덧칠되기 일쑤였다. 또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던 일력은 휴지 대용으로 훌륭해 당연히 제일 어른의 몫으로 쓰였다. 달력은 때로 그 집의 권위와 경제능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행세 꽤나 한다는 집에서는 매달 다른 외국풍경이 있는 달력을 걸어 차별화를 자랑했다. 내 친구 중에는 출입 꽤나 한다는 무면허 의사를 아버지로 둔 친구가 있었다. 그 집은 내가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다보니 그 친구 집에는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고급달력이 걸리곤 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드레스를 입거나 나비넥타이를 맨 아역배우가 나오던 달력이 있어 해가 지나면 그 달력을 얻으려고 친구한테 아부 꽤나 하였던 생각이 난다.
달력을 고르는 취향도 시대에 따라, 나이에 따라 달라져 왔던 것 같다. 한 때는 한 시대를 풍미하던 아리따운 여배우들의 사진이 있는 달력을 좋아 했었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아기들이 나오던 달력을, 40대에 들어서서는 실내 인테리어가 나오는 달력을 즐겨했고 40후반으로는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을 좋아했었다. 새 달력이라도 다 좋아하는 것만은 물론 아니었다. 그 중 여자들이 보기 민망한 달력도 있었다. 주로 주류회사에서 만들어 내던 수영복 차림의 여배우들의 사진이 실린 달력이었는데 주로 남자들이 잘 가는 이발소나 술집 벽에 요염히 자리하여 뭇 남성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렇듯 달력을 고르는 취향은 물론 그 변천사도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빨리 변해왔다.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목가적인 산골정경이 실린 달력이 그 자리에 걸려있다. 원래 산수화를 좋아하긴 했어도 목가적인 풍경이 있는 그림이 더 좋아지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시골에 대한 향수가 더 커지는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계절에 맞는 풍경을 감상하고 나니 내가 이 달력을 걸었든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숫자만 있는 달력을 찾아 다시 바꿔 걸었다. 저녁이 되어서 돌아온 아이가 망설임 없이 또 다시 바꿔 단다. 눈이 어두워지고 기억력도 흐려져서 글씨와 메모난이 큰 달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될 일을 이불에 지도를 그리고 소금을 얻으러 이웃집 마당에 들어선 아이처럼 머뭇거렸다. 간신히 스케줄 때문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서야 목적하는 달력을 다시 걸 수 있었다. 새 달력을 달 때의 기분은 새 공책 첫 장을 쓸 때처럼 묘한 흥분마저 느껴진다. 예쁜 글씨로 단정하게 잘 쓸 것이라는 다짐도 잠시, 채 한 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괴발개발이 되고 말던 것처럼 새 달력을 걸면서 다짐했던 일들이 얼마 못가 또 작심삼일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새해에 거는 기대는 막연하고 추상적이기 일쑤다. 새해엔 마치 로또라도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이룰 듯 부풀었다가 연말이면 허망하게 흘러간 세월을 탓하며 쓸쓸히 달력을 내리기를 늘 반복해 왔다. 언제부턴가 새해를 맞는 소회가 갈수록 무덤덤해져 감을 느낀다. 새 달력을 걸며 거는 기대는 화려하고 황홀하나 꺼지고 나면 매캐한 냄새와 연기만 남기는 불꽃처럼 추한 모습으로 퇴장하는 것이 또한 달력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묵은 달력처럼 어영부영 살다가 세상의 무관심속에 쓸쓸히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기만 하다.
세월은 꼭 그 대가를 요구한다. 달력을 바꿔 달 때면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흔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새 달력을 바꿔 달 때 나이를 먹는 감회가 가장 크지만 올해는 뭔지 모를 초조와 조급함마저 느껴진다. 흰 바탕에 크고 검은 숫자만 있는 새 달력을 바라보자니 칼바람에 몸을 떠는 갈잎 울음이 내 안에서 메아리친다. 달력은 대부분 무상으로 주어진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돈을 주고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흔히들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말들로 세월의 흔적을 표현한다. 올해만은 세월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주어졌음 싶다. 내년엔 올해와 결코 다르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새 달력을 바꿔 달 수 있기를 바램해 본다. |
| 임병식 | 09-01-15 16:46 | | 정말 전에는 달력이래야 당랑 한장짜리, 국회의원이 금배찌 단 자기 얼굴사진을 달력 중앙에 큼직막하게 실은 걸 나눠주어 그걸 붙여놓은 것이 전부였지요. 지금은 쌨고 쌘것이 달력인것 같습니다. 이 불경기에 그래도 달력인심은 좋아서 여기저기서 얻어온 걸 방마다 걸어놨답니다. | |
| | 함혜자 | 09-01-21 09:16 | | 임병식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바쁘신 와중에 답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달력을 바꿔달면서 문득 추억이 떠올라서 한번 써봤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써 올리고 나면 곧 후회하게 되고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지요. 스트레스없이 글을 써야 할텐데 말입니다. | |
| | 정동호 | 09-01-16 06:01 | | 달력의 변천사를 훑어 보았습니다. 저는 식탁 앞에 메모난이 큼직한 달력을 걸어 놨습니다. 식사 때마다 메모를 읽어도 잊어버리고 깜빡할 때도 있지요. 잘 읽고 갑니다. | |
| | 함혜자 | 09-01-21 09:18 | | 정동호 선생님 온화하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글도 모습만큼이나 포근하고 온화한 글을 쓰시더군요. 글도 사람 모습을 닮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
| | 이진화 | 09-01-18 00:03 | |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주말입니다. 수첩과 달력을 새것으로 바꿀 때마다 각오를 새롭게 하지만 시간이 더욱 더 속도를 내며 달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함혜자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남은 한 해 즐거움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
| | 함혜자 | 09-01-21 09:20 | | 이진화 선생님, 반갑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수첩과 달력을 바꾸고서 그 각오가 한달 넘기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선생님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저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보여 주셨음 기대합니다. | |
| | 정진철 | 09-01-18 00:44 | | 새달력에 새해~더군다나 며칠있으면 구정까지 맞게되고 명실공히 새해입니다 운수대통하시길 바랍니다 | |
| | 함혜자 | 09-01-21 09:23 | | 정진철 선생님 바쁘시다는 글을 본 듯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챙기시며 사업도 순조로우시고 좋은 글도 많이 올려주셨음 기대합니다. | |
| | 박영자 | 09-01-22 10:22 | | 함혜자선생님, 좋은 글감을 뺐겼다는 느낌이네요.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내 얘기들을 함선생님이 먼저 쓰셧네요. 그런만치 공감도 큰 글입니다. 달력에 얽힌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잘 풀어 놓으셨네요. 새달력의 첫장을 떼어내야 할 날도 며칠남지 않았는데 한 일은 아무것도 없네요.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쓰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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