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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1. 연중 제28주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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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이사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제2독서<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2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261011. 연중 제28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167 026.10.10 20:05 2026년 10월 11일 일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2,1-14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오늘 제1독서),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밭으로,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갑니다. 잔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 ― 이것이 사랑의 반대편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을 큰길로 보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종들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데려옵니다. 루카 복음은 같은 비유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놀라운 ‘친절’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격을 묻지 않으시고,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집이 아니라 ‘죄인들의 병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서늘합니다. 임금이 들어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십니다. “친구여, 그대는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들어왔나?” 거저 초대받았는데, 왜 예복을 따지실까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풀어 주셨습니다. ‘혼인 예복’은 본질적인 것, 곧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입니다. 성경 주석가들도 그것을 ‘선행으로 가득 찬 회심한 삶’이라 읽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말씀을 삶으로 옮겼듯, 초대는 거저 받지만 ‘사랑은 살아 내야’ 합니다. 잔칫방에 몸만 앉아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는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은총은 값없이 오지만, 응답 없는 은총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친절과 선행’의 주간이 열립니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친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큰길에서 불러들여 잔칫상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입니까? 받은 친절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선행’입니다. 친절은 하느님을 닮는 일이고, 선행은 그 친절이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1티모 3장도 봉사자에게 ‘손님을 후대하라’ 권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친절을 닮았는가? 나는 잔칫방에 앉아 ‘사랑의 예복’을 입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몸만 앉은 것인가, 사랑으로 살아 있는가?
주님, 당신의 초대를 무관심으로 흘려보내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가리지 않는 당신의 친절을 닮게 하시고, 사랑의 예복 ―친절과 선행― 을 입고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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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1. 연중 제28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6?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하느님의 숨 2026.10.10. 17:16
온전한 생태적 회심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과 친교 안에 있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온전한 생태적 회심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2026년 10월 10일 토요일 케이트 더글라스 워너(Keith Douglass Warner)와 일리아 델리오(Ilia Delio) 그리고 파멜라 우드(Pamela Wood)는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창조 세계에 대한 깊은 관상적 주의력을 길러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관찰하며 그들로부터 배우셨습니다. 새들로부터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보며,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본질적 정체성을 나누어야 할 책임을 깨달았습니다. 지렁이로부터는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는 흙과 땅 가까이에서 단순하게 살았습니다. 벌들로부터는 공동체와 친교를 배웠습니다. 그들의 부지런한 노동과 협력적 삶을 찬미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모든 피조물의 형제로 이해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모든 피조물의 자매 혹은 형제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단순화하고 자원을 덜 사용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적 생태 의식을 길러가는 데 근본적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자원 소비율을 보이기에, 가정에서의 선택 하나하나가 창조 세계에 대한 배려를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힘을 지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더 큰 영향을 주는 길은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공동의 프로젝트이며,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의 친교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다른 피조물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고, 그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며, 지구 생명의 온전성을 지키는 정책을 촉진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생태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데 있어 근본적인 일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관계에 마음을 열어, 나병환자와 형제자매, 지렁이와 새들, 주교들, 물과 불과 바람, 그리고 복되신 어머니 대지로부터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 안에서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인식했습니다. 그의 개방성은 자신이 모든 피조물의 형제라는 축복을 알아차리게 했고, 그 응답은 곧 겸손이었습니다. Reference Ilia Delio, Keith Douglass Warner, Pamela Wood, Care for Creation: A Franciscan Spirituality of the Earth (Franciscan Media, 2008), 78–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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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1. 연중 제28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1 04:15
- 행복과 구원 중에서 무엇을?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연중 제28주일의 주제는 잔치인데 우리 인간사에서 잔치하면 대표적으로 생일잔치와 혼인 잔치 두 가지이고 오늘은 혼인 잔치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은 어찌하여 잔치를 산 위에서 베푸시는지 그런 의문에서 오늘 묵상을 저는 시작합니다.
잔치하면 가능한 많은 사람이 참석하도록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잔치를 열어야 마땅한데 하느님께서는 산 위에서 연다고 하시니 많은 사람이 참석하길 바라시는 것인지 의문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참석을 거부하는데 그것도 이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는 것에 그 탓이 손님에게 있지 않고 주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쩌자고 산 위에서 혼인 잔치를 여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혼인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에서 산 위는 늘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그러니 산 위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혼인 잔치에 관심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세속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하늘나라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속 사람들은 밭 가는 일과 장사하는 일에 온 관심이 있고 하늘나라 잔치는 전혀 관심사가 못 됩니다.
저희가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일 줄 몰랐는데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부캉이를 보러 가는 사람 수에 비길 바가 못 되고 천만 명 이상 관람하는 영화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입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세속 사람들이 관심 없는 하늘나라 잔치일 뿐 아니라 구원의 잔치이고 종말의 잔치이기에 더더욱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세속 사람들은 행복에 관심이 있지만 구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이런 세속 사람들과 달리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 행복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느님 나라 구원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까?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에서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을 인용하며 형제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에 비춰 볼 때 다시,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는 사람입니까? 약속된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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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1. 연중 제28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7?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1. 05:44 하느님의 한없이 풍요로운 사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우리....
가끔 저는 오늘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가 남긴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확신이 오히려 신약의 비유 속 인물들보다 더 크게 드러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약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영광스러운 은총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우리도 이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여기서 두 가지 다른 차원의 희망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에 대해 제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해 줍니다. 첫째, 구약의 관점에서 저는 주님께서 저의 두려움과 눈물을 거두어주시고 제 영혼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인도하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제 삶의 모든 날에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체험하기를 희망합니다. 둘째, 신약의 관점에서 저는 이미 그것을 모두 받았음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굳세게 하시기에 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저는 죄의 용서와 성령의 현존 안에서 모든 선하심과 자비를 체험했고, 또 지금도 체험하고 있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무엇을 더 확신하며 희망해야 할까요? 그래서 오늘 저는 에페소서 1장 17-18절을 묵상해 봅니다. 이는 제가 의도적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저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제가 그분을 알게 되고 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제가 알게 되기를 빕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풍성한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만, 그 잔치의 한없는 풍요로움과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그저 어떤 무거운 명령으로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잔치의 참 모습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지요. 에페소서의 이 구절은 제 마음에 박차를 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더 깊은 지혜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도록 이 기도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기쁨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는 것입니다. 나이가 조금씩 더 들어가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영광에 대한 희망 안에서 더욱 확신과 지혜로 성장하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 혹은 영적 수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더 깊이 깨닫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영광스러운 은총을 하늘의 관점에서 함께 나누는 희망 안에 우리 자신을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모두 "부르심에 속한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이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길에서 갑자기 초대받은 이가 예복을 갖추지 못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 언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혼인 예복을 "사랑"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혼인 예복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성 아아우구스티노는 말했습니다. 그 손님은 자신이 받은 초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해석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교만과 분열, 냉소와 낙담을 가지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가장 초라한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왕, 주님, 전능하신 분, 심판자, 율법 제정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온전한 "사랑"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계시는 제자들에게 깊이 새겨졌습니다. 14세기 독일의 도미니칸 신비주의자 요한 타울러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사랑은 너무나 가까우며, 내적이고, 은밀하며, 다정하고, 뜨거워서 모든 이해를 넘어섭니다. 파리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지혜를 다 모아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느님께 모든 신뢰를 두는 단순한 이들은 그 사랑을 영혼 깊은 곳에서 조금은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코 온전히 이해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다도 이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주님께 청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분명히 우리가 이렇게 청할 때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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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1. 연중 제28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2026.10.11 02:12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아주 단순한 질문 앞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그리스도가 되었는가. 그리고 오늘 누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셨는가. 나를 위로한 사람에게서만 그리스도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한 형제, 내 계획을 깨뜨린 사람, 내 약함을 드러내게 한 사람, 나의 인내를 시험한 사람에게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피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오늘 나를 더 깊은 자기 인식으로 이끌고, 내 안의 가난을 드러내며, 내가 아직 놓지 못한 것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데려가는 형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결국 이런 눈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모든 관계를 통하여 나 자신을 보고, 모든 관계 안에서 조금씩 죽고, 모든 관계 안에서 다시 사랑을 선택하며, 마침내 모든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 기다림이 기도가 되고, 내 경청이 기도가 되며, 내 용서가 기도가 되고, 내 침묵이 기도가 되며, 형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기도가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섬김이 기도가 됩니다. 내가 조금 내려가는 것이 기도가 되고, 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 기도가 되며, 상처 속에서도 사랑의 문을 닫지 않는 것이 기도가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마침내 기도 자체가 되어갑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던 사람이 자신의 몸을 다른 이를 위한 선물로 내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은 성사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간다는 것의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분 곁에 편안히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일생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내려가신 곳으로 내려가며, 그분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주고, 사랑의 순종으로 죽기까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우리를 없애는 죽음이 아닙니다. 거짓 자아가 죽고 참된 내가 살아나는 죽음이며, 움켜쥔 손이 죽고 열린 손이 살아나는 죽음이고, 자기중심성이 죽고 형제성이 살아나는 죽음이며, 통제가 죽고 신뢰가 살아나는 죽음이고, 비교가 죽고 기쁨이 살아나는 죽음이며, 복수가 죽고 자비가 살아나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파스카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의 마지막 말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며,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고, 자기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나고, 우리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울 때 형제가 들어올 공간이 생기며, 형제가 들어오는 바로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말한 정배와 형제와 어머니의 신비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정배로서 그리스도를 사랑 안에 받아들이고, 형제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어머니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관계 안에 낳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일생은 하나의 긴 육화가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몸을 취하시고, 우리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시며, 우리의 귀로 그의 아픔을 들으시고, 우리의 손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만지시며, 우리의 발로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시 세상 한가운데 태어나십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우정의 본질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걸었던 그리스도와의 우정의 길이며, 오늘 우리의 공동체와 관계 안에서 계속되어야 할 프란치스칸 기도의 길입니다.
바라보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분과 결합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그분을 닮아가십시오. 마침내 우리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게 하십시오. 그것이 정배가 되고, 형제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길이며, 사랑의 순종으로 일생을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살아가는 길이고, 마침내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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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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