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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반짝이다
공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조금 다른 목소리 : 금속노조 여성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지음
나름북스 l 128*188 l 314쪽 l 16,000원
발행일 2021년 10월 15일
책 소개
금속노조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내놓은 여성노동자 증언집이다. 조합원 18만 명 중 단 6퍼센트인 1만 명이지만,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금속노조의 역사를 넘어 노동운동의 역사와 다름없다. 노조 여성위원회가 조합원 69명을 인터뷰해 여성노동자들이 살아온 삶, 노동조합을 만난 계기, 한 사람의 노동자로 바로 서는 과정을 귀담아들었다. 자동차 부품 생산, 조선소 용접 등 남성의 일로 여겨졌던 직종은 물론 휴대폰 등 전자제품 조립, 구내식당이나 렌탈 가전 방문 관리 등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또는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주로 제조업 생산직에서 일하며 임금 차별, 승진 배제, 성희롱, 우선 해고 등 공장 안에서는 물론 가정과 심지어 노조 안에서까지 성별에 따른 차별을 겪었지만, 여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해왔다. 출신도 일하는 곳도 성격도 다른 여성들은 늘 불의가 무엇인지 알았고 서로 의지해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대공장 남성 정규직으로 대표되는 금속노조 안에서, 이들 여성은 ‘드센 언니들’로 살아남았으나 실은 강하고도 따뜻한,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우리 주위의 여성들이다. 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9년생부터 94년생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노동자의 힘이 보태져 우리가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
6퍼센트의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가로지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온 여성노동자들의 증언
18만 명 중 1만 명. 자동차, 조선, 철강 노동자들이 포진한 국내 최대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의 여성 조합원 숫자다. 비율로는 6퍼센트다. 대공장, 남성, 정규직노조를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금속노조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여성 조합원들의 말을 책으로 펴냈다. 노조 여성위원회가 각 지역과 기업노조에서 추천한 69명을 인터뷰했고, 그들이 왜 노조에 가입했고 어떻게 싸웠는지, 여성으로서 얼마나 힘겨웠고 혹은 당당했는지 시대와 주제에 따라 조밀하게 엮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노동하고, 노동조합을 만나고, 인간답게 살고자 싸워온 이들의 이야기가 가난과 노동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걷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조의 바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중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처럼 이름난 이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제조업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불의를 겪고 노조에 가입해 쟁의를 경험한 후, 노동자의 권리와 단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특별한 여성들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조립하고, 배를 용접하고, 공장 식당에서 밥을 짓고, 핸드폰을 생산하고, 범퍼를 운반한다. 여성노동자들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이미 하고 있지만, 남성노동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도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고, 똑같은 월급을 받고 승진도 하고 싶다고, 성희롱하지 말라고 싸웠다. 그러면서 여성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지하며 삶을 긍정하게 된다.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기획 의도대로 1959년생부터 1994년생까지인 그들의 이야기 앞에는 이름과 일터가 나란히 적혔다. 자동차부품 제조, 휴대폰 등 전자제품 조립, 반도체 생산, 조선소 용접 등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는 물론 자동차회사 구내식당 조리, 렌탈 가전 방문 관리, 노조 법률원 변호사 등 다양한 직종의 여성이 이 기록에 목소리를 보탰다. 책을 대표 집필한 권수정 부위원장은 “각자의 사연과 개성이 다르지만, 각각의 모양과 색깔이 엮여 커다란 조각보처럼 보이길 바랐다”라며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노동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점점 더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도 우리가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책에 나오는 이들처럼 한순간도 멈추지 않은 여성노동자의 실천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치열했던 노동운동을 여성노동자의 증언으로 기록한 이유이자 의미다.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비정규직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의와 차별에 늘 맞서온 사람들
노조의 역사는 20년이지만, 여성노동자들의 기억은 80년대부터 시작된다. 80년대에 공장에 들어가 ‘공순이’라는 멸시를 받았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했고 그 힘으로 노조를 세웠으며 30년 넘게 공장에서 일했다. 김진숙은 의류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고 미싱 바늘이 부러지도록 일했다. 첫 생리를 시작한 여자아이들은 철야 중 치마 아래로 흐르는 피를 보고 ‘왜 코피가 아래로 나오지?’라고 했다.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배우고 노조 대의원까지 된 김진숙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증언하는 부분은 벅차도록 생생하다.
여성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불의와 차별에 맞서 내내 싸웠다. 코리아에프티 김지현은 관리자에게 반말하지 말라고, 대륙금속 서인애는 식당 음식을 개선하라고 싸웠다. 노조를 만들거나 노조에 가입한 후론 변화를 체감했다. 현대중공업 김혜숙은 상여금 차등 지급이 개선됐다고 했고, 앰코 고미경은 사무직과 식사 메뉴가 같아졌다고 했다. 성진CS 정영희는 “노조를 만들고 나니까 늘 우리를 아래로 보던 전무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더라”며 놀라워한다. 싸운 이후에야 산전산후 휴가와 수유 시간이 보장됐다. 임금이 인상되고, 휴일에 쉴 수 있고, 자판기와 휴게 공간이 설치되는 등 노동자 단결의 위력은 이들에게 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을 심었다. 노조 가입과 활동에 따른 탄압이나 부당노동행위도 여성들의 강인한 마음을 꺾지 못했다.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고 신자유주의 재편에 따른 구조조정, 광범위한 비정규직화,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본의 노동 탄압에 이르기까지 제조업 생산직 남성 노동자들에 가려졌지만, 야만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항상 열심히 일했고 싸움에 나설 땐 주저하지 않은 여성들이 늘 존재했다. 금속노조 역사를 넘어 여성노동자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해고, 직장폐쇄, 노조 탄압...
가장 먼저 희생되었지만 강인하고도 따뜻했던
시대는 물론 주제에 따라서도 여성노동자들의 말을 묶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나는 순간, 거친 남성들 속에서 더 거칠게 살아남은 센 언니들인 ‘학출’의 이야기, 폐업과 구조조정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사연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조건과 싸움의 과정, 노조 활동으로 인한 수배와 구속 등 고루 억울하고 부당한 국가와 자본의 탄압 속에서 놀라운 증언들이 시대의 정의를 묻는다.
‘노조는 빨갱이, 학출은 불순 세력’이라고 공격받던 시절에도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며 노동자의 친구가 아닌 노동자로 살았다. 최윤정은 “내가 학출이고 돈 벌러 왔다”고 내질렀다. 헐값으로 노동자를 부리다 폐업해버린 회사를 상대로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25년이나 철수 저지 투쟁을 벌였다. 한국산연 김은형은 정말로 회사가 어려워서 폐업한 게 아니라고 했다. “여성이 노조 위원장이 되고 민주노조를 만드니까 자본을 철수한다는 거죠.” 직장폐쇄를 한다며 파업하는 노조원들을 몰아내고 대체인력을 투입해 공장을 돌린 KEC의 노동자들 이야기도 있다. “우린 일 잘하는 사람 필요 없다, 말 잘 듣는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회사를 상대로 업무방해 배상금 70억 원을 꼬박 3년간 갚아나가면서도 조합원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에서도 여성노동자는 제일 먼저 희생됐다. 현대자동차 정영자는 식당 여성조합원, 맞벌이 중 여자, 가족 2인 이상이 직원인 경우의 여자 순서로 통보된 희망퇴직 순서에 반대하며 버텼다. 불법파견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이 범람한 시기에도 여성들은 남성 비정규직보다도 적은 임금으로 제조업 현장을 떠받쳤다. 기아자동차 김미희는 집까지 찾아와 “당신 딸이 남자들 틈에서 정규직 되려 한다”고 말한 회사를 상대로 싸워 정규직이 됐다.
현대차 사내하청업체 권수정은 월차 내겠다던 동료가 관리자에게 칼에 찔린 일을 계기로 노조를 만들고 해고되고 구속까지 됐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해고에 반발해 복직투쟁, 천막농성을 하면서도 서로를 돌보았고 함께 웃었다. 기륭전자 유흥희는 용역깡패에게 얻어맞은 날에도 “추석이니 송편도 빚고 전도 부치자”고 했다. 한국시티즌정밀 이은선은 결혼이나 병에 걸리거나 다들 자기 일처럼 도왔다며 ‘언니들’이 많은 노조를 좋아했다.
이중의 굴레가 만든 ‘센 언니’이자
주변을 끌어안는 따뜻한 연대자
성평등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장에 할애했다. 공장에서의 고된 노동과 더불어 여성이기에 더해진 차별과 폭력은 삶에 고단함을 더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성별에 따라 겪는 차별이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 성별에 따라 구분된 산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인권 침해를 당하는지 고발한다. 반성폭력운동, 특히 노조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성별과 위계에 따른 차별의 실상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노조 사무처 여성 활동가들의 이야기는 조직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오늘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대륙금속 서인애는 “여자라서 못 한다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남자들 일도 다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생산 라인에서 기아자동차 김미희는 불편하고 힘들다고 호소한다. 성별에 따른 노동현장의 차별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한 사업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일로 간주되는 업종과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 업종 사이에 발생하며 한국 산업구조의 차별로 확장했다. 삼화 이동훈은 남성 신입사원 월급이 여성 기장 월급과 같았다고 말한다. 여자는 30년 넘게 다녀도 대리, 남자는 몇 년 만에 과장이 되었다. KEC 황미진이 왜 여성은 승급이 안 되냐고 물으니 회사는 “남자는 가장이라서 승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남성이 다수인 노조에서도 여성노동자의 투쟁은 어렵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변주현은 “경비에게 맞는 것도 두렵지 않고 삭발도 할 수 있는데 생리통이 심해서 농성장에선 불편하다”고 했다. 관리자의 폭언과 성희롱, 고객의 성추행, 심지어 노조 내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도 있다. 노조 교육 시간에 ‘야동이나 틀어라’고 하는 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노조는 끈질기게 성평등 교육을 하고 성폭력 사건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 사무처 상근활동가들은 왜 여성만 회의록 작성 업무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며 조직적 성찰을 추동한다.
남성보다 더 부지런하고 살뜰해야 했고, 약해 보이지 않도록 대차야 했던 이들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이중 고난의 자리, 일터와 가정에서 굴레를 깬 ‘센 언니들’인 동시에 내 옆의 여성을 응원하고 연대하는 따뜻한 동지로 성장했다. 여성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등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모아내려는 금속노조는 마지막으로 필리핀 여성 마디오와 실라의 이야기를 실으며 이들이 ‘우리가 껴안아야 할 미래’라고 말한다.
지은이 소개
전국금속노동조합
자동차, 철강, 조선산업 등의 종사자 18만여 명이 조합원으로 가입된 국내 최대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2001년 출범했다. 비정규직·여성·이주노동자 조직, 노동조건 개선과 차별 철폐, 평등사회와 환경 친화적 발전, 평화와 통일 등을 목표로 활동한다. www.kmwu.kr
저자의 말
개인의 삶의 경험과 역사는 어떻게 구분될까? 거대한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쯤 있을까? 기록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삶이란 어떤 생김새일까? 우리의 경험이 특별하게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노동자인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노동이 존중받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노조를 만들고 싸워온 금속노조 언니들의 이야기다. - 권수정(금속노조 부위원장)
추천의 글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기록이다.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고 통제하며 착취하는지 69명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의 힘은 노동조합의 민주주의와 성평등 조직문화를 위한 인식의 확장을 열어낸다. 민주노조 운동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여성노동자 이야기의 일독을 권한다. - 박희은(민주노총 부위원장)
금속노조에서 6%밖에 안 되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것도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여성노동자의 역사로. 전국의 노동현장과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35년 내내 전국 곳곳에서 투쟁한 여성노동자로서의 경험을 그대로 전한다. 힘들게 물꼬를 튼 물길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처음으로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역사를 기록해 직접 세상과 소통을 시도한 점에서 이 책은 소중하다. - 유경순(여성노동운동사 연구활동가)
남성으로 대표되는 금속노조, 민주노총 투쟁의 선봉인 금속노조. 그 속에서 같이 투쟁하고 어떤 때는 앞서 투쟁한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해고와 성차별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여성노동자들의 슬프도록 평범하면서도 아주 특별한 이야기. 그들은 어디든 같이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함께할 수 있다. - 김경신(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
공장 안 노동의 현실도 고되고 폭력적이지만, 여성노동자이기에 가중된 차별과 폭력은 이들의 삶에 고단함을 더했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여성노동자’라는 삶이 얼마나 많은 사회 모순과 촘촘히 엮여 있는지, 질곡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이 얼마나 강인하고도 따뜻했는지 볼 수 있다. 싸우면서 세상을 보고,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꿔온 여성노동자들이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한 이야기가 우리를 적극적으로 연결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차례
들어가며
프롤로그 언니가 만들어온 길을 따라 우리가 갑니다
1. 호명,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2. 웃으며 출근한 사람들이 웃으며 퇴근하는 세상
3. 김진숙의 87년, 노동자대투쟁
4. 세상을 뒤엎을 꿈을 안고 현장으로 가다
5. 공장을 돌리지 않으려거든 노동자의 허락을 받으라
6. 불안정한 노동의 시대를 연 신자유주의
7. 다양한 얼굴의 노예노동, 비정규직
8. 오래 다니고 싶은 회사? 노동조합 있는 회사!
9. 나의 복직은 시대의 복직
10. 체불임금 받으러 간 내가 왜 도둑인가
11. 성별에 따른 차별을 이야기할 때
12. 너의 무릎이 내 존엄보다 중요한가
13.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대차게
14. 평등실의 꿈
15.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각자의 삶
16. 우리가 껴안아야 할 미래, 마디오와 실라
17. 금속노조 조끼 입고 뭘 해도 행복해요!
후기
[부록1] 전국금속노동조합 조직 현황
[부록2] 전국금속노동조합 모범단협안 ‘제8장 남녀평등과 모성보호’ 중 차별금지 조항
[부록3] 금속노조 여성노동운동사 기록에 함께한 사람들
책 속에서
이전에는 나만 지나가면 얘기하고 싶어서 ‘진숙아, 이리 와봐라’ 하더니, 그때부터는 내가 지나가면 ‘근로기준법 온다’라며 흩어지더라고요. 그러다 대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아저씨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 진숙이 니는 아는 것도 많고 처자식도 없으니까 대의원으로 나가 봐라.
드디어 저의 진가를 알아보는구나 싶었어요.
- 여러분의 뜻이 정 그렇다면,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여기까지 데려와 버렸네요. 27~28쪽
- 돈 떼먹은 거 죄다 어쨌냐?
- 우리가 다 썼지.
어용들이 그렇게 순진했다니까요. 다음 날부터 그 집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가부좌를 틀었어요. 그때는 영도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진숙이가 누구 집 앞에 앉아있다니까 동네 아줌마들이 죄다 몰려와 왜 그러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민주노조랑 어용노조부터 설명해야 하잖아요. 같은 얘기를 수십 번 해야 하니 입도 아프고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말 안 해도 다 알 수 있게 대자보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대자보를 본 적이 없어서 달력을 찢어 뒷장에 “내 돈 내놔라. 도둑놈아”라고 썼어요. 그랬더니 빚쟁이인 줄 알았는지, 동네 가게 아줌마가 자기네 외상값도 좀 받아 달라 하더라고. 48~49쪽
중식 보고대회 때 식탁에 올라가 선동하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거예요.
- 이게 사람이 먹는 밥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식판을 탁 엎으니까 사람들이 환호하더라고요. 노동조합과 함께하자고 말하는데, 누가 제 다리를 꽉 잡더라고요. 제가 다리를 너무 떨어서 쓰러질까 봐 잡아준 거예요. 여자들은 3명을 제외한 전부가 노조에 가입하고, 남자들은 눈치 보면서 가입하지 않았어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기륭전자도 그랬어요. 여자들은 노조에 가입하고, 남자들은 구사대 노릇이나 하잖아요. 52~53쪽
- 공장장 개새끼, 희망퇴직이 그리 좋으면 너부터 나가봐라. 그럼 내가 동의해줄게.
집회 때 단상에 올라가 이렇게 욕했다고 고소 고발을 당해 수배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집에도 못 가니 선배들이 우리 아이들을 챙겨줬어요. 어느 날 아들이 전화하더니 막 따지더라고요.
- 엄마,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 경찰들이 엄마가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고 한바탕 난리 치고 갔어. 거기서 더러운 꼴 보지 말고 빨리 나와.
그랬던 아들이 투쟁한 지 2년이 지나고서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압니까?
- 엄마 더 열심히 싸워야 해. 내 친구들 다 데리고 갈까? 116~117쪽
저는 남편이 아파서 단식을 못 했어요. 단식하는 동지들을 보면 늘 마음에 걸렸죠. 그래서 삭발을 했어요. 그때 동지들이 투쟁기금으로 가발을 사줬는데, 그걸 쓰고 집에 갔더니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 투쟁하더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
그러다가 밤에 자는데 가발이 벗겨진 거예요. 남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 나 때문에 미안하다.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가발 쓰지 말고 당당하게 해라. 120쪽
남성 비정규직들은 이미 정규직이 됐는데, 저는 여성이라 안 된다고 했었거든요. 억울하더라고요.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빠가 그러는 거예요.
- 너희 회사 인력관리 쪽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네가 남자들 틈에서 정규직이 되려 한다면서 말려 달라고 하더라.
- 그래서 아빠는 뭐라고 했어요?
- 우리 집은 딸만 넷인데, 그럼 우리 딸들은 평생 정규직 한 번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냐? 우리 딸이 알아서 할 테니 그냥 가라고 했지. 134~135쪽
점심시간 직전에 회사가 우리 요구를 다 들어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제 라인으로 돌아가자며 모두 일어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었어요. 너무 서러워서요. 우리가 그때 그랜저와 소나타를 63초에 한 대 만들었어요.
- 인원이 없으면 70초에 한 대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63초에 한 대를 만들려고 월차 쓴다는 사람을 칼로 찌르다니. 우리는 겨우 이런 이유로 칼에 찔려도 되는 사람이구나! 137~138쪽
정문 앞 천막에서 132일째 농성 중이에요. 조합원들끼리 돌아가면서 천막에서 자는데, 한 달에 한두 번 제 순서가 와요. 다행히 공원 화장실을 사용하지만, 생리할 때는 불편해요. 저는 생리통이 심해서 늘 약을 가지고 다니거든요. 농성할 때는 여성의 몸인 게 짜증나고 귀찮아요. 남자친구는 저 혼자 여자니까 농성장에서 자는 걸 빼달라고 하래요. 그래서 말했죠.
- 여자라고 혜택받듯이 나 혼자 빠지기 싫어.
경비에게 맞는 것도 두렵지 않고 삭발할 수도 있는데, 생리 기간에는 우울해질 때가 있거든요. 144쪽
노동조합이 없을 때는 관리자들이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 기분 나빴어요. 성희롱도 잦았고요. 그런데 관리자들이 그러면 웃어주는 조합원들이 있는 거예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죠. 연세가 있어서 그런지 웃으면서 관리자들과 똑같이 농담하곤 했어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어요. 노조 만들고 나서는 언어폭력이나 성희롱이 싹 없어졌어요. 참 신기하더라고요. 167쪽
아무리 해고자라도 지회장이 조합원들이 있는 공장에 들어가 노조 활동한 것이 무슨 죄예요? 남편이든 누구에게든 폭행당해서 국가에 신고하면 응당 국가가 구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홈리스 여성에게는 집과 일자리를 줘서 살길을 마련해줘야 하고요. 감옥은 죄지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국가가 죄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인 것 같아요. 힘없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두면서 ‘까불면 너만 다친다’고 협박하는 거죠. 폭력을 국가가 관리하는 걸 정당화하는 시스템일 뿐이에요. 192쪽
여자라서 일 못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남자들이 1대 작업할 때 저는 2~3대 더 하려고 노력했죠. 이곳 역시 처음엔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멀리 다녀야 했어요. 남자 동료들이 천천히 다녀오라곤 했지만, 그래도 눈치 보여서 자주 갈 수 없었어요. 4,000명 직원 중 여자가 저 하나이니, 늘 주목을 받았어요. 라인에서 미러를 장착할 때도 남자 동료와 양쪽에 서서 작업하면, 지나가는 사람마다 쳐다봤어요. 함께 일하던 동료가 그런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죠.
- 형님, 우리는 원숭이다. 바나나 주고 가라! 202쪽
금속노조 초반에는 늘 여성에게 대의원대회 서기를 시켰어요. 그래서 사무처 여성 활동가들끼리 모여 얘기를 했죠.
- 남자들은 왜 서기를 못하는 걸까?
- 서기를 못 하는 게 아니야. 2시간 이상 어깨 빠져라 집중해서 자판 치는 게 고된 노동이잖아. 남자들은 그게 싫은 거야. 여성들이 서기 하느라 정신없을 때 남성들은 대의원들과 커피 마시며 쟁점 토론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회의에서 남녀 구분 없이 돌아가며 서기를 맡자고 제안했어요. 이런 것 하나도 문제 제기를 해야 했죠. 246쪽
노조도 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노조가 그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저 임금협상과 단체교섭만 열심히 한 거죠. 아이를 낳고 복귀하니까 또 어려움이 발생했어요. 당시엔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쓰겠다니까 난리가 났어요. 저 혼자 창고에 보내더니 책상 하나 주고 허드렛일만 시키더라고요. 삼남전자를 그만두고 1년 후 경기지부 지역지회 사무장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부부싸움을 계속해서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어요.
- 애는 누가 볼 건데?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