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소리
김선중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보신각의 종이 방송되고 지방
마다 새로 만든 종의 소리가 전국 각지에 퍼지고 있다. 소리는 못난 사
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동식물 모두에게 골고루 퍼져 나간다. 오래 끄는
종소리의 여운을 보내는 한 해의 아쉬움인양 한참만에야 잦아들고 한해도
갔다. 어렸을 적에는 경주의 신라 봉덕사종이 방송되고 상원사의 종이
다음에 방송되었다. 늦게 기다리며 깜박 졸다가 보면 어느새 자정이 되
어 긴 여운의 종소리가 라디오를 통하여 울려 퍼졌었다. 봉덕사의 종소
리를 들으며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설레임이 교차하는 순
간을 맞곤 했었다.
새해를 시작하는 종소리를 들으면 지난해를 돌아보게 된다. 지난해 할
일을 제대로 하였는가. 집에서는 가장으로써 직장에서는 기술자로써 최
선의 노력을 하였는지. 야물지 못한 마음 때문에 하던 일을 끝마감하지
못한 일은 없었던가. 할 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가짐 때문이리라.
시골에 살 때 새벽에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일찍 잠에서 깬 날이면
마을 건너편 동산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치는 종소리를 듣곤 했었다. 종
루에 달린 서양종이라 여운은 없지만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시골마을에
울리는 종소리는 마지막에 관성으로 쳐져 마감되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
었다. 연이어 먼 동네에서 치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답했다. 천막교회에
서 포탄피를 걸어 놓고 치는 희미한 종소리도 멀리서 들리면 일어날 준비
를 했다. 도시에 살면서 여기 저기서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시달리다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고 황혼녘의 무심천 너머 절의 종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며 종소리를 듣노라면 자연 하루를 반성하게 된다.
종은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소리로써 만인을 깨우치게 한다. 베르렌르
의 시에 가을날 종소리에 가슴이 막히고 지나간 날 그리며 눈물짓는다는
내용이 있었거니와 고뇌할 때나 마음이 울적할 때에 종소리는 여운을 남
기며 가슴에 스며들었다. 나의 소리는 누가 듣고 반향을 할까. 그저 탱
하고 남의 의견에 반향을 울리는 사람은 아닐까.
우리 나라 자동차 회사에서 엔진을 못 만들어 고심하다가 일본의 기술
자를 초빙하여 어느 독일학자가 세계 제일의 종이라고 했다던 봉덕사종을
구경시키니 신라시대에도 정교한 주물을 만든 걸보고 감탄하면서 기술을
이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예술품으로 잘 만들어지건 포탄피로 만
들어지건 자기 맘대로 된 것인가. 메주같이 생겼거나 호박같이 생겼거나
자의에 관계없이 태어난 운명이리라. 옛날의 종같이 예술품이 있는가 하
면 서양식의 종이 있고 포탄피로 된 종도 있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우리의 종같이 잘 생기지 못했지만 가진 마음으로 소리만은 은은하게 울
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해가 끝이 나고 또 새해가 시작이 되니 자연은 법칙에 따라 순환하고
무한한 세월중의 덧없는 여행자에 불과함을 생각하다 보면 한해가 스러지
는 순간에 인간으로써의 허무감이 사무쳐온다. 식구들이 잠들자 거실에
홀로 남아 바른 행동을 할 것과 만물 평안을 천지신명에 기원한다. 앞으
로는 빠른 세월을 탓하지 않고 이 나이에 살고 있는 자체를 기쁨으로 보
아야겠다. 새해를 맞는 순간에 살아서 움직이며 기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제 하루가 가고 계절이 가고 한해가 가겠지. 올해의 말일에는 어떤 마
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을까.
1998
첫댓글 빠른 세월을 탓하지 않고 이 나이에 살고 있는 자체를 기쁨으로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