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낭의 매장>. 1849~1850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귀스타브 쿠르베
평범함이 전략이다
팥쥐 엄마가 팥쥐와 더불어 동네잔치에 놀러 갔다.
따라가고 싶어하는 콩쥐에게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고 오라 시키고 말이다. 울고있는 콩쥐 앞에 두꺼비가 나타났다.
“내게 맡기고 걱정 말고 다녀와!”
두꺼비의 호언장담을 믿고 잘 놀다 집에 들어온 콩쥐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텅 비어 있는 물독이었다. 깜짝 놀란 콩쥐는 집안 아랫목에 잠들어 있는 두꺼비를 발견했다.
타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고 왜 독에 물을 채우지 않았는지 참을성 있게 물어보는 콩쥐에게 두꺼비는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 물독? 밑이 빠져 있던데?”
진짜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1990년대 한국에는 당연한 것이 반전이 되어버리는 이런 ‘썰렁 개그’ 가 한창 인기를 모았다.
그런데 이보다 무려 1세기 반이나 앞서 비슷한 반전을 시도한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사실주의의 창시자’ 라 불리는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였다.
쿠르베는 수도 파리에서 한참 떨어진 스위스 접경 지역 농촌 오르낭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부유한 편이라 열두 살 때부터 일대일 개인교습으로 미술을 공부했고, 1837년에는 브장송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며, 2년 뒤에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내로라하는 스승들 밑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당시 유행하던 방식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스타일에 더욱 눈길이 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쿠르베의 학습은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명작들을 모사하는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파리 생활 2년 만에 살롱에 작품을 출품한 쿠르베는 3년에 걸쳐 세 번의 낙선 끝에 1844년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자화상>으로 처음 입선 명함을 얻었다.
“최고로 좋은 자리에 내 그림이 걸리게 되었다”며 부모님께 쓴 편지로 보아, 이때만 해도 쿠르베의 행보는 당시 유행하던 화풍을 고수하며 제도권 입성을 꿈꾸는 당대 여느 아티스트와 별반 다를 바 없던 듯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51년,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이라는 작품을 살롱에 발표하며 자신이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예술가임을 폭탄선언했다. 이 그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주어 당대 화단을 뒤집어놓았다.
첫째, 스케일이 범상치 않았다. 실물 크기의 인물 50여 명이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의 폭은 무려 6미터가 넘어 살롱의 가장 큰 방 벽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였다.
둘째, 이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품에 담긴 인물들이 모두 듣도 보도 못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쿠르베의 이 그림은 실제 쿠르베의 먼 친척 장례식을 묘사한 것으로, 1849년부터 2년에 걸쳐 고향인 오르낭에 머물며 동네 공무원, 성직자, 부모와 여동생을 차례로 작업실에 불러 모델로 세워 완성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작가와의 가상대담을 설정하자면 이런 것이다.
무엇을 그린 것인가요? 내 친척 장례식을 그린 겁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죠? 우리 동네 사람들이요.
그림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요? 그냥, 우리 동네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요.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죠? 그냥,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죠.
장난합니까? 장난이라뇨. 이건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림 속 사람 한 명 한 명 이름도 다 댈 수 있다고요!
실제로 그림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길게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은 저마다 딴 짓을 하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죽은 자의 장례식에 관심이 없다. 어떤 메시지도, 주제의식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첨단 유행을 걷는 파리지앵들의 기준에서 그들의 옷차림은 심지어 촌스럽기까지 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기대하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판타지를 원했다.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모습이라든가(실은 노새를 탔었다고 한다), 실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기적을 묘사한 작품이거나, 하다못해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해야 감상뿐 아니라 소장 가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모를 저 시골 촌구석의 촌부들이나 보려고 귀한 걸음을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남_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1854년. 파브르 미술관 소장
그로부터 2년 뒤, 쿠르베 버전의 ‘썰렁 개그’(그것을 진정 ‘개그’ 라고 말할 수 있다면) 2 탄이 다시 화제를 모았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초라한 등산복에 더러워진 신발을 신은 쿠르베가 동네에서 자신을 찾아온 후원자 알프레드 브뤼야스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의 제목을 보고, 관람자들은 동방박사가 어린 예수와 마리아에게 인사드리러 오는 장면처럼 어떤 특별한 내러티브를 기대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림 상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부유한 후원자가 허름한 옷차림의 화가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는 이 설정은 심지어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훗날 쿠르베가 ‘천재에 대한 부富의 경의’ 라고 부제를 발표했을 때는 더욱 화가 났다.
그래, 위대한 예술가에게 경의는 표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림 속 ‘위대한 예술가’의 외모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배경이 되는 풍경도 쿠르베가 살던 촌구석 시골길일 뿐이며, 어떤 카리스마도, 아우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쿠르베는 아마도 또 이렇게 항변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렸을 뿐” 이라고.
그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작가로 유명했다. 쿠르베의 화풍을 마음에 들어 한 어느 후원자는 그에게 찾아가 천사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쿠르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천사’라는 것을 제 눈앞에 데리고 와준다면 기꺼이 그려드리겠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미술작품을 통해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을 그리며 보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다. 그러한 작품세계에 부재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었다.
쿠르베는 이를 역이용했다.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정작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을 ‘노골 적으로’ 그리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노골적으로’라는 수식어를 강조한 이유는 심지어 현실조차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관과 선입견, 속물적 미적 기준에 의거하지 않고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대체로 초라하고, 지루하며, 때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중심에 선 19세기 프랑스는 더욱 그랬다. 모두가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그런 모습을 쿠르베는 “이래도 안 볼래?”라고 항의라도 하듯, 엄청나게 큰 캔버스 위에 굵직하니 그려댔다.
<화가의 화실>. 1854-55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The Artist's Studio (L'Atelier du peintre): A Real Allegory of a Seven Year Phase in my Artistic and Moral Life, 1855, 359 × 598 cm (141.33 × 235.43 in), oil on canvas, Mus?e d'Orsay, Paris
보수적인 파리 미술계가 이런 쿠르베의 시도에 쉽게 적응할리 만무했다. 그나마 쿠르베의 의중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주는 극소수의 지식인과 후원자, 그리고 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특이하고 눈에 띄어서 계속 그의 그림을 쫓아다니는 다수의 관객들 덕분에 쿠르베의 지명도는 나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는 가운데, 쿠르베는 1855년 만국박람회에 총 열네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주최 측은 그 가운데 두 점의 작품은 전시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위에 언급한 <오르낭의 매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쿠르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거론되는 <화가의 화실>이다.
하필 가장 중요한 작품 두 점이 누락되다니 쿠르베는 단단히 뿔이 났다.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을 빌어 박람회장 근처에 임시 천막을 짓고 거부당한 두 점을 포함한 개인 전시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했다.
천막 바깥에는 붓으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사실주의Realism’.
이 단어는 그렇게 쿠르베의 허름한 천막 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The Source, 1868 . <샘>. 1868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부상당한 남자>. 19세기경. 오르세 미술관 소장. Gustave Courbet: The Wounded Man, 1844-54.
Les_Baigneuses-Courbet. Gustave Courbet, The Bathers. 1853 . 목욕하는 여인들
마지막 반전으로 남긴 자화상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라는 쿠르베의 원칙은 여인화를 그릴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쿠르베 이전 19세기의 이른바 ‘아카데미즘’이라 불리는 고전회화에서 여인의 누드는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해 그려졌다. 몸의 비율은 엄격한 8등신이어야 하며, 피부는 하얗고, 매끄러운 곡선은 거침이 없어야 했다. 이런 - 당시 미적 기준으로는 - 완벽한 여인의 누드화 앞에서 아마도 수많은 파리 신사들은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쿠르베의 누드화는 그들로부터 이런 은밀한 기쁨을 앗아갔다.
1853년 <목욕하는 여인들>이라는 최초의 누드화는 살롱에 출품되자마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
이상적 신체비율은 고사하고 아이 열 명은 낳은 듯 펑퍼짐한 엉덩이에 셀룰라이트가 드러난 중년 여인의 등판은 남성들의 에로틱한 환상을 통째로 앗아갔다.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어 1868년 비슷한 분위기의 <샘>이란 작품은 다시 한 번 파리 시내를 뒤집어 엎었다.
당시 전시회를 방문한 최대 권력자 나폴레옹 3세는 “여체에 대한 모독” 이라고 화를 내며 그림 중 여성 부분을 채찍으로 내리쳤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악평이 심하면 심해질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쿠르베의 작품값은 껑충껑충 올라갔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네거티브 마케팅’ 의 수혜자였을 것이다. 대중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대중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영리한 예술가였다. 영향력 있는 신문이며 비평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다루는 빈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성실한 예술가였다. 모델들을 전부 해고하고 제자들에게 누드화 대신 살아있는 암소를 그리게 하는 퍼포먼스를 취하며 근엄한 아카데미를 경멸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적을 마음껏 비웃은 다음에 그는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취지아래 그의 누드화도 날이 갈수록 디테일해져 은밀한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그의 작품 대부분이 전시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저 유명한 <생명의 기원>은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관객몰이를 하는 최고의 화제작으로 남아있다.
쿠르베의 작품세계에서 남은 마지막 반전은 그의 자화상에 있다.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다양한 버전으로 남겼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그는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남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날렵한 몸매에 다소 마른 듯 날카롭고 고귀한 인상으로 그려진 그의 대부분의 자화상과 달리 사진 속 그의 모습은 대체로 펑퍼짐하고 각이 없어보인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던 쿠르베도 결국 제머리는 못 깎은 것일까?
글 ::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Self-portrait (Man with a pipe), 1848-49
Woodburytype of Gustave Courbet
L'Origine du monde in the Mus?e d'Orsay
In Courbet’s footstep retracing the creation of the “Origins of the World”,
Courbet ‘Origins of the World’ missing parts.Really ?
Chopin, Piano Sonata No. 2 in B Flat Minor, Op.35
Leif Ove Andsnes, piano
I. Grave - Doppio movimento 7:14
II. Scherzo 6:42
III. Marche funèbre (Lento) 8:23
IV. Finale (Presto)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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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쿠르베 본인이 그린 자화상과 사진의 대조에 웃음이 나옵니다.
< 생명의 기원 >저 작품을 그릴 때의 쿠르베의 눈동자와 심사가 궁금합니다. ((ㅎ
본래 위대한 예술가들은 당대에서는 야유나 인기를 못 얻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 시대의 통념이나 관념, 관례 등을 초월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여인의 몸을 사실대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 여체에 대한 모독이라고 화폭에 담은 여인을 향해 채찍질한 나폴레옹 3세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 행위 자체가 잘 얘기해 주네요!^^
그쵸.
여체라하믄 무조건 쭉쭉빵빵 잘빠진거라고만 생각하니 사실대로 그린 그림이 높은 양반들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겠죠.
사람의 몸뚱아리라는게 나이가 먹으면서 변한다는건 기정사실이고
죽으믄 썩어 없어질 몸뚱아리.
옳바른 시각으로 보는게 좋을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