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8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불교의 경전을 통틀어 새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대장경판은 처음에는 대장도감이 있던 강화도의 선원사(禪院寺)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조선 태조 7년(1398)에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해인사로 옮겼다. 한편 대한불교 조계종 31본산 중의 한 곳인 해인사는 거느린 말사가 65개쯤 되는데, 여러 암자 중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은 가야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자리한 백련암(白蓮庵)이다. 조선 선조 때 세워진 이 암자는 깊디깊은 산중에 들어앉은 만큼 정진에 골몰하려는 승려가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곳에 거처하던 성철스님이 1981년 정월에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1911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나 24세에 해인사로 들어와 승려가 된 그의 속명은 이영주다. 출가한 지 5년째 되는 해부터 솔잎가루와 쌀가루만을 먹으며 공부에 몰두하여 마침내 30대 중반부터는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把溪寺)로 들어가 자신의 거처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8년 동안 장좌불와(長座不臥), 곧 눕지도 자지도 않고 앉은 채 참선을 하였다. 그가 백련암으로 돌아온 때는 그처럼 맹렬히 정진을 거듭한 끝에 이른바 도를 깨우쳐 ‘큰스님’으로 발돋움한 뒤인 1960년대 중반이다. 성철스님은 암자에 거처를 정한 뒤로도 줄곧 소금을 전혀 넣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엄격한 수행을 계속하였다.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자 대중매체들이 신비롭기까지 한 그의 수도생활을 다투어 소개하며 그가 이번에야말로 백련암을 떠나 ‘저자’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울 조계사에서 있었던 종정 취임식에도 나가지 않고 백련암에서 적은 짧은 법어를 사람을 시켜 그 자리에 전하였다.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사회 대중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끝맺음한 그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성철스님이 천년 동안에 걸쳐 해인사가 배출해낸 여러 고승들의 맥을 이어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해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는 사람이 많아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합천 해인사 밥인가’라는 속담이다. 이는 절에서 재(齋)를 올리느라 식사가 늦어진 데서 유래한 말로, 밥이 끼니때보다 늦어질 때를 비꼬는 말이다.
홍류동계곡 © 유철상홍류동계곡은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이른다. 가을 단풍이 매우 붉어서 계곡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박원형이 “좋은 산은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듯 천 겹이나 아득하고, 절벽은 강에 임해 몇 자나 높은가?”라고 하였고, 유사눌이 “땅이 궁벽하니 마을 모습이 예스럽고 시냇물이 맑으니 나무 그림자가 깊다”라고 노래한 합천에 편입된 초계군의 형승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사방이 산이요, 여덟 가락 물이다. 군 사면이 모두 산이면서 평평한 들판이 넓고도 넓다. 대암(臺岩), 무월(舞月)의 여러 골 물 여덟 가닥이 구불구불하여 역력히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학자인 서거정은 「관가대기」에서 “사방의 산은 군을 에워싸고 여덟 가락 물은 마을을 안고 흐른다”라는 글을 남겼는데, 초계군 객관 동쪽에 감정루(鑑政樓)라는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언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는데, 고려 때 사람인 김태정이 누각 앞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은 시 한 편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벼슬 굴레 벗어나지 못한 백발 첨지는 허리 굽힘이 시세 풍습 따라 서네.
세상일과 상관없는 푸른 수염 첨지는 어떤 사람 눈에 들려고 매양 몸을 굽히나.
이 시를 들은 이인복은 이렇게 화답하였다. 빈 객관에 병든 첨지, 접대하는 사람 없는데,
노송(老松)은 오히려 맑은 바람 보내니 기쁘기 그지없네.
이 몸은 굽었을망정 마음은 굽히기 어려우니, 우리 당(黨)에 어찌 더 직궁(直躬)을 물으리.
초계에는 임진왜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가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 이순신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난 뒤 모친상을 치를 겨를도 없이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권율이 머물고 있던 초계진영에서 6월 4일부터 7월 18일까지 종군하였다. 오늘날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 학생들이 이순신의 발자취를 따라 행군을 하기도 한다. 그때의 상황이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정유년 6월 초나흘(계해), 맑았다.
일찍 떠나려는데, 현감이 문안 편지와 함께 노자까지 보냈다. 합천 땅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5리쯤 앞으로 가서 갈림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바로 고을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초계로 가는 길이었다.
초닷새, 맑았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달려왔기에 불러들여 이야기하였다. 아침 먹은 뒤에 중군 이덕필도 달려와서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22일(임오), 개다 비 오다 하였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軟泡)국을 끓여 와서 권했는데, 오만한 빛이 많았다.
7월 초열흘(기해), 맑았다.
열과 변존서를 아산으로 보내려고 앉아서 날 새기를 기다렸다. 스스로 정을 억제하며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머님의 장례도 직접 모시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순신의 자취가 서린 초계군 지역이었던 덕곡면 율지리(栗旨里)의 율지나루는 낙동강변에 자리한 나루로, 낙동강 유역의 포구 중 가장 번성했던 포구의 하나였다. 율지리는 밤나무가 많아 ‘밤머리’라고 불렸는데, 이 지역은 조선 중기 이후 낙동강 중류의 최대 나루터였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율지나루는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몰려들어 큰 장터를 형성하였는데, 오늘날엔 경상도 지역에서 성행하는 가면무극인 오광대놀이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오광대놀이가 율지나루에서 시작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오광대초계오광대(草溪五廣大)는 홍수 때 탈을 담은 궤가 강물에 떠내려왔다는 설화가 유래로 전한다.
‘말뚝이’라는 마부가 살고 있는 초계는 양반 세력이 드세서 상놈이나 하인들은 양반들의 무시와 천대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기 그지없었다. 힘든 세월을 보내던 말뚝이는 어느 날 꾀를 내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탈을 쓰고 양반들의 온갖 비리와 위선을 폭로하였다. 탈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양반들에게서 당한 온갖 수모를 후련하게 씻어낸 사람들과 상인들은 오광대놀이를 발전시켰고, 1900년대에는 경상남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오광대놀이는 ‘길놀이’편과 ‘탈놀음판’으로 나뉜다.
율지오광대율지나루는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몰려들어 큰 장터를 형성하였는데, 오늘날엔 경상도 지역에서 성행하는 가면무극인 오광대놀이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경상남도의 여지집성(輿地集成)인 『초계지』에는 “밤머리장은 초계군 북쪽 30리에 있으며, 초하룻날이 장날이다. 한 달에 여섯 번 장이 서는데 고깃배, 소금배, 장삿배가 와서 머문다”라고 실려 있고, 『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에는 “강가 나루에 장삿배와 고기잡이배가 숲처럼 왕래하고 노 젓는 소리와 뱃노래가 서로 어울려 끊어질 사이가 없다”라고 실려 있다. 밤머리장은 정기적인 향시(鄕市)가 대규모로 열리기도 하였지만 난장이라고 하여 일정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어서 장삿배가 빈번히 왕래하여 남해안의 해산물과 대구, 왜관 등 내륙 지방의 물품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져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갔던 나루터지만, 1999년 말 율지교가 만들어진 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작은 배만 매여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