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한 민생토론회에서 대통령은 총 622조 원이 넘는 투자로 경기 남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발표한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300조 원만 해도 역대급 규모인데, 우리나라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금액인 622조 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해서 산업부의 보도자료를 찾아봤다.
산업부 보도자료를 보니 "2047년까지 총 622조 원 투자 통해 팹 16기 신설 계획"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금액은 반도체 관련 민간 기업들이 향후 2047년까지 23년 동안 투자하겠다는 금액을 모두 다 더한 것이었다. 민간 기업의 투자계획을 대통령이 발표한 것뿐이다.
용인 남사의 360조 원 삼성 파운드리 팹은 지난해 내내 우려먹었던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300조 원'에 60조 원을 더한 것이다. 평택의 120조 원 시스템 반도체 팹은 2022년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던 P4, P5, P6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KAIST 연구 허브가 추가되었기 때문인지 애초 삼성전자의 발표 당시보다 20조 원이 더해졌다. 용인 원삼의 122조 SK하이닉스 팹은 2019년에 발표된 사업이다.
이처럼 '622조 원 투자' 가운데 상당 부분은 대통령이 불리할 때만 호출하는 '전 정권' 시기인 2019년에 발표된 것부터 아직 완공되지 않은 민간 기업의 반도체 팹 투자 계획을 모두 더해 대통령 입으로 발표한 것일 뿐이다. 대통령이 연초에 국민들을 만나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현황을 이야기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민간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를 통해 이런 식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그러나 민간 기업들이 하겠다는 투자가 아니라, 그 투자를 핑계로 대통령과 정부가 하겠다는 일들이다. 대통령은 토론회에서 "반도체 파운드리 라인을 하나 구축하는 데 1.3GW(기가와트)의 원전 1기가 필요하다"며 "탈원전을 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 산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핑계로 원전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산업부의 보도자료에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공급계획"이 나와 있다. 향후 필요한 전력은 10GW인데, 초기수요 3GW는 LNG발전소 6기를 세워 충당하고, 나머지 7GW는 2037년 이후 호남의 재생에너지와 동해안의 원전을 활용하겠다고 되어 있다.
민생토론회의 핵심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동해안에 원전을 세우고 경기도 용인까지 송전탑을 세워 전기를 끌어오겠다는 것이다. 이걸 위해 송전선 인허가 일괄처리제를 신규 도입해서 송전탑 설치를 쉽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법안이 제출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을 통해 송전선로 건설 기간을 30% 이상 단축할 예정이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원전이나 LNG발전소의 전기는 재생에너지가 아니므로 RE100 규정을 못 맞춘다. 즉 반도체 클러스터에 사용할 전력으로 LNG발전이나 원전을 이용한다면 2030년 이후, 용인 클러스터의 삼성 팹에서 나온 반도체는 2030년까지 넷제로 달성을 선언한 애플에 팔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애플의 넷제로는 공급망에서부터 사용자에 이르기까지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는 의미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대통령은 외국 정상을 만났을 때 자기 나라에 파운드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 나라에 원전이 몇 기나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고 했다.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과 전문가들을 앞에 앉혀 놓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싱가포르만 해도 반도체 팹이 16개가 넘는데 원전이 단 하나도 없다. 요즘 반도체 팹이 몰려가고 있는 독일도 탈원전 선언해서 작년부터 가동 중인 원전이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에도 반도체 팹이 여럿 있는데 거긴 체르노빌 원전 폭파 사건 이후로 세계 최초로 탈원전 선언했다. 원전은 반도체 산업에 필수가 아니라 이젠 RE100 규정 때문에 선택사항에서도 빠지고 있는 중이다.
산업부는 보도자료에서 "반도체 산업 전쟁은 클러스터 국가대항전 형태로 전개 중"이라며 우리도 클러스터에 다 끌어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 대만, 미국, 독일 등을 사례로 들었다. 과연 그들이 반도체 팹과 연관 산업들을 한 군데에 다 몰아넣어서 클러스터를 만들고 있을까?
산업부는 일본을 두고 "구마모토현을 반도체 산업 재건 클러스터로 조성"하고 있다고 했다. 대만 기업 TSMC가 팹을 건설 중인 곳은 일본 열도의 최남단 구마모토다, 그럼, 미국 기업 마이크론 역시 구마모토에 있을까? 아니다. 200km 이상 떨어진 히로시마에 있다. 일본 전자 업체가 연합하여 만든 라피더스는 구마모토에서 2200km 이상 떨어진 일본 열도의 최북단 홋카이도에 있다.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 국가들은 반도체 팹을 최대한 분산시켜 놓는다. 인텔은 미국 외에 아일랜드와 이스라엘에 별도의 팹이 있고, 패키징 시설은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에 분산해서 만들어 놓고 있다. 반도체 관련 모든 업체를 수도권 근처 한 지역에 모아 놓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세계 최대의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건 자연재해나 가스 폭발 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함께 몰락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방식이다.
대통령은 반도체 클러스터로 인해 "앞으로 20년에 걸쳐서 최소한 양질의 일자리가 300만 개는 새로 생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 양질의 일자리가 왜 꼭 수도권에만 생겨야 하는 지에 대해 답을 듣고 싶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서 고향을 버리고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지방의 청년들 역시 대통령이 챙겨야 할 우리 국민이다. 수도권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동해안과 호남에는 수도권에서 사용할 전기 생산과 송전을 위해 원전과 송전탑을 나눠 주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정한 처사다.
대통령은 민생토론회에서 "국가안보실 안에 경제 안보와 첨단기술 안보를 담당하는 제3차장직을 신설했다"면서 "반도체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보단 원전 산업에 더 관심 있어 보이고, 지역 균형발전보단 수도권 개발사업에 더 집중하는 듯한 대통령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간섭하고 챙기다간,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도 제 갈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이봉렬 오마이뉴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