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데미봉을 넘어
삼월 셋째 토요일은 벗과 근교 산행을 나서기로 했다. 시내 초등교장으로 재직하는 벗은 코로나 사태로 개학이 연기되어도 늘 출근이라 주말에 틈을 내었다. 우리는 둔덕행 농어촌버스를 타기 위해 마산역 광장에서 만났다. 두 주 전에도 그곳으로 가 오곡재에서 미산봉과 상데미봉을 넘었다. 이번에도 오실골에서 머위 순을 채집하고 미산령으로 올라 산등선을 따라 갈 참이다.
김밥을 사려고 번개시장으로 갔더니 들머리에선 국회의원으로 나선 선량이 연신 허리를 굽혔다. 코로나로 경기가 어려워진 서민들에게 얼굴 내밀 면목이 없어 송구해했다. 버스가 역 광장을 출발해 시내를 빠져나갈 때 약국 앞에는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마스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기다렸다. 코로나로 인한 진풍경이지만 사회주의 배급제가 도래하는 듯해 씁쓸했다.
어시장과 댓거리를 지날 때 시장 봐 가는 할머니와 근교로 산행을 나선 중년 아낙들이 더러 탔다. 진동 환승장에 들렸다가 팔의사 순국기념탑과 해병전적비를 지난 진전 면소재지에서 진전천을 따라 올랐다. 일암과 대정을 지나니 벼논 뒷그루로 가꾼 양파농사가 잘 되어 있었다. 상평과 나뉘는 의산보건진료소에서 원산으로 들어 골옥방에서 이십여 분 머물다 둔덕 종점에 닿았다.
오곡재로 가는 길목엔 수년 째 지방도 확장공사가 찔끔찔끔 진행 중이었다. 오실골 들머리로 가 보름 전 머위를 캔 개울바닥으로 가니 머위는 그새 더 많이 자랐더랬다. 배낭을 풀고 벗과 곡차를 몇 잔 비우고 칼과 봉지를 준비해 골짜기로 내려섰다. 양지바른 산골의 개울에 절로 자란 머위라 잎줄기가 부드럽고 뿌리는 통통하게 살졌다. 한 시간 남짓 머위를 캤더니 양이 많았다.
배낭을 벗어둔 자리로 와 남긴 곡차를 마저 비우고 배낭을 추슬러 일어섰다. 오곡재로 오르면서 미산령으로 가는 임도로 들었다. 중간에서 쑥을 캐던 중년 남녀 셋을 만났다. 아까 길가에 차를 둔 일행인 듯했다. 우리는 더 올라가 수종갱신지구 근처에서 쑥을 캤다. 청정지역 볕 바른 자리라 손에 움켜쥘 정도로 웃자란 쑥이었다. 검불이 좀 붙기는 해도 집에 가 다시 가릴 작정이다.
미산령 정자에 올라 김밥과 곡차를 꺼냈다. 그때 마침 자동차를 몰아 고갯마루로 올라온 사내가 있어 인사를 나누니 산불감시를 나온 지역민이었다. 곡차를 권하면서 삼진 일대 근현대사와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기미 삼일운동 때 일본 순사와 맞서 장열하게 순국한 분들을 배출했다. 한국전쟁 소용돌이에선 임시수도 부산을 방어하는 최후의 전선으로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동 산불감시원과 작별하고 우리는 미산봉을 향해 올랐다. 시든 고사리줄기가 보이고 취나물은 뾰족한 움이 트고 있었다. 양달에는 양지꽃이 화사했고 응달에선 뒤늦게 핀 복수초가 노란 꽃잎을 펼쳐 있었다. 미산봉에서 산등선은 따라 상데미봉으로 올랐다. 지역민들은 상데미봉이라 하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붙인 이름은 전투봉으로 아직도 곳곳에 그 당시 참호 흔적이 보였다.
상데미봉은 헬기 착륙장이었다. 제철에 핀 할미꽃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이었다. 여러 곳 야생화를 봤지만 한 군데서 할미꽃이 지천으로 핀 곳은 거기였다. 피바위 능선은 지난번 탔기에 이번에 원효암으로 내려섰다. 일부 구간은 경사가 아주 가팔랐다. 깊숙한 북향 골짜기 바위벼랑에 의상대가 있고 그 낭떠러지에 원효암 법당이 있었다. 법당에서 보살들이 나누는 담소가 들려왔다.
샘물을 한 바가지 받아 마시고 암자를 나오니 두 청년이 가파른 비탈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올라왔다. 굽이진 길을 따라 한참 에둘러 내려가지 상수원과 농업용수로 쓰일 저수지가 나왔다. 사촌에서 서촌을 지나 군북역이었다. 열차는 시각이 맞지 않아 면소재지로 나가 맑은 술로 하산주를 겸한 저녁을 먹었다. 합성동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타고 마산을 거쳐 창원으로 복귀했다. 20.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