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8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남덕유산에서 남강물이 시작된다
강혼이 지은 시에 “옆 고을에 까마귀 울어 해가 지는데, 눈 갠 강변길이 꼬불꼬불하다. 곳곳에 인가는 숲을 의지했는데, 흰 널판, 쌍 사립문이 대울타리에 비친다”라고 하였고, “연기는 막막하고 달은 쓸쓸한데, 은하수 비꼈고 북두칠성 나지막하다. 지난봄 따뜻하던 밤 생각나누나. 배꽃 활짝 피어 집도 환한데 두견이 우네”라고 하였던 삼가에서 산 너머 고개 너머를 흐르는 강이 진주 남강이다.
전라북도 장수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사이 백두대간에 우뚝 서 있는 남덕유산에서 진주 남강이 시작된다. 산청과 함양, 전라도 남원의 물이 합쳐져서 남강이 되고 강은 진주시의 촉석루를 지나서 남쪽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서상면을 지나 서하면에 이르고,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을 지나 비단내라고 불리는 금천변의 광풍루가 있는 함양군 안의면에 이른다.
군자정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을 지나 비단내라고 불리는 금천변의 광풍루가 있는 함양군 안의면에 이른다.
안의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된 옛집 허삼둘 가옥이 있다.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였던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아내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윤대흥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안주인인 허삼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이 집에 들어서면 여느 집과 달리 경제적 실권을 쥐었던 안주인의 의견이 존중되어 지어졌음을 첫눈에 알 수 있다. 산청 남사리의 옛집들이나 악양의 조 부잣집처럼 조선 후기 신분 제도의 철폐와 신흥 부농층이 출현하면서 1920년대에 나라 곳곳에 세워진 상류 주택의 건축 요소와 서민층의 주택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허삼둘 가옥의 부엌문은 ‘ㄱ’ 자형 안채의 꺾인 모서리 부분에 들어서 있어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허삼둘 가옥에서 50미터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옛 시절 안의현청이 있었던 안의초등학교에 이른다.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사상가인 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동안 머물면서 40여 권의 저술을 남겼고, 그런 연유로 안의초등학교엔 박지원의 사적비가 서 있다.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땅을 다질 때 썼던 도구를 비롯해 대형 맷돌과 여러 종류의 민속자료들이 세워져 있다. 하나하나 그 도구들을 바라보며 나라 곳곳에 늘어만 가는 폐교에다 자그마한 민속박물관(문, 옹기, 농기구, 짚공예품 등)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초등학교를 돌아보고 다시 버스 정류장 근처로 나오자 대낮인데도 낮술을 마신 두어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박지원에 얽힌 일화가 생각났다.
박지원 사적비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동안 머물면서 40여 권의 저술을 남겼고, 그런 연유로 안의초등학교엔 박지원의 사적비가 서 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봄날이었다. 연암은 하릴없이 대청을 서성이다가 홀연히 쌍륙을 가져다가 오른손을 갑, 왼손을 을로 삼은 뒤 교대로 주사위를 던지며 쌍륙을 두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놀이를 하고는 웃으며 일어나 누군가에게 편지 한 장을 썼다.
사흘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어여쁘던 살구꽃이 죄다 떨어져 땅을 분홍빛으로 물들였습니다.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 혼자 쌍륙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야!’ ‘여섯이야!’ 하고 소리치는 중에도 너와 내가 있어 이기고 짐에 마음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 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해서도 사사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내 두 손이 갑과 을로 나뉘어 있으니 이 역시 물(物)이라 할 수 있을 테고, 나는 그 두 손에 대해 조물주의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하건만 사사로이 한쪽을 편들고 다른 한쪽을 억누름이 이와 같습니다. 어제 비와 살구꽃은 대부분 떨어졌지만 곧 꽃망울 터뜨릴 복사꽃은 장차 그 화사함을 뽐낼 것입니다. 나는 또다시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연암이 편지 쓰는 것을 지켜보던 손님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선생님이 혼자 쌍륙놀이를 하시는 것이 놀이에 뜻을 두어서가 아니고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연암이 쌍륙놀이를 하고 느낀 생각이 어쩌면 그리도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흡사한지! 나와 생각이 같으면 좋은 사람, 곧 군자이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나쁜 사람, 곧 소인인 이 시대. 이도저도 아닌 나 같은 회색인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안의면을 지난 강물은 정여창의 고향인 지곡면 개평리에 이른다. 함양읍 마천리의 고리봉에서 내려온 물과 합해진 강은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어귀에 이르러 북쪽에서 내려오는 위천과 남계천의 합수된 물과 합해져 생초면 어서리의 외어교를 지나 남동쪽으로 꺾인다. 갈전리, 신연리, 대포리를 경유하여 같은 군 금서면과 산청면의 경계에 이르러 경호강이 되고, 계속 남동쪽으로 흘러 산청면 묵곡리와 범학리를 거쳐서 단성면과 신안면의 경계를 이루며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단성면 성내리에 이르러 양천을 합하며 진양군 대평면의 중앙을 꿰뚫고 진주시에 이르러 남강이 된다.
경호강을 건너면 문익점의 면화 시배지인 단성과 우리나라에서 돌담길이 가장 아름답다는 단성 남사리를 품고 있는 고을이 나오는데, 바로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산청군이다. 신라 때 이름이 지품천현(知品川顯)인 이곳이 산음(山陰)으로 바뀌어 궐성군에 예속된 것은 경덕왕 때였다. 영조 43년(1767)에 지금의 이름인 산청(山淸)으로 바뀌었다.
단성면의 소재지인 성내리에는 5일과 10일에 장이 섰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동헌 터 서쪽에 있던 강가새미라는 샘이나 관아의 밭이었던 관죽전官竹田 그리고 군기를 넣어두던 창고인 군기고가 어디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라져버린 것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남사리엔 고즈넉한 옛집들이 여러채 남아 있다.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등 여러 성씨들이 수백 년간을 살면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큰 마을을 이룬 이곳에 집들이 대대적으로 지어진 것은 1920년대였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후손이 살고 있는 하영국 가옥에는 18세기 초에 건립된 안채와 20세기 초에 건립된 사랑채인 사양정사(泗陽精舍)가 있다. 사양정사는 정면 7칸에 측면 3칸으로 된 큰 건물로, 내부에 2층 다락과 안채가 있어 살림도 겸하고 있다. 이 집에는 하연이 7세 때 심었다는 마을에서 가장 큰 감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길흉화복을 함께했다고 한다. 날씨가 춥거나 비바람이 치면 도깨비가 나와서 이 감나무를 보호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씨 집안에는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인 최재기 가옥은 1920년대 초에 그의 아버지가 지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집인 이상택 가옥은 18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성주 이씨의 종가인데, 70여 년 전에 지은 사랑채인 사양정사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을 빛내는 것은 집들이 아니라 고색창연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와 담장들일 것이다.
남사리에서 성내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사월리에 문익점 면화 시배지가 있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길에 올랐던 문익점은 정언(正言)으로써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종자를 구해서 돌아왔다. 그의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더니 3년 만에 많은 목화를 수확하여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씨앗을 발라내는 기구와 실 뽑는 기구는 모두 정천익이 만들었다.
문익점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무렵은 해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고 어머니의 3년 상을 끝낼 정도로 효성이 극진하였다.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강성군(江城君)으로 추증되었다.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이곳에 오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목화를 볼 수가 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서 가장 농사가 잘되는 곳의 표본을 나락(쌀)이 잘되고 목화가 잘되는 곳이라고 꼽았는데, 세월이 흘러 어느 사이엔가 목화는 이곳 면화 시배지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산청군 신등면에 있는 둔철산(屯鐵山) 정취암에 문익점의 후손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다. 문익점의 동생 익하(益夏)의 둘째 아들 가학(可學)이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정월 보름날이 되니 암자에 있던 승려들이 모두 달아나기에 그 까닭을 묻자 해마다 요괴가 나타나서 젊고 잘생긴 상좌 중을 잡아가므로 이를 피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남자가 요괴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는가 싶어서 좋은 술과 안주를 준비해놓고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과연 어여쁘게 단장한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와 요염한 몸짓으로 아양을 떨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노는 척하면서 틈을 엿보아 준비해둔 밧줄로 여인을 묶고 죽이려 하였다. 여인은 울면서 자신은 본래 늙은 여우인데, 만일 자신을 살려주면 무엇으로든 둔갑할 수 있는 장신술(藏身術) 비결 책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학이 여우 뒤를 따라가니 과연 여우는 높은 바위틈에서 비결 책을 꺼내어 주었다. 그가 약속대로 여인을 풀어주고 그 책을 읽는데, 여인이 나타나 마지막 장을 빼앗아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책에 쓰인 대로 마음껏 바위, 돌, 나무, 짐승으로 둔갑을 할 수는 있는데, 밧줄의 끝 토막을 감출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 뒤 군자금을 모으려고 둔갑술로 궁중으로 몰래 들어가서 여러 번 나라의 돈을 훔쳐 내오다가 결국 잡혀서 죽게 되었다. 단성고을에 살던 문씨들도 모두 동래부(東萊府)로 귀양을 갔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 산청군 단성면 운리(雲里)에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릿해지는 단속사(斷俗寺)가 있다. 보물 제72호와 제73호로 지정된 신라 탑 두 개와 상처투성이인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는 폐사지라서 애착이 가는 점도 있지만, 구름이 머무는 마을이라는 운리에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을 지닌 단속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속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신충패관」에 나오는 두 가지 창건 이야기다. 하나는, 어진 선비 신충이 경덕왕 22년(763)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그 절이 지금의 단속사라는 얘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경덕왕 7년에 이준이라는 사람이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지은 뒤 단속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김일손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지은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이 절에 신라 경덕왕의 초상화가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의 뛰어난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신라의 명찰이었던 이 절은 조선의 선조가 임금이 된 해인 1567년에 지방 유생들에 의해 불상과 경판이 파괴되면서 절도 사라져버렸고, 강희백의 「단속사 견매(見梅)」라는 시 한 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기운이 돌고 돌아갔다 오나니
천심(天心)은 섣달 전의 매화에서 볼 수가 있고,
스스로 큰 솥에 국 맛을 조화하는 열매로서
부질없이 산중에서 떨어졌다 열렸다 하네.
그 뒤 이곳을 찾았던 김일손은 「정당매(政堂梅)」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나는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은
비록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자연의 이치가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흥망과 득실이 모두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내려와 고개를 넘으면 남강의 지류 중 하나인 덕천강과 만난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법계사와 대원사 골짜기를 흘러내려온 덕천강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닿는데, 그곳에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덕천서원남명 조식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은 합천의 삼가에서 태어났으며, 과거 공부보다 경사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