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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하는 두 지파
민 32:1-15
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10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민 32:1-15 / [요단강 동쪽을 차지한 지파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가축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살펴본 그들은 그 땅이 가축을 치기에 알맞은 땅이라는 것을 알았다. 2)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모세와 엘르아살 제사장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찾아와서 부탁하였다. 3) `아다롯, 디본, 야셀, 니므라, 헤스본, 엘르알레, 스밤, 느보, 브온은 4) 여호와께서 우리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이 정복하게 하신 땅입니다. 그 땅이 가축을 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더군요. 우리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에 가축이 많으니 5) 우리 지파가 그 땅에서 가축 떼를 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땅을 우리 몫으로 주시면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대대로 그 땅에서 살겠습니다.' 6) 그러자 모세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 형제들은 싸움을 하러 나가는데 너희만 편하게 그 땅에 자리잡겠다는 말이냐? 7) 너희 형제들은 지금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려고 강을 건너려는 참인데 그런 식으로 형제들 마음을 낙심하게 할 셈이냐? 8) 우리가 가데스바네아에 진을 치고 머무르고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땅을 살펴보고 오라고 너희 아비들을 보낸 적이 있었다. 9) 그런데 그때에도 너희 아비들이 그 땅을 보고 돌아와서는 형제들을 낙심하게 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10) 그때 여호와께서 무척 화를 내시며 이런 맹세를 하셨다. 11) `애굽에서 나온 무리 가운데에서 20세 이상된 사람들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하여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은 그 땅으로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그 두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이다. 13)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무척 화를 내셨고 황량한 빈들에서 40년 동안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리고 그동안 여호와께 못된 짓만 골라서 하던 그 세대는 다 사라져 버렸다. 14) 너희 아비들이 그러더니 이번에는 너희까지도 이 지경이냐? 어째서 여호와의 화를 북돋우는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냐? 15) 너희가 그렇게도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고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그분이 우리 이스라엘을 이 황량한 벌판에 내팽개쳐 버리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이스라엘 온 백성이 너희 때문에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을 정복했고 이제 가나안 정복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편에 머무르길 원했습니다. 겉으로는 많은 가축을 소유한 그들에게 최적의 장소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심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편히 살려는 마음도 숨어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을 요구한 두 지파(1-5) 야셀과 길르앗 땅은 목축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한 땅을 보고 르우벤과 갓 지파는 언약의 땅에 대한 사명보다 욕심이 먼저 앞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자신들만의 풍요와 이익을 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두가 공평하게 그 땅을 경영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계획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가나안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곳이 어디든 생명과 기쁨의 땅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책망(6-11) 요단 동편에 정착하겠다는 르우벤과 갓 지파를 모세는 엄중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다른 지파들이 크게 낙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공동체의 사명이고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도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 10명의 부정적 보고를 한 정탐꾼 때문에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던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특히 과거의 일을 반면 교사로 삼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명과 비전 앞에서 순종하는 믿음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12-15) 이스라엘에게 좋은 믿음의 본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12절의 “온전히”는 히브리어 ‘밀레우’를 번역한 것으로 ‘충만하다’, ‘만족시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들의 믿음이 확고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며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항상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지난날의 좋은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을 기억하며 삶의 선택과 결단의 순간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겠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난날 동안 어떤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까? 이제 당신의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세상 사이에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한번은 무디 선생이 자신의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 시간만 합쳐도 몇 달은 족히 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 믿음이란 번갯불과 같이 어느 날 나를 확 달아오르게 할 어떤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수없이 기도해도 믿음이 오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로마서 10장을 읽다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란 구절을 보았다. 그 즉시 난 성경을 부둥켜안고 믿음을 구했다. 그리고는 성경을 다시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했더니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 설 교 >
함께 싸우라
민 32:1-42 / 이정원 목사(참사랑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소수의 좋지 못한 행동은 전체에 악영향을 줍니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그 구성원들은 자기 한 몸만을 생각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경제발전에 힘입어 요즘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 된 것일까요?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부문은 선진국에 크게 못미처 겨우 1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회의 약점을 잘 지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많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들이 사회 전체나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큰 불행과 손해로 다가오게 됩니다. 지금 환경 문제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심각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오는 가운데 만났던 어려움의 대부분은 일부 소수의 불신앙적인 불평과 원망, 그리고 낙심 등으로 인하여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그러한 심각한 문제가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열 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문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의 요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시혼과 바산을 점령했으며, 미디안을 점령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가나안 땅을 요단 건너편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이 지역은 매우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이 먼저 얻은 이 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르우벤과 갓 지파가 모세와 엘르아살과 족장들에게 와서 자기들에게 요단 이 편의 땅, 곧 이스라엘이 이미 점령했던 땅들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요단을 건너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갈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1-5절)
르우벤과 갓 지파가 그렇게 요청한 이유는 그 땅이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며, 이 두 지파는 특별히 가축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지파의 이러한 요구는 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의 불씨가 들어 있었습니다.
모세의 질책
르우벤과 갓 지파의 요청을 받은 모세는 그들에게 크게 노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두 지파의 요청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담시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파는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이미 정복한 땅에서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질책했습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 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6-7절)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하였었나니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8-13)
40년 전 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며, 그 땅에 들어가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이들의 말을 듣고 울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다가 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20세 이하였던 2세들이 자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진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 한 죄에 대하여 그들은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중도에서 탈락한다면, 다른 지파라고 해서 안 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러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지파들이 가나안으로 건너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완전히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두 지파가 이스라엘 전체를 망하게 만드는 반역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뼈아픈 악몽을 되풀이는 하는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여 백성을 멸망시키는 일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14-15절)
이들의 순종적인 반응
아마도 르우벤과 갓 지파는 단순히 자기들이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을 요구한 것이었지,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에 미칠 파멸적인 악영향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호된 책망을 받아들였고, 이 문제를 충분히 의논한 다음에 다시 모세에게로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위한 병역의무를 이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기업을 나눌 때 자기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분깃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16-19절)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모세의 경고를 듣고 진심으로 순종한 태도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죄를 지적했으며, 그들은 모세의 지적을 받고 불평하거나 싸우지 않고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심각한 위기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 낼 줄을 알라.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말대로 가나안 땅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럴 경우에만 그들이 요구한 땅이 그들의 땅이 될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20-22절) 이렇게 다짐하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23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죄는 죄인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함으로써 범죄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죄는 또 범죄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과 분리시키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분리시킴으로써 그 사람을 찾아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 죄는 그 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그 복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그 사람에게서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감으로써 그 죄인을 찾아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함으로 죄는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경고를 듣고 두 지파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자기들이 요단을 건너가서 형제들과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병역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종들은 우리 주의 말씀대로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27절)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이기적이고 죄악되며 위험을 내포하고 있던 이 두 지파의 요청이 바로잡아졌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백성의 두령들에게 이 두 지파의 제안을 설명하고, 그들이 약속을 지켜 가나안에 싸우러 가거든 그 땅을 그들에게 주고, 만일 그들이 싸우러 가지 않거든 그 땅을 주지 말고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분깃을 주라고 명했습니다.
새 이름
이렇게 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가나안을 건너기 전에 기업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므낫세 지파의 절반도 함께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을 중건하여 새 이름을 붙였으며, 기존의 성에도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세가 각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주되 곧 그 땅과 그 경내의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 갓 자손은 디본과 아다롯과 아로엘과 아다롯소반과 야셀과 욕브하와 벧니므라와 벧하란들의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또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었으며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바꾸었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은 가서 길르앗을 쳐서 빼앗고 거기 있는 아모리인을 쫓아내매 모세가 길르앗을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게 주매 그가 거기 거주하였고 므낫세의 아들 야일은 가서 그 촌락들을 빼앗고 하봇야일이라 불렀으며 노바는 가서 그낫과 그 마을들을 빼앗고 자기 이름을 따라서 노바라 불렀더라”(33-42절)
이렇게 성읍들에 새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성들의 이전 이름들이 전에 그 땅 사람들이 숭배하던 우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들의 이름을 새롭게 바꾼 것은 이제 그 땅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서 사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소망을 굳게 잡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망에 합당한 모습으로 그 날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함께 싸우러 가자.
오늘 본문에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싸우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죄와 악한 세력으로 더불어 싸웁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교회를 전투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하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쉬지 말고, 총력을 기울여 죄와 싸워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힘을 합하여 우리의 대장이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싸우지 않고 구경만 하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불신앙적인 태도로 다른 성도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예배 참석과 기도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실탄을 공급받고 작전을 지시받는 일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배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당신은 성도의 교제에 힘쓰고 있습니까? 교제는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합치는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은 봉사와 선교와 구제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전쟁터에 나가 작전에 따라 우리가 받은 실탄을 사용하여 실제로 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나 혼자만 우선 편하자고 불신앙과 나태함과 이기적인 태도로 교회의 하나됨과 전진에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경고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내리라.” 대장 되신 주님을 따라 모두가 힘을 합하여 싸우며 승리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민수기 32:1~5 / 이성우 목사
오늘은 학원 선교 교육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을 학원 선교 교육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땅에 세워진 감리교 계통 학교들이 본래적인 뜻을 따라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후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운영 중인 감리교 계통학교로는 중학교가 23개 학교, 고등학교가 27개 학교가 있으며, 이 외에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화여대를 비롯한 몇 개의 대학교들이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재를 양성해 내는 일을 위해서 각 학교에 파송된 교목들을 중심으로 귀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발전과 인류 문명의 발달을 위해서 교육이 차지하는 그 역할이라고 하는 너무도 소중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가치관이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놀라우리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신앙 교육을 통해서 그들이 세상을 신앙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믿음 안에서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며 그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학문과 재능, 그리고 신앙 인격을 연마시켜 나가는 일이야말로 정말 한없이 소중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교육의 힘은 놀라워서 교육에 의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도 분명히 달라지며 세상에서의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찾아가는 것도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학교 교육 현장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는 일은 정말로 귀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세상이 급격하게 물질문명에 사로잡혀서 끝 간 데 없이 정신없이 이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심어줌으로써 거센 세상물결의 물고를 바꿔 놓는 일은 다음 세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세상을 탁류의 홍수에서 구해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삶에 필요한 정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습득하게 되는데 정보의 많은 부분을 보는 것을 통해서 습득하게 됩니다. 만약 사람이 지금처럼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마도 세상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보는 것은 꼭 눈을 통해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통해서도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상상력을 통해서도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느낌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사람들의 경우에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는 영적인 시각장애자들은 마치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사실상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요소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놀랍습니다.
사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여러 가지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경험이든지 간접적인 경험이든지 간에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서 정보를 습득해서 축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서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경험하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데, 교육은 경험의 중요한 한 수단입니다.
무엇을 보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만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장 6절 말씀을 보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나서 선악과를 보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고는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 하게 되는 과정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의 눈이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많은 범죄들이 이렇게 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는 것과 그 보는 것에 대한 탐심이 생기는 것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입술도 할례를 받아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못지않게 우리의 눈이 할례를 받아야 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보는 것과 관련된 또 다른 성경 속의 이야기는 민수기 13장 이하에 기록된 가나안 땅 정탐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파견되었던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 동안에 가나안 땅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각각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서 다른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고 왔으면서도 10명의 정탐꾼들과 갈렙과 여호수아는 전혀 다른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가나안 땅을 그저 사실적으로만 정탐하고 돌아와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불신앙적인 결론을 가지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들 10명의 정탐꾼들과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2명의 정탐꾼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실만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눈을 뜨고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두 그룹의 보고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전혀 다른 보고를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되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아담과 하와의 경우나 정탐꾼들의 경우나 두 가지 모두 똑같이 무엇을 볼 때 어떤 시각,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문제는 한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서 공동체 전체의 운명까지도 좌우하게 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민수기 32장 1~5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가운데 요단 강 동편, 곧 가나안 땅 접경지대에서 아랏 왕과 아모리 왕, 그리고 바산 왕과 미디안 왕을 물리침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모세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 족속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가나안 땅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있었을 텐데 이제 그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소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적은 수의 군인들이 미디안 족속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사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없이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은 애급의 고센 땅 라암셋을 출발하여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숱한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통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큰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여세를 몰아서 전열을 정비하고 나서 곧장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당인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외부적인 적 보다 내부적인 적이 더 무서운 법이며, 공동체 존립에 더 위협적인 요소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뜻밖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요구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과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모세가 예상치 못했던 이러한 내부적인 걸림돌을 지혜롭게 수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두 지파 반 사람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한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이기주의와 무사 안일주의는 공동체의 단합과 공동체의 번영된 미래를 위협하는 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나긴 광야 여정에 지쳐버린 나머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도,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요단강 동편의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도록 요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두 지파 반 사람들이 요단 강 동편 땅을 요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본문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결국 이들의 요구는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서 행동한 것으로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놓쳐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의 눈에 일시적으로 좋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아니라면 결국은 인간을 실망시키게 되며,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육신의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그 땅에서 큰 시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의 두 지파 반 사람들 역시 역대상 5장의 말씀을 보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고 앗수르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불신과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최후가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교훈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타인의 유익과 안전에는 유의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불신앙적인 처사이며 끝내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안목의 정욕에 빠져서 자기 욕심대로 보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질서를 도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을 깨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 주된 방법이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무사 안일주의적인 생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 모두는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서 세상적인 것만 바라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일을 이루어가는 일에 부름 받았음을 믿고 앞장서 헌신하고 충성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귀한 상급을 받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위하여
민수기 32:1~9 / 송기정 목사(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톨스토이는 “국가에 대한 사랑은 가정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국가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좀 안 될 얘기지만 국가가 망하면 가정도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있어야 교회도 있고 가정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3·1절 9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불행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국선열들은 그 불행했던 과거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희생적으로 투쟁했고 헌신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평화와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은 국토의 분단만이 아니라 사상과 이념, 체제와 계층 간의 갈등과 분열로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불행했던 과거를 반복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행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영광스런 미래를 전개해 나갈 것인지를 우리 모두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위하여 우리 각자가 취해야 할 국가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1. 이기적으로 수수방관하지 말고 앞장 서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광야생활 40년 만에 마침내 요단 동편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물이 풍족하고 목초지가 많아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어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요청은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들려집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라며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일단 요단 동편의 땅 곧 그들이 요구한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며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요단강을) 건너가라’(신3:18)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말고 앞장 서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요단강을 건너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뿐입니다. 형제들은 싸우러 가는데 좋은 땅을 먼저 분배 받고 앉아 있고자 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안일한 짓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지파들도 가축을 가지고 있었으며(민31:32~36),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이 목축지로 적합한 땅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땅을 먼저 자기들의 소유로 삼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 머물며 안주하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않고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하였던 것입니다.
민족 교육의 터전을 닦은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10세 때에 그를 키워 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조실부모한 고독한 상놈이라는 천한 신분과 극심한 가난이 전부였습니다. 고아로 자란 그는 정주에 있는 유기공장에 들어가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는 도가니 앞에서 유기를 만드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해내었습니다. 30대에 거부가 된 남강은 민족자본을 형성하여 물밀듯이 들어오는 매판자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 열변에 감동을 받아 ‘우리가 살아갈 길은 오직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나가는데 있다’라고 생각하여 민족 사학의 명문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불과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지만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교장으로 부임했으며, 주기철 목사님 등 수 많은 영적, 애국적 인물들이 오산학교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세 번에 걸쳐 모두 7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오산학교에 돌아온 남강의 연세는 60세였습니다. 그는 불타버린 교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다. 그러나 헌병들이 오산학교를 불지른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불씨가 남아 있으므로 학교를 다시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꺼지지 않는 불씨론’을 입버릇처럼 외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이미 독립선언서에 누구의 이름을 앞에 넣을까 왈가왈부할 때 모인 사람들에게 “이건 죽는 순서가 아닌가, 죽는 순서”라는 말을 던졌다고 합니다.
로마서 9:1~3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멘!
사도 바울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할 정도로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않고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주의와 안일주의를 탈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도 망하고 민족도 망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말고 앞장 서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함으로써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맞이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말고 앞장서서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해야 한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이미 심히 많은 가축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용맹스러운 르우벤은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장남이었습니다. 따라서 르우벤 지파의 자손은 그의 형제들에게 모든 면에 있어서 앞장 서서 솔선수범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있는 그의 형제들만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고 자기들은 건너가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지 않고 목축할 만한 땅을 바라보고 그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갖는 것이 모세에게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라며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로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던 비극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며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라”(신3:18)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말고 앞장 서서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지 요단 동편 땅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다른 지파들도 세속적인 번영에 관심과 욕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시선을 요단 동편 땅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않고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하였던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당시 우리 정동제일교회의 이필주 목사님과 박동완 전도사님이 크게 활약하신 것은 생각할수록 자랑스런 일입니다. 1919년 2월 27일 정동34번지, 곧 우리 교회 이필주 목사님의 목사관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며 기독교 측 민족대표 16분(감리교 9명, 장로교 7명)의 명단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 밤 회합에서 돌아온 이필주 목사님은 마지막 예배가 될지 모르는 예배를 가족들과 함께 드렸습니다. 그때 부른 찬송은 찬송가 610장입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이미 하나님과 교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목사님의 결연한 신앙심과 애국심은 3년간의 옥고를 치루는 동안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경찰 심문에 대한 목사님의 답변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심문 :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반에게 배포하였는가?
답변 : 그것은 동양의 평화를 주창하며 조선 자주독립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심문 :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변 :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2:24~26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시기리라” 아멘!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처럼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않고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주의와 번영주의를 탈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도 망하고 민족도 망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말고 앞장 서서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함으로써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맞이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IQ는 평균 108로 세계 1위이고, 유대인의 IQ는 평균 96으로 세계 26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는 유대인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월등하게 앞서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 못지않게 유대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최악의 수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요단강을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선봉이 되어 건너가라. 이는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말고 앞장 서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말고 앞장 서서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요단 동편 풍요로운 땅에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반복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말씀대로 순종하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쇠하는 비참했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적으로 수수방관 하지 말고 앞장 서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멸사봉공하며, 세속적으로 사리사욕 하지 말고 앞장서서 신앙양심적으로 경천애인 함으로써 민족의 단결과 약속된 미래를 맞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이스라엘을 낙심케 말라
민수기 32:1-9 / 배 혁 목사
신앙 생활을 하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내가 속해있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혼자 믿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신앙의 공동체, 교회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신앙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신앙공동체가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힘을 씁니다. 만약 공동체가 흔들리게 된다면 결국은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도 흔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내 개인의 신앙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신앙적으로 잘 설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고 견고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과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관심하는 것 중에 하나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믿음 공동체로서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과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공동체의 위기를 감지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낙심케 만드는 말이 이스라엘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도록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십니다.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도록 시킵니다. 그리고 모압과의 싸움에서 완승을 거두게 하십니다. 모압의 왕, 시혼과 옥은 강력한 왕이었는데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가나안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서 잔뜩 놀랐습니다. 이스라엘도 이 승리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자신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또 실패할까봐 염려하며 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위험을 감지한 것입니다.
그것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의 말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와서 자신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모압평지에 있는 목초지에 머무르고 싶다고 했을 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두 지파는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늘 가축을 먹일 목초지에 관심했고, 모압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그 땅에 목초지가 좋아서 그곳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과 갓 지파사람들이 모세를 찾아가 “요단 동편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이곳에서 우리를 짓고 양을 키우며 자녀를 위해서 집을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5절, 후반에 보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이 하는 말이 단순히 좋은 땅에 자신들이 머무르는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지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민수기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모세는 그 두지파의 말이 다른 지파를 낙심하게 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로 약 38년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처음으로 가나안 땅을 들어가려고 준비했던 때를 말합니다.
민수기 32: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가나안 땅을 들어가려고, 정탐꾼을 보냈는데,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 당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이 별볼일 없는 존재로 말했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낙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결국 낙심한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초창기에 이미 사람들을 낙심케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를 체험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공동체 전체에 영향력을 미침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실 10명의 정탐꾼의 믿음없는 말을 통해서 200만명이나 되는 많은 이들이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바로 앞에 있었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의 말 한마디는 다른 신앙인들과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침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신앙공동체안에 있을 때에, 어떤 말이 서로의 신앙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견고한 신앙공동체로 세워나가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해야 할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때로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의 유익만을 생각하다가 다른 이들을 낙심케 하기가 쉽습니다.
모세는 두 지파들이 와서 이야기 하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한 말이 다른 지파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주신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낙심하게 하다.’ 라는 뜻에는, ‘방해하다. 저지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두 지파의 말은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두지파가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다른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낙심하게 하고자 의도적으로 했던 말이 아닙니다.
사실 두지파의 관심은 자신들의 지파에만 관심했습니다. 좋은 목초지에서 가축들을 기르며, 좋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살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미 땅을 차지했으니,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했고, 다른 이들을 낙심케 하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말이 내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두 지파가 모세에게 자신들의 뜻을 말하기 전해 더욱 생각해야 했던 것은, 자신들의 말을 들을 다른 지파들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은 가나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작은 힘이라도 아쉬운 때인데, 두지파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다른 지파들은 낙심하고 사기가 떨어져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경험한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반역할 것이 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공동체 전체에 영향력을 끼칩니다. 때로 다른 이들을 낙심하게 만들때에 낙심이 공동체 안으로 퍼져서, 그 신앙의 공동체를 낙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지난 부흥회때에 오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전화를 잘 안받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 교회에서 사역하시면서 건축을 세번하셨는데, 건축을 할 때마다 부담을 느끼셔서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시기 전에 그분들은 목사님께 전화를 주셔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식사 한 번 하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십중팔구 교회를 떠나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 이후로 전화오는 것에 대해서 긴장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빈번하면,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도 힘이 빠지고 낙심하게 마련입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들입니다. 신앙적으로 서로 잘 성장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라고 맺어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낙심하게 하는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모세의 경고를 들은 갓, 르우벤지파는 그제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말이 이토록 심각한 일을 야기할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이제 이 두지파는 다른 지파들을 낙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할 방법을 모세에게 제시합니다.
르우벤과 갓지파는 모세에게 약속을 합니다. 자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다는 말을 취소하고, 자신들도 다른 지파와 같이 요단강을 건너가겠는데, 다른 지파들 앞에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앞장서서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의 기업을 받았으니, 서편의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갓과 르우벤 지파의 말을 듣고서 만족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허락합니다.
르우벤과 갓지파는 이제 더 이상 다른 형제를 낙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격려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미 땅을 얻었어도, 요단강을 건너가 이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갓과 르우벤 지파는, 자신들의 풍요와 편의를 위해서 형제를 낙심시킬 만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하나님과 형제를 위해서 싸우는, 격려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에 상대방을 격려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말을 들을 때에 격려가 됩니까?
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격려하실 때에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시면서 그를 격려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2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처럼, ‘우리가 우리를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은데, 그들이 보기에는 어떠하랴’ 라면서 낙심케 하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격려하며 믿음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강한 팔로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그리고 또 격려할 말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서로 함께 할 것을 말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좋은 땅을 차지했으니, 당신들이 할 일은 당신들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지파는 말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공동체이니, 내가 함께 돕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앞장 서겠습니다. 우리 힘을 합해서 주님을 뜻을 이루어 봅시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격려를 바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안에서도 자녀가 부부가, 부모가 우리의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나도 늘 당신곁에 있을테니 힘을 내세요”라는 말로 격려해야 합니다.
샘터안에서, 교회안에서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를 통해서 교회가 믿음안에서 굳건하게 서게 되고, 그것이 또한 각 성도들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 것은, 서로가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공동체로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한 격려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3.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가 견고하게 서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신앙의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낙심할 만한 상황을 만났을 때에도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낙심하게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만, 낙심케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악의가 없더라도, 상대방을 알지 못해서, 때로는 실수로 상대방을 낙심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낙심시킨다고 해서, 낙심하여 믿음을 잃어 버리게 되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지만, 결국 손해는 당사자의 몫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사람들을 낙심케 했지만, 그렇다고 정탐꾼들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케 된 모든 이들이 그 낙심의 결과로 광야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낙심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9절에서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한 일을 할때도 낙심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도 우리를 낙심케 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 주위의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낙심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우리를 낙심하게 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도 그렇게 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렇게 합니다. 때로는 내 스스로가 낙심하게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요즘 어떤 말을 듣거나 사람을 보고서, 환경으로 인해서 낙심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고 포기할까하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그럴 때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에 사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낙심된 일을 능히 이길 소망과 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낙심할 일이 생길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낙심을 이기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믿음의 공동체는 더욱 강건하게 세워져 나가는 법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터전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건강할 때의 우리의 믿음생활도 강건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 또한 흔들리고 연약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앙공동체가 든든히 서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낙심하는 말이 아니라,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는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그 내부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가나안 백성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낙심하게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공동체 전체가 낙심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믿음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낙심케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같아도, 다른 형제들과 연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일에 힘쓴다면 그 공동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로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 기초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낙심케 하는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살 때에 내 믿음도 살고, 공동체도 살아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을 모아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들이 낙심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낙심케 하는 세상적인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도 낙심케 하는 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앙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여, 주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서로를 믿음으로 격려하며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서로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공동체를 잘 세워감으로, 각자의 믿음으로 잘 성장하여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고 영광돌리는 성도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죄가 나를 만납니다
민 23:1-23 / 박조준 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지나 요단강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갓 지파 와 르우벤 반 지파가 모세에게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시는 대로 우리는 가축이 많은 지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 한 곳입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그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셨으 면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 갈 것 없이 요단강 이 편에 가축을 기를 만한 풀밭이 많이 있으니 우 리 두 지파는 여기에 그대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뭐라고 했어요? 너희 형제들은 가나안 복지 를 점령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가 싸우려 하는데 너희들은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겠다는 말 이냐? 너희가 너희 형제들과 같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다시 여기에 있기를 원한다면 허락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너희들만 여기에 있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해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낙심케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 느니라. 너희가 만일 무장을 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 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나 무죄하게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산업이 되겠지만 너희가 만 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 사람은 흔히 죄를 범한 다음에 그 죄를 숨기려 하고 잊어버리려고 합니다.그러나 우리가 범한 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여기 정녕 이란 말은 분명히, 확실히 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피할 수 없고, 숨길 수 없고 분명히 앞날에 그 죄와 만나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죄는 지은 다음에 덮어두면 그만인 줄 압니다. 다른 사람의 눈만 피하면 괜찮을 줄로 생각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가릴 수가 있습 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릴 수 있을는지 모르 지만 내 양심에게는 가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가 내 양심에서 나를 찾아내서 나와 만나게 합 니다. 잠언에 보면 죄 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 고 했습니다. 왜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도망합니까? 죄 지은 사람의 양심 속에서 죄가 그 사람을 쫓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 생명 과일을 먹으며 영생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일 이 명령을 어겨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찾아와서 하와를 유혹하는 바람에 하와가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된 다는 말을 듣자 그 열매가 그렇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같이 보여서 제 손으 로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고 나니까 죽을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남편 있는 여자가 죽을 생각만 하면 생각나는 게 남편입니다. 나 죽으면 우리 남편을 누가 돌봐 주나 하는 생각보다도 나 죽으 면 우리 남편이 누구와 또 재혼하지? 하는 생각만 하면 죽었다가도 살아나야 합니다. 하와가 자 기 혼자 죽기는 억울해서 남편인 아담에게도 먹게 했습니다. 죄는 혼자 짓는 것보다 같이 짓기 를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평안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싶고, 할 말도 많았는데 죄를 지은 다음에는 하나님 만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동 산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왜 숨었습니까? 그의 양심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적하기 전에, 양심이 나를 지적합니다. 양심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양심이 내가 지은 죄를 만나게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옛날 헬라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 입니다. 이비커스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 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 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는 이렇 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 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 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 라고 소 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나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 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속 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근대사를 보아도 우리 민족의 훌륭한 지도자였던 김구 선생님을 안두희가 암살했 습니다. 지시한 사람도 괴로웠겠지만 하수인으로 김구 선생님을 죽인 안두희도 평생을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가지 않았습니까? 양심이 날마다 그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부스럭 소리만 나도 깜짝 놀라곤 했다고 해요. 무서운 것이 있어서 그 래요. 전두환 씨 같은 분은 자기 성씨만 나와도 벌벌 떠는 생활을 했어요. 무서운 것이 있어서 그래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죄가 처음에는 사람의 생각을 무척 괴롭히지만 계속 죄를 지으면 그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를 양심 속에서 찾아 만날 길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 로 인해서 양심이 마비되어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지만 꼭 피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사람의 성품 속에서 죄가 그를 찾아 만납니다. 가령 사람이 한 번 죄를 짓는 것은 흰 수건을 더러운 물에 한 번 담그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 번 죄를 지으면 그만큼 그 성품이 더러워지고, 세 번 죄를 지으면 그만큼 그 성품이 부패해집니 다. 몰핀 주사를 한 번 맞는다고 중독이 되는 것은 꼭 아닙니다. 그런데 한 번 맞고, 두 번 맞 고, 세 번 맞고 하다가 결국 아편 중독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술도 한 잔 마시고, 두 잔 마 시고, 한 병 마시고, 두 병 마시고, 일차 마시고, 이차 마시고 하는 동안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 고 마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는 동안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마 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하루 아침에 은 30냥을 받고 자기 선생 예수님을 판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사 도 요한의 기록에 보면 저는 도적이라 맡긴 돈을 몰래 쓰더니 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님과 열두 제자를 위해서 회계의 직분을 맡아 가지고 그 가운데서 한 번 훔쳐 쓰고, 다시 훔쳐 쓰고 하면서 돈맛을 알게 되었고, 돈을 원하게 되었고, 돈을 사랑하게 되었고 돈 때문에 부패한 성품이 되어 결국은 자기의 선생님까지 팔아먹은 반역자 가룟 유다를 만들었습니다. 죄를 지으 면 그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죄는 부패한 그 사람의 성품 가운데 반드시 찾아 만나 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어떤 사람이 산에 갔다가 호랑이 새끼를 만났습니다. 새끼 니까 고양이와 비슷하고 귀엽기도 해서 집에 가져다가 길렀습니다. 고양이처럼 집에서 먹이고 길렀습니다. 말도 잘 듣고, 귀엽게 장난도 치고, 매달리기도 하고, 길이 잘 들었습니다. 어느덧 호랑이 새끼가 자라서 중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제법 커서 안으면 한아름 되고, 들면 무거운 정 도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사람이 낮에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졸았 습니다. 전에는 이 사람이 졸 때는 꼭 호랑이 새끼가 옆에 있으면서 손도 핥아 주고 발도 핥아 주곤 했습니다. 너무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 사람은 이 호랑이 새끼가 이만큼 길들었으니까 괜 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졸다가 갑자기 이상해서 놀라 깨어보니까 그 호랑이가 주인의 손을 깨물고 있었 습니다. 그 호랑이의 눈을 보니까 불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야수성이 나타나서 손목뿐만 아니라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옆에 총이 있어서 그 총으로 달려드는 호랑 이를 쏘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일을 하다가 왼손을 다쳐서 붕대로 감 았었는데, 이 호랑이가 그곳을 핥다가 붕대가 풀려지면서 상처의 딱지가 벗겨지고 그러면서 피 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호랑이가 피맛을 보고는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작은 호랑이 같아서 처음에는 별로 겁낼 것이 없습니다. 크게 상하는 것도 없고 잘 커 갑니다. 내가 마음대로 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 죄를 통해서 그 악한 성품 이 결국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 죄가 정녕 너를 찾아낼 줄 알라. 죄는 우리 사람의 성품에서만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당대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받은 후에 에서가 노하는 바람에 멀리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하지 않 았습니까? 하란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20년이나 지냈습니다. 그동안 야곱이 지은 죄를 다 잊어 버렸고, 에서도 지난날의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야곱은 그 동안 하란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재산도 많이 모아서 이제 고향에 가서 살아 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족과 재물을 다 거느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동생 야 곱이 돌아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400명을 거느리고 마중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 곱은 형이 마중 나온다는 것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얍복강을 건너지 못 하고 아내와 짐승들과 다른 모든 재산은 먼저 보내고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형이 오랜만에 반가워서 동생을 마중 나온다는데 왜 야곱이 그렇게 무서워했습니까? 야곱은 형 에서가 아니라 20년 전에 지은 자기의 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형들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죽 여버리려 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대상에게 돈 얼마를 받고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 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요 셉의 형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다 잊어 버렸습니다. 야곱도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알고 아픔 가슴을 부둥켜안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잊어버렸습니다. 13년이 지났습니다.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었는데 야곱이 아들들에게 저 애굽에 가면 곡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애굽에라도 가서 곡식을 좀 사오라 고 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으니까 애굽에라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갔다가 누구를 만났어 요? 동생 요셉을 만났습니다.
13년만에 만나는 동생입니다. 얼마나 반가워야 했습니까? 그러나 그 형들은 반가운 동생을 만난 것이 아니고, 13년 전에 지은 자기의 죄를 만난 것입니다. 13년 동안이나 잊고 있던 죄를 그때 만났습니다. 네 죄가 정녕 너를 찾아 낼 줄 알라. 우리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는 말이 있 습니다. 죄라는 것이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다가 꼭 이런 때 만납니다. 도둑놈도 도둑질해다가 잘 먹고 노는 그때에 꼭 잡힙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이 죄가 그냥 따라 다니다가 그 자신뿐만 아니고 자손 삼사대까 지 내려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너의 죄가 삼사대까지 이르겠다 고 했습 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유전법칙을 연구해서 어떻게 죄가 자손에게 미치는가를 과학적으로 증 명하고 있습니다. 또 유전법칙 이외에 직접 부모의 죄가 자손에게 가서 갚아지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합 왕의 경우를 보세요. 아합 왕이 이방여인 이세벨을 왕후로 삼고 나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모 함해서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죽을 때에 그가 흘린 피를 개가 핥아먹지 않았습니 까? 그뿐입니까? 그 자손 대에 가서 70명이나 되는 아들이 하루 아침에 학살을 당했습니다. 불 란서 역사 중에 제일 사치했던 왕이 루이 14세였는데 그가 자기 원수였던 황제의 무덤까지 파서 불사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일이 있은 지 꼭 100년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 왕의 무덤을 파서 그와 같이 불을 놓고 그 재를 공중에 날렸다는 것입니다. 네 죄가 정녕 너를 찾아 낼 줄 알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닙니다. 죄는 내세까지 우리를 찾아 가서 만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죄를 범했지만 세상에서는 그 형벌을 피했 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우 리가 새벽의 날개를 타고 저 바다 끝에 갈지라도 거기에 주님이 계시며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을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죄인의 피할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 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 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세상에 있을 때 너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눈처럼 귀한 것이라도 버리라. 한 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은 비유의 말입니다. 비유의 말이 이 렇게 무섭다면 실제 지옥은 얼마나 더 무섭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속지 맙시다. 하나님은 만 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만히 보면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 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 니다. 물론 세상의 일이 분명치 않은 것이 많습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분명히 모릅니다. 그러 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의 값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나를 찾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내 양심에서 만납니다. 내 부패한 성품에서 만납니다. 이 세상에서 내 당대에 아니면 내 자손 대에 만납니다. 아니면 저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에서 반드시 만나고야 맙니다. 성경은 이렇게 죄가 무섭다는 사실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죄가 무서우므 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는 도리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지은 죄가 나를 찾아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죄를 찾아서 회개하고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 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지은 죄가 나를 찾아 만날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내 죄가 나를 찾아서 만나기 전에 내 죄를 회개하고 온전히 죄사함을 받읍시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그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더러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1 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해도 절망하 지 맙시다. 탕자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두 팔 벌려 환영 해 주시고, 아들의 권리를 회복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생활을 통해서 여러 가지 신령한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 받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죄사함 받는 것이 왜 축복이 됩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있을 때에는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범한 사람 위에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변해서 긍휼과 자비가 됩니다. 죄 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담으로 막았었지만, 죄사함을 받게 되면 그 막혔던 담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 자신과도 바른 관계를 가집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에는 우리 양심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평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바싹바싹 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게 되면 양심의 고통이 없어지고,마음속에 안정이 오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죄사함 받은 사람의 장래에는 하나님의 축 복과 언약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생입 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는 길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이 은혜요, 예수님이 우 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길을 열어 주 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길에 들어와 순복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가 죄사함 받는 객관적인 조건이라면 우리의 주관적인 조건은 바로 회개입니다. 대 속이 아무리 사실이어도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이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가 없습니다. 이 뜻깊은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
민 32:6-27 / 류영모 목사
Ⅰ.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
어떤 사람이 산 길을 걷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예전에 곰을 만나 죽은 척 했더니 곰은 죽은 것을 안먹어 그냥 지나가더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납작 엎드려 죽은척 하고 있었지요. 곰이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이 곰은 맘씨가 너무 착한 곰이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않고 땅을 파고 이 사람을 묻어주었습니다.
누워있는 모습, 넘어져 있는 모습, 쓰러져 있는 모습,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화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복판을 달리며 정복하는 정복자들입니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분명한 자기 사명과 역할과 목적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공동체안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란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싸우지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민32:23)
싸움이란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요"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라웁게도 우리를 향하여 싸움터로 나아가라고 종용합니다. 짐을 보고 어깨를 내밀 줄 모르는 사람, 사명이요 주의 명령인 줄 알면서도 달려나갈 수 없는 사람, 공동체의 아픔을 보고도 뛰어들 줄 모르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차가 처음 교통수단으로 이용될 때에도 1등석, 2등석, 3등석이 있었답니다. 1등석은 언덕을 오르나 개울을 지나나 진흙탕으로 지나도 자리에 앉아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 2등석은 힘든길을 지날 때면 내려서 걸어야 합니다. 3등석은 개울창을 지날때마다, 진흙탕을 지날 때마다 내려 뒤에서 마차를 밀어야 했답니다.
천국행 마차에도 1등석 2등석 3등석이 있습니다. 1등석은 교회에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큼직한 모임이 있어도 제자리만 지키고 은혜만 받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2등석은 힘든 일이 있으면 내렸다 좋은일이 있으면 탔다 꾀를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3등석 교인은 힘든 짐은 어깨에 메고 교회가 진흙탕길에 빠지면 발을 걷어 부치고 땀흘려 밀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천국문에 들어섰을 때 주님이 1등 2등 3등석 앞으로 갓! 그럴것 같습니까? 아니요. 뒤로 돌아 앞으로 갓! 천국은 3등석 교인이 1등하는 곳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몇 등석에 앉아 계십니까?
오래전 상영된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운데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수많은 저항운동가들 가운데 별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사람이 붙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의 사형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이 사람은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나 벌고 가족들이나 먹여 살리던 소시민입니다.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그때 묶여 있던 젊은이가 이 사나이를 향하여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로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이다." 대단히 인상깊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죽게 해도 마땅한 죄과라는 것입니다. 그 무서운 전쟁터에서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위해서는 별의 별 일을 다했지만, 민족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이 사나이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 마땅한 이유라는 겁니다.
Ⅱ.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 민수기 32장의 기록은 열두 지파에게 땅이 분배되기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을 정복하고 보니 그곳은 풀이 많은 목초지대였습니다. 마침 가축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르우벤 지파 사람들과 갓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자신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울러 어느 한 두 지파에게 점령지를 먼저 나누어 주는 것도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과 갓 지파사람들이 모세를 찾아가 "요단 동편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이 곳에서 우리를 짓고 양을 키우며 자녀를 위해서 집을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단호히 거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너희 형제들은 지금 당장 또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 어떤 부족을 만나서 피를 흘릴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너희들만 이곳에서 편안하게, 안락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느냐? 너희들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단결을 깨고 전쟁중 사기를 저하시킬 뿐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악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세의 경고와 꾸짖음을 듣고 르우벤 사람들과 갓 지파 사람들은 반항하거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앞장서 싸움터로 나갈 것을 결심합니다. 물론 싸움이 끝난 나중에 요단 동편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배분이 되었지요. 여기까지가 대략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특별히 23절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Do not! 하지 말라!"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Do! 하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는 긍정적인 종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만족해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여긴 그 무엇이 없습니까?
르우벤 지파 사람처럼 분연히 일어나 영적인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갓 지파 사람들처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허울을 벗어버리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활동적이고 진보적이고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Ⅲ. "이같이 하지 아니하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는 죄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주민 가나안의 죄이거나 이방 족속 블레셋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선민 이스라엘의 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맏아들 르우벤 지파의 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기 세상 사람들의 죄, 하나님을 배신한 불신자들의 죄가 아니요. 하나님이 선택한 나의 죄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우리의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마땅히 동참해야 할 책임을 피해가고자 하는 죄악입니다. 오늘 교회안에 있는 신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할 때에,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책임을 회피할 때에 주님이 책망하는 바로 그 죄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 죄, 나라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고 민족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속물 크리스챤들이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사명을 보고 회피하고 소명을 듣고 귀를 막았던 죄입니다. "내가 싸우지 아니하면 이 험악한 전쟁터에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 함께 나누어지지 아니하면 역사의 아픈 고통을, 교회의 무거운 짐들은 누가 담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1.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 그것은 우선 나태와 방종의 죄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와 가축이 있습니다. 이 좋은 목초지는 우리 가족과 가축들에겐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냇가에서 돌을 주워다 집을 짓고 가축들의 우리를 짓고 여기서 살렵니다. 우리는 피흘리며 싸우는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바산왕 옥, 아모리왕 시혼과의 싸움으로 족합니다. 우리 르우벤 사람들은 싸우는 것보다 양치는 것이 좋고 우리 갓 지파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칼을 가는 것보다 가슴에 새끼 양을 안고 어린 양의 젖을 짜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자세였습니다. "나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선교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공동체가 어떻고 내가 고민하지 않는다 할찌라도 나는 내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도 힘에 벅찬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게으른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또 한편에서 "우리 집은 평안합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예수를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우리 집은 모든 식구들의 안락한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번창하고 있으며 자녀들은 모두 착한 우등생들입니다. 우리 식탁은 항상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평안하고 매일같이 잘 준비된 설교를 듣고 영혼이 배부른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저들의 고백의 전부입니다.
예. 좋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무장을 해제했고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봉사 생활에 나태하고 충성 생활에 방종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안일이요 쾌락의 추구입니다. 기름진 식탁과 침상엔 관심이 있으나 여호와의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는 일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는 받지만 교회안에서, 밖에서, 셀목장이나 공동체안에서 사역터나 싸움터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으름 -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죄, 이는 크리스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가장 잘못된 죄라는 것이 본문의 지적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나만이 편히 쉬겠다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2. 르우벤과 갓지파의 태도는 형제애가 결여된 이기주의적 탐심입니다.
요단 저쪽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는데 요단 이쪽에서는 안락침대에 누워 편히 쉬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은 헐벗은 몸으로 싸우고 있는데 자신들은 가축이나 돌보고 창고나 짓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라는 사람의 책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한 중년 남자의 집에 갑자기 불이 나갔습니다. 그는 촛불을 켜기 위해 양초를 모아둔 창고로 들어가서 양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양초 한 자루를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양초가 말을 합니다. "주인님, 나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빛을 밝힐 수 있는지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빛나는 불을 밝힐 수 있는지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그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밝히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상하다 양초가 말을 하네."
옆에 있는 양초에 손을 뻗치자 "주인님 나는 내가 불을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내가 불을 밝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을 깊이 묵상하는 중입니다. 아직 묵상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묵상에서 깨어날 때까지 내 몸에 불을 밝히는 것을 연기하면 안되겠습니까?" "어~ 양초가 말을 하네."
문득 옆에 나란히 서 있는 4개의 양초를 발견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의 양초를 가지고 나가려 했더니 4개의 양초가 함께 소리를 지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른 초들이 훨훨 탈때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중창연습 화음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작은 나의 빛 비취게 할테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양초도 불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불 밝힐 양초가 없다고 투덜거리며 나왔습니다.
그의 아내가 왜 초를 가지고 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아내는 화를 내면서 "무슨 그런 양초들이 있죠. 도대체 당신은 그 양초를 어디서 사왔길래 그래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양초들은 건너 마을 문을 닫은 교회에서 사왔다는 겁니다. '아 그랬구나!' 그제서야 그 양초들이 왜 그러는지를 알았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은 세상의 빛된 우리가 이둔 세상을 비춰주길 기대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은 나를 태우길 원하십니다. 나를 태우면 나도 살고 너도 살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하여 손을 내밀면 너도 살고 나도 삽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몸을 던질 때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살릴 수 있지마는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나 혼자만 살아야 겠다는 이기적인 탐심으로 살아가게 될 때 공동체는 물론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서 우리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나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받은 은혜에 대한 배신의 행위라는 사실을 성경은 똑똑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잘 것 없는 나 하나 구원하기 위해 삼위 일체 하나님이 총동원되었습니다. 열두 사도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칼에 찔려 죽었고, 불에 타 죽었고, 맹수에 찢기어 죽었습니다. 이 땅에서도 일찍이 저기 새남터에선 수많은 성도가 순교를 당했고, 토마스 선교사님은 도끼에 맞아 강변에 피를 토하며 죽어 갔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저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한 채 고통스런 죽음을 달게 받았습니다. 저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세상 것을 흔쾌히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내 주변에 있었으며 나 하나를 위한 땀방울이 얼마였으며 내게 복음이 전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핏방울이 내 밑에 고여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까?
성자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저도 어릴 때 잠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시골 교회 마루바닥을 적신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기에 나는 주님 앞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 여전도사님의 40년 세월 애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나는 목사가 될 수 있었으며 헌신적인 시골 교회 학교 교사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피묻은 복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에 크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교회는 어머니가 되어 우리에게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한 거룩한 전쟁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배신입니다.
주어진 일을 소홀히 다루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십시오. 주님의 피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여러분의 희생 없이는 자랄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으며 역사를 감당하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요.
4.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 - 그것은 곧 소명에 대한 배신입니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슴에 빨대를 들이 대고 꿀을 빠는 것일 수 만은 없습니다. 교회 생활이 무엇입니까? 나의 행복이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 잠시 잠시 들리는 백화점 같은 곳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곧 사역이다. 일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곧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자들이 가나안 땅 -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흔쾌히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들의 몫이다!
「직업과 소명」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막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의 얘기가 서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소신과 말을 빌리면 "직업은 수단이요 소명은 인생의 목적이요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것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명을 감당하도록 주신 기회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신앙생활 - 교회의 직분은 본업이요, 세상의 직업은 부업이라는 것입니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그가 출석하는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교사의 일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은퇴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전세계 평화와 연약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의 직무와 하나님의 소명 즉 작게는 주일학교 교사의 직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하나님의 소명, 주일 학교 교사의 직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에서 사장쯤 되면 교회 일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 세상에서 조금 유명인사가 되고 바빠지다 보면 하나님의 일 교회의 사역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커다란 도전을 주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얼마나 큰 위인의 모습입니까?
신앙생활은 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찾아 감당하는 것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소명에 대한 배신이요 죄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달이면 창립 13주년을 맞게 됩니다. 그 동안 참으로 벅찬 행진을 계속해 왔었고 하나님께서 순간 순간 가슴 벅차도록 이 교회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개척 초기는 물론 눈에 보이는 지금 이 예배당이 있기까지 돌이켜 보면 땅을 사고, 건축을 하고, 그 안에 많은 성물, 비품들을 들여다 놓고 누군가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큰 돈, 목돈을 낸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벌이나 큰 교회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온 교인들이 힘에 지나도록 헌신을 다해왔고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방학내내 아르바이트한 돈을 내어놓은 젊은이가 있었는가 하면, 교회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노모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보상금을 아낌없이 주의 전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6.25때 순국하고 평생 모은 연금으로 자식들 위해서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는데 그 아파트에 이사 한 번 해보지 아니하고 그 아파트를 팔아서 주의 성전에 내어 놓은 권사님도 계십니다. 여성들이 계란 줄을, 무거운 쌀가마를 어깨에 걸머쥐고, 미역 다발을 두손에 들고 아파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장사하여 한 푼 두 푼을 모았습니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종아리가 붓기까지 이발하고 가위질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장사하고 사업해서 돈이 모아 질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줄 알고 주님 전에 기쁨으로 내어놓는 집사님도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코 묻은 돈으로부터 몇 년 동안 입어보지 못하고 남들이 먹는 기름진 음식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절약하고 헌신해서 오늘의 교회를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교우들은 금반지 금부치를 집에 두지 아니하고 모두 성전에 드렸습니다. 그 희생의 피 위에 오늘의 교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 생애 마지막, 한소망교회 역사상 어쩌면 마지막이 될 「한소망 비전 센타」건축을 우리는 설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밤 설계업체 선정을 위한 설명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건축은 사람을 찾아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건축에 앞서 「한비가 축제」- 한소망 비전센타 가족찾기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의 가족 태신자 즉 VIP를 작정하는 날입니다. 회피할 수 없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왜 VIP?
한사람도 예외없이 가슴마다 주님의 심장속에 우리가 들어있었듯이 우리속의 내일의 가족을 품고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우리는 VIP라 부릅니다. 내 생애 최고 고객들, 내가 많은 기도를 해야되지만 급박한 기도가 내게 있지만 엎드릴 때마다 그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그래서 VIP입니다. 내게 시간이 있다면 최우선순위로 그들을 위해서 내어놓겠습니다. 간식을 즐기고 외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에 그들과 함께 이 간식을 즐기겠습니다. 내 인생의 최우선순위를 그들에게 부여하겠다. 이것이 VIP입니다. 많이 품으십시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3명에 집중하십시오. 창립주일 그 카드를 올려드리고 금년이 다 가기전에 이들과 더불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겠습니다.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본문 민수기 32장 6절입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23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싸움터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라"
5. 특히 7절에 의하면 싸움을 회피한 르우벤과 갓 지파의 안일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중대한 피해와 실망을 던져 주었습니다.
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전염이 되어져서 온 이스라엘을 낙심케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낙심케 한다 - 어떤 사건을 연상케 해주는 메시지 아닙니까? 모세는 일찌기 가나안에 정탐갔던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신앙이 없는 열명 정탐꾼의 보고는 이스라엘을 낙심케 했고,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모든 장정이 광야에서 멸망받고 40년간이나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던 무서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형제를 낙심케 하지 말라. 가족의 뜨거운 신앙에 제동을 걸지 말라.
친구의 열심을 비웃지 말라. 교회의 활동에 찬물을 붓지 말라.
낙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되어라. 타오르는 불길에 기도의 기름을 붓는 사람이 되어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며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이다. 합심해서 짐을 나누어 지라. 가나안은 합심해야 얻을 수 있는 땅이다." 이것이 모세가 외쳤던 외침이었습니다.
Ⅳ. 정복의 야성을 회복하라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잃은 야성을 회복해야 할때입니다. 도시를 정복하는 정복자의 야성, 잃은 하나님의 가족을 찾아오는 하나님 나라 군사로서의 야성말입니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가면 사나운 맹수 호랑이, 사자들이 널려 있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으르렁 거리는 법도 없습니다. 왜 이토록 온순한가? 공원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이 맹수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처음 이것들이 공원에 들어왔을 때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사냥을 즐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먹이감을 - 염소나 돼지들을 이곳 저곳 풀어 놓았더니 언제나 배가 불러 있어 사냥을 포기 하더랍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결국 맹수의 야성을 잃어버린 순한 양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한국교회,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불신자 전도를 포기한 교회, 천국 가족 찾기를 포기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동성장을 교회 성장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한국교회 기존신자들이 늘 자리를 채워 도전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사자처럼 포효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야성을 우리는 되찾아야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심장에 불이 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외치던 사도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내 민족을 구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울부짖던 저 전도자들의 열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선배 신앙인들의 전도적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류관순 여사는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친구들에게 "얘들아 기차소리가 어떻게 들리니?" "칙칙폭폭~" 그렇게 들린다고 하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내 귀에는「대한 독립 만세!」「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기 들려오는 세상 영혼들의 비명 소리가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십니까? 그의 피값을 나의 손에서 찾겠다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독사의 입으로 빨려들어가는 개구리의 비명처럼 지옥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의 몸부림이 여러분의 눈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이 위대한 명령을 경청하십시요.
나아가 싸우라! 나아가 정복하라! 내 백성을 구원하라!
모든 족속을 내 제자로 삼으라!
「나가 싸우라」는 모세의 명을 따라 기쁨으로 순종했던 루우벤과 갓 지파는 그들의 소원대로 요단 동편을 분배받게 됩니다. 이 땅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워싱턴 주 타코마시에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토마스 주남 여사가 쓴 최근의 베스트 셀러 Heaven is so real!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1996년 1월 성령의 임재와 함께 천국을 다녀온 그는 그의 신앙과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열일곱번이나 천국에 이끌려 천국과 지옥을 모두 보고온 그는 본대로 느낀대로 기록하고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책을 썼습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한번 책을 손에 잡으면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긴장과 감동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책입니다. 이 땅에서 나태와 형식적인 신앙생활,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받는 것만 좋아하던 사람들이 천국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천국에서 가장 영광스런 구원이 이 땅에서 영혼을 살려내려는 구원의 열정을 가슴에 끌어안고 전도하고 교회를 섬긴 사람임을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도보다 더 큰 사랑도 없고, 전도보다 더 큰 상급도 없습니다. 전도보다 더 큰 면류관도, 전도보다 더 큰 영광스런 구원도 없습니다. 널부러져 있는 우리의 모습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 나가 정복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파트를 마을을 내게 주신 것은 거기서 밥 먹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아파트를 마을을 정복해라. 내게 직장을 주신 것은 직장에서 우리 식구 세 식구 밥 먹고 살게함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교사가 되어서 많은 젊은이들과 어린영혼들과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학원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거룩한 주님의 명령, 선교적인 사명이 내게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소망 비전 센타가 세워지는 것은 우리 안락이나 편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거대한 영적인 바람이 이 북부 땅을 가로질러 저 북녘땅을 태우고 실크로드와 예루살렘 땅끝까지 위대한 성령의 바람이 위대한 부흥의 계절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소망 비전 센타 거기에 동참하게 될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전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열정을 이 시간에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몸부림하며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마다 찍기를 하나님은 어쩌면 서슴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도끼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가 거름을 주겠습니다. 울며 가꾸겠습니다.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내 민족을 내게 주시옵소서. 넘어져 있는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북녘땅을 품겠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이 위대한 성령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이 땅에서 이 교회 한복판에서 내 심장속에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장에 불을 던져서 그 불덩어리로 이 민족, 이 땅을 태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쓰실 줄로 믿습니다.
잘못 같지 않은 잘못
민 32:6-7 / 김우영 목사
이스라엘은 가난안을 향한 여정에서 요단 동편의 아모리, 바산, 미디안을 차례로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요단 동편의 길르앗을 기업으로 달라고 청원합니다. 까닭은 두 지파가 어느 지파 보다 가축들이 많았고, 그 곳은 가축 사육에 매우 유리한 초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22)”,길르앗이 비옥한 땅임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가축이 심히 많은 두 지파가 가축을 사육하기에 좋은 땅을 요구함은 당연합니다. 잘못 됨이 없습니다. 허나 두 지파의 청원을 들은 모세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모세가 그들을 꾸짖었을까요? 그들의 요구에는 당연한 것 같으나 당연치 않은, 잘못같지 않은 잘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 안일주의 청원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곳 저곳을 정복은 했으나 계속 전진,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 그들을 궤멸, 정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정복’ 이라는 목적 때문에 피흘려 싸워야 할 희생의 삶이 남아 있었습니다. 헌데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타 지파의 희생은 아랑곳 아니하고 자기들만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려는 이기적인 안일을 택하려고 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사는 것은 분명 복이요,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이 아닙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가축이 많아지고, 비옥한 땅에 이르른 것은 문제가 없는, 복된 것입니다. 허나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다른 지파는 희생을 각오하고 가나안을 정복코자 싸우러 가는데 자기네들만 남아서 안일하게, 편안하게, 살고자 함은 확실히 잘못됨이요, 철저한 이기주의입니다. 삶이 잘 됨은 복을 받음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은 후에 생이 잘못 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1차적 복에서 안주하고자 하고, 이에서 잘못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천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할때 반공포로 충신 교인이 있었는데 생활이 막막했습니다. 해서 저도 어려운 가운데서 양계장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양계가 아주 잘 되었고, 확장되었으며, 물질의 부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주일을 범했습니다. 이유는 “양계 때문에 너무 바빠서”-.
성경, 신구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선, 예수님께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하셨지 “너 혼자만 평안히 잘 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기적 안일주의 자들은 눈앞의 풍요를 보면 하나님께 향하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돌려 버립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돌려도,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곧 월드컵 대회가 개막됩니다. 헌데 월드컵 대회를 인질로 집단 이기주의가 발로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월드컵 대회를 이용, 데모, 파업을 함은 국가적 망신이요, 수치입니다. 국가 위상을 추락시킴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늘로서의 만족이나 안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까지의 미래지향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소유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소망으로서의 소유입니다. 기독교는 나만의 안일을 추구하고 이기적 안일에 둥지를 트는 생이 아닙니다.
둘째 : 모세의 책망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길르앗 땅을 분배해 달라고 청원함에 모세는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까닭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 자신들만 편안하려는 안일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6절)”, ‘앉았고자’라는 히브리어 ‘테쉐부’는 ‘거하다’ ‘남아있다’ 라는 ‘야솨부’에서 유래된 말로서 본절은 “너희만 아예 자리를 잡고 아정되게 살려고 하느냐” 라는 질책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케 하여서(7절)”, ‘낙심케하여서’라는 히브리어‘테니우운’은 ‘거부하다’ ‘방해하다’라는 ‘누’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느냐(7절)”,본 절은 10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가 이스라엘 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케 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상기 시킴입니다. 어떤 집단, 단체 속에는 꼭 사기를 저하시키고, 맥 빠지게 하며, 망치도록 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초치는 ‘국민’, 초치는 ‘내’가 아니라 힘을 합하고, 일을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방해꾼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승리는 합력이요, 협력이며, 희생입니다. 인간에는 늘 밝고 화창한 소망, 용기, 빛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자가 있고, 개였다 흐렸다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전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명령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현재에 안주하려는 두 지파는 공동체에 먹구름을 덮은 무리요, 하나님께 범죄한 집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은 현실과의 타협, 안주가 아닌, 전진, 도전, 희생, 모험, 정복입니다. 하와이에 스미스라는 사람이 1971년 70세 때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회복은 되었으나 남의 부축을 받아야만 겨우 걸을 수 있었답니다. 그의 방은 아름다운 하와이카이 산이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도 누워 그 산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산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우면 산기슭 하이웨이를 달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죽기전 “마지막 헌신이다 십자가를 세우자”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산은 낮은 산이었지만 가파른 언덕이었답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날마다 조금씩 언덕을 깎아 계단을 만들었고, 1974년 8월1일, 3년만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헌데 언제 완치 되었는지도 모르게 몸이 완치되었고, 몇세까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15년이 지난 후인 1986년, 85세에도 건강하게 살고있었다고 합니다. “저 산에 세운 십자가는 불행에 대한 나의 도전의 상징입니다.” 스미스의 말입니다. 사단은 나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안일주의 삶을 택하게 하고, 하나님 책망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믿음은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는 능력이요, 고통에 대한 도전이며, 고통을 뚫고 나아가는 힘입니다.
셋째 : 안일주의 결과
루우벤, 갓지파는 결국 길르앗을 분깃으로 분배 받았고, 한 동안은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주변 국가들로부터 많은 고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해서 두 지파는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길르앗은 지역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까닭에 주변 국가들의 침공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의 계속이었습니다(삼하2장).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인의 안목으로 결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곧 후회가 뒤 따릅니다. 자기가 택한 안일은 참 안일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일만이 진정한 안일을 소유케 하고 참안식을 누리게 합니다. 사단은 여기 저기에 이기적 안일의 덫, 잘못같지 않은 잘못의 올무를 수없이 놓아 둡니다. 까닭은 사단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기독교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이 덫에 놓는 먹이는 잡고자 하는 짐승이 싫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좋아하는 것이랍니다. 기독교인이 제일 범하기 쉬운 죄는 잘못같지 않는 잘못을 저지름입니다. 롯과 룻, 롯은 눈에 뻔히 보이는 기름진 땅을 택했건만 부끄러운 불행의 인생애 된 자요. 룻은 눈에 환히 보이는 가난, 고생을 택했지만 행복한 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것 같으나 당연치 않은 것, 잘못 같지 않은 잘못의 죄를 짓는 우를 범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악’을 선택함입니다. 이기적 안일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됨이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 경외요 이타주의 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배제된 내눈 앞의 기름짐은 나를 자승자박케 하는 사단의 올가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인들이 좋아하고 택하는 환경, 풍요를 거절할 수 있는 바보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사람의 인생은 모험이요 도전이나 ‘승리’라는 결과가 나와있는 모험이며 도전입니다. 현재의 편안한 상황, 안일한 환경의 안주는 기쁨의 내일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주어진 복된 기업입니다. 그러나 도전하고, 모험을 해야만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 나를 만듭니다. 내 선택이 내 결과의 원인입니다. 이기적 안일주의 선택은 미래에 내게 올 행복을 흩어버림입니다. 이기적 안일주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안일과 평안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나의 이기적 생각 때문에 나와 내 자손에게 와질 견고하고 영구한 귀한 복을 떨쳐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왕이 꿈을 꾸었답니다. 헌데 자기가 잘아는 한 사제는 지옥에 있고, 자기 잘 아는 한 왕은 천국에 있더랍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의아해 하고 있는데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제는 왕들과 타협했기에 지옥에 갔고, 왕은 사제들을 존경했기에 천국에 간 것이다” 인생여정에서 ‘잘못같지 않은 잘못’의 올무를 순간, 순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께 지혜로운 분별력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 복된 새로운 영역을 소유하기 위해선 성령께서 나의 도전, 모험, 희생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