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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스크랩)모음 스크랩 8/8일 금요일 저녁 이야기가 있는곳 걷기(낙성대,강감찬장군이야기)
김항섭 추천 1 조회 61 14.08.09 06:3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8/8일 금요일 저녁 6시 낙성대로 출발하였다.

원래 사당역에서 시작할려고 했으나, 많이 다니던 곳이라, 호압사에서 석수역까지 더 걷기로 했다.

코스는 낙성대역~낙성대~서울대 규장각~관악산입구~둘례길~삼성성지~호압사~석수역

소요시간은 약 3시간 정도.

이야기 :

1.낙성대 강감찬장군 이야기

2.정조대왕의 규장각이야기

3.삼성성지 이야기

4.호압사 이야기

4개의 이야기가 있으나, 오늘은 강감찬장군의 이야기만 찾아보자.

 

강감찬장군 동상앞에서 기념으로 찰깍, 중국인 꼬마에게 부탁해서, 처음에는 꼬마둘이 가길래 당연히 우리나라 꼬마들인줄 알고 한국말로 이동상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중국말로 한국말 잘 모르다고 하니, 중국말로 호구조사 좀하고 동상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강참찬장군의 귀주대첩 : 역사스페셜

http://www.youtube.com/watch?v=iwoQE2pNZMM&list=PLBAED6B48517DE758

 

 

위인전을 읽었다면 유치원생도 들어봤을 이름이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감찬장군은 모시고 있는 사당은 6시 이후라 문은 닫혔다.

그러나, 일년에 2번은 재사를 지낸다고 하니, 재사 지낼때 한번 와야겠다.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강감찬의 탄생 신화가 서려있는 관악산 정상.
<출처 : Wolfgang Schaefer at ko.wikipedia.com>

 

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강감찬이 태어난 서울 낙성대공원에 있는 동상. <출처 : Sasha Friedman at ko.wikipedia.com>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계속되는 거란의 침입으로 궁지에 몰린 고려,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하였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구국영웅 강감찬의 이름을 딴 강감찬 호.

귀주, 바람의 방향이 바뀌다

결국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신화가 된 장군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이 남긴 오언절구의 한시 필적(초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5_001_000_0109)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

 

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양규와 강감찬 : 한국사 천자문

마흔세 번째 이야기_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거란을 물리치다

楊規七勝 邯贊州捷(양규칠승 감찬주첩)
양규의 일곱 번의 승리와, 강감찬의 귀주대첩이다.

거란의 제2차 침략 - '7전 7승'의 명장, 양규

제6대 임금인 성종(成宗) 때 1차 침략한 거란(契丹 : 요나라)은, 제8대 현종(顯宗) 시대에 들어와 2차와 3차에 걸쳐 대규모 침략을 자행합니다.

거란은 제1차 침략에서 화친조약을 맺은 후에도, 서희(徐熙)가 개척한 강동6주(江東六州)를 되찾고, 고려와 송(宋)나라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고려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제7대 목종(穆宗)의 모후(母后)인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와 권신 김치양(金致陽)은 불륜관계를 통해 얻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에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있던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시키는 한편 현종(顯宗)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거란은 이 '강조(康兆) 사건'을 빌미 삼아, 그의 반역죄를 묻겠다면서 대군(大軍)을 몰아 고려를 침략합니다. 특히 당시 거란은 임금이 직접 40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먼저 강동6주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장군 양규(楊規)가 완강하게 버티자 방향을 바꾸어 통주(通州)로 진격해, 그곳에서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강조를 살해하고 고려의 주력부대를 깨뜨린 거란은 곽주(郭州)와 서경(西京)을 거쳐 수도인 개경(開京)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때 현종은 남해안의 나주(羅州)까지 피난 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고려군과 치른 격전 때문에 병사들이 몹시 지쳐 있었고, 또한 수도 개경을 함락하기 위해 서두르는 바람에 자신들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고려군을 미처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은 현종이 친히 거란을 찾아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조건을 내세워 화친(和親)을 맺고, 군대를 서서히 북쪽으로 퇴각시켰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고려 복병을 만나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때 거란군을 상대로 '7전7승'의 대승을 거둔 사람이 바로 양규(楊規)입니다. 그는 김숙흥(金淑興)과 보량(保良)이 거란군 1만여 명을 공격해 죽이는 사이에, 무로대(無老代)의 거란군을 불시에 습격해 2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해냈습니다.

또한 이수(梨樹)에서 거란군과 격전을 치러 석령(石嶺)까지 쫓은 다음, 적병 2천 5백여 명을 죽이고 고려군 포로 1천여 명을 빼앗아 왔습니다. 3일 후 다시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적병 1천여 명을 죽이고, 고려군과 백성 1천여 명을 구했습니다. 이 날 싸움에서 양규는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습니다. 그리고 양규와 김숙흥(金淑興)은 퇴각하는 거란군의 선봉을 애전(艾田)에서 기습 공격해 1천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거란 임금이 지휘하는 대군(大軍)이 순식간에 밀어닥치자, 양규가 지휘한 고려군은 전멸을 당하고 맙니다. 양규 자신도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거란은 양규와 김숙흥을 비롯한 여러 고려 장수들의 강력한 반격에 시달린 데다, 장마까지 겹쳐 더 이상 고려에 주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재빨리 압록강을 건너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거란군이 물러가자, 고려는 빼앗긴 여러 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거란은 수도 개경까지 함락했지만, 양규를 비롯한 고려 장수와 병사들의 게릴라식 공격에 시달리다 결국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양규(楊規)'에서는, 당시 양규가 거둔 전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規以孤軍 旬月閒 凡七戰 斬級甚衆 奪被虜人三萬餘口 獲駝馬器械 不可勝數
양규(楊規)는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한 달 동안 일곱 번을 싸워 무수히 많은 적군을 베어 죽이고, 포로가 된 고려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아 데려왔다. 낙타와 말과 기계 등을 노획했는데, 그 수가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 『고려사』 「열전」 '양규'

거란의 제3차 침략 - 고려·거란 전쟁 최고의 영웅, 강감찬

거란군이 고려에서 물러가자, 현종은 다시 수도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전후 수습에 온 힘을 쏟는 한편으로 군사력 정비와 피해 복구의 시간을 벌기 위해 거란(요나라)과의 화해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제2차 침략 때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운 '현종의 친조(親朝)'와 '강동6주(江東六州)의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고려 조정을 압박했습니다. 또한 거란은 강동6주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과 침략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현종의 친조(親朝)나 강동6주의 반환 요구 중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요나라의 임금은 제1차 침략 때 거란군을 총지휘한 소배압(蕭排押 : 소손녕)에게 10만 대군을 몰아, 또다시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1~2차 침략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고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략에 맞서기 위해 고려는 20여만 명의 대군(大軍)을 갖추고,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 : 총사령관)로 삼아 출병시켰습니다.

거란군과 고려군의 1차 전투는 강동6주의 최북단에 위치한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습니다. 거란군은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합니다. 흥화진에서 패배한 거란군은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 대군의 눈을 피해 개경을 급습하는 작전을 계획합니다. 이 계획은 개경을 점령하고 현종을 사로잡아 기선을 제압한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에 거란군의 일부가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뒤를 쫓은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에게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또한 조원(趙元)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마탄(馬灘)에서 거란군 1만여 명을 죽이고 크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소배압(蕭排押 : 소손녕)은 다음해 정월, 주력부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불과 1백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신은현(新恩縣)까지 침입합니다. 당시 현종은 '청야 전술(淸野戰術)'로 적을 맞았습니다. 청야 전술이란 백성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적군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 등 온갖 물건들을 전부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개경 함락이 어렵다고 생각한 소배압은 기만책을 쓰기로 하고, 부하인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 군대를 철회하겠다고 통고하는 한편으로 비밀리에 기병척후대 3백여 명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 1백여 명이 밤을 이용한 기습작전으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또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주력부대가 자신의 후방을 공격하며 압박해오자, 전세(戰勢)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배압은 급하게 군사를 돌려 퇴각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강감찬은 후퇴하는 소배압을 총공격할 수 있는 최적지로 귀주(龜州)를 선택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지대에 고려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피로에 지친 거란군을 3면에서 일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당시 강감찬이 거둔 승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강감찬(姜邯贊)'에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我軍勝勢奮擊 勇氣自倍 契丹兵奔北 我軍追擊之 涉石川 至于盤嶺 ?尸蔽野 ?獲人口馬駝甲胄兵仗 不可勝數 生還者 僅數千人 契丹之敗 未有如此之甚
우리 군사가 승세(勝勢)를 몰아 맹렬히 공격했다. 용기(勇氣)가 스스로 배가(倍加)되었다. 거란의 병사들은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우리 군사가 추격(追擊)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는데, 적군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고 포로로 잡은 인원과 뺏은 말과 낙타·갑옷·투구·병장기 등이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불과 수 천여 명이었다. 거란(契丹)이 지금까지 이토록 무참한 패배를 당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 『고려사』 「열전」 '강감찬'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거란 임금은 분노에 떨며 소배압에게 사람을 보내,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 패배를 당했다"면서 "얼굴 가죽을 벗긴 후 죽이겠다"는 위협을 가했다고 합니다. 거란의 고려에 대한 침략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어 버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강감찬의 '귀주대첩(龜州大捷)'입니다. 이로써 강감찬은 '고려·거란 30년 전쟁(서기 993년~1019년)'의 최고 영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강감찬장군의 늠늠한 초상화, 예전에 찍어놓은것이 있네요.

낙성대에서 서울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과학전시관도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가는 곳, 서울대 정문

여기에 오가는 인재들이 우리국가를 짊어지고갈 젊은이들이다, 하나같이 똑똑해보인다.

 

정문에 조금 올라가면 규장각이 떡 버티고 있다. 세종대왕의 집현전, 정조대왕의 규장각 인재를 키우던 곳, 서울대학 안에 규장각이 있는게 당연한듯 싶다.

 

http://blog.daum.net/spaceandtime/3259

정조의 규장각이야기는 여기 참조

 

 

서울대 전경을 내려다 보면서, 정조대왕과 정약용선생을 생각하면서 막걸리 한잔하고...

 

석양이 아름다운데, 나무에 가려서 사진이 영 시원찮네요...

매주 수요일 야등코스를 옆으로 하고, 둘례길로...

석양을 바라보며, 걷는다

장승들도 환영을 하고...

솟대 이야기도 다시 읽어보고...

 

호압사 도착하니, 해는 지고 어둠이 깔려, 등산로 주변은 어두운데, 여기만 가로등으로 밝으니...

http://blog.daum.net/spaceandtime/2121

호압사와 삼성성지 이야기는 여기 참조.

둥근달이 삼성산 위에 밝게 비추고 있는데, 사진이 없어서 대신하고...

밝은 달을 구경하며,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걷으니, 어느새 석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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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09 14:16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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