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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 마사오는 규슈치과대학교 2년 선배인 학회원 쓰네미쓰 요시히코와 '어떻게 하면
치과 의사가 없는 곳이 없도록 할까'에 관해서 대화한 적이 있었다.
"국가 제도를 바꾸어 치과 의사가 없는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해야 한다"는
산가의 의견에 쓰네미쓰는 이렇게 말했다. "제도를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거야. 가기 싫어하는 사람을 강제로 변두리 지역으로 보낸다 해도, 현지 사람들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의료가 가능할까. 의사가 그 일에서 큰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이라고 자각해, 진심으로 몰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아닐까. 다시 말해
의사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해결은 없어. 좀 더 말하면 제도 개혁만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이야. 예를 들면 현대는 주권재민으로 신분제도는
없어졌어. 하지만 정말로 모두 평등한가 하면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여러가지
차별이 있잖아. 또 만연하는 공해는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 본질적인 요인은
인간의 욕망에 있어. 더욱이 인간불신과 소외감, 고독감이라는 고뇌는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잖아. 정치도, 경제도, 산업도, 교육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야.
따라서 무엇을 개혁한다 해도 근본은 모든 창조의 주체자인 인간 스스로가 변혁되어야 해.
니치렌대성인불법이 그 인간혁명의 길을 가르치고 있고, 창가학회가 그것을 민중운동으로
전개해왔어."
산가도 인간혁명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가학회는 싫었다.
산가의 아버지는 니가타에서 포목점을 경영했는데 아버지의 고향 집은 타종파의 절
이었다. 산가도 그런 아버지에게서 "학회는 단가(檀家)를 빼앗는 어처구니 없는
종교다!"라는 말을 듣고 자라 어느새 그렇게 믿고 있었다.
편견은 인식하지 않고 평가하는 일이다.
그 편견과 싸우는 것이 불법대화다.
산가는 창가학회에 관해 자기가 느낀 인상을 쓰네미쓰에게 말했다.
"창가학회는 강제적인 포교와 선거로 세력을 늘린 신흥종교가 아닙니까.
저는 싫습니다. 본디 창가학회는 종교로서 경건한 기도를 드리지 않잖아요."
쓰네미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산가는 학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판
하고 있군. 학회원은 아침저녁으로 진지하게 근행하고 최고의 경전인 법화경을
독송하며 남묘호렌게쿄라고 제목을 부르고 있어. 또 학회에서 하는 활동은 서로 격려
하며,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 인생의 승리자로, 사회건설의
주체자로 소생시키는 커다란 민중운동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판하는 일은
청년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 학회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실제로 활동에도 참가한 뒤에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산가는 그런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학회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에는 웃음이 넘치고, 감동의 눈물이 있고 칭찬과 격려를
보내는 따뜻한 박수가 있었다. 큰 병을 앓았지만, 신앙을 마음의 버팀목으로 삼아
병을 이겨냈다고 기쁨의 눈물에 목이 메이며, 불법의 위대함을 말하는 부인도 있었다.
또 승려도 아닌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기쁨을 힘차게 말했다. 산가는 그러한 모습에 경탄했다. 당시 도쿄대학교 의학부의
분쟁이 차츰 격화되어 대학분쟁이 거대한 물결이 되려고 할 무렵이었다.
시대와 사회의 변혁은, 많은 학생의 주제이고 산가에게도 인생의 큰 과제였다.
산가는 생각했다. '학회는 민중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를 변혁하고 있다!
더욱이 인간의 정신이라는 내면의 변혁을 실제로 일으키고 있다!'
좌담회를 보고 감탄한 산가는 쓰네미쓰가 강하게 권유하기도 했고, '창가학회에 대해
더 알아보자'는 마음에 입회했다. 쓰네미쓰는 산가와 후쿠토미 준노스케가 입회한
이듬해에 규슈치과대학을 졸업해 고향인 미야자키현으로 돌아갔다. 교내에서는
오우치보리 요시토와 산가 그리고 후쿠토미 세 사람이 대학부 활동에서 핵심이 되었다.
그들 가족이 모두 창가학회에 입회한 일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에게 어떻게
학회를 이해시키느냐가 공통된 고민이었고 주제였다. 오우치보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인데 "신심에는 반대다!"라고 언명했다. 산가의 아버지는 신심에
관해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산가가 입회한 뒤,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한 일이 화가 나서 경제적인 지원을 끊어버렸다. 학회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었지만 아버지는 신심과 연관시켜서 생각한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산가는 학원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후쿠토미의 아버지는 입회한
사실에 관해 후쿠토미 본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쿠토미의 어머니
에게는 "준노스케는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입회한 다음 달부터
집에서 보내오는 돈이 갑자기 줄었다. 후쿠토미도 아르바이트로 우유배달과
도장(塗裝) 보조, 그리고 가정교사 등을 했다. 대학부 선배들이 그런 그들을 격려했다.
어느 선배 간부가 이렇게 격려했다.
"니치렌대성인 문하 중에 이케가미 형제로 알려진 형 무네나카와 동생 무네나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스미쓰는 고쿠라쿠사 료칸에게 속아 형제의 신심을 반대해,
형인 무네나카를 두 차례나 의절합니다. 대성인은 이 이케가미 형제에게
'이 법문을 말하면 반드시 마가 출래하느니라. 마가 다투어 일어나지 않으면
정법이라고 알지 말지어다.' (어서 1087쪽)라고 말씀하셨어요.
대성인불법은 만인을 성불시키는 최고의 가르침이기에, 그 신심을 방해하려는
마가 다투어 일어나는 겁니다."
이케가미 형제의 아버지 사에몬노타이후 야스미쓰가 형 우에몬노타이후 무네나카와
의절했다는 사실은, 동생 효에노사칸 무네나가에게는 가독상속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말한다. 가마쿠라시대의 무가사회에서 의절은 가독상속권을 잃고 경제적 기반도,
사회적 위치도 잃게 됨을 뜻했다. 요컨대 의절은 한마음으로 신심에 힘쓰는 형제를
서로 갈라놓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동생 무네나가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것을 느낀 대성인은 두번째 의절 때, 무네나가에게 "당신은 이번에는 퇴전할
테지요"라고 말씀하고 이렇게 지도하셨다.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니치렌의 가르침을
믿으려고 한다면 부모님에게 형과 함께 신심을 관철하겠다고 잘라 말하시오."
또 형제에게 "일체는 부모에게 따라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 부처가 되는 길은
따르지 않는 것이 효양의 본(本)이로다." (어서 1085쪽)라고 말씀하셨다.
대성인불법은 자신이 일생성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모도 성불시킬 수 있는 위대한
법이다. 그 정법을 부모가 "버려라" 하고 말할 때는 부모를 따르지 않는 일이 효양의
근본이 된다. 또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느니라." (어서
1528쪽)는 지도도 있다. 신심에 면려하는 일이 최고의 효도가 된다. 더욱이
이 어서는 신심을 하는 사람은 효도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도 읽을 수 있다.
부모에게 효양과 보은을 다하는 일이 불법자(佛法者)의 도리다.
대성인은 출가한 목적을 "반드시 부모를 구하기 위함이니라." (어서 192쪽)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보은하는 최고의 길은, 일생성불을 약속한
묘법(妙法)을 알려드리는 일이다. 규슈치과대학교 대학부원 세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진지하게 신심에 힘썼다. (중략)
대학부 선배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후쿠토미와 산가를 걱정해, 만두 등을 사 들고
하숙집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대성인은 분투하는 이케가미 형제를 보고
'미래까지의 설화로 무엇이 이 보다 더하리오' (어서 1086쪽)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그 투쟁이 장래 모두에게 전해지고 광선유포의 역사에 남을 만큼, 위대하고도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래요. 치아 하나는 가장 큰 치아라도 직경 1센티미터 정도
입니다. 만일 이를 치료해 돈을 벌 생각만 한다면 직경 1센티미터의 작고 좁은 경애
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묘법의 치과 의사'가 되어 광선유포라는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목표로 산다면 자기 경애는 세계를 감싸게 됩니다.
따라서 생애, 신심을 관철하며 광선유포라는 사명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야 합니다.
자, 만두도 어서 드세요.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끙끙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먹고 힘내세요." 선배는 모두에게 만두를 권했지만 자기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세 사람이 만두를 다 먹었을 때,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났다. 선배의 배에서 나는 소리
였다. 선배는 2부(야간부)에 다니는 학생으로 생활이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후쿠토미를 비롯한 세 사람은, 선배의 진심이 폐부에 사무치는 느낌이었다.
지구의 부인부가 챙겨주는 세심한 배려에도 용기가 났다. 지구 거점에 가면, 부인부가
주먹밥과 다과 등을 넉넉히 차려 놓고 따뜻한 말로 격려해주었다.
"부모님이 이해해주지 않는데도 열심히 하다니, 정말 훌륭해요. 장래, 훌륭한 치과
의사가 될 여러분이 열심히 신심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자랑이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힘내는 겁니다."
강속구와 같은 신심 지도와 창가가족의 진심 어린 격려, 그리고 인간성의 따스함이
그들의 사명감을 부화시키고 성장시켰다.
규슈치과대학교에 다니는 후쿠토미와 산가 그리고 오우치보리 세 사람은 학회활동에
열심히 도전했다. 홍교에 힘쓰자 생명의 약동감이 넘쳐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기쁨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핍박도 괴롭지 않았다. 자주 즉석 라면을
함께 먹으면서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사회는 대학분쟁으로 스튜던트파워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튜던트 푸어(가난한 학생)로군." 더욱이 교학을 공부하는
속에서 불법의 생명 법리에 감탄했다. 또 좌담회 등에 참석할 때마다, 병고와 생활고라는
벽에 부딪혀 죽음까지도 생각하던 절망의 구렁에서 소생했다는 장년부원이나 부인부원의
체험담을 들었다. 그런 것들을 통해 신심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동지와 함께 우정과 연대의 정을 나누고 환희를 실감하며, 교학을 심화하고 체험을 공유
하는 데 신심의 성장을 촉구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요건이 있다.
후쿠토미를 비롯한 세 사람은 제1회 '규슈청년부총회'(기타큐슈시 신닛테쓰오타니
체육관)가 열린 1973년 3월 21일에 야마모토 신이치를 만나 처음으로 대화했다.
총회가 끝난 뒤, 기타큐슈회관에서 신이치를 둘러싸고 대학회 멤버와 여자부 대표 등이
모여 간담회를 열었다. 세 사람도 규슈치과대학회 멤버로 간담회에 참석했다.
세 사람 모두 이미 치과대학에서 6년이라는 대학생활을 마친 상황이었다.
후쿠토미와 산가는 병원에 근무하면서 치과의원을 개업하려고 도전했다. 그러나
오우치보리는 개업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담회 때
오우치보리는 결심하고 신이치에게 물었다. 그는 평소에 언뜻 보면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주었다. 그런 그가 긴장하며 말했다. 눈은 강렬하게 빛났고 표정은 경직되었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요. 무서운 얼굴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