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운영하는 그림 공부 모임에 대구의 화가 김용조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공부 글에는 사람이 많이 들어오지 않고, 이 글에는 많이 들어옴으로,
문협 수필인에게도 김용조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리로 옮겨 왔습니다.


김용조 자화상
선생님의 양말을 신겨 주세요
대구 미술의 뿌리를 더듬어 가다 보면 무척 아쉬움이 남는 천재 화가를 만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서울에서 비껴나 있는 시골 도시일 뿐인 대구가 한국 미술사에 이름을 드러낼 만한 자료도 흔적도 찾기가 어렵다. 한국 미술사에서 보면 한없이 초라한 대구를 그래도 잠시나마 미술사에 얼굴을 내밀도록 한 것은 천재화가 이인성과 김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조는 대구의 변두리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군 집의 아들로 태어나서 홀어머니 밑에어 유년을 보냈다. 대구 달성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서 아동문학가인 창주 이응창 선생의 눈에 띄었다. 담임이었던 이응창 선생은 물감도 도화지도 구하지 못하는 그에게 물감도 사 주고, 격려도 해주었다. 살을 에도록 추운 어느 해 겨울에는 맨발로 학교에 나온 김용조에게 자기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신겨 준 일이 있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더 이상의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김용조의 재능을 아깝게 여겼던 이응창은 열 다섯의 그를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 미술사에 소개해주었다. 그때 대구 미술사는 또 한 명의 천재화가인 이인성이 서동진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이 미술 모임을 만들자 그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인의 화가로만 구성한 미술 모임을 만들었다. 향토회였다. 김용조는 열 다섯의 나이인데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 준 것은 열 여섯이 되는 해인 1932년에 제 11회 선전에 출품한 ‘풍경’이라는 작품이 입선하였다. 이인성이 걸어왔던 길을 김용조가 따라가고 있었다.
사실은 조선 총독부가 지원하는 관전이어서 이인성도 친일 화가라는 짐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피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후부터는 9회에 걸쳐서 16점의 작품이 입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바다를 즐겨 그렸다. 선전의 입선작에는 ‘어선’, ‘흰 돛대의 배’ 등 바다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 많다. 따라서 바다 풍경을 통해서 그의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잘 드러냈다는 평도 듣는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그가 수평선 너머로 미지의 세계를 꿈꾸면서, 한 없이 날아가 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정신적인 해방감을 맛보려 하였는지도 모른다.
1935년에는 제 14회 선전에서 ‘그림 책을 보는 소녀’가 특선을 했다. 이때도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 하였다. 이응창 선생이 모델을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겨우 스물 나이인데도 대구에서 꽤나 명성을 얻었다. 선전에서 특선을 한 화가는 이인성과 김용조 두 사람 뿐이었다. 이응창과 서상일은 김용조가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조양회관 2층에 화실을 열어 주었다.
백화점(무영당)에 취직하여 미술 도안과 장식일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생활이 안정되었다. 이제는 물감을 구하지 못하여 애태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안일함에 갇혀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면 천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미술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을 떨쳐내지 못 하였다. 그에게 안정을 주는 모든 것을 접어두고 미술 공부를 더 하려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그를 대구에 눌러 앉아 있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낮에는 힘들게 일하여 학비를 벌었다.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의 야간부를 다녔다. 생계와 공부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한 몸으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고생으로 찌들어가는 육신을 병마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몸은 하루하루 야위어 갔고, 마침내는 심한 기침을 하면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앙상해진 몸으로 대구로 돌아왔다.
김용조가 1930년 대에 그린 작품은 한국 화단에서 의미 있는 그림으로 평가 받는다. 1940년 대의 작품인 ‘해수욕장’은 강한 색채를 사용하여 야수파 류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는 손에 익은 능숙한 솜씨의 상투적인 기법에서 벗어나서 유화의 또 다른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그가 화가로서 활동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때문에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귀국하였을 때는 병마가 너무 깊숙이 침범하여 그림 그리기도 힘에 부쳤다. 1944년에는 그가 혼신의 힘으로 그린 ‘어머니의 상’이 선전에서 특선을 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가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에게 마지막 남기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언젠가 대구의 어느 화가가 쓴 글을 읽은 일이 있다. 그 화가가 우연히 동네의 약국에 들렸다가 ‘어머니의 상’으로 생각되는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림의 밑 부분은 뜯겨 나가서 너덜너덜했다. 누가 그린 그림이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더니 모른다면서, 어느 아주머니가 약값 대신에 맡아 달라면서 맡겨 두고 간 그림이라고 하였다. 잊고 있다가 몇 년 뒤에 그 약국을 찾아갔더니 그림도 없었고, 그림의 행방도 몰랐다고 하였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그림이 남아 있을까?
그가 일본에서 귀국하자 말자 만신창이가 된 몸은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동산병원에 입원한 그의 병실을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썰렁한 병실에 들리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는 ‘발이 시려요. 창주 선생님 양말을 신겨 주세요.’라며 중얼거리더라고 했다. 창주 선생이 찾아와서 그의 발에 양발을 신겨주었던 그날 밤에 김용조는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이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김용조라는 화가 이름 정도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이력 알게 되어 기쁩니다. 요절한 작가가 참 아싑습니다.
짠한 감동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나마 선생님께서 그분의 큰 뜻을 깊이 새겨주시니 하늘에서 감응하실 것 같습니다.
동민형 좋은글 올려 잘읽었습니다.
아까운 천재화를 잃었네요.
동민형 좋은글 올려 잘읽었습니다.
아까운 천재화가를 잃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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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당은 일제 강점긱 때 조선인 자본가 이근무가 건립한 대구 최초의 백화점으로 이상화 시인, 이인성 화백을 후원했다고, 심후섭님이 제게 매일을 보냈네요. 김용조도 후원했습니다. 무영당 건물은 곽병원 부근에 있는데, 대구시가 구입하여 보존하기로 했다는 자료도 보냈습니다.
이런 자료를 받으니, 대구시내 답사도 따라다니면서 '이 분 진짜 부지런하다고 느꼈는데, 정말 부지런하네요.' 저에게는 너무 고마운 자료나서, 심박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