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 오후 4시 / 김선
눈보라 치는 가리봉오거리 조개구이집에
차가운 불빛들 다 모여 있다
몇 달 전부터 죽은 조개처럼
굳게 입을 다문 셔터
꽃샘바람을 안아 뒹굴며
타악기 소리를 낼 때마다
아직 막 내리지 못할 것 있다며
휴업 안내장 속 손글씨들이 손사래 치고 있다.
영하의 날씨에
맨손으로 조개를 박박 문지르고 있던 한 사내
먼 하늘 올려다보는 움푹한 눈 속으로
오래 머무르고 있던 먹구름
철거는 이미 끝났는데
누가 그 사내의 먹구름을 철거해주나
밤마다 몰래 조개 무덤을 뒤져
여윈 실꾸리만큼 남은 달빛을 찾던
도둑고양이 시력을 회복해주나
아직도 문을 못 닫고 기다리는
시민슈퍼 뻥뚫어철물점
기울어진 한쪽 어깨를 밟으며
겨울 햇살이 4시를 건너고 있다
개발의 향기로 살찐
빌딩 유리창마다 드리워진 일확천금의 청사진
아무리 건져도 만져지지 않는다
벽보마다 크고 화려한 재건축 조감도 속 아파트들 너머
큰돈 만지게 해준다는
약속이라는 큼지막한 활자에
진눈깨비가 침을 뱉고 있다
- 『눈 뜨는 달력』, 푸른사상, 2017.
* 서울 인근이면서 공단이 밀집되어 있던 가리봉동은 또한 공단 노동자들이 밀집해 살던 곳이기도 했다. 영화 ‘박하사탕’의 두 주인공이 연애감정을 가졌던 곳이고, 소설 『외딴방』도 이곳이 주요 배경이다. 공단 앞에 줄지어 늘어선 방, 그 좁은 방 한 칸에 주인공과 오빠 두 명과 외사촌누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던 공간으로 묘사되고, 노동조합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도 다루어진다. 『원미동 사람들』의 임 씨가 연탄값 떼어먹은 사장을 찾아다닌 곳도 가리봉동이다.
이후 가리봉동은 도심 재개발이란 변화의 물결을 지나오게 되는데, 시인이 말하는 가리봉동은 바로 이 시점과 닿아 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에서 보듯 대개의 이익은 자본가와 투기업자가 챙겨 가고, 세 들어 사는 노동자나 영세 상인은 그나마 있던 보금자리만 뺏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소한의 보상과 생존권을 요구하며 버티지만 이들이 흔쾌히 보상받는 경우는 드물다. 법질서나 공권력마저 가진 자의 이익에 부응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손찌검에 휘둘린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조개구이집도 휴업을 내건 마당에 시민슈퍼도, 뻥뚫어철물점도 뻥 뚫고 나갈 재간이 없어 보인다. 가리봉동 오후 4시의 풍경은 서부영화의 끝 장면을 닮은 듯도 하다. 총격전이 끝나고 총잡이들이 휘파람 불며 유유히 떠난 자리, 쓰러진 패자 주위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으로 페이드아웃 시키는 쓸쓸한 정경이다.
외딴방의 노동자도 슈퍼 주인도 “일확천금”을 꿈꾸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일한 만큼 땀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으면 될 일이다. “천금”의 가치를 줄 만한 게 있다면, 시장 가치나 상품 가치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풍조 대신에 사람 자신으로, 노동 자체로 대우받는 세상이다. 자신은 좋은 집, 좋은 차 가지면서 연탄 장사에게 가야 할 돈을 아끼려는 가리봉동 사장 같은 부류는 얼마나 미운가. 시민슈퍼 탁자에 앉아 맥주 한 컵으로 내릴 게 많다. (이동훈)
첫댓글 인간시장, 인력시장, 아침마다 수십명의 인력을 태우고 가르치고 입혀서 열기속으로 보냅니다. 일당 8만오천원, 마음에 들면 만원을 더 줍니다만 오늘도 두명이 중간에 그만두고 귀가조치 되었습니다. 어제는 한 사람이 앰브란스에 실려가고 그제는 한 사람이 높은데서 떨어져 어깨뼈가 부러졌습니다. 날마다 살얼음을 걸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을 배웁니다. 에어컨 앞에 있다가 가끔 밖에 나와서 덥다 덥다 투덜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무사한 하루 감사합니다
무더위 속에 고생하시는 분이 많겠지요. 땀 흘린 만큼 더 대우받는 삶이 상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