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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백성훈 토마스 부제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학교 강론 원고를 그대로 올려드리는 터라, 구어체와 비문이 다소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번 강론은 신학교 공동체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시간 여유가 부족하여 일반 교우 대상으로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올려드리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
2026.4.17. 가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1독서] 사도 5,34-42
[복음] 요한 6,1-15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익히 들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 기적 자체를 신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본문 자체에 충실하면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함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 봉독된 요한복음은 전하지 않지만, 다른 공관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늦은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 다가가, 여기는 외딴 곳이니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도록 하자고 말씀드립니다.
심지어 장소는 ‘외딴 곳’, 시간은 ‘늦은 저녁 시간’, 거기다 사람은 억수로 많습니다. 대충 상황이 그려지지 않나요? 해는 어둑어둑 지고 있고, 주변에 마을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이라곤 호수뿐인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 주위에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군중들이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나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죠. 아무리 봐도 자기들이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을 구해올 수도 없을 뿐더러, 다시 마을에 배를 타고 가서 낑낑대며 양식을 구해온다 한들, 돈은 또 얼마나 들고 시간은 또 얼마나 늦어지겠습니까? 그러면 잠자리는 또 어떡하고요.
제자들 입장에선 꽤 큰 일이 난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의 판단과 마음이 이해는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떻게 구하겠냐’ 물으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제 생각이지만,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소위 ‘현실 감각’이 떨어지시는 건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예수님 말씀에 다음과 같이 반문했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긴 한데,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제자들은 여태 예수님 바로 곁에서 많은 기적들, 요한복음 맥락에서 보자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던 기적까지 봤음에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잘 아셨습니다. 당신께서 만물을 지어내신 창조주이심을 잘 아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여기서 먹을 것 하나 못 만드실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께 다가왔을 때부터, 그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아 보였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미 제자들과 군중의 배고픈 상황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더 시장하셨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금 양식을 구하기엔 역부족이란 현실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필립보를 시험하려고 했던 말씀이었다고 전하지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설령 제자들이 빵을 ‘하늘에서’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청하여 사렙타의 과부가 먹었던 빵과 기름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엔 모세와 엘리야를 뛰어넘는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직접 빵을 나눠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맥락에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만나, 빵과 기름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그대로’를 이용하여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것도 한 아이가 가진 별 것 아닌 빵과 물고기, 거기다 많은 양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부족한 우리 처지가 예수님께는 봉헌 예물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다음의 시편 저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심지어 우리의 부서지고 꺾인 마음뿐일지라도, 그것은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그대로’ 당신께 가져오라 하십니다. 어떤 포장지도 필요 없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날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그것도 넘치게 배불리실 것입니다. 마치 오늘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남은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이면 시험기간이 끝이 납니다. 영성관 형제들이 여기 없긴 하지만, 공동체 차원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1학년 형제들이 첫 시험을 치느라 고생했을 것이고, 3학년 형제들은 아직 화약 냄새나 세상 물이 덜 빠졌을 텐데 오랜만에 머리 쓰느라 많이 애쓰셨을 것입니다. 예시로 두 학년만 언급했지만, 우리 모두 이곳 못자리에서 학업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성소자로서 겪는 내면의 갖가지 소용돌이들, 관계 안에서 오는 고민들, 직무가 주는 부담감 등으로, 남모르게 땀인지 눈물인지 훔쳐가며, 나름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물론 즐겁고 기쁠 때도 많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기쁜 순간에든 힘든 순간에든,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자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물론 다 알고는 있지만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사실이지요. 분명 우리의 주님이시며 친구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군중을 가엾게 바라보시고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처럼, 배고픈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가여운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비록 몇 줄 못 쓴 우리의 시험지가,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 나의 고민이 남들 눈엔 별 것 아니게 보일지라도, 심지어는 ‘예수님께 보여드려도 괜찮을까’하는 힘들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마음까지도, 예수님께서는 그것 그대로 당신께 가져오라 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올리셨던 그 손 안에서, 부서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넘치게 배불리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함을, 필요를, 고통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가진 전부, 우리 모습 그대로를 내어드립시다. 곧이어 우리가 봉헌하게 될 빵과 포도주의 예물에, 우리를 ‘산 제물’로 함께 봉헌하여 올려드립시다. 그때에, 땅에서 올리는 우리의 작은 봉헌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교환의 신비로,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올 것입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강론>
(2026. 4. 18. 토)(요한 6,16-21)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다음에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제자들과 군중을 곧바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더 이상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보내신 것과 그들이 호수에서 바람과 파도를 겪게 하신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서 응답했는지를 다시 잘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이야기는 분명히 상황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고생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태 8,23-24).
그 이야기에서 ‘큰 풍랑’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겪은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 옆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들뜨고 흥분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안 계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또는 그들의 믿음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일, 즉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만물의 주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만을 위한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례한 일이기도 합니다.
20절의 “나다.”는, 원문으로는 탈출기 3장 14절에 있는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도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마태 14,33).
4)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메시아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 방식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오해합니다.
그 오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루카 4,6-7).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그 유혹을 간단하게 물리치셨지만, 신앙인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인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4월18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6,16-21
절망의 끝에서 손잡아 주시는 주님!
갈릴래아 호수는 마치 사람 심장 모양을 닮았는데, 호수 가운데를 열십자(+)로 그어보면 수직선 부분, 즉 남북으로는 대략 17~18킬로미터, 수평선 부분, 곧 동서로 대략 11킬로미터입니다.
이곳을 갈릴래아 호수라고 부르는 것은 갈릴래아 지방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담긴 물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 너머
헤르몬산 쪽에서 유입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채워진 물은 요르단 강을 거쳐 사해로 흘러가게 되지요.
호수가 꽤나 컸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 호수를 갈릴래아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호수에는 다른 이름이 두 개 더 있는데, 하나는 겐네사렛 호수입니다.
겐네사렛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프를 뜻하는데, 호수가 하프 모양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신약성경 시대에는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에 로마를 다스리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존 킬갈렌 저,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 바오로 딸 참조)
둘레가 대략 51킬로미터나 되는 갈릴래아 호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형제 같은 어부 출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먹고 살아오던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곳 갈릴래아 호수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저는 딱 한번 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제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선배 신부님께서 성지순례단 지도신부로 가시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중요한 일이 생겨 ‘땜방’으로 이스라엘을 갔었지요.
갈릴래아 호수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호수였습니다. 신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참으로 그 느낌이 묘했습니다.
고요한듯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얼마나 호수가 컸으면 잔잔한 파도가 일었습니다.
가끔씩 밀려오는 파도와 산들바람이 해변을 어루만지면서 동시에 제 영혼까지도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저녁 무렵에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해도 떨어졌겠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른 스타디온 정도 나아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에서 무슨 파도냐고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는데 갈릴래아 호수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류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기류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상당히 높은 파도가 일곤 했습니다.
서른 스타디온 스타디온은 그리스 길이 단위입니다.
한 스타디온은 192.5미터입니다.
서른 스타디온이라면 약 5.7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육지로부터 꽤 떨어진 거리였기에 깊이도 꽤 깊었을 것입니다.
날도 이미 저물어 칠흑처럼 캄캄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그렇고 뒤로 돌아가기도 그런 애매한 곳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 쪽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싶어 혼비백산했겠지요.
아마도 제정신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목숨도 여기도 끝이로구나, 생각하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의 끝에서 낙담하고 있는 우리, 이제 끝이로구나, 하며 포기하는 우리,
죽음의 두려움 앞에 떨고 있는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월19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요한 6,16-21
평화가 성체성사의 표징이다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0-2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는 거대한 '양식의 표징'과, 다음 주부터 이어질 '생명의 양식'에 관한 심오한 담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사건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다(Ego Emi)"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그의 서간에서 명확히 선포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면, 그것이 곧 내가 성체와 한 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빠서 두려운 줄 압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려움은 '하느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확신에서 오는 독극물입니다.
이 감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짐승의 본성으로 퇴행합니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 배경이 된 실제 사건입니다.
1816년 세네갈로 향하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되자, 고위층은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갔고
150명의 선원은 급조한 뗏목에 버려졌습니다. 13일간의 표류 동안 그들을 죽인 것은 굶주림보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존재의 빽)을 잃어버린 순간,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즉시 지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끔찍한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15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성체적 평화가 없는 영혼이 마주하게 될 감정의 종착역은 이처럼 처참한 짐승의 상태입니다. (출처: 조나단 마일스, 『메두사: 난파선과 지옥의 기록』)
두려움은 우리를 현실보다 더 큰 공포의 환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우리를 죽이는 창칼이 되게 만듭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왜일까요? 주님을 사랑의 주권자가 아닌, 내 삶을 위협하는 낯선 타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냉담자 방문을 할 때 어떤 분들의 시선도 그랬습니다.
저를 보지 않기 위해 문을 빨리 닫았고, 빨리 가라고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Ego Eimi).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신성 선포입니다.
이 목소리가 들리고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을 모시는 순간, 풍랑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풍랑 한복판에서도 내 감정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비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존재의 현존'을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합니다.
영화 ‘127시간’에서도 돌에 손이 눌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 자신의 손을 자를 용기는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단순히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실재적인 믿음에서 옵니다.
'개미 마을의 마리아'라 불리는 가톨릭 복자 후보 기타하라 사토코(Satoko Kitahara)의 사례입니다.
명문가 출신의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는 일본의 가장 비참한 빈민가인 '개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오물과 악취, 질병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금방 두려움과 혐오감에 질려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토코는 그곳에서 평생 본 적 없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미사에서 모시는 성체를 통해
"예수님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이 가난한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평화로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치의는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가면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가 느껴졌다.
그녀의 감정 자체가 그녀가 믿는 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사토코의 평화는 그녀가 성체와 온전히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부신 표징이었습니다.
(출처: 마쓰이 토오루, 『기타하라 사토코: 개미 마을의 천사』)
성당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세상 걱정에 가슴이 답답하다면, 우리는 아직 성체를 '음식'으로만
먹었을 뿐 '생명'으로 합일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면 죄도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말고 평화를 선택합시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고백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읍시다.
그는 1544년 1월 15일, 인도 코친에서 사프란스(Saffrans) 섬으로 향하는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다는 사납게 울부짖었고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내적인 위로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며, 저의 모든 고난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 바다가 나를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의 생명보다 하느님의 평화를 더 크게 맛보았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간집』, 1544년 1월 서한 재구성)
그가 인도와 일본의 낯선 땅,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으로 기쁘게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체를 통한 '감정의 정복'이었습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성사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가 모시는 성체는 단순히 빵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구원의 방주다.
풍랑이 일어날 때 배 바깥을 보지 말고,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대의 심장은 고요한 항구가 될 것이다.
감정의 평화가 곧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사신다는 가장 고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St. Ambrose, De Sacramentis, 4, 4).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평화로울 때, 여러분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