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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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죽은 엄마의 방에서 겉이 낡아 여기저기 찢겨진 노트를 발견했다.
‘1995. 1. 1 ~’ 표지에 노트를 처음 쓴 날짜로 추정되는 년도, 월, 일이 새겨져 있었다.
한 줌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 방 한 켠에 호롱불을 키고 표지를 넘겼다.
1995. 1. 1.
쉼 없이 며칠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저녁을 준비 하던 중,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엊그제 면접을 봤던 윤서실업 회장댁의 가정부로 채용이 됐다는 전화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서 몸을 흔들었다.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밥만 축낸 다며 비수를 꽂던 남편에게서 이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임금님 수랏상 못지않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티비를 보았다. 재미없는 프로그램도 내겐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다.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은 날이다.
1995. 1. 14.
남편이 이주 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해봤지만, 끝끝내 받질 않고 듣기 싫은 여자의 사무적인 목소리만 들려준다. 어디 갔어요. 도대체. 머리 꼭대기 까지 오른 화보단 걱정이 앞선다.
1995. 1. 20.
드디어 남편이 들어왔다. 축 처진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왜 그래요. 나 취직 했어요. 기쁜 마음으로 말하지만, 차갑게 대꾸한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괜히 씁쓸해지고 몇 주 만에 들어온 남편이 밉기 시작했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어디가요? 남편의 대답은 돌아오질 않고 내 목소리만 방 안에 맴돌았다. 이 늦은 시각에 도대체 어딜 가는 걸까?
1995. 1. 21.
밤늦은 시각에 전화 한 통이 집안 가득 울렸다.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으러 거실로 이동했다.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누구세요? 다시 한 번 물었다. 미안해, 여보. 남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가요. 왜 그래요. 되물었지만 대답이 없고 전화가 끊긴 소리만 귓가를 때렸다. 여보,…….
남편이 회사의 경제난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을 했다.
아빠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구박만 받으며 아빠의 자살을 막지 못했던 엄마의 세세한 일기를 보자 눈물부터 쏟아져 나왔다. 엄마가 불쌍한 것? 아니면 심장을 바닥에 떨어뜨린 아빠의 자살? 무슨 이유 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고충과 회사 경제난의 진실은 다음 장에서 알 수 있었다.
1995. 2. 11.
식모라며,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관심조차 없었던 윤서실업 회장이 많은 가정부 가운데 나를 서재로 불렀다. 뭐지? 고민을 하며 걸어가는 도중 사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모님의 살기 어린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서재로 들어갔다.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제 곁으로 불렀다. 조심스레 다가갔다. 회장의 손짓에 무릎을 숙였다. 회장의 입 바람이 귓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 말은 가히 충격으로 와 닿았다.
당신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나?
경제난의 원인은 윤서실업과의 합병에서 문제가 있던 것이고 1차 부도를 맞이했었던 아빠의 회사는 아빠의 손을 떠나서 이미 ‘부도’ 가 맞았다. 자금 돌려 막기엔 늦었고, 윤서실업은 합병이 아닌 회사 인수를 요구한 것에 대해 나중에 알게 된 엄마는 일기에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엄마의 그 때 심정에 왈칵 하는 눈물 때문에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흐릿하게 박혀 있는 글씨 위로 애굣살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글씨가 번지며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변했다. 으.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을 메웠다. 눈물을 삼키려 여러 개의 이로 짓이긴 입술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지금의 나처럼…….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위액이 휩쓸고 간 자리는 참혹했다. 변깃물을 노랗게 만든 위액은 쓰고 목이 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맑은 수돗물이 거세게 쏟아졌다. 텁텁한 입 안에 수돗물을 머금고 헹궜다. 며칠 밥을 굶겼다고 반항을 하는 위가 미워지는 순간이다. 배를 문대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뭘 잘했다고 문대는 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엄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째 꾸준히 보고 있는 엄마의 일기장을 펼쳤다. 벌써 반이나 읽었다. 엄마의 일기에는 아빠의 죽음과 박차실업의 괴기함이 쭉 적혀있었다. 하, 울지 말아야 겠단 굳은 다짐을 하고 어제 봤던 페이지의 다음 쪽에 시선을 박았다.
2011. 2. 14.
딸아이가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다. 한 살 때부터 식모 방 한편에서 애지중지 키웠던 딸이 별 탈 없이 커주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닌 딸이 장학생으로 특성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있는 곳과 아주 먼, 부산의 유명한 ‘부산예고’로. 기쁨도 잠시 서운함이 밀려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더 이상 이 집에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니까, 눈물부터 흘러나온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딸을 볼 때마다 목구멍에서 치고 올라오는 말을 집어 삼키고 만다.
초연아, 안 가면 안 되니?
엄마의 일기에 2001년부터 2010년의 날들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드문드문 기재 되어 있는 일기는 내 심금을 울리고 저절로 눈물을 자아냈다.
말라비틀어진 입으로 꺼이꺼이 울어대는 나의 울음소리는 거의 통곡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페이지를 뒷장으로 넘겼다. 눈물로 인해 다 번져버린 엄마의 마지막 일기가 보인다.
2011. 4. 5.
요새 들어 회장님의 호출로 잦아드는 서재의 내 출입이 심기가 불편 한지, 사모님이 나를 불렀다. 일을 마치고 안 방으로 들어서자 사모님의 긴 손이 뺨을 후렸다. 아릿한 뺨을 손으로 잡고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사모님의 핀잔이 귓가로 스며든다.
서재 출입이 잦다? 너?
내 남편이 너한테 뭐라고 하디.
네 육중한 몸을 탐하고 싶다니?
아니면, 남편한테 깔려 즐거웠어?
말 해봐. 지금 말 하면 다 용서해줄게.
시기가 아니었다. 질투도 아니었다. 나와 회장님 사이를 의심하는 사모님은 의처증보다 더 심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 같았다. 내가 알던 사모님은 없었다. 다중인격, 아니 정신분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미, 뇌가 제 작용을 못하고 멈추어서 제어불능 상태로 보였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견딜 수가…….
살 수가 없다.
미안해, 딸.
아빠를 잃은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아빠를 따라가서.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엄마가 너무 나약해서. 그리고…….
가난하고, 비열하고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네게 미안할 정도로 말하지 못할 졸렬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정말, 진짜로 미안해. 딸…….
입을 틀어막았다. 내게 쓴 마지막 말밑에 빼곡히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초음파 사진이 엄마를 자살로 인도한 하나의 고충이었다는 것이 내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일어 날 수 없는 일이며, 예측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서재에 잦은 출입을 한 것은 회장의 불어나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이며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 들어갔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있을 수 없어. 그러면, 안 되잖아. 아빠를 따라갔으면, 적어도 그러면 안 되잖아. 눈물이 새어 나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게 용서를 구하고 자살을 한 엄마도, 제 부인이 아닌 식모를 탐했던 회장도 심지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했던 사모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 하. 하하. 하. 어이없고, 웃기고 분노가 차오르고 여러 가지의 감정이 섞인 미묘한 기분에 그만, 엄마의 일기장을 형체 없이 구겨버렸다.
차라리, 읽지 말걸 그랬다.
이렇게 참혹 한 것을, 한 없이 밀려오는 비통함이…….
멋모를 호기심이 무덤까지 숨기고 갈 진실을 알게 했고, 그 진실이 나를 부수었다.
*
이, 소설은 단편으로 구성 된 작품 입니다.
2012년 1월 쯤에 제가, 다른 아이디로 있을 때 썼으며, 전 팸에서도 10편 내지로 연재 하려다 말았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냥, 이 상태가 제일 좋은 거 같아서. 한 편 구성으로 올려 봅니다.
미숙한 작품이지만,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Fan. 별다방 Miss ♡ (http://cafe.daum.net/Miss-)
Fam. 우아한 년들 (http://cafe.daum.net/JHPHG)
첫댓글 다음이 꼭있을것만 같으네요
내일 들어오면 누구나예상 할것같은 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