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이 개봉 일주일 만에 6만5000여 명의 관객을 모으며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상업적인 극영화가 아니라 상영관을 잡는 데 애를 먹은 데다 2022년, 2023년 각각 개봉한 정치인 다큐멘터리 ‘그대가 조국’ ‘문재인입니다’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좌석 수로 출발했지만 높은 완성도로 호평받으며 관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관람 후 관객 후기를 집계하는 CGV 에그지수에서 ‘길위에 김대중’은 ‘서울의 봄’ 과 함께 99%의 최고 점수를 유지 중이다. ‘길위에 김대중’을 본 관객들이 꼽는 이 영화의 명장면·명대사 5개를 소개한다.
하나.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구치소에서의 김대중
방대한 자료화면을 2시간 분량으로 엮은 푸티지 다큐멘터리인 ‘길위에 김대중’에는 그동안 미디어에서 볼 수 없었던 희귀 영상들이 여럿 등장한다. 전두환 정권 초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이 구치소 내부 CCTV에 포착된 장면도 그중 하나다. 이희호 여사에게 편지를 쓴 뒤 책상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표정에는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씹어 삼킨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을 가장 좋았던 장면으로 꼽은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몹시 외로워 보인다”라면서 “‘길위에 김대중’은 늘 대중 속에 있었지만 군중 속의 고독에 시달렸던 김대중의 표정을 잘 캐치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고 평했다.
둘. 감옥에서도 용서와 관용을 강조한 옥중서신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민주주의는 돌아온다. 그때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한테 이런 일을 저지른 분들에게 보복하지 마라, 보복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확고히 해라,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라, 그것을 이야기했어요.” 사형선고 후 최후진술에 대한 김대중의 회고 육성이다. 가짜 혐의를 씌워 죽음까지 몰고 간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진술에 감명을 받았다는 관객들도 많았다. 작가이자 서평가인 김미옥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혹자는 권력을 잡는 가장 큰 이유는 보복이라고 한다. 단순히 정적을 정치적으로 재기불능으로 만든 넋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을 저지하려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가족을 보면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권력자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정적에게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투옥과 망명과 가택 연금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 왜 한이 없었겠는가? 그의 적은 독재만이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쓸쓸했을지 눈두덩이 뜨거워진다.”
셋. 의회주의자 김대중
‘길위에 김대중’은 후대에게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건 투사 이미지로 각인돼있지만 젊은 정치인 시절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면서 의회 정치로 현실을 개선하고자 애를 썼던 의회주의자 김대중의 면모를 새롭게 알려준다. 1965년 정부 여당의 한일협정안을 무조건 반대한 야당과 달리 협상 조건을 한국에 유리하게 조정하자고 주장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이 영화까지 찾아봤다는 30대 관객 이윤경씨는 “김대중 대통령은 나와 같은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의 투사처럼만 느껴졌는데 영화를 보고 지금의 정치인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더 세련된 정치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빨갱이라는 프레임으로 과격한 인물처럼 포장됐던 김대중의 지적인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넷. 김대중과 함께한 국민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에 관한 영화이자, 그와 함께 현대사를 살아온 국민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광주 민주화운동, 87년 민주화 투쟁 등에서 김대중과 함께 싸우고 김대중을 열호하는 군중의 모습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소설가 조선희는 이렇게 썼다. “이 다큐는 김대중에 관한 다큐이지만 김대중과 동시대를 같이 산 한국인들에 관한 다큐이기도 하다. 그 정치사회적 변곡점마다 피플파워로 치고 나가는 한국인은 참 대단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날(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날의 오기)관중이 환호하는가 싶다가 ‘김대중’을 연호하는 장면. 김대중도 위인이지만 한국인들도 참 대단하다! ”
다섯. 1987년 16년 만의 광주행
1987년 16년 만의 광주 방문은 ‘길위에 김대중’의 엔딩이자 정점이다. 영화는 이리와 정읍, 장성을 거쳐 광주에 도착하기까지 기차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김대중을 만나기 위해 역으로 모인 이들의 수많은 얼굴을 비춘다. 정치인 김대중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호남 민중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가슴 뭉클한 엔딩으로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는다. ‘이희호 평전’을 집필한 고명섭 한겨레 기자는 “당시 그 길에 130만명이 모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남 사람들의 5분의 1이 자발적으로 모인 셈”이라면서 “광주항쟁의 참혹한 현장을 보여주고 난 뒤 광주로 가는 여정을 지나 망월동 묘역에 도착해 통곡하는 장면까지 내레이션 없이 이어지는 구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김대중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는 “광주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DJ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희호의 말처럼 김대중의 통곡 속에는 광주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과 자신을 살렸다는 감사함이 녹아있었을 텐데 이러한 김대중과 호남의 내적 연결을 잘 담아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