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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출처 국민일보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2159&code=11171426&cp=nv
자기의 삶을 담은 이야기로
남아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후손에게 길게 이어진다
주변 어른들이 세상을 뜨면서 장례에 참석할 일이 잦아진다. 얼굴을 내밀고, 부의를 전하고, 고인께 예를 표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국밥 한 그릇 먹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옛 친구나 동료를 만나서 안부 묻고 수다 떨기도 한다. 애도는 작게 오그라들고, 예의만 앙상히 남은 듯한 장례 풍경이 사뭇 불편하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유대 랍비인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 따르면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만나고, 그 곁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에 속한다. 히브리어로 ‘거룩한’을 카도시(kadosh)라 한다. 카도시는 본래 ‘구별되다’란 뜻이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이를 애도하고 기억하며, 남은 자를 위무하는 이 시간은 구별되는 시간이다. 일상의 시간이 끊어지고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까닭이다.
유대 전통에서는 죽고 나서 매장되는 순간까지 시신 곁에 촛불을 켜둔다고 한다. 촛불은 죽은 자가 내뿜는 영혼의 빛을 상징한다.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아직 살아서 며칠간 눈부시게 존재를 드러낸다. 장례에 감으로써 우리는 이 빛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 참여한다. 기억의 책갈피를 뒤지고, 유족이나 고인의 친지들이 보이는 말과 행동을 종합해 이 빛을 죽은 자의 인생 이야기로 고쳐 쓴다. 죽음이 그 생명을 모조리 삼켜 없애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오르빌뢰르는 이야기가 “시간 사이와 세대 사이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존재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말한다. 거룩한 이야기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통로를 연다. 사람은 죽음으로 삶을 몽땅 끝맺지 않고, 이야기로 남아서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아이들, 후손에게 길게 이어진다. 이야기가 있는 한 죽음은 없다.
햄릿의 아버지가 “나를 기억하라”고 부르짖으면서 밤마다 성벽 위를 배회하듯, 가끔 죽은 자는 유령의 형태로 우리 곁에 되돌아온다. 히브리어에서 유령은 루아흐 레파임(rouH’ refaim)이다. 이 말은 ‘늘어진 영혼’ 또는 ‘올 풀린 영혼’을 말한다. 자기 삶을 담은 이야기의 솔기가 떨어져서 너덜너덜해졌을 때, 살아남은 자들이 그 이야기를 손보아서 고쳐 달라고 유령은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오르빌뢰르는 이렇게 말한다. “유령들은 기념일을 좋아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자신의 혈통을 전혀 모르거나 심지어 혈통 따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 떠난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안에서 울컥한 그리움이 샘솟는 것이고, 친척 소식을 듣거나 언론 기사를 접하면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그들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유령들은 우리의 삶에 매달리고 들러붙어 “우리 이야기와 그들 이야기를 봉합해 줄 모자란 실”을 찾고, 서로 다른 두 옷감을 단단히 하나로 이어붙이도록 이끈다. 여러 사람을 넘나들며 이 옷감들이 충분히 연결됐을 때 그 위에서 한 집안의, 한 사회의, 한 국가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한 죽음과 마주친다. 우리 곁에 늘 죽음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 앞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구원 또한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도록, 망각의 틈새에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애도란 죽은 자의 삶을 충분히 말하는 행위다. 빈소에서 나누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그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역시 언젠가 이야기로 남아서 누군가의 인생 비단에 짜인 크고 작은 문양이 될 테다. 그러니 장례가 죽은 이의 삶을 말하지 않는 부산하고 공허한 시간에서 그 영혼의 빛으로 인생 비단을 짜는 거룩한 시간이면 좋겠다. 죽은 이를 위해,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빛명상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힘, 빛(VIIT)
죽음이 두려운
이유
생불(生佛)로 추앙 될 만큼 높은 법력으로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한 큰스님이 입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빛(VIIT)선생님은 아십니까?”
스님이 내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큰스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는지요?”
“죽어 본 적이 없으니 죽음 뒤에 갈 길 또한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큰스님조차 피해 갈 수 없었던 걸까? 평생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던 두려움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흘러나온 것이다.
한 정신세계 단체의 지도자였던 ‘무불선사’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는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인 경지에 올랐다며 수많은 제자를 두고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렸던 유명한 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배신과 치명적인 병마 앞에서 지난날 자신의 교만함에 뼈아픈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기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디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평생 구도에 몸을 받쳤다는 성직자와 도인들도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일반인들은 말해 무엇 할까. 영원 할 것 같았던 삶이 어느덧 그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떤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평온한 죽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죽음은 자연의 흐름이며 이 흐름에서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자연스러운 현상 앞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 동물들은 생에 대한 본능은 있지만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빛(VIIT)마음’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 안에는 동물과는 달리 우주의 마음을 닮은 내 안의 진정한 나 빛(VIIT)마음(마음, 정신 혹은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인간 생명의 탄생이 육체와 이 빛(VIIT)마음의 결합이었다면 죽음은 육체와 빛(VIIT)마음이 분리되는 순간이다.
죽음과 함께 잠시 전까지 ‘나’ 인줄 알았던 육체는 이제 시체라 불린다. 그 시체는 사람들 곁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그 육체 안에 담겨 있던 진정한 나, 빛(VIIT)마음은 어디로 가게 될까? 물질이 아니기에 썩지 않고 또 다른 육체를 찾아 들어갈 수도 없다. 그 돌아갈 길을 안다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울 이유가 없지만 이를 알지 못하면 죽음 후의 갈 길이 무섭기만 하다. 마치 길 모르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친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공포, 웰다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출처 : ‘빛명상’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초판 1쇄 발행 2009/09/14
2021/06/01 초판 45쇄 P. 213-214
죽음 이후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내안의 진정한 나, 빛(VIIT)마음이 원래 온 곳은 바로 우주마음이다. 따라서 그 빛(VIIT)마음이 죽음 후 되돌아가야할 곳 또한 마음의 고향, 우주마음이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 없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철학적 이론이나 종교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 아니라 많은 실제적 사례를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한수우 씨는 오십대 초반 뜻하지 않게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늘 한창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암이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남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다행히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거쳐 암도 이겨낸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암 세포가 다시 임파선으로 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씨와 그의 가족들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처음 한수우 씨를 만났을 때 그는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완강히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부부에게 빛(VIIT)을 주며 이분의 건강이 최대한 맑게 정화되고 통증 또한 줄어 고통스럽지 않기를 청하였다. 그 때 문득 이분의 생명이 몇 년 더 연장되라는 느낌이 왔다.
이후 한 씨는 꾸준히 빛(VIIT)을 받는 가운데 건강이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그는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행복해지기 위해 빛(VIIT)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아내는 물론 자녀들과 친지들, 가까운 이웃들이 함께 빛(VIIT)명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감기증세처럼 나빠진 한 씨의 몸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순식간에 처음 빛(VIIT)을 만났을 때의 상태로 돌아갔다. 문득 시간을 돌이켜보니 처음 우주마음의 느낌과 같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러나 한 씨의 마음이 지난 번 죽음을 앞두었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갑작스런 죽음 앞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불안해하던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평온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마감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제가 돌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알기에 마음이 정말 가볍습니다. 이렇게나마 빛(VIIT)마음을 알고 죽는 것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합니다만 빛(VIIT)을 좀 더 일찍 알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디 제 아내와 아들, 딸들이 훗날 저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진정한 복을 짓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이 한씨가 사람들 앞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자 유언이었다. 이후 그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말기 암이었음에도 고통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정신은 더욱 또렷해져갔다.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오로지 빛(VIIT)이 봉입된 초광력수만 찾았으며, 이따금씩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고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불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한수우 씨는 평온한 상태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시각, 빛(VIIT)의 터에 있던 나에게 한 영혼이 찾아왔다. 작은 빛(VIIT)방울 혹은 눈사람처럼 보였는데, 직감적으로 그것이 한수우 씨의 빛(VIIT)마음임을 알 수 있었다. 육신으로부터 벗어낫기 때문에 나이, 직업, 세상에서의 모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빛(VIIT)마음 그 자체, 어린 아이와도 같은 상태였다.
“어서 빛(VIIT)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그 빛(VIIT)마음이 내게 인사하더니 태양빛에 실려 온 환한 풍선 같은 모습의 빛(VIIT)에 휩싸여 두둥실 사라졌다.
수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처음 윤희를 보았을 때 일곱 살이나 된 아이가 늘 엄마 등에만 붙어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아이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걷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다. 이후 아이가 몇 차례 빛(VIIT)을 받고 걸음을 뗄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은 아이가 곧 정상으로 회복되기라도 할 것처럼 기뻐했고 다시금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씩 걷게 되었지만 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명이 너무 짧았다. 하루는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고 언젠가 넘어가야 할 일을 조용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아이 어머니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윤희가 쓰러지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았을 때는 이미 아이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윤희가 무의식중에도 무언가 꼭 쥐고 놓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끝까지 빛(VIIT)선생님을 찾았어요. 그리고 이 초광력봉을 손에 쥐고는 놓지를 않네요.”
그것은 윤희가 늘 빛(VIIT)과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작은 빛(VIIT)봉입 물품이었다. 그런데 윤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꼭 쥐고 아무리 해도 손을 펴지 않고 있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정신을 잃고도 초광력봉을 놓지 못할까 싶어 마음이 짠했다.
“윤희야, 이제 괜찮으니 손 편안하게 펴라.”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때껏 꼭 쥐어져 있던 아이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어요. 혹시 아이가 길에서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객사를 시킬 수는 없잖아요.”
“괜찮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큰일 없을 테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서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 또한 4시에 열리는 회원 모임에 늦지 않게끔 되돌아왔다. 그런데 모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볕이 들지 않는 북창으로 선명한 빛 한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그 빛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 작은 빛(VIIT)방울 같은 것이 그 빛줄기를 쪼르륵 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순간, 알 수 있었다.
“윤희 왔니?”
작은 빛(VIIT)방울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흔들렸다.
“그래, 이제 빛(VIIT)으로 되돌아가라.”
그러자 창문 틈으로 들어왔던 작은 빛(VIIT)방울이 다시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점점 멀어져갔다. 이 광경을 본 회원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주일 후 윤희 어머니가 회원들의 정기 회합시간에 찾아와 그날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후 주체할 수 없이 잠이 쏟아져 한동안 윤희도 저도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후였어요. 아이는 제 품에서 잠들 듯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시간이 4시가 조금 넘었다고 했다. 그날 회합 시간에 창문 틈으로 빛줄기가 들어온 바로 그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상을 궁금해 하지만, 그 세상은 산 사람의 귀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아예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가 흔히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을 한다. 명복이란 무엇인가? 죽음 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일까?
죽음 이후의 세상은 살아서 자신이 가졌던 생각, 관념을 따라간다. 즉, 살아있을 때 죽음 후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면 마치 잘 아는 길을 찾아가듯 갈 길을 찾아간다. 만약 열심히 믿는 종교가 있었다면 종교 교리에 따라, 생각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없다면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갈팡질팡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거리다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빛(VIIT)과 함께 맞이한 두 사람의 사례와 같이 죽음 이후 우리의 마음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다면 풍요롭고 행복한 죽음, 웰다잉(well-dying)이 가능해 진다. 가야 할 길을 알기에 그 길이 전혀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P. 215-220
출처 : ‘빛명상’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초판 1쇄 발행 2009/09/14
2021/06/01 초판 45쇄 P. 215-220
첫댓글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웰다잉,
빛명상으로 돌아갈 마음을 고향을 알고 살아 갈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풍요롭고 행복한 죽음
빛과함께 맞이하는 웰다잉
그길을 알려주심에 근원의빛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감사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삶과 죽음ㆍ
웰다잉에 대한 귀한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ㆍ
빛마음으로 살다 빛으로 갈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웰다잉을 위한 빛VIIT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 합니다...
줌음 이후
빛VIIT 마음을 알고 죽는
웰다잉을 위한 힘 빛VIIT
안에서 살아감에 우주마음님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죽음도 삶도 빛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 감사 합니다.
귀한 글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명상과 함께하는 웰다잉이라면 두려움도 고통도 없을 듯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죽음의 길을 늘 일깨워주시는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죽기전에 어떻게 무엇을 해놓고 갈것인가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빛마음이 가야할길을 밝혀주시고 이끌어주시는 학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웰다잉의 힘인 빛,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죽음의 의미를 알고, 죽음 후 마음이 돌아갈 곳을 알게 해 주시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웰다잉을 위한 힘 빛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현존의 삶에 더 성실히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빛명상과 함께 몸과 영혼을 정화시킵니다,
죽은후에의 나는...?귀한글 잘보고갑니다^^
살아서도 죽음 이후에도 빛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우주마음 학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월다잉을 위한 빛VIIT
빛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무한이신 빛마음과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을 올립니다.
빛의 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웰다잉을 위한 힘,빛VIIT
빛과 함께 맞이한 죽음이후 웰다잉이 가능해 갈길을 알기에 고통스럽지 않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웰다잉을 위한 빛
우리는 죽음이후 어다로 가는가
소중한 빛글 감사합니다.
웰다잉을 위한 힘 빛(VIIT)!!
죽음은 삶의 마지막 정화작용이며
죽음 이후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빛으로 갑니다. 알고 준비하며 빛의 뜻을
타라 진실한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지요. 빛으로 가니 즐거워합니다.
추기경님 같이 "나 빛으로 간다"고
밝힐 수 있어야하지요. 감사합니다.~
웰다잉이야기,잘읽었습니다,빛과함께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빛과 함께 우리의 마음이 가야 할 곳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빛과 함께 풍요롭고 행복한 죽음 웰다잉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읽어면서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을 올립니다
빛과 함께 하는 삶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감사입니다.
죽음 이후 우리의 마음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다면 웰다잉(well-dying)이 가능해진다. 귀한 깨우침의 빛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례촛불은 죽은자의 영혼의 빛을 상징하는 거룩한 시간.
빛의 초에 꽃이 피지요.
죽음은 육체와 빛마음이 분리되는 순간.
빛VIIT과 함께 산 우리들은 빛마음이 갈곳을 알기에 웰다잉하고 빛의 세계에 갈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웰다잉을 위한 힘, 빛VIIT...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겠습니다.
빛으로 오신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