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건초더미> 연작


모네의 <건초더미, 늦여름 Haystacks, end of Summer>, 1890-91, 유화, 60-100cm.

모네의 <서리를 맞은 건초더미 Les Meules, Effet de Gelee Blanche>, 1889, 유화, 65-92cm.

모네의 <석양의 건초더미 Meules, Derniers Rayons de Soleil>, 1890, 유화
모네는 한동안 지베르니를 떠나지 않고 그곳의 풍경을 그렸는데, 1890년 늦여름 건초더미를 주제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늦여름부터 겨울 한철에 이르는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는 인상을 포착했는데, 건초더미의 그림자 모양과 길이가 언제 어디서 그렸는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말라르메가 건초더미에 대한 칭찬을 했습니다.
“선생의 최근작 건초더미가 절 무척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프리즘을 통해 벌판을 바라보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니 그림이 절 그렇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1890. 7.)
모네는 제프루아에게 적었습니다.
“전 지금 상이한 효과가 나타나는 연작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점은 제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더욱 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설픈 솜씨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 저의 느낌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1890. 10. 7)
모네는 “일견에 본 걸 그린다” 혹은 “다른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린다”면서 자연에 대한 개인적인 관망에 전념했습니다. 1889년과 1890년대의 그의 작품을 보면 일 년 후나 십 년 후 동일한 장소로 다시 가서 동일한 주제를 달리 묘사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늘 야외로 또는 외국으로 나가 자연의 새로운 영상을 직접 찾았으며, 그것을 단번에 캔버스에 모두 옮길 수 없었으므로 동일한 장면을 그리고 다시 그렸던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과학자와도 같은 태도로 일기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빛을 관찰했으며, 그것이 거의 과장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로 분류하더라도 쿠르베와 휘슬러의 작품에 비하면 덜 사실주의적이었습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긴급하게 붓을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천천히 작업하는 것이 빛의 운동을 더욱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영상을 오랜 시간 안에서 음미하며 그렸습니다. 피사로에게 야외 작업에 관해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같은 장면은 어느덧 사라집니다. ... 전 화실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부러운데 그들은 실망하는 인은 적지 않겠습니까?”
나이 쉰이 되고부터 모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1889년 테오가 앙티브 그림을 1만350프랑에 팔았는데, 여태까지 판 작품 중 가장 고액이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모네가 작품을 판 돈은 10만 프랑에 달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지베르니의 집주인은 모네에게 집을 아예 사라고 권했습니다. 모네는 집을 사서 하인과 정원사들을 고용하고 값비싼 식탁을 구입했으며, 자동차도 몇 대 구입했습니다. 여러 나라로부터 화가들이 지베르니로 그를 방문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의 작업 장면을 자세히 소개했으며, 그가 소장한 친구 화가들의 작품들도 소개했습니다.
1891년 알리스의 남편 오슈드가 사망하자 모네는 알리스를 법적 아내로 맞았습니다. 오슈드의 유해는 지베르니에 안장되었습니다. 알리스의 셋째 딸 수잔은 미국인 화가 테오도르 버틀러와 사랑에 빠졌는데, 영국에 귀화한 미국인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모네와 알리스에게 버틀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수잔과 버틀러는 1892년 7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수년밖에 존속되지 못했는데, 수잔이 둘째 아이를 낳은 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버틀러는 수잔의 큰 언니 마르트와 재혼했습니다. 1890년대 말 모네의 아들 장은 루앙에 있는 아저씨와 함께 화학자로 일했는데, 알리스의 둘째 딸 블랑슈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장은 의붓누이와 결혼한 것입니다.
모네는 1884-85년에 그린 적이 있는 건초더미를 1890-91년에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들 중 여섯 점이 햇빛이 건초더미의 측면을 비춘 것들이고, 일곱 점이 해가 중천에 떠 있어 그림자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18점은 해가 관람자를 향한 실루엣의 장면입니다. 모두 겨울에 그린 이것들에 나타난 색들은 따듯한 느낌을 줍니다. 금빛 나는 지푸라기는 비와 서리를 맞아 엷은 회색으로 변했으며, 땅은 붉은 갈색입니다. 몇 점의 그림에는 눈과 서리가 보입니다.

모네의 <겨울의 건초더미 Meule, Effet de Neige, le Matin>,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건초더미, 겨울 Meule, Effet de Neige, Temps Couvert>, 1891, 유화, 65-92cm.
지베르니는 센 강과 구릉 사이에 있는 마을로 센 강 오른편 구릉은 양지가 바르며, 당시에 품질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강가와 들을 산책하기 좋아했으며, 보통 블랑슈가 동행했습니다. 그대 건초더미가 빛에 의해 다르게 보이는 걸 보고 이를 주제로 시리즈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클레망소에 의하면 모네는 이젤을 여러 곳에 세워놓고 관선이 변할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빛의 조화에 의한 건초더미를 그렸습니다. 15점의 건초더미가 뒤랑-뤼엘 화랑에 진열되었는데, 사흘 만에 전부 팔려서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성공이었습니다. 명성과 부가 모네에게 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네의 <건초더미 La Meule>,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건초더미, 해빙, 석양 Meule, Degel, soleil Couchant>,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늦여름 아침의 건초더미 Haystacks at the End of Summer, Morning>, 1891, 유화

모네의 <햇빛 속의 건초더미 Meule au Soleil>, 1891, 유화, 60-100cm.

모네의 <지베르니 근처 석양의 건초더미 Neule, soleil Couchant>, 1891, 유화, 73-92cm.

모네의 <햇빛 속의 건초더미 Meule au Soleil>, 1891, 유화, 60-100cm.
같은 주재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을 오늘날 많은 화가들이 그리고 있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었던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홀란드의 평론가 비반크는 모네의 건초더미 시리즈를 보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그의 작품 한 폭은 건초더미를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후의 햇빛은 지푸라기를 금빛과 피 같은 붉은색으로 화염에 싸인 듯 빛을 발하도록 했다. 따뜻한 대기가 진동하는 것이 보이며, 건초더미는 푸른 아지랑이 속에서 투명하게 보인다.”
<건초더미>를 부소&발라동 화랑이 1891년 초에 세 점을 구입하면서 각각 3천 프랑을 지불했습니다. 1888년 모네와 불화했던 뒤랑-뤼엘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다시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랑-뤼엘은 부소&발라동 화랑이 건초더미 시리즈를 싹쓸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습니다. 모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베르니 집과 정원을 완전히 인수할 수 있도록 2만 프랑을 보내달라고 뒤랑-뤼엘에게 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