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요한 18,1─19,42
나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손님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십자고상’ 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말보다는 ‘십자애상’ 이 나을 거 같다.’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씀인데요. 어떠신가요? 그분의 사랑이 마음 깊이 와 닿으시나요?
때로 그 십자가 죽음이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그런 마음이 드는 저를 바라보며 문득 제 강아지를 보며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강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은데요.
한 번은 먹이를 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직접 먹이를 줄 때는 얘가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나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데, 내가 다른 일들도 자기를 위해서 고민하고 준비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예를 들면 강아지가 추울까봐 일주일정도 방에 두었던 일이나,
병 걸리지 말라고 주사 놓아준 일,
그리고 홍합 껍데기나 닭뼈 먹지 않도록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한 일을 알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적인 복과 선물은 감사하게 여기지만,
감각적이지 않고 직접적이지 않은.. 당장 실용적이지 않고
나의 이해력으로 다 파악할 수 없는 그분의 신비에 대해서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성실함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고 또 읽다보면...
또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와 성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랑이 마음 깊이 강렬하게 파고들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랑 비슷한 거 같습니다.
평소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잘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떤 글귀, 행동 하나 때문에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군대를 짧게 갔다왔는데요.
훈련소에 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편지를 썼었습니다.
그 중간에 대략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앉아 있을 때도, 일어나 있을 때도, 일할 때도 아들 생각뿐이다.’
그 문장이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 주는 글귀였던 거 같습니다.
또 방위산업체 다닐 때 발냄새도 많이 났고 무좀도 심했는데요.
어느 날 밤에 문득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제 발에 무좀약을 바르고 계셨습니다.
저녁에 일을 나가셨다가 새벽에 들어오셨는데 주무시기 전에 제 냄새 나는 발에
약을 바르고 계셨던 겁니다.
그걸 보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고 깨달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고통 중에 있는 이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그런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경우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전신마비 환자가 그분의 십자가에서 자기와 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아시는 그분의 사랑을 느낀다든지,
손이 망가진 나환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의 상처 이야기를 듣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상처를 지니신 분으로 가깝게 느끼는 경우도 있는 거 같습니다.
또 그분의 죽음에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큰 사랑을 보고 변화되기도 하죠.
그러한 순간에 예전에 몰랐던 십자가의 신비..
‘곧 그분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사랑해서..’ 라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위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 시작이 ‘제가 신부님과 같이 살고 있는데...’ 였다.
그래서 ‘네?’ 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잠시 내용을 들어 보니 아까 한 말이
‘제가 시어머님과 같이 살고 있는데...’ 였다. ^^;
첫댓글 감사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