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초록 비타민, 염기훈
염기훈, 그는 웃으면서 걸어왔다. 비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유니폼보다 더 하얗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순간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라고 화답해야하나? 그렇지만 고민은 잠깐이었다. “괜찮나요?”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마 오른쪽에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상처는 그가 안녕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염기훈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다 나았는데요, 음… 이렇게 흉터로 남았네요. 이마 흉터는 나중에 없앨 수 있다는데요, 머리는 어쩔 수가 없대요. 꿰맨 부위에서 머리가 안 자라요. 나중에 심을 수 있나 알아봤는데 못 심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제 이름보다 머리가 더 유명하니까. (웃음) 그냥 머리를 기르지 말까 봐요. 영구라는 별명도 생겼잖아요. (마음에 드나요?) 마음에 안 들죠. 왜 물어봐요. 아, 장난이고요, 괜찮아요. 그런데 영구 말고 더 괜찮은 다른 별명 없을까요?”
파닥파닥. 갓 건져 올린 생선처럼 그의 얼굴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때때로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생애 첫 태극마크
“요즘 좋죠.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운동했는데, 꿈이 그거였는데 이뤘으니까요. 생각했던 거 보다 빨리 이뤄서 좋아요. 그저 좋을 따름이에요. 국가대표 발탁 소식은 자다가 들었어요. 오전에 낮잠 자다가.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원래는 안 받으려고 했어요. 잘 때는 전화를 안 받거든요. 그런데 확인해보니까 구단 홍보팀장님한테서 온 전화더라고요. 그래서 받았죠. 저보고 국가대표에 뽑혔다고 하는데, 잠이 덜 깬 상태라 꿈인 줄 알았어요. 그 전화 끊고 바로 누나한테 전화했어요. 그랬더니 누나가 맞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좋았는데요, 졸려서 다시 잤어요. (웃음) 그날부터 전화도 엄청 오고 숙소랑 경기장으로 기자 분들도 많이 찾아오고 얼떨떨했어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자고 일어나보니 스타가 됐다는 말은 바로 염기훈을 보고 하는 말인 듯싶다. 생애 첫 국가대표 선발의 기쁨을 누린 지 하루가 지났을까. 다시 한 번 그를 위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대표팀에도 뽑힌 것이다. 그의 파주 입성은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됐다.
“그래도 처음 파주 들어갔던 날, 진짜 뻘쭘했어요. 처음 간 거여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진짜 한 명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되나 걱정했어요. 그것도 방을 두 명씩 썼으면 룸메이트랑 친해졌을 텐데 한 명 씩 썼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랬죠. 그전에 소집되기 바로 전에 울산경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이)종민이를 잠깐 봤어요. 형범이가 친하게 지내라고 소개시켜줬거든요. 그래서 종민이랑은 쪼금 알았거든요. 그런데 많이 안 것도 아니어서 진짜 처음에 들어가서 어떻게 적응해야할지 몰랐어요. 그런데 조금씩 같이 운동하다보니 다들 먼저 와서 말도 걸어주고 그러더라고요.”
“합숙기간동안 (김)남일이 형이 많이 챙겨줬어요. 원래 형이 장난을 잘 안치는데 먼저 와서 장난도 쳐주고, 첫 경기 앞두고는 이렇게 하는 거다, 하면서 조언도 많이 해줬어요. (김)동진이 형도 많이 챙겨줬고요. 동진이 형이 먼저 제 방으로 찾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그랬어요. 동진이 형이 자기는 첫 A매치가 약한 팀이랑 해서 괜찮았는데 전 강팀이랑 한다고 많이 힘들 거라고, 패스도 쉬운 거부터 먼저 천천히 하면 경기가 좋아질 거라고 이야기해줬어요. 나중에 가나전 끝나고 나서는 다 친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많이 알게 됐어요.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대표팀 들어있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항상 좋았어요.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거 있잖아요. 제가 딱 그랬어요.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돼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좋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얼굴 가득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생애 첫 국가대표 발탁의 설렘이란 이런 거구나. 듣는 내내 그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참, 그러고 보니 가나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그에게 가나전은 첫 A매치 데뷔전이었으니까.
“저는 정말로 뛸 줄 몰랐어요. 경기 전날 친구랑 통화하는데 친구가 그랬어요. 가나전에는 아시안게임 멤버 위주로 뛸 거라고. 제가 뛸 수 있을 거라는 기사를 봤다면서 기도 많이 하고 자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만해도 기운 내라고 친구가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뛰게 되도 후반에 교체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점심 먹고 다 같이 모여 미팅하는데 스크린에 제 이름이 뜨는 거예요. 선발로 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경기장에 도착해서 애국가가 나오고 태극기가 올라가는데, 그런 건 처음이잖아요. 소름이 쫙 끼쳤어요. 태극기가 쭉 올라가는 걸 보면서 기도하는데 닭살이 팍팍 돋는 거예요. 관중들이 응원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데 그때 국가대표로 뛴다는 사실을 실감했어요.”
“아, 국가대표 돼서 놀랐던 게 하나 또 있는데요, 버스를 타고 파주에서 상암까지 가잖아요. 그런데 경찰차가 우리를 호위하는 거예요. 신기했어요. 처음이잖아요. 저는 또 그런 게. (웃음) 출발하려고 하는데 경찰차랑 오토바이가 6대 정도 왔더라고요. ‘왜 왔지?’ 혼자 속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호위하려고 온 거였어요. 신호를 한 번도 안 받고 상암까지 쭉 갔어요. 와, 좋다. 그랬죠. 사람들이 지나가는 우리보면서 손도 흔들어주고. 진짜 좋았어요. (웃음)“
그렇지만 분명 떨렸으리라. 처음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더구나 가나는 분명 강팀이었다. 그에게는 혹독한 신고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긴장을 진짜 많이 했어요. 첫 A매치다보니 긴장하느라 전반전 때 제가 많이 위축이 됐어요. 게다가 세계적인 선수들이잖아요. 우리나라 선수들하고 틀린 점이 볼을 잡았을 때의 그 여유. 볼이 왔을 때 2~3명이 붙어도 침착해요. 위험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빠져나와요. 볼 패스며 컨트롤도 틀리고. 가나 선수들은 컨트롤도 한 번에 딱딱 해주거든요. 거기다 힘도 너무 좋고 몸도 진짜 딱딱한 거예요. 몸싸움을 하는데 벽이랑 부딪히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얘기해보니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했더라고요. 그런 상태로 전반전이 끝났는데 남일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왜 팀에서 하는 것처럼 안하냐고. 드리블도 하고 그러지 왜 패스만 하고 소극적으로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후반전에도 못했지만 전반전보다는 그래도 나았어요.”
“그 덕분에 후반 18분에 제 이 왼발로 슈팅을 날릴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골키퍼가 막아서 아쉬웠지만 동현이가 골로 연결시켰잖아요. 좋죠. 그래서 제 이야기도 나오는 거잖아요. 못 넣었으면 아무 이야기도 안 나왔을 거예요. 물론 제가 넣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요. 형들도 그랬어요. 너 그거 넣으면 대박이었을 거라고. 신인왕 무조건 네가 됐을 거라고. (조)원희도 그랬어요. 기훈아, 너 그거 넣으면 진짜 대박 터트린 건데 아쉽다. 그때 옆에서 누구였더라. 종민인가. 아무튼 누가 원희야, 너도 데뷔전 때 골 넣었잖아. 그랬더니 원희는 아, 그게 뭐 골이었나, 하면서 웃더라고요.”
“그렇지만 가나전 끝나고 나서 진짜 경기는 못했어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사고 후에 두 달 만에 경기를 뛴 거잖아요. 사실 상하이 전, 대구전 때까지는 몸이 좋았어요. 그런데 대구전 끝나고 나서부터는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쉬다가 하다보니까 몸이 너무 다운돼서 뛰지도 못하고 자신감이 너무 많이 떨어졌어요. ‘큰일 났다. 이렇게 자신감이 떨어져서 국가대표 가서 잘할 수 있을까?’ 그랬어요. 제 몸을 제가 아니까. 그런데 막상 가나전 끝나고 나니까 자신감이 다시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운동하는데도 운동이 너무 재밌었어요. 정말 국가대표 갔다 와서 얻은 게 너무 많아요. 제일 크게 얻은 것은 자신감. 자신감을 다시 얻었다는 게 제일 좋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돼서 좋고, 큰 경기 뛰어봐서 좋고, 경기장에서 어떻게 해야겠다고 많이 배웠고 얻었고. 정말 국가대표 갔다 와서 진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왔어요. 아주 보람차게, 그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거 같아요.”
시리아와의 아시안컵 예선이 열리기 전날, 염기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엔트리에 못 들면 관중석에 가서 열심히 응원하면서 보려고요. 그때 보면 인사해요.” 그러나 그 말은 이뤄지지 않았다. 염기훈, 그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저도 진짜 몰랐어요. 파주에서 인터넷하다 최종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 거 보고 그때 알았어요. 저는 정말 가나전 엔트리에 든 것보다 시리아전 엔트리에 든 게 훨씬 더 좋았어요. 시리아전 때는 정예멤버가 나가는 거니까 전 엔트리에 들지도 못하고 그냥 구경만 할 줄 알았거든요. 진짜 좋았죠. 게다가 시리아전 때 애국가 다 끝날 무렵에 감독 선생님이 부르는 거예요. 불러서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저를 그냥 뽑은 게 아니라 많이 지켜보고 뽑은 거라고. 첫 A매치 떨리고 힘들었던 거 안다고. 재능이 많은 선수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후반전에 뛸 준비를 하라고. 갑자기 기분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후반 준비하라고 하니까요.”
“제가 생각해도 시리아전 때 진짜 몸이 좋았어요. 자신감도 많이 올라온 상태였고요. 그래서 준비 제대로 하고 있었죠. 그런데 기회가 안 오더라고요. 그런데 확실히 제가 가나전 때 뭘 못 보여줬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천수 형이 아닌 저를 교체선수로 넣기에는 부담이 있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어요. 그날 어떤 기자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 기사 봤냐고, 기분 안 나빴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기분 나쁘기보다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고. 가나전 때 뭔가 보여줬다면 기회를 잡았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솔직히 천수 형이 저보다 실력이 좋잖아요. 경험도 많고, 그래서 전 개의치 않아요. 실력 차이가 아직은 커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죠.”
“사실 이번에 대표팀 와서 잘하는 형들 보면서 제 실력을 많이 깨달았거든요. 특히 (설)기현이 형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괜히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게 아니구나. 정말 확실히 느끼고 왔어요. 힘이면 힘. 움직임이면 움직임. 다 틀려요. 일단은 제가 왼쪽에 서면 형은 오른쪽에 서고 위치는 틀리지만 같은 포메이션이잖아요. 사이드니까. 움직임을 자세히 보면 아, 진짜 대단해요. 수비가 다 떨어져요. 수비를 다 따돌리고 나와요. 움직임이 진짜 좋아요. 그 움직임을 정말 배우고 싶어요. 사실 처음 파주 와서 기현이 형이랑 친해지기가 어려웠어요. 처음 만났고 같이 생활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처음 기현이 형이 저한테 팔 왜 그러냐고 묻더라고요. 형도 사고 난 이야기를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직접 보니까 놀랐나봐요. 저한테 언제 사고 났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7월 25일에 났다고 하니까 어, 별로 안됐네. 진짜 너 대단하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다행인데, 머리 안자라니? (웃음) 그렇게 묻길래 안 자라요, 그랬죠. 이번에 형 보면서 해외에서 뛰는 모습도 부러웠고, 언젠가 저도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생애 가장 신났던 일주일은 그렇게 갔다.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동료들은 “이게 누구신가. A 대표팀 선수 아닌가?” 하며 놀려댔다. 그렇지만 다들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부활의 신호탄
“요즘 저희 팀이 단합도 정말 잘됐고, 팀 분위기도 아주 많이 좋아졌어요. 분위기 탄 거 같아요. 일단은 제가 다쳤잖아요. 사고 난 후 거의 한 달 반을 쉰 거니까 짧은 기간이 아니죠. 그런데 복귀전에서 이기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결국 4강 올라가게 됐고… 저 뿐만 아니라 팀, 선수들 모두 좋은 것 같아요. 또 제가 골도 넣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좋고요. 복귀하기 전부터 형들이 우스갯소리로 “빨리 네가 돌아와야 한다” 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장난 식으로 이야기했어도 기분 참 좋았어요. 형들이 그만큼 저를 믿어준 거니까요.“
다시 복귀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오래 기다리며 인내했던가. 염기훈, 그는 지난 9월 20일 열린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상하이 선화와의 경기에서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그가 후반 23분 그림 같은 헤딩골을 성공시키는데 이어 후반 32분에는 시원한 코너킥으로 정종관의 골을 도왔다. 지난 7월 19일 대구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이후 꼭 두 달만의 일이었다.
“사실 저희가 처음 전반에는 게임이 잘 안 풀렸잖아요.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어요. 이길 수 있다는 생각만 있었거든요. 진짜 저희 다 잘한 것 같아요. 저는 뭐 잘… (웃음) 전반에 제가 찬 프리킥이 두 번 다 아쉽게 안 들어갔는데… 처음엔 저도 들어갈 줄 알았어요. 딱 때렸을 때 됐다 싶었는데 빗나갔어요. 두 번째는 (정)종관이 형이 건드려서 밖으로 나갔어요. 나중에 형들이 종관이 형한테 왜 건드려서 방해했냐고 그랬는데, 형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나 중국이야. X맨이야. 몰랐어?“ (웃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저희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큰 경기 뛰면서 많이 강해졌거든요. 감독님이 항상 그러셨어요.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뛸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프로 와서 한 번도 못 뛰는 선수들도 많잖아요. 다들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열심히 뛰었어요. 진짜 투혼이죠. 그래서 좋은 결과가 온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 자신의 발끝에서 역전골이 터지던 그 순간의 이야기는 쏙 뺀다.
“공격수면 누구나 골을 터뜨려야하는 부담감이 있잖아요. 게다가 전 이제 막 복귀를 한 상태라 부담이 컸어요. 포인트를 올려야 자신감도 올라갈 텐데. 그런 부담감 속에서 복귀하고 2게임 만에 골을 넣어 우선은 무척 기분 좋았고 또 감격스러웠어요. 그 순간 기쁨을 어떻게 표현 못하겠더라고요. 2대 1로 역전했지만 1골을 더 넣어야 우리가 4강에 올라가는 거잖아요. 제 골로 3대 1이 되는 순간, 이제 됐다. 올라갈 수 있겠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런데 그 짧은 시간동안 사고 이후로 침울하게 보냈던 시간들도 같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서 더 감격스러워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저희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다른 때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골 넣고 그 짧은 시간에 사고 나서 힘들었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여기 팔 보세요. 제 상처가 이래요. 여기 소독할 때 만날 울었어요. 소독약을 붓기만 하면 괜찮은데 솔 같은 걸로 막 긁어요. 여기 다 긁어내야한다면서 세게 긁었는데 너무 아파서 정말 만날 울었어요. 아침저녁으로 만날 울고 그랬던 게 막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다치기 전까지는 몸이 진짜 좋았는데 이제 다시 복귀해서 잘할 수 있을까? 정말 병원에서 혼자 별별 생각을 다했어요. 그런데 복귀하자마자 두 번째 경기 만에 골을 넣었어요. 기분 정말 좋았죠. 저도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봤어요. 골 넣는 장면. 진짜 제가 봐도 울려고 하는 게 보이는 거예요. 울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프로 와서 넣은 골들 중 제일 기분 좋았던, 그래서 절 행복하게 만들어준 골이었어요. 데뷔골도 좋았지만 그 골이 더 좋았어요.”
다친 머리보다 마음이 더 아픈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프로는 냉정하잖아요. 잘하면 뛸 수 있지만 못하면 그럴 수 없으니까요. 신인인데, 좋은 모습 보여줘야 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잘할 수 있을까? 몸 상태는 돌아올까?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혼자서 속상해했죠. 아쉬웠고, 또 답답했고.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순 없었어요. 걱정하는 거 아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안부를 물으며 걱정했다. 그 가운데 가슴으로 눈물 흘리던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와 팀 동료 김형범이었다.
“9월 16일에 있었던 대전전이 사고 후 복귀전이었잖아요. 그날 경기 끝나고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하셨대요. 인터넷으로 제 사진을 보셨는데 사진에 이마 흉터가 그대로 나왔다면서요. 병원에서 어머니께서 울던 모습이 생각나요. 사고 나고 다음날 소독 때문에 붕대 풀던 날, 제 옆에서 막 우셨어요. 큰 상처인 줄 모르셨거든요. 어머니가 오셨을 땐 붕대를 감은 상태라 상처를 볼 수 없었거든요. 그냥 조금 찢어졌구나, 하고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제 상처가 굉장히 심했거든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어요. 이렇게 많이 다쳤구나, 하시면서요. 그러더니 막 우시더라고요. 그런데 상하이 선화전 끝나고 누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엄마 운다고, 옆에서 울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음… 많이 기쁘셨나봐요. 동네 분들하고 다 같이 오셨는데 좋은 모습 보여드린 것 같아 저도 기뻐요.”
“그리고 (김)형범이… 형범이가 경기 전날 제 방에 와서 그랬어요. 제가 해줘야한다고. 지난 대전 경기 때부터 계속 저보고 운동장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해줘야한다고 그랬어요.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 골이 터지던 순간, 저희 어머니 손 잡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대요. 경기 끝나고 나선 저한테 달려와서 껴안는데, 눈이 엄청 빨갛더라고요. 거의 울 것처럼요. 그래서 저도 고맙다며 껴안았죠. 사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형범이는 계속 미안하다 그랬어요. 그때마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고 했고, 저는 오히려 그게 더 미안했어요. 이번에 큰 일 한번 같이 치루고 나니까 둘 사이가 더 끈끈해진 것 같아요.”
상하이 선화와의 경기는 그에게 기분 좋은 승리만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우정, 다시 찾은 자신감,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쁨. 그로서는 잃었던, 그래서 잠시 잊을 수밖에 없던 것들과 조우한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그러더라고요. 사고 난 후에 제가 더 성숙해진 것 같다고. 다친 게 어떻게 보면 참 속상한 일이지만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에게 더 좋은 약이 됐다고 생각해요. 다치고 나서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었고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늘 희망을 꿈꾸는 남자
누군가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며 엄지를 세울지도 모른다. 두 달 만에 교통사고 후유증을 이겨내고 태극마크를 달았으니까. 그러나 염기훈, 그가 진정 대단한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했어요. 운이 좋았던 게 저희 중학교 축구부에 선수가 별로 없었어요. 그 덕분에 축구 시작하자마자 1달 만에 경기를 들어갔어요. 아무 것도 모르고 막 기본기 배우고 그럴 땐데 그때부터 들어가서 뛰었고, 고등학교 때도, 또 대학교 때도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뛰었어요.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진짜로 힘들 때 그걸 견딜 수 있을까, 하고요. 선수가 항상 좋을 수가 없잖아요. 언젠가 슬럼프도 올 텐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요. 어려운 순간과 만났을 때 힘들지만 이겨내는 사람이 있고 계속 고립된 상태로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음… 그렇지만 저는 이겨낼 것 같아요. 사실 고등학교 때 진짜 많이 힘들었거든요. 진짜 운동도 그만둔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때 이겨낸 것처럼 이겨낼 것 같아요. 결국에는.”
“원래는 마라톤을 먼저 시작했어요. 4학년 때 처음 마라톤을 하다 6학년 때 근대2종(수영,육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제 꿈은 축구선수였어요. 혹시 김기선 선수라고 아세요? 제가 어렸을 때 김기선 선수가 저희 앞집에 살았거든요. 그 영향이 엄청 컸어요. 어렸을 때 그 형을 봤을 때. 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멋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축구를 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저희 중학교에 수영장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연습하다 화장실을 가고 싶지 않은데도 화장실 갔다 온다고 나와서 한참동안 축구부 연습하는 걸 혼자 구경했어요. 진짜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이미 근대2종을 하고 있으면서도 축구가 진짜 하고 싶었어요.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엄마, 아버지께 울면서 빌었죠. 한 달 동안. 나 축구 시켜달라고. 아버지는 됐다고, 너 이거나 열심히 하라고 딱 잘라서 말씀하셨어요. 밥도 안 먹고 만날 그랬죠. 한 달 거의 됐을 때였나. 아버지가 축구화 사주시면서 그럼 축구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시작한 축구였으니까 처음에는 다 재밌었어요. 축구하는 게 그저 좋았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피가 모자랐어요. 빈혈이었어요. 빈혈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선수들이 몸 풀 때 운동장을 한 다섯 바퀴 뛰거든요. 천천히 뛰잖아요. 천천히 뛰는데도 저는 세 바퀴나 따라 잡혔어요. “준비 시작!” 하면 전 걸어요. 뛰지를 못하니까. 어지럽고 다리에 힘도 없고 그러니까. 후들후들 거리면서 걷다가 세 바퀴를 따라잡혀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아, 운동 그만 둬야겠다. 뛰지도 못하고. 매일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경기장에서 뛰지를 못하니까요. 축구선수가 잘 뛰어다녀야하는데 뛰지 못하니까 정말로 운동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진짜 체력이 떨어진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한 1년 정도를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그렇게 보냈어요.“
“그러던 중 선생님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3학년 올라가는 겨울이었어요. 검사를 했더니 빈혈이라고 나왔어요. 정상인 수치가 13~15인데 저는 7~8 이래요. 피가 그렇게 모자랐어요. 약을 일단 먹어보자고 해서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죠. 6개월 정도 먹어봐야하는데 3개월 쯤 됐을 때부터 몸이 완전 틀려진 거예요. 항상 뒤에서 뛰고 막 쳐져있던 난데 어느 순간부터 앞에서 애들 다 끌고 뛰는 거예요. 뒤에서 뭐하냐고 빨리 오라고 하면서. 자신감이 그때부터 막 생긴 거예요. 뛰는 게 힘들지도 않고 자신감이 생기니까 그때부터 경기하면서 막 뛰어다녔어요. 경기 때마다 그냥 막 이쪽 저쪽 정신없이 뛰어다녔어요.”
“요즘도 그때 먹던 약을 먹고 있어요. 안 먹어도 되는데요, 왠지 걱정이 돼서요. 미리 사놓은 게 있어서 그거까지만 먹고 이제 안 먹으려고요. 헤모큐라고 하세요? 보통 임신한 여자들이 먹는 건데 제가 먹는 게 그 약이에요. 한번은 헤모큐 사러 약국 갔는데 저보고 그러는 거예요. “아내, 임신하셨어요?” (웃음) 헤모큐가 절 살렸죠. 진짜로 헤모큐가 저를 살렸어요. 제가 그랬어요. 아, 내가 진짜 성공하면 헤모큐 모델 한다고. 돈 안 받고 내가 모델 한다고. 거의 5년 동안 먹었는데 이번에 사고 나면서 약 먹으면서 살린 피 한 번에 다 쏟았죠.“
간간히 웃으며 말했지만, 또 간간히 한숨도 섞여 나왔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당시 가슴으로 흘려야만했던 눈물도 함께 서려나왔다. 그도 고백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진짜 힘들었어요, 라고.
“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면 정말 빈혈 밖에 생각 안나요. 경기할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이빨 꽉 물고 뛰었어요. 고등학교 감독 선생님께 정말 고마운 건 2년 가까이를 몸이 안 좋아서 못 뛰었는데도 계속 게임을 뛰게 해주신 거예요. 다른 감독 선생님 같으면 애가 못 뛰고 그러면 게임을 안 뛰게 했을 거예요. 그런데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계속 베스트 11 안에 저를 넣어줬어요. 한 번도 안 뛰게 하신 적이 없어요. 그렇게 저를 믿고 뛰게 해주셨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중학교 때 감독 선생님이랑 고등학교 때 감독 선생님, 두 분이 쌍둥이세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동생이셨는데 그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저를 많이 보셨어요. 중학교 때는 제가 잘 뛰어다녔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저희 부모님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세요.”
나를 키운 호남대학교
2년간 그를 괴롭혔던 빈혈은 고3 5월이 돼서야 떠났다. 진로도 그때 정해졌다. 비록 테스트를 받고 들어간 곳이지만 호남대는 지금의 염기훈을 만들어준 소중한 곳이다.
“대학 때 정말 좋았어요. 제가 1,2학년 때만해도 그렇게 실력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3학년 때부터 부쩍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대학에 와서 이만큼 늘어 프로에 간 거예요. 호남대에서 보낸 시간이 제 축구인생에서는 제일 큰 도움이 됐어요.”
그 역시 2004년 LG컵4개국친선대회 멤버다. 이현진(수원), 조용형(부천), 배기종(대전), 최효진(인천), 권순태(전북) 등 요즘 각 구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선수들과 함께 뛰었고, 염기훈은 그중 에이스였다.
“기억 기가 막히게 나죠. 베트남 갈 때 그때는 다 처음 보는 애들이었어요. (배)기종이는 고등학교 때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애들이었어요. 같이 운동하면서 너무 재밌었어요. 잠깐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멤버가 아니었어요. 광주에서 모였다, 울산에서 모였다, 나중에는 영국도 같이 갔어요. 몇 개월을 같이 하다보니까 조직력이 엄청 좋아졌어요. 그때 저희가 우승했잖아요. 5대 4로 이겼는데, 4대 3인 상황에서 기종이가 PK 만들었잖아요. 기억나요? 그때 제가 안 차려고 했어요. 안 차려고 했는데 애들이 다 와서 하나같이 하는 말이 ”기훈아, 침착하게!“ 그러면서 저를 막 밀어요. 솔직히 안 차려고 했어요. 못 넣으면 제가 다 책임져야하니까. (웃음) 안 차려고 하는데 애들이 하나같이 와서 ”기훈아, 차분히. 골대 안으로만 넣어.“ 그러면서 저를 막 미는 거예요. 이걸 참, 알았다. 알았다, 하면서 찼는데 한번 막혔잖아요. 튕겨나간걸 다시 넣었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죠. 다행히 우리가 이겨서 좋았죠. 경기 끝나고 (권)순태가 엉엉 울더라고요. 자기 때문에 골 많이 먹힌 거라면서. 그런데 저도 옆에서 같이 울었어요. 대회 나가서 우승한 게 처음이었거든요. 3학년 때까지 준우승만 4번했어요. 대학 4년 동안은 준우승만 5번이고요. 우승 처음 하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그 대회 가서 골도 많이 넣고 어시스트도 많이 하고 그 계기로 제가 더 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베트남 때는 모든 게 다 좋았죠. 딱 하나 빼고요. (웃음)”
“여기 상처 하나 있잖아요. 안 보여요? 여기 코 밑에서 입술까지 쭉 그어진 흉터 안 보이세요? 이거 어떻게 난 거냐면요, 그때 저희 호텔 옥상에 수영장이 있었어요. 다 같이 수영하는데 다이빙하면서 놀았거든요. 그런데 바닥에 쑥 들어간 부분이 있었어요. 점점 바닥이 깊어지는 수영장이었는데 저만 반대로 뛰어서 얇은 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박았어요. 팍 박아서 일어났는데 피가 줄줄줄. 손으로 계속 막아도 피가 계속 나는 거예요. 겨우 멈추고 약을 발랐는데 약이 굳으니까 콧물 나온 것처럼 된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다들 찔찔이라고 부르면서 놀렸어요. 코 찔찔 흘린다고. 베트남 가서 찍은 사진 보면 여기 코밑이 하예요. 이 하얀 게 다 약 때문에 그런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대학축구는 염기훈으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2006 K-리그 신인왕은 염기훈이 탈 것이라 예상했다.
“대학교 때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사실 대학교 때만해도 제가 공격에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골도 많이 넣고 항상 자신감 있게 플레이를 하니까 주변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주신 것 같아요. 또 제가 있던 호남대도 예선에서 탈락하는 게 아니라 항상 꾸준히 올라가서 좋은 성적 거뒀으니까요. 그렇지만 신인왕은 잘 모르겠어요. 신인왕 관련 기사가 많이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저랑 대전시티즌 (배)기종이, 대구FC (장)남석이 이야기가 꼭 같이 실리잖아요. 아직 잘 모르겠는 게 기록상으로 제가 앞선 게 아니니까요.”
“원래 둘 다 대학선발 때부터 다 알던 친구들이에요. 제 복귀전이 대전과의 경기였잖아요. 그때 경기 시작 전에 기종이가 묻더라고요. 괜찮냐고, 머리는 어디 갔냐고. 그래서 다 나았다고 너 너무 잘나가는 거 아니냐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냥 웃더라고요. 제 머리 보면서 웃었는데 전 기종이 놀릴게 없어서 그냥 넘어갔죠. (웃음) 사실 기종이가 미웠던 적이 한번 있어요. 3월 29일, 저희 홈에서 대전이랑 경기할 때요. 그때 제가 데뷔골을 터뜨렸거든요. 저는 제가 골 넣고 이대로 끝날 줄 알았어요. ‘아,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기종이가 들어와서 골 넣었잖아요. 속으로 안 도와준다. 안 도와준다. 그랬죠. (웃음)”
“9월 23일, 대구전 때도 경기 전에 남석이를 만났어요. 남석이도 제 머리 보더니 머리 어디 갔냐며 웃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남석이 배 만지면서 살 왜 이렇게 많이 쪘냐고 그랬죠. (웃음) 오랜만에 봤더니 살이 많이 쪘더라고요. 배도 잡히고 볼도 통통해지고. 지금은 남석이가 제일 잘 나가고 있잖아요. 9골에 2도움인가요? 남석아, 천천히 해. 나 쉬는 동안 너, 너무 달렸다.”
“솔직히 기종이, 남석이 다 의식돼요. 의식 안한다면 거짓말이고요. 아무래도 신인왕이라는 게 일생에 한번만 받을 수 있는 상이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직은 팀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공격수는 다들 골 욕심이 많잖아요. 골로 보답해야하니까요. 하지만 골을 넣어야겠다는 개인적인 욕심보단 팀을 먼저 생각하고 싶어요. 요즘 팀 성적이 안 좋아서 어려운 상황인데, 욕심 같은 건 버리고 팀을 위해 뛰고 싶어요. 팀에 보탬이 된다면 결국 저에게도 좋은 거잖아요. 팀이랑 같이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만 가지려고요. 열심히 해야죠.”
전주성에서의 시작
신인왕 욕심은 버렸다. 자신보다는 팀이 먼저다. 염기훈의 평소 성품을 생각한다면 그 말은 진심이 분명하다. 그만큼 어느새 그에게 있어 전북현대는 특별한 ‘우리 팀’ 이 됐다.
“저는 대학교 감독 선생님께 다 맡겼어요. 신연호 선생님께 선생님이 가라는데 가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계약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 오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에 얽매지 말라고 계약을 일찍 시켜주셨어요. 그래서 전북이랑 5월에 계약을 했죠. 전북은 제가 가고 싶은 팀이었어요. 전북 가고 싶다고 만날 그랬어요. 연습게임 하다보면 정말 이 팀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신연호 선생님이 좋은 팀 갈 수 있게 잘 도와주신 것 같아요.”
좋은 팀이었다. 가고 싶던 팀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래서 프로팀이겠지만.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그 시작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대학교 때는 공이 저한테 오면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수비도 별로 안했어요. 공이 저한테 오면 그때부터 시작하다보니 힘들 줄도 몰랐고요. 프로에 와서 처음 국내전지훈련을 갔는데 게임을 못 뛰었어요. 4-4-2에서 제가 측면을 봤거든요. 엄청 중요한 자리인데 제가 수비를 할 줄 모르니 경기도 못하고 엄청 혼났어요. 처음 프로 가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는데 막상 하다보니까 제가 지적 많이 받으니까 자신감이 막 떨어졌어요. 정말 브라질 전지훈련 가서도 지적을 엄청 받았어요. 아마 제일 많이 혼났을 거예요. 진짜 많이 혼났거든요. 매일 훈련모습을 비디오로 찍었는데 그거 보면서 혼자서 연구도 많이 했고, 연습경기 때 항상 수비를 먼저 생각하면서 했어요. 그랬더니 감독 선생님도 칭찬을 조금씩 해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수비 때문에 많이 혼나다가 브라질 전지훈련 기간에 많이 바뀐 거예요. 공격 뿐 아니라 수비도 많이 하는 스타일로요. 지금은 저도 모르게 수비 쪽으로 내려와요. 이상하게 그게 몸에 뱄나. 항상 수비로 먼저 내려오게 되더라고요.”
뭐든 쉽게 이뤄지는 것은 없었다. 힘이 들 때마다 그는 프로입단 후 처음으로 받은 유니폼을 생각했다.
“대학교 때 프로경기를 보면 형들이 진짜 멋있게 보였어요. 그 모습 보며 ‘프로가면 나도 저렇게 등번호 달고 뛸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프로 왔을 때 처음 받은 유니폼에는 이름만 박혀있었어요. 염기훈. 이렇게 제 이름이 찍힌 유니폼을 브라질 전지훈련 가서 받았는데, 와… 좋더라고요. 기분이 진짜… 이게 내 이름이 진짜 박혀서 오니까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혼자 방에서 입었다, 벗었다 막 그랬죠. 입어서 보고 벗어서 다시 보고. 좋았어요. 진짜. 지금도 경기 뛸 때마다 유니폼을 보면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제가 프로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서요.”
그 덕분에 프로 데뷔전도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매일 밤 잠들기 전의 기도와 다짐이 이뤄진 것이다.
“매일 밤 항상 생각했죠. 언제 뛸지 모르지만 그때 꼭 열심히 하자. 프로는 항상 최고의 몸 상태를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며 단 1분을 뛰더라도 열심히 하자고 매일 생각했어요. 그래도 슈퍼컵 때 못 뛸 줄 알았어요. 단 10분 뛰어도 열심히 하자. 그런 생각하면서 경기장에 갔는데 출전선수 명단에 제 이름이 있더라고요.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그때도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수비 먼저 하자는 생각으로 했어요. 수비를 먼저 하다 보니 많이 뛰어다녔고 그 때문에 엄청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 덕분에 오히려 저한테 공격기회가 더 많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보니 공격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고요. 경기 끝나고 형들이 다 그러더라고요. 오늘 잘했다고. 데뷔전 엄청 잘했다고.”
그에게 데뷔전 당시 짓눌렀던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처음 와서 번호가 부담됐어요. 번호 정하고 유니폼을 나눠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11번인 거예요. 저는 30번 대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1번을 주니까 저도 놀랬죠. 왜 11번을 줬을까? 고민까지 했어요. 우리나라 11번은 빠르잖아요. 저는 안 빠르거든요. (웃음) 저는 평범한 스피드를 갖고 있는데 아, 난 빠르지도 않은데. 진짜 많이 부담된다. 이걸 어떻게 해야돼나. 그랬어요. 형들도 부담되겠다고 했고요. 처음에는 11번이라는 번호가 참 많이 부담됐죠.”
11번. 결코 가볍지 않은 번호를 달고 그는 그렇게 ‘K-리그 샛별’ 이라는 이름으로 뛰기 시작했다.
“K-리그는 정말 신인에게는 만만치 않은 무대에요. 대학교 때 볼 때는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부딪히고 하다보면 힘들어요. 신인들에게는 참 버거워요. 다 잘하고 경험 많은 선수들 밖에 없으니까. 밖에서 보는 거랑 게임 뛰고 들어가서 보는 거랑 정말 다르고 힘들어요. 프로 와서 축구는 전쟁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진짜. 총만 안 들었지 진짜 전쟁이에요. 이 팀을 못 이기면 내가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하니까. 알게 모르게 신경전도 많고. 축구는 전쟁이에요. 몸싸움도 해야 하고, 부러질 수도 있고, 어느 상황에 다칠지 모르니까. 조심한다고 안 다칠 수도 없는 거니까. 즐겁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기장에서 힘들고 괴롭다고 그만둘 수 없으니까. 늘 집중력 갖고 해야 하니까.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을 거예요. 오늘 저 팀은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말이죠.”
“대학교 때는 항상 공을 갖고 시작했는데 프로 와서는 먼저 생각하고 미리 움직여야만해요. 그런데 그게 엄청 힘들어요. 게다가 프로 1년차는 경기장에서 뭔가 보여줘야 하잖아요. 또 막내다보니 다른 선수들보다 열심히 또 많이 뛰어야 다녀야해요. 전기리그 때 숨이 한 세네 번은 넘어갔을 거예요. 계속 호흡이 여기 턱 밑까지 차서 막 헉헉대고. 숨이 절대 안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도 안 뛸 수 없으니까 숨이 여기까지 오는데도 참고 뛰었죠. 다행히 그러다보니까 체력은 더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전기리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프로적응 과정 중 하나라고 마음 편히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컵 대회부터 몸이 많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볼을 잡으면 우리 선수들이 다 보이는 거예요. 전에는 볼만 보기 급했는데 컵 대회부터는 시야도 넓어졌고 그 때문에 자신감이 많이 올라갔죠.”
“대학교 때는 미드필드 지역만 봤는데 프로 와서는 왼쪽 사이드도 보고, 포워드도 보고 그래요. 컵 대회 때는 포워드가 많이 다쳐서 그쪽에 있었는데, 포워드에서 한 경기 뛰고 나면 온몸이 다 아파요. 하도 몸싸움하다보니까요. 수비들하고 몸싸움 하는 게 엄청 힘들어요. 그게 그렇게 힘들다는 것도 프로 와서 처음 알았어요. 장난 아니에요. 원래 사고 나기 전까지 계속 풀타임으로 뛰었어요. 프로 와서 이번에 사고 나기 전까지 다친 적도 한번 없고요. 아픈데도 없어서 치료실가서 마사지 받은 적도 없어요. 그래서 숙소에 있는 형들이나 선생님들이나 저보고 염장사라고 그래요. 염장사. (웃음) 닥터 선생님들도 그랬어요. 너는 왜 그렇게 치료실에 안 오냐고. 마사지 좀 받으러 오라고.“
갑자기 막 프로 데뷔했던 어느 봄날이 생각났는지 이야기 도중 염기훈은 “제가 처음 프로 와서 어땠는지 아세요?” 라며 웃기 시작했다.
“프로에서 처음 딱 와서 웃긴 게 (웃음) 대학교 때는 선수들이 유니폼을 자기가 챙겼잖아요. 경기시작 전에 자기가 용품들 다 챙겨서 가거든요. 그런데 처음 프로 와서 경기장에 가기 전에 유니폼을 찾는데 없는 거예요. 이상하다. 유니폼을 챙겨야하는데 왜 유니폼을 안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조)진수한테 물어봤어요. “야. 유니폼 왜 안줘? 우리 유니폼 안 챙겨?” 그랬더니 진수가 웃으면서 경기장 가면 유니폼 다 걸어놨다고. 스타킹만 챙기면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냐고 끄덕끄덕하고 갔더니 진짜 걸려있는 거예요. (웃음) 아, 이렇게 걸어놓는구나. 그건 그렇게 넘어갔어요.“
“그런데 몸 풀러 나가면 선수들 다 모여서 관중들에게 인사하잖아요. 저는 그걸 몰랐어요. 그냥 혼자서 공 가지고 놀았어요. 갑자기 옆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어, 다들 어디 갔지?” 그러면서 살펴봤더니 형들이 인사하러 하프라인으로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뭐하는지도 몰랐어요. 왜 하프라인으로 다 같이 뛰어가나. 뭐하는 거지? 살펴봤더니 경기 전에 인사하고 몸 풀더라고요. 그때 인사하고 몸 푸는 것도 배웠어요. (웃음) 대학교 때 몰랐던 것들이라서 처음에는 다 신기했죠. (경기 끝나고 서포터즈에게 인사하는 것도 몰랐나요?) 그거는 TV에도 나오잖아요. 경기 끝날 때 가서 인사하는 건 많이 봤어요. 그래서 그건 알았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인사하고 손을 위로 올려서 박수치는 걸 잘 못하겠어요. 그냥 인사만 하고 그래요. 참 못하겠더라고요. 게다가 다른 선수들은 인사하고 한번 쳐다보는데 저는 인사하고 쳐다보는 것도 잘 못해요. 바로 돌아서요. 앞으로는 쳐다보려고요. (웃음) 빨리 적응하는 게 제일 좋다고 하니까 빨리 적응해야죠.“
아직은 K-리그에 적응 중인 새내기, 염기훈. 그에게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느냐고 묻자 손가락으로 턱 끝을 톡톡, 치며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형들이 그러더라고요. 5년 동안 수원을 한 번도 못 이겨봤다고. 저는 수원전이 그렇게 의미가 크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런데 경기가 끝나자 우리 주무형있죠? 그 형이 막 우는 거예요. 소원 풀었다고. 주무로 여기 와서 처음으로 이겼다고 막 울었어요. 보통 때는 경기 끝나고 서포터즈에게 인사만 하고 왔는데 그날은 서포터즈 앞에서 다들 같이 어깨동무하고 막 춤까지 추는 거예요. ‘어, 다들 왜 그러지?’ 했는데 의미가 그렇게 컸더라고요. 형들도 주무 형도 막 울고 있고 저희 서포터즈도 다른 경기 때보다 엄청 좋아했어요. 이 경기가 참 의미가 컸구나. 중요한 경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음에 수원이랑 할 때도 꼭 이기려고요.” (5월 21일 수원전)
“제가 대학 생활을 광주에서 했기 때문에 상무전 때는 아는 분들이 많이 왔어요. 광주 경기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 날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진짜 잘해야겠다. 경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상무전이 낮 경기였잖아요. 날씨가 더워 처음엔 몸이 상당히 무거웠어요. ‘아, 오늘 경기 진짜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때도 운이 좋았어요. 그날 두골을 넣었는데 두 번째 골은 제가 진짜 운이 좋았어요. 왜 그랬냐면 항상 감독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사이드에서 센터링이 올라오면 항상 네가 잘라줘야한다. 그래야 수비들이 너한테 다 쏠리고 뒤 공간이 난다. 그런 주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도 저는 그런 생각하면서 그냥 잘랐어요. 그런데 골키퍼랑 상대 수비수랑 부딪히면서 공이 흘러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걸 차 넣거든요. (왼발로요?) 오른발로요. (웃음) 오른 발로 차 넣었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제가 그랬잖아요. 항상 골 넣으면 골 세레모니가 바뀐다고. 그때 골 넣고 나서 진짜 힘들었어요. 그래서 골 넣고 그냥 그 자리에 누웠어요. 그런데 괜히 누웠다 싶은 게 다 타요. 제 위로 형들이 여섯, 일곱 명이 다 타는 거예요. 얼마나 무겁던지. 어깨는 아프고. 괜히 누웠구나. 힘들어도 그냥 뛸걸. 그랬죠. (웃음) 광주는 대학 4년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갈 때마다 잘 해야겠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6월 3일 광주전)
“서울전 때 후반 45분쯤에 페널티킥 상황이 났잖아요. 저한테 기회를 주셨는데 제가 그걸 못 넣었어요 4대 1보단 그래도 4대 2가 낫잖아요. 못 넣은 게 무척 아쉽더라고요. 페널티킥이 어렵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또 제일 쉬운 건데 못 넣어서 속상했어요. 나중에 인터넷에서 페널티킥 상황을 찍은 사진을 봤어요. 차기 전. 차고 난 후. 실축하고 나서 어깨 손 올린 연속 사진. 이렇게 따로 따로 나왔더라고요. 한번 사진보고 바로 컴퓨터 껐어요. (웃음) 형들은 그냥 괜찮다고 그랬는데 제가 또 안 괜찮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아쉬운 장면은 자기 전에 항상 생각나거든요. 그럴 때는 잠이 안 오고… 저도 똑같았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하면서 잠을 잘 못 잤어요.” (7월 15일 서울전)
참, 이 새내기 스타는 아직 자신만의 골 세레모니가 없다. 어쩌면 그게 진정 염기훈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골을 넣으면 누구나 다 좋잖아요. 데뷔골은 ‘내가 넣었구나’ 하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어요. 공이 오는 순간 그냥 세게도 아니고 그냥 툭 댔는데 그게 골이 됐거든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제가 평소에 하지도 않은 세레모니를 혼자 막 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하지도 않는 세레모니가 저도 모르게 그냥 되더라고요. (웃음) 대학교 때는 항상 골 넣고 기도를 했어요. 사실 프로 와서 첫 골 넣고 나서 기도를 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손 막 들고 좋아했어요. 형들이 그러는데 골 넣고 나서 손을 들고 뒷걸음질을 쳤대요. (웃음) 그런데 이상한 건 골 세레모니가 넣을 때마다 다 틀려요. (웃음) 컵대회 때는 그냥 혼자 걸어 나왔고, 상하이전 때는 위로 팔 뻗은 채로 혼자 좋아했고, 후기리그 대구와의 경기 때는 그냥 손 하나 번쩍 들고… 다 틀린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그래서 재밌어요. (웃음)“
어느 덧 긴 인터뷰도 거의 끝날 시간이 다됐다. 이쯤에서 인터뷰를 정리하려고 할 때, 진지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스스로 다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 개구진 표정으로 웃던 염기훈은 없었다.
“대학교 때 선발 같은데 갔다 오면 항상 몇 백번 마음속으로 다지는 게 있어요. 건방떨지 말자고. 지금도 똑같아요. 저는 건방 떤다. 그런 소리 듣는 게 제일 싫어요.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더 적극적으로 해요. 더 말 많이 하고 더 열심히 하고 더 뛰고.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항상 그렇게 하거든요. 항상 조심스럽게 다짐해요. 건방 떨지 말자. 그렇게 몇 백번 다짐해요. 이번에도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대표팀에 뽑히자고 다짐했어요. 대표팀 다녀와서 운동 자세가 달라졌거든요. 운동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저를 다시 바꿔놨어요. 한 단계 또 바꿨어요. 그렇지만 생각은 변함없어요. 항상 같아요. ‘열심히 뛰어다는 선수가 되자’는 생각은 항상 갖고, 거기에 더 보탠다면 ‘자신 있는 플레이를 하자’에요. 이번에 자신감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자신 있게 하자.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이번 아시안게임 때도 그렇게 하려고요. 뽑힌 명단을 살펴보면 공격멤버들이 너무 좋잖아요. 주영이와 성국이형과의 경쟁인데 주전을 못 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 실력도 알고 그 선수들 실력을 아니까요. 그렇지만 진짜 열심히 해서 오늘은 5분 뛰고, 다음엔 더 잘해서 10분 뛰고 그렇게 조금씩 늘려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해야죠.“
뭔가 잘난 척을 해도 좋으련만 그는 끝까지 순박했고, 또 구수했다. 바로 내일, 별이 된다 할지라도 처음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을 사람. 그렇게 처음의 마음을 오롯이 기억할 사람. 바로 그가 염기훈이었다.
“처음 홈경기 하던 날이 생각나요. 서포터즈가 응원하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사실 저희 서포터즈가 많은 편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경기할 때 서포터즈의 함성을 들으면 힘이 나요. 기분도 좋아지고 설레어요. 처음에는 정말 많이 설??어요. 서포터즈도 와서 막 응원해주고 그러니까 기분도 좋고 의식이 되더라고요. 몸이 정말 나도 모르게 붕 떴어요. 그분들 보면 처음이나 지금이나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이렇게 많이 응원해주시니까요.
감독님한테도 감사드려요. 조직력을 생각하셔서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도 많이 주고 키우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저희도 가끔 경기 전에 엔트리에 젊은 선수들 밖에 없는 걸 보고 놀랄 때가 있어요. 한번은 경기 전에 11명이 몸을 풀러 나갔는데 나이 많은 형이 (김)현수 형 딱 혼자였어요. 현수 형이 36살이고, 그 다음으로 나이 많은 형이 종관이 형인데 26살이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형이 우리 팀 평균 나이 다 깎는다고 놀렸어요. (웃음) 앞으로도 잘해서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 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항상 저에게 관심 가져주시는 팬 여러분들께 정말 고마워요. 요즘 종종 놀래요. 대표팀 갔다 와서 바로 홈경기가 있었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요. 경기 끝나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제 이름 불러주시더라구요. 원래 없었던 일이었거든요. 그분들 보면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팬들에게 보답하는 건 경기장에서 열심히 하고, 골도 넣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경기장 안에서나 운동할 때나 안 다치고, 멋진 모습, 이기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옆에서 응원 많이 해줬으면 좋겠고 격려도 계속 해주세요.“
눈 아래 쌓여있던 피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전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인터뷰 내내 웃던 염기훈이 나눠준 초록 비타민 덕분이었으리라.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주성이 보였다. 창 너머 전주성은 깊은 밤, 그렇게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별을 보았지.
상암 잔디 위에서
조용히 기도하던 어느 샛별을,
우리는 마음으로 보았지.
깊은 밤, 우리는 보았지.
별들도 잠든 밤,
진주성보다 더 아름다이 속삭이던
전북의 어느 축구 혼을.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우리는 가슴으로 느꼈지.
K-리그 명예기자 권민정, 김정현(사진)
첫댓글 우리염기훈씨 참 순박하네..다 읽으니 꽤 시간걸리네요..ㅎㅎ
정말, 대성할 선수~
재능 있는 선수 꾸준히 발전해 주기를...
대성했으면 좋겠어요
멋있다..ㅜ
길지만 다 읽었음... 진짜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기훈선수만 보면 이뻐 죽겠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