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의 역사
할아버지와 맞담배를?
1653년 (조선효종 4년)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하여 14년 동안 우리나라에 살았던 하멜은 "요즘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우는데 불과 4~5세 된 아이들도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이 시기에는 코흘리개 꼬마가 호호백발 할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받아 들여 졌으며 신하들 역시 임금 앞에서 장죽을 길게 물고 국사를 논했다고 한다. 요즈음 버릇없는 녀석의 대명사가 어른들 앞에서 담배 꼬나물고 담뱃불 빌리는 녀석들인 것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할 듯싶다.
그러나 어느 정도 흡연 문화가 자리를 잡은 인조시대에는 신하들이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높은 용상에 앉은 임금에게 괴로움을 주게 되자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없게 되었다. 일반 평민들 역시 재상이나 홍문관원이 지나가는데 담배를 피우다가 눈에 띄면 일단 길가에 구금을 시켜 놓은 후 나중에 잡아가서 치죄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나오는 이러한 일화는 이미 할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피워대던 일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일이 되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담배의 유래와 기원
담배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을까? 가지과 담배속 식물인 담배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50 여종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지는 아메리카 열대지방이나 서인도 제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담홍색 꽃에 난형의 열매가 많은 종자를 가지고 있다. 특히 흡연용으로 재배되는 것은 니코티아나 타바쿰과 니코티아나 루스티카 2종 뿐이며 현재 한국에서 재배되는 품종은 황색종, 벌리종, 재래종 등이다.
담배가 지금과 같이 전 세계적인 기호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원주민들에게 선물 받은 것을 유럽에 전파하면서부터.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담배가 유럽에 전파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흡연용이 아니라 의료용이나 건강보조 식품 등으로 알려져 더욱 폭발적인 수요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1565년 세빌리아 대학 교수이며 의사였던 니콜라스 모랄레스는 "이 신비로운 약초는 피부병과 신경통을 치료하고 기침, 천식, 위경련 그리고 몸 안의 기생충까지 구제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의사들이나 금연론자들이 들으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조선시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 역시 "담배는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나, 비위가 역할 때, 소화가 안되고 횟배를 앓을 때 특효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담배의 효용이나 재배법은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나 유입 시기나 유입 경로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나라 담배 유입의 일반적인 통설은 대개 광해군 10년 전후(1608~1618)에 일본에서 들어와, 전래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학설은 특히 이수광이 그의 저서인 '지봉유설' 19권에서 "담파고(담배)는 초명이며 남령초 혹은 남초라고도 불린다. 근래 들어서 왜국에서 전해졌다" 라고 기록해 놓음으로써 그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러나 한국담배인삼공사의 홍보자료에 의하면 오히려 일본 학자들은 담배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한국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담배를 '담파고'라고 불렀는데 이 같은 명칭은 중국에서 상업을 하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이 한자로 담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것 등에 근거하여 일본에서의 유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귀족의 표시 장죽과 궐련
남초, 남령초, 담바고, 연초 등으로 불리던 담배는 말린 잎담배를 잘게 썰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장죽이나 곰방대가 없으면 피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장죽은 담배를 태우는 담배통과 빨아들이는 물부리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설대 사이가 멀었기 때문에 하인이 없이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다. 하인을 둘 수 없었던 서민들은 설대가 짧고 모양이 단순한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담배 한 쌈지가 은 한 쌈지와 비교될 정도로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과중한 끽연은 서민들의 가계에 무리한 부담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각종 구황 작물과 함께 조선 중기의 농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안겨준 효자 작물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매된 궐련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후 미 군정청에서 광복을 기념하여 제조, 발매한 '승리'였다. 한 갑에 3원이었던 승리는 길이 6cm의 필터없는 막궐련 10개가 들어 있었다. 영문, 일문, 한자등이 잡다하게 도안되어 그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승리 담배는 발매 되자마자 '흰 담배'라는 별명을 얻으며 흰 담배를 물고 멋 부리는 사람들은 마치 최상류층의 사람처럼 대우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서민들은 쌈지 혹은 봉지담배라고 불리던 풍년초를 곰방대에 넣어 피우거나 아니면 신문지에 말아 피웠기 때문에 비록 필터가 없는 막궐련 이었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승리'는 기념담배였기 때문에 번듯하게 포장된 궐련으로 나왔으나 그 후에 나온 '공작'이나 '무궁화'등은 낱개비를 종이띠로 묶어 팔았으며 가격 변동도 아주 심해 한국 전쟁 이후에는 아예 가격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화랑 담배 연기속에
북한이 단독 정권 수립을 선언한 후에 남쪽에서도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때 정부 수립을 기념하여 발매된 담배가 '계명'이었다. 비록 3개월 남짓한 발매 기간이 전부였으나 계명은 푸른 하늘색 바탕의 하부에 대한민국 지도를 백색으로 나타내고 그 위에 수탉이 서서 새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의장으로 새 정부의 탄생을 축하했다
민간 담배 연구가인 이승모 씨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첫 담배는 미군정청하에서 발매된 '승리'가 아니라 '계명'이었다고 강조하였다. 막궐련 담배는 이후에도 '샛별', '건설', '백양', '재건' 등 많은 종류가 발매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발매된 '화랑'과 '새마을'은 장년층을 중심으로 많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담배.
화랑은 1949년 5월1일 부터 발매된 국군용 특수 담배였다. 화랑의 의장은 황색 바탕 마름모꼴 육각형 안에 육, 해, 공군의 상징 마크를 백색으로 도안하고 암적색의 글씨로 화랑 글자를 표기하였다. 이후 화랑 담배는 8차에 걸쳐서 도안이 변경되었으며 군인들의 애호품으로 사랑받다가 81년 12월 단종되었다.
필터 담배의 시작, 아리랑
1958년에 발매된 '아리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필터 담배로서 애연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원래 최초의 아리랑은 종이와 천을 말아서 필터로 사용함으로써 흡연감이 자연스럽지 않아 애연가들에게 많은 불평을 샀다. 그러나 곧 필터를 수입하여 사용하고 국산 필터까지 개발하여 사용함으로써 애연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88년 12월 최종 단종 되었다.
1965년 7월7일에 발매된 '신탄진'은 우리나라 애연가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담배 중의 하나였다. 신탄진은 1974년 단종 될 때까지 축소 포장 담배인 '스포츠'와 '자유종'이라는 50본들이 통담배까지 발매되었다.
신탄진의 폭발적인 인기를 가라 앉혔던 '청자'는 고급 알루미늄 금박에 봉황이 청자를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럭셔리한 분위기의 담배였다. 그러나 원가 상승의 이유로 금박을 금색 아트지로 바꾸고 질도 많이 떨어지면서 수요 역시 많이 줄게 되었다. 하지만 청자는 현재까지 발매되고 있는 담배 중 가장 오래된 담배이다.
30대 이후에서 40대 초반의 애연가들에게 '거북이'라는 애칭으로 더 친근한 '거북선'은 당시 최고의 필터를 사용하여 애연가들을 사로 잡았다. 1979년 4월부터는 저 니코친, 저타르 담배를 기존 담배와 병행 판매하여 더욱 인기를 얻었었다. 거북선은 한동안 우리나라 애연가들에게 "담배는 거북선"이라는 등식을 낳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다가 1988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발매되고 있는 담배 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던 '솔'은 '흰솔', '청솔', '홍솔' 등 다양한 취향의 담배들로 애연가들의 기호를 충족 시켜 주었다. 특히 흰솔은 '빽솔'이라는 애칭과 함께 젊은 층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디스' 나 '팔팔' 등에 주력 품종으로서의 자리를 내주고 서민용 담배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담배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원'과 '에세' '레종' 등은 잇따른 담배 시장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선전하고 있다.
담배 한 모금에 인생을
쌈지 담배에서 장죽으로, 장죽에서 궐련으로 사람 사는 모양만큼이나 담배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가난했던 50, 60년대와 가난을 벗어버리고자 몸부림치던 70년대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을 함께 보냈던 담배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연과 외산 담배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외국 담배사들 역시 소매점의 간판이나 진열대 등을 교체해주면서 대단위의 물량 공세를 펴는 한편 팔팔 담배의 필터에 다량의 수은이 함유되어있다는 식의 유언비어 등이 퍼져 국산 담배가 수모를 겪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금연 운동으로 이제 흡연을 즐기는 이들은 마치 죽음을 즐기는 약물 중독자들과 같은 인식을 얻게 되었으며 갈수록 확대되는 금연 공간 등으로 인해 흡연자들의 입지 역시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흡연을 즐기고 있다면 담배는 분명 천 원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며 스트레스의 해소나 심리적인 안정감의 도움 역시 무시 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또한 국산 담배에 대한 애용도 이제는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애국심에만 호소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미국의 '카멜(CAMEL)'이나 '럭키스트라이크(LUCKYSTRIKE)' 그리고 영국의 '던힐(DUNHILL)' 등은 이미 백년이 넘은 담배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담배들은 단종 기간이 너무 짧으며 신제품 또한 보다 뛰어난 품질의 개발보다는 가격 인상의 얄팍한 상술정도로 인식되어 많은 애연가들을 실망스럽게 만들곤 했다. 우리들에게도 백년을 넘어 사랑 할 수 있는 담배가 생겨나길 기대해 본다.
자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