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회개의 표징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어제 원장수사가 집무실에 붙일 "상담중" 이라는 안내판 글자를 새겨다 주었습니다. 이 또한 저에게는 제 무관심과 나태함을 일깨우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면담성사 보시러 오는 분들이 많이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밤 내린 봄비로 촉촉이 젖는 대지가 은총의 회개로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오래 전 써놓은 ‘봄비’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메마른 대지/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오늘 복음 말씀의 결론을 미리 말씀 드리자면 회개의 절박성입니다. 호기심을 부추기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닌 우리 모두 참으로 회개가 절실함을 보여줍니다. 말그대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요 구원이지 죽어서는 회개도, 구원도 없습니다. 하여 ‘회개의 표징-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복음 후반부 아브라함의 호소가 우리 마음에 안타깝게 와닿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진작 회개했다면 이런 절박한 호소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산다면 절대 전처럼 살지 않겠지만 이젠 죽음으로 다시 이승에서의 삶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죽음으로 영원히 고정되어버린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회개하여 참으로 진짜 살아보라고 우리의 날들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저는 방금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순간 이런 기발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 부자가 살아있을 때, 이런 비유의 내용을 그대로 실감나게 꿈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 부자가 이런 꿈을 꾸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꿈을 꾸었다면 복음의 부자는 스쿠르지 부자 영감처럼 회개하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상상도 했습니다. 스쿠르지 영감에 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스쿠르지 영감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이다. 돈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으나, 어느날 밤 죽은 친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물이다.-
아마 복음의 부자도 오늘 복음 내용을 꿈꿨다면 스쿠르지 영감처럼 회개하여 베푸는 삶을 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부자대신 살아있는 우리가 꿈꾸듯 묵상하며 깨달아 회개하라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비유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복음 전반부 평범한 묘사가 저에게는 충격적 깨달음으로 와닿았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단 세 구절입니다만 한폭의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읽으며 묵상하는 순간, ‘아, 이렇게 부자처럼 생각없이, 의식없이, 영혼없이, 공감없이, 배려없이, 존재감없이, 자기만 알고 살아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완전히 하느님과 이웃에 단절 고립된 이기적 자기 안에 갇힌 수인囚人같습니다. 하늘을 향한, 이웃을 향한 문이 없는 온통 벽속에 닫힌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봐서는 부자가 라자로에 대한 뚜렷한 죄목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죄는 라자로의 대한 전적인 무관심입니다. 라자로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라자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개 돼지처럼 아니 그냥 사물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에게 애완견이나 반려견보다 못한 존재감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니 이것이 진정 회개해야할 대죄인 것입니다. 저승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부자에 대한 아브라함의 답변에서 큰 구렁은 살아있을 때 둘간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오려해도 올 수 없다.”
겉으로는 평범한 둘 간의 사이같지만 내적 골은 이렇게 깊고 넓었으며, 내적 벽 역시 너무 두텁고 높아 도저히 소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부자의 경우를 묵상하면서 얼마전 교황님의 강론 중, “죄인은 구원받을 수 있지만, 부패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고, 부자의 내면이 극도로 부패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얼마전 식탁에서 사과를 깎아먹던 형제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던 사과가 속은 부패해지기 시작하여 잘랐다 먹지 못한 사과가 국그릇에 가득 채워졌던 것입니다. 약간 부패하면 얼른 도려내고 먹으면 되지만 이렇게 다 썩으면 버릴 수뿐이 없습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부패해 버리면 사람도 버려질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내면은 온통 부패한 사과같은 모습이 부자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복음의 부자처럼 세상 재미와 쾌락에 빠져, 또 무관심으로 내면은 구제불능의 부패한 냉담자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부자에게 라자로가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듯이 하느님께 부자도 그런 존재였을 것입니다. 부자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함축하지만, 빈자인 라자로의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 라는 이름 뜻은 그가 하느님께는 존재감있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실상을 오늘 예레미야가 잘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더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 살리라.”
그대로 부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라자오의 내면은 이와 반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늘 푸르른 삶에 영적 열매 풍요한 빈자貧者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이미 산상수훈의 참행복선언에서 밝힌 바와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오늘 제1독서 후반부 말씀 역시 흡사 복음의 부자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부패해지기 쉬운, 변하기 힘든 인간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골치덩어리, 암적 존재같은 인간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 적용되지 않습니까? 아무도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답은, 유일한 구원 가능성은 회개뿐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회개뿐입니다. 이래야 썪지 않습니다. 오늘 비유의 정점은 마지막 31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드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결정적인 표징은 비상한 기적이 이나라. 성경, 곧 하느님께서 일관되게 내리시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성경 말씀입니다. 사실 깨어 눈만 열리면 성경은 물론 모두가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입니다. 어제 저는 인터넷 대문 기사 제목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망국' 가속화...작년 출산율 '세계최저' 1.05명 추락
부동산투기 광풍, 청년실업, 살인적 사교육비 산물. 국가존립 위태-
이 또한 우리 국민 모두를 각성,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과연 내 주위에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라자로 같은 이웃은 없는지요? 부자도 라자도로 모두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회개해야 사람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회개해야 겸손과 온유, 순수와 진실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를 위한 집중적 영적훈련기간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serving, 보살피고caring, 주고giving, 나누고sharing, 떠받쳐주며supporting’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 로봇 인간을 말해도 이런 서로 사랑하는 감정의 인간을 민들지는 못합니다.
회개는 영혼을 발효시키는 영적 효소와 같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회개의 효소가 부패를 막아주어 부패인생이 아닌 늘 푸른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살게 합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부패인생이 아니라 은은한 향기의 발효인생을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영적 효소로 회개한 우리들 모두가 향기롭고 아름다운 발효인생을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