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에세이>
Sociology, 회귀성(回歸性) 없는 반향(反響)
崔 秉 昌
살아간다는 일이 예전보다는 많이 무거워졌고, 단순하려 할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나날 속에서 생각만은 불안정한 현실을 외면하려고 노력
하지만 어느 틈에 세상사(世上事)는 피할 틈도 없이 시공과 벽공을 거슬러
다가와 세상과 나를 저울질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지럽기만 하지요.
사람들은 연륜이 더해감에 따라 미완의 인고(忍苦)를 견뎌내는 버릇이
이미 에고(Ego)가 관성(慣性)으로 전환되었어도 생각은 점점 짧아지기만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작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아득하기만 하네요.
거스른다면 인류는 약 약 50만 년 동안 지구에서 생활해 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정착생활의 토대였던 농업은 12000년 전에야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문명은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고요.
어떤 학자는 인류 생존의 전 주기를 하루로 생각하여 농업은 밤 11시
50분에 창출되었다고 계산되는 것이며 다시 계산을 해보면 문명은 밤 11시
57분부터 존재하기 시작되었을 뿐이고 사회의 발전은 11시 59분 30초에
겨우 시작되었을 뿐인데 그 하루의 시간에서 30초 동안의 인류의 생활은
엄청난 변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발전의 가속화와 더불어 계산된 바와 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까지도 어쩌면 찰나 같은 것인지도
모르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변동의 메커니즘을 진화(evolution)와 분화
(differentiation)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지요.
생물학적 진화에서, 단순한 유기체로의 발전은 환경에의 적응 즉,
동물이 물질적 환경에 어떻게 잘 적응하는 가로 설명되지요.
더 복잡한 유기체일수록 더 큰 적응력을 가지며 다 단순한 동물에 비해
환경에서의 생존율도 높지요.
그래서 진화론자에 따르면 생물학적 발전과 인류사회의 계승 간에는
직접적인 평행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더 복잡한 시회일수록 더 단순한
시회유형과 비교하여 생존가치(survival value)가 더 크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19세기 초 사회진화론을 종종 진보, 또는 도덕적으로 우세한 사회형태
로서의 운동을 진화로 보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이론에 대하여는
지배적 위치를 가졌으나 결국 쇠퇴하였다고 하지요.
결국 현실적인 발전 메커니즘이 상이(相異)하기는 하지만 당시 사회
진화는 생물진화의 확장이라고 생각되며 적응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지요.
역사의 유물론에서 마르크스의 해석은 분화 즉, 병동의 변증법적 해석으로
간주하고 생산력과 여타 제도의 시기를 혁명의 변동국면으로 전환하였다지만,
그 이론도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하였다고 하지요.
결국 진화와 분화 역시 최근 산업주의의 종말과 나아가 탈 현대성
종말일지도 모르는 국면에 다다른다는 것이며 종국에는 진보와 분화도
무너지고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과학(科學)과 법칙(法則)과 이상화(理想化)도 무력화되어 버린 그저
다원적(多元的) 형식만이 존재하며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도 없으니,
따라서 역사의 진화도 끝이 났다고 하는 것 같지요.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이해하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만들고 있기에 자기 주체성에 대한 심원한 의식은 살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내용 속에는 수많은 딜레마가 잠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틀 속에 빠지기를 두려워하여 회피성의 당위성만으로 살아간다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에게 남은 시간을 유용하고 적절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접근해야 되겠지요.
범 글로벌이든 범 정치 경제사회, 범 종교 어떤 지도자 누구든 모두가
함께 하는 그런 세계가 구축되어 그 속에서 우리도 거듭나는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을 가다듬어 보네요.
- 끝-
< 필자. 시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