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무게, 심장의 무게
김 난 석
아내가 처음 쓰러진 건 신혼 초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옆자리에 나란히 자고 있던 아내가 슬그머니 나가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얼마 안 있어 화장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무얼 정리하고 있겠거니 하고 가만히 누워있었지만
곧 불안한 마음이 들어 황급히 화장실로 가봤다.
아니나 다를까 변기 옆으로 고개가 꺾인 채 넘어져
숨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감이 오가는 가운데에도
제발 별일 없기만을 바라며 감싸 안고
사지를 주무르며 온기를 넣어주니 살아났던 것이다.
두 번째 쓰러진 건 새아침 동틀 무렵이었다.
쿵! 하는 소리에 아내의 방을 열어보니
옆으로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목숨은 건졌지만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사흘 내내
만감이 오가는 가운데에도 나는
나의 살길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
장지(葬地)며 아내가 쓰고 있는 내 명의의 카드며
아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며
또 새 둥지를 틀 생각이며,
첫 번째의 경우와 왜 그렇게 생각이 달랐던 것이던지...
쓰러졌다는 건 타자로부터 충격(Impact)을 받았다는 걸 뜻한다.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내부인 것이든
자신의 의지가 방해받았음을 말하는 것이고,
산다는 건 타인에게 신세 지는 일에 다름 아니니
태어남에 자라남에 부모님과 이웃의 신세를 지며
성혼하여 배우자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신세를 진다는 건 단순히 기대는 것으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남의 생살을 파먹고 내 몸을 살찌우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내 살점이 뜯기는 건 운명이라지만 남의 살점을 뜯어먹는다는 건
그게 육신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살인에 버금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산다는 건
타인에게 신세 지는 일에 다름 아니라 해보는 것이다.
내 양심(良心)을 무게로 치면 얼마나 될까?
물론 우스갯소리로 해보는 소리지만
그것을 측정할 객관적 수단은 없다.
흔히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받거나 경악했을 때
가슴이 두근반 세 근 반이라 하고
정상혈압을 알아보기 위해선 최고 최저 혈압을 측정해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내 양심의 무게는
최고치 세근반에서 최저치 두 근 반을 뺀
한 근(375그램)가량 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건 우스갯소리로 해본 말이지만
사람의 심장 무게는 남성의 경우 300그램 내외라 한다.
그것은 또 감정의 기복에 따라 수축하고 확장하는 것이니
이래저래 우리 가슴은 한 근 안팎에서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한다고 하겠다.
우리의 근(斤)에 비견할 서양의 무게 단위는 파운드(Pound)이다.
1 파운드는 대략 453그램이니
우리의 한 근을 조금 넘는 무게가 되는데
우리에 비해 조금 큰 체구를 갖는 저들이니
그에 따라 심장의 무게도 한 근보다 조금 더 무겁다고나 할까 보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빚을 놓으면서
약속을 어길 경우 보증인 안토니오의 살점 1파운드를
떼어가겠다는 약정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떼어가라는 재판관에게 걸려들어
낭패를 보고 마는데, 양심 1 파운드의 시험이었던 셈이다.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영화
‘세븐 파운드(Seven pounds)'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주인공 토마스(윌 스미스 분)는 예기치 않은 일로
일곱 명의 생명을 잃게 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며 순간순간 죽음을 생각하면서 몸부림도 친다.
그러다가 자신의 존재가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자
양심이 훼손되지 않은 이들을 찾아 사랑을 나눠주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된다.
또 그러다가 시한부 심장을 가진 에밀리의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때는 이때다 하고 자살하여 육신을 일곱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모습으로 이어져
뜨거운 감정에 젖어보게 되었지만
마지막 10분경에 이르러 사랑과 헌신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예술을 대하면서 해석(Interpretation) 하지 말고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라는 것이니
(수잔 손탁의 ’ 나는 해석에 반대한다 ‘ 중에서)
뜨거운 감정만 품고 돌아섰던 것이다.
인간은 유한과 무한, 자유와 필연의 중간에 위치하는 존재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
그 중간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이 절망이요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지 않으려면 신의 품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신의 품에 귀의하는 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자비와 겸손의 삶을 걷는 게 그 가까이라도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자비란 억지로 베푸는 것이 아니요.
자비란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듯이 내리는 것이요.”
샤일록에게 마지막으로 타이른 재판관 포오샤의 말이 떠오른다.
나의 자비심은 어디를 향해 있으며 내 양심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그것을 달아보기 위해 가슴에 더께 진 피(皮)부터 걷어내야 할까 보다.
2025. 7. 4. 도반(道伴)
첫댓글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오딨겠습니까?
하지만
고해성사 때
실행하지 않코 생각으로 만
지은 죄는 고백하지. 마라고
하시더군요
맞아요, 완전한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가끔 가끔 뒤를 돌아보며 살아가는 거지요.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어떤 사람이 남편을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신부님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부부생활을 못해봐서 모르겠다고 하시더랍니다.ㅎ
결국 자신은 자신이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겠지요.
@도반(道伴) 하긴
글습니다
영혼의 무게는 21 그램이래요
그런가요?
남성들 고환의 무게가 10 그램이라는데
그래도 욕망덩어리보단 무거워서 다행이네요.ㅎ
@도반(道伴) 인간의 절반에게 있는 10그램도 없고
가끔 사라지는 양심의 무게도 가볍고
더더욱 영혼은 더 가볍고
근데
체중계 화살은 휘리릭
어마무시 하게 넘어가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가볍게 살고 싶은데
@온유 그런땐 방법이 없는것도아니지요.
체중계 화살을 마음 둔 곳에 고정시켜요.
내 양심의 무게 ..
새삼 재어 봅니다
오를때도 살짝 내릴때도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게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뀌어요.
그러니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있는거지요.
장마가 끝났다는데
이젠 땡볕만 내리쬐겠지요.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있다고 봅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도 있겠지만...
아주 비양심적으로
저주와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조금만이라도 더 양심을 갖고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그런 사람들이 내 주위에 더 많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봅니다
인간이란 천태만상이니까요.
그걸 가리기도 어렵지만
보이면 피해가는 수밖에요.